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정(1)
내가 북해를 구원하는 하얀 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하사받은 지도 벌써 칠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제일 먼저 체감한 건 북해인들의 태도 변화였다.
전에는 손님이긴 하지만 딱히 대우해줄 생각은 없다, 라는 티를 팍팍 냈다면, 지금은 말부터 행동까지 손님을 넘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숙소도 여섯 밤의 시련(하루 만에 끝낸 걸 이렇게 칭하는 것도 우습지만)을 끝낸 당일 바로 손님용 숙소에서 빙궁주의 아들딸인 소주와 같은 숙소로 변경해주었을 정도니까.
물론 나와 동행인 공주에 대한 태도도 돌변했다.
도착한 당일에도 초대받지 못한 연회를 바로 초대받았으니 말이다.
덕분에 공주는 빙궁주의 환갑 전에 열리는 보름간의 연회에 매일 초대받고 있었다.
···솔직히 북해 사람들이 술과 가무를 즐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일 연회를 즐기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어찌 됐건, 지금까지 북해인들과 친해지는 것에 목을 매고 있던 공주는 마음껏 인맥을 만들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매일 연회에 초대받아 북해와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정보와 인맥을 꾸준히 얻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시오란.”
새로운 숙소로 옮기면서 배정받은 시녀의 이름을 부르자,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예, 하얀 별이시여.”
“내게 서찰을 보내온 이들에게 이 답장을 전해주게.”
웬만한 서책만큼 두꺼운 서찰 더미를 건네자, 시오란은 이마에 자그마한 주름을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명령을 듣기 싫어서 이런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벌써 칠 일째 똑같은 일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밤의 시련을 마친 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북해의 내로라하는 무인들의 도전장을 받고 있었다.
처음에야 초절정 고수에게 승리했다는 흥분감에 몇 번 받아줬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매일 최소 백 장의 도전장을 받다 보면 힘들다 못해 그냥 질린다.
차라리 전에 싸웠던 흑설표나 아무라칸처럼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내공이라도 얻을 수 있지, 도전장을 보내오는 인간들은 끽해봐야 절정 초입의 경지에 불과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물론 더 자신보다 더 강한 강자와 싸우고 싶다는 욕구는 알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첫날 싸워줬던 몇 안 되는 인간들도 한 번 더 싸워보고 싶다고 내게 도전장을 매일 보내오고 있었으니.
덕분에 지금 내 일과는 그 도전을 거절하는 서찰을 적는 거로 시작되었다가, 그것을 다 보내고 왔다는 시오란의 대답을 듣는 거로 끝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오란이 나가고 잠시 뒤.
똑똑.
“네, 누구십니까?”
“접니다, 폭풍단장.”
“공주마마?”
지금 열심히 인맥을 만드느라 바쁠 사람이 웬일로 내 방을 찾아왔지?
이런 질문이 잠깐 떠올랐지만, 그걸 해소하는 건 나중의 일.
지금은 먼저 밖에서 내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를 불러들이는 게 먼저였다.
“들어오십시오, 공주마마.”
“고마워요. 오늘도 거절 서찰을 적느라 바쁘신 것 같군요?”
책상 위에 널려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를 확인한 공주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질문하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제는 좀 익숙해졌습니다.”
물론 그것을 매일 건네주러 다니는 시오란의 생각은 다르겠지만.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십니까?”
“일의 진행 상황을 좀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폭풍단장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거니와···.”
싱긋. 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한창 지루해하고 계실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안 그래도 서찰을 보내고 나면 뭘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찰나였으니, 고마운 제안이었다.
일단 표행 의뢰라는 명목으로 온 거긴 하지만, 그래도 내 나라와 관련된 일인 만큼 궁금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일단 희망적인 부분을 말씀드리자면, 생각보다 강경파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거예요. 물론 둘 뿐인 온건파보다야 세력의 크기도, 숫자도 훨씬 크지만, 전쟁만을 외치는 강경파는 적어요.”
“으음, 그건 의외군요. 북해의 강경파라면 무조건 전쟁을 바랄 줄 알았는데요.”
힘과 무력이 숭상받는 북해인지라 당연히 전쟁을 바라는 쪽이 훨씬 많을 줄 알았는데,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히려 다른 쪽이 더 많은 듯했다.
“저도 그리 예상했지만, 오히려 중립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많아요. 물론 여기엔 빙궁주님이 아직 아무런 대답이 없다는 사실도 크게 작용하는 것 같지만요.”
“그럼 빙궁주의 환갑잔치가 끝난 후 열리는 회의가 그들의 방향성을 정하게 될 거란 소리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요.”
“그럼 제일 중요한 빙궁주의 의사는 어떤 것 같습니까?”
내 질문에 공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알아보기가 꽤 힘들어요.”
“역시 티를 잘 안 내나 보군요.”
“물론 그것도 있지만, 연회에 자주 참석하지 않는 것도 커요. 칠 일간 겨우 두 번. 그것도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떠났으니 얼굴 보기도 거의 힘든 지경이죠.”
“흐음···뭔가 바쁜 일이 있는 걸까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하루 대부분을 연공실에만 있다고 해요.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건지, 아니면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경지에 오르려 하는 건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요.”
이 부분은 우리에게도 아주 나쁜 소식은 아니다.
물론 직접 빙궁주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강경파의 인물들도 빙궁주를 설득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였으니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우리의 설득보다 그래도 좀 더 가까운 사이인 강경파의 설득이 잘 먹힐 걸 생각하면, 우리에게 이득이라면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문에 불과하지만, 그가 왜 연공실에만 틀어박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빙궁주의 경지는 초절정 최상급.
과연 그는 뭔가 깨달음을 얻어 화경의 경지에 올라서려 하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무공을 창시하려는 걸까?
무인이라면 궁금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우르릉!
공주가 뒤이어 설명하려는 찰나, 갑자기 우리가 앉아있던 책상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책상뿐만이 아니다.
열댓 명은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커다란 침상부터, 어디서 구해오는진 몰라도 매일 싱싱한 꽃으로 바꾸고 있는 꽃병까지.
무거운 것, 가벼운 것 가리지 않고 모든 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와 나는 놀라지 않고 그 진동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칠 일 사이 벌써 네 번째로 겪는 지진이다.
처음에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자연재해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것도 한두 번뿐.
이제는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예상도 가능할 지경이었다.
반 각쯤 지났을까. 북해빙궁 전체를 진동시키던 지진이 멈추자, 나는 책상 아래로 떨어졌던 붓을 주우며 말했다.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지진이 나는군요.”
“네. 이제는 이 진동도 없으면 어색할 지경이에요.”
농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공주의 대답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요.”
“지진 말인가요? 확실히 칠 일 사이 이렇게 여러 번 지진이 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나, 종종 여진이라 하여 커다란 지진이 온 뒤나 올 징조로 여겨지기도 하니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아뇨, 저도 그건 압니다만···.”
내가 진짜 이상하게 여기는 건 지진이 여러 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북해와 가장 가까운 국경부대에서 삼 년을 종군하는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지진이 칠 일 사이에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북해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기이하기 그지없다.
북해의 대지는 수천 년. 아니, 수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눈과 얼음의 대지가 안쪽 깊숙이 있는 땅이 조금 흔들린다고 해서 같이 흔들릴까?
그것도 이렇게 위에 있는 사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또 길게?
그 정도로 큰 지진이라면 북해뿐만 아니라 인접한 국경부대를 넘어,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도시도 느껴야 했겠지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진동이 느껴지려면 그 근원이 땅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어야 할 텐데···.
이만한 자연재해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이제는 진짜 폭풍이라 부를 수 있는 진와류(眞渦流)를 쓸 수 있게 된 나지만 그런 건 엄두조차 못 낸다.
아니, 설사 나보다도 훨씬 강한 신승이나 독고삭이라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 당연히 자연의 힘이라 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왜 이렇게 가슴 한쪽이 답답할까.
“···폭풍단장?”
“네? 아, 죄송합니다.”
아직 한창 공주와 이야기 중이라는 걸 잊어먹고 너무 상념에만 빠져 있었다.
조심해야지. 이러다가 삐져서 다시 안 오기라도 하면, 진짜 일과라고 할게 거절 편지 보내는 것밖에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무슨 이야기 중이셨죠?”
“저번에 여섯 밤의 시련에서 폭풍단장과 싸웠던 아무라칸님이 어제 연회에 참석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벌써 회복이 끝났답니까?”
결착 이후에 기절한 걸 보고 혹시 너무 심했던 걸까, 하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때 심장도 느리지만 뛰고 있었고, 호흡도 가지런했으니 당연한 일인가.
“네. 듣자 하니 폭풍단장의 무공을 막느라 너무 많은 내공을 한 번에 써서 내상을 좀 입으셨다고 하더군요. 그리 큰 내상도 아니었던지라, 금방 회복하고 돌아오셨고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렇게 자세히 아시는 걸 보아하니 직접 대화를 나누셨나 봅니다?”
“네. 덕분에 명나라의 무인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고 폭풍단장을 극찬하시더군요. 아, 참.”
그렇게 말한 공주는 품 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여기, 아무라칸님에게 받은 서찰입니다.”
“이거 혹시···?”
“아마 폭풍단장의 예상이 맞을거라고 생각해요.”
···다행이라는 말은 취소.
이 인간이 그냥 낫자마자 싸움질을 하려고 드네.
그래도 초절정의 무인이니까, 한 번 더 죽고 죽일 각오로 싸우면 내공을 또 얻는 게···.
[꿈도 꾸지 마라.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하고 있어. 한 사람당 한 번뿐이니까, 싸울 거면 다른 사람이랑 싸워.]
···젠장.
“그래도 요즘 폭풍단장이 무공을 겨룰 상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으니, 거절한다고 해도 그리 크게 아쉬워하시진 않을 겁니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봤는지, 공주가 변명하듯 급하게 말을 건넸다.
그건 그나마 다행인가.
하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공주가 건넨 서찰을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래도 이 도전장은 보류다.
내공이나 무공을 얻을 수 없다는 건 아쉽긴 하지만, 실존하는 초절정의 고수와 싸우는 건 분명 다른 방향으로라도 내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아무라칸과 붙겠다고 일자를 정해 놓으면, 최소한 그동안은 무인들이 내게 도전장을 보내는 일도 없겠지.
물론 그 뒤에 몇 배로 몰려올 도전장을 생각하면 한순간의 미봉책에 불과하지만, 어차피 회의가 끝나면 돌아갈 예정이니까 상관없겠지.
“그러고 보니 폭풍단장은 자야 소주 님을 뵌 적 있으십니까?”
“네? 그러니까···여섯 밤의 시련 이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 뒤로 다른 시종에게 물어보고, 직접 숙소에도 몇 번 찾아가 봤는데 매번 자리에 없으시더군요. 혹시 폭풍단장이 있는 곳에 찾아가셨나 해서요.”
“아뇨, 저도···.”
그러고 보니 그 뒤로 그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전만 해도 귀찮을 정도로 나와 공주를 부르고, 따라다녔던 사람이 갑자기 흥미가 식은 듯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는 바빠서 별 신경도 못 쓰긴 했지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공주는 잠깐 인상을 쓰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녀도 그녀 딴에 할 일이 적지 않겠죠. 가능하면 저희에게도 설명해줬으면 하지만, 바쁘다면 어쩔 수 없겠죠.”
북해와의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다른 수단도 있어서일까.
공주는 알 수 없다는 말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 다음 연회에는 폭풍단장도 얼굴 한 번쯤 보여주도록 하세요. 모두가 폭풍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애가 타는 것 같으니까요.”
“···싸움에 관련된 일만 아니면 얼마든지요.”
“후후, 그건 제가 어찌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네요.”
마치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미소 짓는 공주.
···장난도, 농담도 아닌데 말이지.
손을 흔들며 떠나는 공주를 마주하고, 다시 책상에 앉아 붓을 들었다.
곧 시오란이 가져올 두 번째 도전장 뭉치의 답장을 적기 위해서.
*****
그로부터 칠 일 뒤, 빙궁주의 환갑 잔칫날.
연회 준비를 위해 시오란을 먼저 보낸 나는 공주와 함께 연회장에 가기 위해 옷차림을 정돈하고 있었다.
물론 옷차림이라고 해봐야 그냥 무복을 갖춰 입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게 갖춰 입고 다녀야지.
똑똑똑.
“네, 지금 나갑니다.”
옷을 입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 걸까.
이런 건 내가 먼저 가서 맞이해야 하는데, 이렇게 오게 하다니, 이러면 조금 미안한···.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어?
내 예상과 달리 그 앞에 있던 건 공주가 아니었다.
“보름 동안 조금 마르셨네요? 뭔가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걱정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웃고 있는 건지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여인은.
“그래서 말인데···.”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북해의 소주.
“···저랑 함께, 어디 좀 가실래요?”
자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