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위(3) >
촤악!
마부석 옆에 세워뒀던 철혼을 휘두르자, 미처 피하지 못한 흑의인 셋이 아래로 추락했다.
창에 실린 바람을 피하지 못하는 걸 봐선 일류에서 크게 벗어난 수준은 아닌가.
평상시라면 순식간에 쓰러뜨릴 수 있는 숫자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일 때 이야기다.
내 창의 범위 밖에 있던 흑의인이 품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 던졌다.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마차.
정확히는 그 안에 있는 공주였다.
쉐에엑!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단검에는 심상치 않은 힘이 실려 있었다.
마차를 이루는 나무 따위 간단히 관통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닿을 공격!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막아내는 대신, 바로 흑의인에게 달려갔다.
안에 있는 공주가 피하리라 생각했다?
전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병이라는 구음절맥에서 벗어난 지 겨우 일 년밖에 안 된 사람이 어떻게 저런 공격을 피하겠는가.
내가 믿은 건 딱 하나.
팅, 팅팅!
“!!!”
바로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 그 자체였다.
무력하게 떨어져 나가는 단검을 본 흑의인의 눈이 찢어지라 커졌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잠깐의 방심.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창을 휘둘러 놈의 목숨을 거뒀다.
겉으로는 평범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내부는 세 장의 강철판을 깔아 평범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도록 만든 마차였다.
일류의 무인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도 뚫을 수 있을까 말까 한 물건인데, 겨우 단검 따위로 흠집이나 새길 수 있으랴.
흑의인 중 몇은 후퇴를, 몇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나를 향해 덤벼왔지만.
휘잉.
나는 단 하나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와류.
명과 북해를 가르는 산에서 휘몰아치는 강렬한 바람!
흑의인들은 자신들을 쫓아오는 바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들 중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끄아···.”
“살려···.”
휘이이이잉!!!
그들은 물론 그들이 내뱉은 최후의 단말마조차 집어삼킨 거대한 바람이 사라지자, 거기에는 진한 피비린내와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면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기 힘든 짓이겨진 고깃덩어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흑의인들은 모두 처리했지만, 나는 아직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혹시나 이번 습격이 전초전에 불과하고, 진짜 공격이 뒤이어 올 가능성이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 각가량을 기다려봐도 누군가 나타날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제야 나는 전투태세를 풀고 마차로 다가갔다.
“공주마마.”
“···다 끝났나요?”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되돌아오는 대답.
확실히 차폐막이 되어있는 마차지만, 이렇게 자욱한 피비린내까지 막아낼 순 없었으리라.
“네, 전부 처리했습니다.”
“다치진 않으셨나요?”
“적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피해는 없었습니다. 공주마마는 괜찮으십니까?”
“네, 몸이 상한 곳은 없어요.”
역시, 황실에서 쓰는 마차답게 암살 대책은 완벽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내 귀로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생각보다 적측의 습격이 많이 늦었군요.”
“그렇습니다. 예상보다 오 일은 더 걸렸습니다.”
“적의 정보 습득력이 예상보다 낮은가, 아니면 그만큼 우리가 흔적을 잘 지워서 왔는가···어느 쪽이건 다음 습격까지의 시간도 길어지겠지요.”
“네, 그러면 저희도 좀 더 편해지겠지요.”
그녀의 말에 나도 동의를 표했다.
적들이 어디를 근간으로 두고 있는 집단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황제를 암살할 때 북해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독을 사용했던 자들이다.
북해가 그들의 주 세력권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북해에 어느 정도 세력이 있으리라는 예상은 충분히 가능했다.
“마차는 더 쓰기 힘들겠죠?”
“내부는 괜찮지만, 겉에는 상흔이 많이 남았으니까요. 눈에 띌 수 있는 만큼 마차는 이만 포기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공격에 집중함으로써 도망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대신 마차로 향한 공격을 막는 건 도외시했던지라, 마차 겉에는 단검이 만들어낸 상흔이 잔뜩 남아 있었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도 마차는 쌩쌩 잘 달릴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따뜻한 옷 세 벌과 면사만 꺼내 오시면 됩니다.”
“폭풍단장의 옷은요?”
“저는 이미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올랐으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한서불침의 경지에 올라도 북해의 추위를 막아내기가 쉽진 않을 테지만, 나는 원하는 만큼 내공을 뿜어내 추위를 막을 수 있어서 지금 입고 있는 얇은 옷으로도 북해에서 견딜 수 있었다.
딸칵.
꽉 닫혀 있던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면사를 뒤집어쓴 공주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면사를 쓰고 있었지.
첫 만남을 회상하고 있던 내게 공주가 말을 걸었다.
“세 벌은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까지 포함해도 상관없겠죠?”
“네, 곧 북해에 진입할 테니 입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면사 때문에 안색을 살필 순 없었지만, 그래도 호흡이나 태도로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습격 직후보단 호흡이 훨씬 안정된 걸 봐선 그래도 많이 진정한 모양이었다.
이 정도라면 휴식은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마차와 말을 연결하고 있던 끈을 풀고 그녀에게 말했다.
“북해의 첫 마을에 들어서기 전까진 이 녀석을 타고 움직이시지요. 북해에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마방이 있을 테니, 거기서 공주마마가 타실 말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폭풍단장은요?”
“저야 튼튼한 두 다리가 있지 않습니까.”
탁탁, 내가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하자, 공주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급박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농은 사람의 긴장을 풀어주기 좋다.
전장에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이렇게 농담을 꺼내면 아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으니까.
“녀석이 빠르긴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공주마마의 옆에 딱 붙어서 보필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있겠어요.”
그녀는 내게 대답을 남긴 후 바로 말 위에 올라탔다.
“이랴!”
그녀가 쥐고 있던 고삐를 크게 흔들자, 녀석이 빠르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꺅, 하는 아주 자그마한 비명과 함께 빠르게 멀어지는 공주를 뒤쫓기 위해 나도 최대한 다리를 움직였다.
바로 앞에 북해가 있었다.
*****
국경부대에서는 북해와 명을 확실히 나누는 성벽이 있었지만, 우리가 이번에 가는 곳은 달랐다.
성벽은커녕, 평범한 울타리조차 없는 국경선.
그나마 서로를 나누듯 솟아오른 산이 성벽과 국경선을 대신하긴 했지만, 어디까지가 명나라고, 어디까지나 북해인지 어느 누구도 나눠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이들은 모두가 어디가 명나라고, 어디가 북해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코와 목을 싸늘하게 찌를 때.
입으로 내쉰 숨이 기다랗고 하얀 구름을 만들 때.
나도 모르게 올려다본 하늘이 마치 넓고 푸른 바다처럼 보일 때.
그들은 거기서부터 자신이 북해에 있음을 알았다.
습격을 당한 뒤 세 개의 산을 더 넘어서고 나서야, 우리는 북해로 진입했다.
첫 마을은 산을 넘어서자마자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부족에 속한 마을이 아니라, 명나라와 북해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레 나타난 마을이었다.
그 때문에 마을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신 두 국가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많은 만큼 상권은 다른 대형 부족 휘하 마을 부럽지 않게 발달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들린 곳은 당연히 마방이었다.
거기서 제일 크고, 튼실하며, 체력 좋은 말(물론 수컷으로)을 구한 우리는 바로 객잔으로 향했다.
잠깐의 휴식과 함께 앞으로의 여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주문하자마자 바로 나온 차를 한 모금 마신 공주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북해로 들어왔군요.”
“북해의 언어는 많이 익히셨습니까?”
“일상적인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못해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네요.”
북경을 떠난 직후부터 북해의 말을 익히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하면, 빠르다 못해 경악스러운 습득 속도다.
거기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이 오직 대장군이 엮은 서책만을 보고 익힌 거니···.
[이게 바로 천재라는 거구나.]
화순의 말이 곧 내 심정과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공주는 오히려 충분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가능하면 가문에 있을 때부터 익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가씨의 북해행이 알려지지 않으려면 그에 관한 건 일부러라도 피해야 했으니까요.”
내 위로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쉬움은 남았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좀 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도착할 때쯤이면 제가 원하는 대로 말할 정도는 될 거예요.”
북해와의 평화협상을 원활히 이뤄내기 위해선 공주의 북해의 말 구사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디까지나 호위에 불과한 내가 그녀의 옆에 붙어서 통역을 할 수도 없거니와, 북해의 통역사에게 맡기기엔 그 의미가 어찌 전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공주가 북경에서 여기까지 올 때까지 마차 안에서 북해의 말만 주야장천 익혔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일단 첫 번째 걱정은 덜었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되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떻게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가느냐 군요.”
최소한 북해빙궁에 도착한 이후에는 습격 걱정은 할 필요 없을 터.
북해에서 가장 추운 땅인 북해빙궁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최소 일류 이상의 고수여야 했고, 그 때문에 거기선 시녀조차도 일류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우리를 습격한다는 건 어불성설.
북해빙궁. 아니, 북해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결심을 하지 않는 한 우리를 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습격하려는 놈들도 잘 알고 있겠지.
“역시 낮에 쉬고, 밤에 가는 것이 제일 안전할까요?”
그녀의 의견은 일견 좋은 의견인 듯 보였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달랐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산이나 숲을 가로질러 간다면 좋은 생각이지만, 북해는 숨을 곳 하나 없이 너른 평야만 있으니까요.”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북해의 추위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밤에는 추위가 낮보다 몇 배는 심해지고요. 북해의 토박이도 밤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하물며 한족이 밤에 움직이는 건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에서의 일정은 전적으로 나에게 맡기겠다는 신용의 발로였다.
“지금처럼 낮에 움직이되,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낮에 움직이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이는 건 왜인가요?”
“적은 분명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정보를 토대로 따라오고 있을 테니까요. 적이 먼 거리에서 우리를 파악하고 있는지, 아니면 흔적을 파악하고 뒤따라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다른 이들과 함께 움직이면 저들에게 잠깐이라도 혼란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저희와 함께 가는 일행 중 적이 있을 가능성은요?”
공주는 내 작전의 허점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멀리서 덮쳐오는 검보다 바로 옆에서 은밀히 찔러오는 검이 더 무서운 법.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내겐 그런 위험까지 막아낼 방도가 있었다.
“북해의 전사와 삼 년 동안 전쟁을 치러온 접니다. 그들이 무슨 무공을 익혔고, 또 어떻게 싸우는지 직접 싸울 필요도 없이 근육과 기세만 보고도 알아맞힐 수 있지요.”
“그 말은···?”
“북해의 전사 중 암살과 기습을 익힌 자는 다른 부족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부족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무공을 익힌 자가 저희와 함께 여행한다는 건···.”
“···곧 그들이 저희를 습격하려는 자들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내 대답에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손가락으로 조용히 탁자를 내리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결국, 차와 함께 나온 다과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우리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더 긴 시간 의견을 나눌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녀가 내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방법이 정해졌으니, 남은 건 행동하는 것뿐.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랴!”
히히히힝!
공주보다 몇 배는 커다란 몸집을 가진 말이 고삐를 한 번 휘두르자 우렁찬 울음소리를 뱉어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자, 우리도 따라가자.”
히이잉~
그리고 그보다 훨씬 작은 내 말은 초라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 뒤를 설렁설렁 따라갔다.
그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과 두 말이 마을의 출입구로 향했다.
*****
세 번의 외부에서의 습격과 한 번의 내부에서의 습격.
그리고 북해로 들어오기 직전 한 번까지.
그렇게 총 다섯 번의 습격을 경험하고 나서야 우리는 북해빙궁에 도착했다.
“너희는 누구냐!”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해빙궁이 있는 성의 입구에 들어섰다, 라는 게 좀 더 맞는 말이겠지만.
북해빙궁의 첨탑(尖塔)이나 겨우 보일 법한 위치건만, 북해빙궁의 문지기들은 거기서부터 벌써 누구도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든든한 지킴이겠지만···.
“저희는 명나라의 사절입니다. 이번 빙궁주님의 환갑을 축하해드리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흥! 거짓말하지 마라!”
지금은 우리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 최악의 존재였다.
“명나라의 사절이 찾아오기까진 최소 보름은 더 걸린다고 위에서 말했거늘, 어찌 벌써 찾아올 수 있느냐! 어디서 그 정보를 알아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이상 거짓을 말했다간 목숨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문지기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큰소리로 외치자, 좌우에 있던 네 명의 문지기도 똑같이 사나운 기세를 내보였다.
젠장, 빨리 찾아온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줄이야.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는 징표를 보여드리지 않았습니까.”
공주는 답답하다는 듯 인상까지 쓰며 말했지만, 문지기는 여전히 요지부동.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욱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것도 어떻게 위조한 것이겠지! 너희 허약한 한족 두 사람만으로 명에서 이곳 북해빙궁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내가 믿으라는 소리냐!”
놈의 말에 공주가 나를 바라봤다.
나를 탓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걸 공주한테 미리 설명해놨어야 했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북해의 인간은 명의 인간들을 무력 면에서 얕잡아 보는 경우가 많았다.
혹한에서 살아가는 북해의 사람들이 더 강인한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부터, 태어나자마자 무공을 익히는 우리가 너희보다 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 양민끼리 비교할 때의 이야기일 뿐.
일류 이상의 무인이라면 거의 차이가 없는데도 북해인들은 본인들이 더 강하다고 믿었다.
이놈이 방금 꺼낸 말도 아마 그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일 터.
이것을 놈들이 보는 앞에서 설명할 순 없었던 나는 인상을 쓴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런 의미였다.
“···그렇다면 당신보다 높은 사람을 불러주시지요. 이것이 위조된 것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흥! 이젠 윗사람을 부르라?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로군!”
말이 안 통하는 건 그쪽이고, 이 자식아.
처음에는 설득으로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 했지만, 이렇게 나오면 나도 더 못 참는다.
아니, 안 참는다.
기껏 평화협상을 하러 와서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럼 자기들이 좀 정상적인 문지기를 뒀어야지.
손님을 초대해놓고 조금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칼자루에 손을 올리는 문지기를 두는 건 무슨 경우냐.
이 손님 접대의 손자도 모르는 새끼들아.
내가 기세를 피어오르는지조차 모르는 수준 낮은 문지기들이 거들먹거리며 칼을 뽑으려던 바로 그때.
“허허, 그만두지 않겠나?”
누군가의 목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분명 눈에 보이지는 않음에도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한 누군가.
그것만으로도 지금 말을 꺼낸 이가 얼마만 한 고수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내가 행동을 멈춘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목소리.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 근육을 경직시키고, 태세를 가다듬게 만들며, 내공을 끌어올리게 만든다.
그리하지 않으면 죽는다.
전장에서 강제로 익혀야만 했던 상식.
“자존감이 좀 높긴 하지만, 그래도 쓸만한 아이네. 여기서 목숨을 잃을 아이는 아니야.”
“네, 네? 저, 저 말입니까?”
나처럼 그의 정체를 알아챈 문지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목소리는 마치 내일 해가 뜨냐는, 당연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대답했다.
“너 말고 누가 있겠느냐.”
휘잉.
한 줄기 바람과 함께 그가 나타났다.
다른 사람보다 3할은 더 큰 커다란 몸집에 검은색으로 물들인 쇠 갑주를 두르고 있는 백발의 노인.
등 뒤로 자기 키만큼이나 거대한 언월도를 맨 그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지 않은가? 응?”
북해를 지키는 네 명의 장군.
그중 우리 명의 국경부대와 맞닿은 남쪽을 수호하는 장군.
“국경부대의 위대한 전신이여.”
남방의 흑성(黑星). 투할.
그 옛날, 누구보다도 나를 죽이고 싶어 했던 남자가 지금은 나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 호위(3)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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