빙정(2)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내 물음에 먼저 앞서나가던 자야는 뒤를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멀리 가진 않을 테니까요.”
[아니, 지금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요, 이 사람아.]
방금 화순이 내뱉은 말이 곧 내 생각과 같았다.
공주와 합류해서 빙궁주의 환갑잔치로 갈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자야는 빙궁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곧 커다란 연회에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뻐하던 화순은 당연히 투덜거리고 있었고, 나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인상을 쓴 채로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그만 돌아가지요. 공주마마도 기다리고 계실 테고, 곧 잔치도 열리지 않습니까.”
“에이, 괜찮아요. 어차피 잔치는 내일 아침까지 내내 진행될 예정이고, 공주님은 시녀가 알아서 데려다줄 테니까요.”
가는 길에도 몇 번이나 돌아가자며 설득해봤지만, 그녀는 내 말을 전부 무시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긴 하지만, 겨울에 가까워진 이때 우리를 북해로 초대해준 귀인을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은가.
물론 빙궁의 소주인 만큼 무공을 익히긴 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는 게 또 북해의 겨울이라는 놈이니까.
어디 가는지 속 시원하게 말이라도 하면 편하겠다만은, 그녀는 내 질문에도 계속 가깝다, 얼마 안 걸린다고 둘러대며 목적지를 계속 숨겨왔다.
결국 그렇게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간 지 일각이 흐른 그때.
“저도 이제 못 참습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향해 매섭게 말했다.
“벌써 빙궁을 나온 지도 꽤 지났습니다. 지금이라도 목적지를 제대로 설명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냥 돌아가 버릴 겁니다.”
이미 간단한 산책의 영역은 아득히 넘어섰다.
아직 북해빙궁이 눈에 보이고는 있지만, 만약 여기서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거나 조금이라도 더 걸어가면 그것도 확실치 않다.
무기라도 챙겨온 상태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는 나는 몰라도 자야까지 지키기는 힘들었다.
내 단호한 목소리에 결국 자야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발걸음을 멈췄다.
“하얀 별이시여.”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혹시 빙정이라는 걸 아십니까?”
“지금 말 돌릴 때가 아닙니다. 더 지체하면 저도 이제 그냥···.”
“무지몽매한 외인들은 그것을 한낱 절대 녹지 않는 얼음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빙정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자야의 모습에 나는 이마를 찌푸리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일단 그녀를 멈추게 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거니와, 내가 모르던 정보에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 정보요원의 슬픈 습성 때문이었다.
“빙정이란 북해의 근간(根幹)이며 근본(根本)이요, 근원(根源)이며 근저(根底).”
아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자야는 뒤에 있던 빙궁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저 거대한 빙궁도 빙정의 힘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네, 네. 그거참 재밌는 옛날이야기군요. 자, 그럼 이제 그만 빙궁으로···.”
“틀렸습니다!”
휙!
그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내 쪽으로 향하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다.
“빙정은 한낱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빙정은 지금도 이 땅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며 보살펴주고 계십니다! 매서운 혹한이 엄한 아버지라면, 빙정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우리를 보듬어주고, 사랑해주고 있단 말입니다!”
어우야, 씨. 깜짝이야.
저번에 봤던 광신도보다 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광신도의 대처법은 그저 무조건 동의를 표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회귀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인이 빙정을 신앙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그 영역을 아득히 넘어섰다.
만약 빙정에 입이 달려 있고, 그녀에게 죽으라 말했다면 당장이라도 기쁘게 목숨을 끊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런 숨길 수 없는 광기가 그녀의 눈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 예. 제가 실수했군요. 자, 그럼 이제 그···위대한 빙정의 이야기는 잘 들었으니, 그만···.”
“아뇨, 하얀 별께서는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아니, 잘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알고 싶지 않은 것···.
자야의 말을 머릿속으로 반박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걸어갔다, 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발을 크게 구른 것뿐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소리는.
쿠구구구궁!
끼기기기긱!
그저 한 번 발을 구른 것 치고는 너무나 크고 기괴했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많은 이들이 빙정이 빙궁의 지하, 빙궁주님의 연공실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쿠구구구궁!!!
그리 말하는 자야의 옆에서 하나의 문이 솟아올라 왔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 재질조차 짐작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문은 내가 위로 손을 뻗어야 겨우 닿을 만큼 높이 올라오고 나서야 멈추었다.
방금 그 소리는 혹시 기관장치가 움직이는 소리였나?
내가 기관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큰 소리를 내는 걸 보아 짐작할 수 있는 건 크게 두 가지.
방금 움직인 기관이 무척 오래되었다는 사실과···그 크기가 가히 빙궁과 맞먹을 만큼 크다는 사실이었다.
“정말로 빙정이 빙궁 아래에 있었다면, 거기엔 어떠한 생명도 살지 못했겠죠. 이미 다 얼어 죽었을 테니까요. 진짜 빙정은 바로 여기.”
쿵!
자야는 자신의 옆에 솟아오른 문을 강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 문 뒤편에 있습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와 눈동자.
그것만으로도 지금 자야가 말하는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왜 나에게 말해주는 거지?
아무리 하얀 별로 인정받았다고 하지만, 면밀히 따지자면 외인인 나에게 왜 이런 비밀을 알려주는 건가.
그것에 대해 질문하려던 찰나, 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야, 이거···.]
화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투덜거리던 화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문 앞으로 다가갔다.
[아냐, 설마···그럴 리가···.]
뭐야, 대체 왜 그러는···.
“컥!”
갑자기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화순에게 말을 걸던 그때, 갑자기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입을 다물었다.
이 통증. 경험해본 적 있다.
최초로 천마의 권능을 얻었을 때와 흡사한 고통.
하지만 그때보다도 훨씬 강한 통증에, 이제는 고통이라면 익숙했던 나조차도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뒤, 통증이 가라앉자마자 나는 바로 오른팔을, 정확히는 거기에 있는 권능에 새롭게 적힌 글자를 응시했다.
[숨겨진 임무 등록.]
[임무 조건 :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정수를 획득하라.
빙정(氷精) : 미획득.
?정(?精) : 미획득.
?정(?精) : 미획득.]
[임무 보상 : 개당 40년의 내공. 임무 전원 달성 시 120년의 내공 획득 가능.]
[기억났어. 나, 여기 와본 적 있어.]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임무와 갑작스러운 화순의 발언.
연이어 나를 덮쳐온 충격적인 사실에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던 내게 자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신가요?”
마치 부처를 향한 마라(魔羅)의 유혹처럼 은밀하면서도, 달콤하게.
“한 번 안에 들어가 빙정을 직접 마주해보시겠어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
그 시각. 빙궁주의 환갑잔치가 한창인 빙궁의 연회장.
모두가 왁자지껄 떠들며 빙궁주의 환갑을 축하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한쪽 구석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하아···.”
숙소에서 반 시진 동안 유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혼자 연회장에 와버린 성하 공주였다.
“혹시나 먼저 와 있나 싶어서 그냥 와버렸는데···.”
좌로 훑어보고, 우로 둘러봐도 유현과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북해인 사이에 한인은 그 누구보다 눈에 잘 띄어야 할 텐데.
아니,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물밀 듯 밀려오는 도전자들 때문에라도 눈에 띄겠지.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그의 모습도,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 결국 그가 여기 오지 않았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럼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하아···.”
“이런, 쉬고 있었소?”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던 공주는 위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중년과 노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사내.
그가 누군지 알아챈 공주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빙궁주님. 환갑 축하드리옵니다.”
“허허, 아니, 아니오. 나야말로 인사가 늦었지. 원래 한참 전에 환영 인사를 해야 했는데, 내 일이 바빠 미리 만나지도 못했으니 말이오.”
한때의 적국의 공주에게 반 존대로 말을 거는 그의 모습은 한 점의 어색함도 보이지 않았다.
“아닙니다. 이 거대한 국가를 다스리는 분인데 어찌 그것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황실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호의 고맙게 받아들이겠소. 내 마지막 일만큼은 한 점의 후회 없이 끝내고 싶은 마음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다른 일은 잊고 말았어.”
“마지막 일이라면···혹시 점찍어두신 분이 있습니까?”
빙궁주에게 질문을 던진 동시에 공주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만약 온건파. 혹은 지금까지 만나 본 소주 중 중립에 가까운 사람이 다음 대 궁주가 되면 완벽한 화평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조약을 맺을 순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만약 강경파 소주가 된다면 환갑잔치가 끝나고 열릴 회의에서 설사 화평의 이야기가 나와도 곧 깨져버릴 터.
그렇기에 공주는 그의 대답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굴 생각하고 있느냐니, 무슨 말이오?”
빙궁주의 대답은 공주의 예상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
혹시 쓸데없는 질문으로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리 생각한 공주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아···죄송합니다. 혹시 다음 대 빙궁주로 점찍어두신 분이 있으신가 하여 여쭤본 것인데···개인적으로 여쭤보긴 실례인 질문이었던 듯 합니다.”
“다음 대 궁주···그래, 그것도 미리 정해 놔야겠지.”
하지만 사죄 직후의 빙궁주의 반응은 더욱 이상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말한 마지막이 아닌 듯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혹시 자신을 속여넘기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공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실제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빙궁주의 모습을 보니 그런 건 아닌 듯 했다.
‘그렇다면.’
공주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일이 무엇이지?’
빙궁주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이후에 할 일이라니.
성하 공주가 한창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혼잣말을 끝낸 빙궁주가 공주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는 길은 어떠하였소? 검은 별이 잘 해주더이까? 무력은 강하나 손님 접대는 어수룩한 사람이라, 시종에게 다 맡겨 놨을까 봐 걱정인데.”
“검은 별···이라면 혹시 투할 장군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 말고 한인들을 초대할 온건파가 누가 있겠소?”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되묻는 빙궁주의 모습에 성하 공주는 그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저희는···.”
무언가 이야기가 전혀 맞물리지 않는다는 걸 느끼면서도, 공주는 진실을 말했다.
“···자야 소주님의 초대를 받고 온 겁니다.”
“자···야······라고?”
공주의 대답을 들은 빙궁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와 동시에 갑자기 몸을 덮치는 한기에 공주는 몸을 떨었다.
바깥에서 찬 바람이라도 불어왔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가 공주와 비슷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그 한기를 느낀 것이 공주뿐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자야가 초대했다고 했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빙궁주의 말에 대답하는 걸 우선으로 생각한 공주가 고개를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네.”
“그럼 그 아이는 어디 있소.”
“그건 저도 잘···저도 열흘이 넘는 시간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습니다.”
쿠구궁.
공주의 대답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빙궁 전체에 울려 퍼지는 미약한 진동.
지금까지 여러 번 겪었던 지진과 달리 몸도 떨리게 하지 못하는 진동에 공주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빙궁주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바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있어선 안 될 일이 벌어진 듯, 얼굴이 파랗게 질린 빙궁주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주의 숙소를 맡은 시종은 누군가!”
구구구궁! 조금 전 그 진동보다도 더욱 크게 빙궁을 울리는 심후한 목소리.
빙궁주의 우렁찬 외침에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뛰어왔다.
거기서 날아오듯 뛰어왔으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시종은 빙궁주의 앞에 서자 그제야 막혔던 땀구멍이 열린 듯 식은땀을 쏟아내며 이마를 바닥에 문대며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궁주님.”
“자야는 지금 어딨느냐.”
“자야 소주 님은 잔치가 열리기 한참 전에 숙소를 떠나셨습니다.”
“지금은 어딨느냔 말이야!”
“그, 그건 저도 잘···.”
식은땀을 흘리던 시종이 말꼬리를 흐리던 그때.
콰과과과과광!!!!!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충격이 빙궁을 덮쳤다!
쨍그랑!
와장창!
“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도 예상치 못한 충격에 조금 전만 해도 웃음과 축하만이 가득하던 연회장은 경악과 비명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음식을 잔뜩 쌓아둔 접시가 땅에 처박히고, 의자와 식탁이 뒤집히는 대참사!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자신의 옆에 있는 기둥과 벽에 기대어 진동이 지나가길 기다리던 그때, 그 모든 소음을 없애는 누군가의 목소리.
“안 돼!!!”
대포 소리보다도 더욱 커다란 함성, 혹은 비명을 내뱉은 빙궁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연회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탈주에 모두 놀라던 것도 멈추고 그 뒷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것도 잠시.
“궁주님의 뒤를 따라라!”
사방장군 중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여있던 초절정과 절정의 무인이 몸을 날렸고.
“···뭔가 이상하다. 우리도 따라가자!”
일류 이하의 무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중에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아.’
한 점의 내공도, 무공도 익히지 못한 공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