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체불명의 의뢰 >
신승과 만난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무림맹 밖을 나섰다.
용봉대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참가도 못 하고 그냥 구경만 할 바엔 차라리 며칠이라도 일찍 내려가자, 라는 판단이었다.
함께 왔던 도인현 일행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림맹엔 다른 화산파 사람들도 있고, 노잣돈도 어느 정도 주고 왔으니 괜찮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표국에 특이한 의뢰가 왔습니다. - 신기정’
오늘 새벽, 내게 날아온 한 장의 서찰.
이걸 보고도 한가하게 용봉대전을 구경하고 있을 만큼 정신머리가 없진 않았다.
서찰의 내용을 읽은 화순이 투덜거렸다.
[기정이 녀석, 돈 좀 들여서라도 좀 제대로 된 서찰을 보내든가 하지. 왜 한 줄짜리로 보낸 거야?]
자기 돈이 아니라 내 돈이라고 그런 거겠지. 길면 길수록 전서구 하나를 통째로 써야 해서 비싸니까.
기정이가 보낸 서찰은 여러 명이 하나의 전서구에 한 줄씩 적어 보내는 방식이라 한 마리를 통째로 쓰는 것에 비하면 가격이 훨씬 저렴했다.
대신 정확한 내용은 기재하지 못하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만 적어 보내야 했기에 받는 사람이 상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의뢰라니···대체 뭐지?
내가 없는 동안 표행은 섬서 내에서만, 그것도 가능한 산을 타지 않고 관도로 갈 수 있는 곳만 받으라고 말해뒀다.
그리고 그 외의 의뢰는 전부 거절하라고 해뒀는데···.
이렇게 한 줄짜리로나마 내게 알려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의뢰가 대체 뭐가 있을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스레 내 발걸음은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관도든 산이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직선 돌파한 나는 무림맹으로 떠날 때와 비교하면 절반도 걸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씻고 오는 걸 깜빡해서 문지기가 나를 거지로 보고 살짝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 됐건,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말끔하게 씻고, 산을 타느라 잔뜩 해진 옷도 갈아입은 나는 바로 기정이를 만났다.
“엄청나게 빨리 돌아오셨네요? 아직 용봉대전 결승도 안 끝났을 시간인데···.”
“네가 보낸 서찰 때문에 조금 먼저 돌아왔다. 녀석아, 경비 아끼는 건 좋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은 제대로 정보를 적어서 보내야지.”
“죄, 죄송합니다. 표국 운영하는 동안 돈이 조금 남긴 했는데, 그래도 제 돈이 아니라 다 도련님 돈이라는 생각에···.”
“네 생각은 이해한다만, 돈을 써야 할 때는 쓸 줄 알아야 제대로 장사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다음부터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좀 더 들여서라도 확실한 정보를 알리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내 훈계에 조금 시무룩한 기색은 보였지만, 그래도 말귀를 알아듣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기정이.
너무 돈을 아끼겠다는 생각이 장사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때도 종종 있는 법이다.
기정이를 몇 번 쓰다 말 잡일꾼이 아니라, 나와 쭉 함께할 동업자로 생각하고 있기에 하는 조언이었다.
[그럼 올 때 나한테 왜 그렇게 말했냐?]
혼내도 주인인 내가 혼내야지. 왜 네가 혼내.
[이 자식이···.]
내 말에 이를 가는 화순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기정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특이하다는 의뢰가 무엇이더냐.”
“여기 의뢰서를 받아놓은 게 있습니다.”
“그래, 한번 보자.”
기정이가 건넨 의뢰서는 놀라울 정도로 단출했다.
‘사람 두 명을 원하는 위치로 보내주시오. 금액은 원하는 만큼 내겠소.’
이걸로 끝. 보통 의뢰서에 있어야 할 이름도, 직인도 없다. 말 그대로 본인이 원하는 것만 적어놓은 쪽지일 뿐.
“···이게 다라고?”
“네, 그렇습니다.”
혹시나 해서 뒤를 확인해보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
표국에서 주로 옮기는 건 어디까지나 물건뿐이지만, 사람을 옮길 때도 종종 있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호위 업무라 부르는 게 맞겠지.
아무래도 무력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거니와, 산길도 편하게 갈 수 있고, 도시에 도착하면 객잔을 수배할 필요도 없이 바로 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정말 부득이한 경우일 뿐, 지금처럼 이렇게 의뢰서까지 작성해서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냥 장난 쪽지 아니더냐? 이런 건 그냥 무시해버리면 될 것을.”
“저도 처음에는 그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잠깐, 그럼 이게 처음으로 보낸 게 아니란 소리야?
내 말에 기정이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전서방(傳書房; 전서구나 전서응을 기르며 편지를 보내는 곳.)에서 꾸준히 쪽지를 보내오길래 무언가 이상해서 가보니, 이걸 매일 두 번씩 저희에게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매일 두 번···이 한 장만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제야 왜 기정이가 이것을 이상케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보통 이렇게 한 줄짜리 내용만 보내오는 건 기정이처럼 한 마리의 전서구에 여러 사람이 원하는 내용을 적어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단 한 줄짜리 쪽지를 계속 보낸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기정이의 말에 나는 인상을 쓰며 고민에 빠졌다.
“하루에 전서구 두 마리를 쓸 돈이라면 이미 다른 표국을 수배해서 보낼 수 있을 텐데, 어찌하여 이리 우리 표국에만 의뢰를 보내는 것이지?”
“저···도련님?”
“음? 왜 그러느냐?”
한창 고민에 빠져있던 내게 기정이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전서구가 아닙니다.”
“응?”
“이걸 보낼 땐 전부 전서응을 사용했습니다.”
“뭐라···뭐라고?”
내가 잘못 들었나? 전서응이라고?
전서구라면 어느 정도 부유한 집안이라는 전제하에 두 번씩 날릴 수 있지만, 전서응은 이야기가 다르다.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물량이 없어서 못 날리는 경우가 태반.
그것을 매일 두 번씩 날릴 수 있는 곳이라면, 내가 알만한 곳이라면 딱 세 곳뿐.
내가 다녀왔던 무램맹과 회귀 전 소속했던 마교.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진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기정이에게 말을 걸었다.
“···기정아.”
“네, 도련님.”
“이게 어디서 보내온 거라고 하더냐.”
“제가 전서방에서 듣기론 분명···.”
기억을 더듬어가던 기정이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북경. 북경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기정이의 대답에 드디어 확신이 생겼다.
의뢰서를 품 안에 넣고, 기정이에게 말을 건넸다.
“기정아. 표국 운영은 어렵더냐?”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표정을 짓던 기정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저, 그리 어렵진 않았습니다. 아직 표행 의뢰도 많이 들어오고 있고, 저번에 고용한 쟁자수나 표사 분들도 열심히 일해주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씩씩한 기정이의 대답에 미소를 띠었다.
“그럼 잠깐 더 표국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
“이번에도 어디 떠나십니까?”
“그래.”
이제 겨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내 표국에 하루에 두 번씩 전서응을 써서 의뢰를 맡길만한 북경의 어딘가라면 한 군데 뿐.
“북경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황실.
오직 그곳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
히이힝~
“야. 넌 힘도 좋고, 튼튼하기까지 하면서 울음소리는 왜 그렇게 맥이 없냐?”
가까이 있지 않으면 듣는 것조차 힘든 말의 울음소리에 투덜거려보지만, 녀석은 내 말에 신경도 쓰지 않고 전과 똑같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함께 성문을 지나던 다른 사람들이 풋, 하고 웃었다.
“큭큭, 무슨 울음소리가 저러냐.”
“말 치곤 작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노샌가 봐, 노새.”
“저 작은 걸 여기까지 타고 오다니, 그것도 대단하다.”
···젠장,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비웃네.
어휴, 그래. 힘 좋다고 야생에서 잘 살던 놈 잡아 온 내 업보지.
어차피 북경 안에 들어왔겠다, 더 타고 다닐 이유도 없다 싶어 바로 말에서 내리자, 나에게 몰려있던 시선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의뢰를 받을 심정으로 북경으로 최대한 빨리 오긴 했지만, 막상 오고 나니 앞길이 막막했다.
황실에서 보냈을 것이다, 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확실한 인증이 없는 이상, 황궁 앞에 가서 백날 떠들어봐야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감히 황궁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고 금군이나 튀어나오지 않으면 천만다행이지.
혹시 의뢰서에 무슨 숨은 암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정보요원 시절 배웠던 암호 발견 방법을 다 써봤지만, 튀어나오는 건 쥐뿔도 없었다.
···이걸 보낸 ‘그분’은 대체 어떻게 찾아오라고 이것만 딸랑 보내신 걸까.
하다못해 뭔가 인장 같은 거라도 찍어서 보내주셨으면, 일 처리도 훨씬 편했을 텐데.
[일단 의뢰서를 보낸 전서방에 먼저 가보는 건 어때? 그건 어딘지 알잖아?]
그럼 그렇게 할까? 그쪽에 무언가 쓸만한 정보나 흔적을 남겨두셨을지도 모르니까.
화순의 제안에 동의한 나는 전서방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만사에 신중을 기하는 그분의 성격을 생각하면 확실치 않은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도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전서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아이고, 무사님! 북경은 처음입니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사내에 의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소만?”
“그렇다면 아직 잠자리를 구하는 것도 아직이시겠군요?”
젠장, 그냥 호객꾼이었나.
혹시 그분이 보낸 사람인가 싶어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렇긴 하오만.”
“그러시다면 저희 황농(黃濃) 객잔으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 안락하고 푹신한 침상! 떠나시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얼른 가버리라는 생각으로 잔뜩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지만, 호객꾼은 이미 그런 경험이 많은 듯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 내뱉었다.
[속인 건 괘씸하지만, 호객 솜씨는 좋네.]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데 너까지 그러지 마.
마음 편한 화순에게 한마디 쏘아준 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이보시오,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이 있어서 그러니 나중에 그···황농 객잔인가 뭔가 직접 찾아가겠소. 그러니 지금은 옆으로 좀···.”
“어어? 정말로 그러실 겁니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은데요? 저희가 손님만을 위한 특별 식사까지 준비해 놨습니다.”
“아니, 이보시오!”
말을 해도 여전히 멈추지 호객행위에 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인 그때.
“···폭풍단장님.”
그의 입에서 발설된 한마디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전혀 의외의 공간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왔다.
그 사실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줬지만, 전장에서 살아온 나날들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도 내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호객꾼. 아니, 이제는 그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사내의 멱살로 날아가는 오른손.
스윽.
‘엇?!’
하지만 그것을 간단한 몸짓 하나로 피하는 사내의 모습에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공을 익혔던 건가···!
맥을 짚어보지 않고 무공을 파악할 수 있는 태양혈이나 손바닥을 보여주지 않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뿐. 내가 천마금나수를 발휘하자, 마치 끌려오기라도 하듯 그의 멱살이 내 손에 잡혔다.
자신이 잡혔다는 사실에 퍽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사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놈은 뭐냐.”
“그저 평범한 호객꾼일 뿐입니다.”
“난 장난칠 생각 따위 없다. 딱 한 번만 더 묻겠다.”
번쩍!
강렬한 안광과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살기.
평범한 양민은 물론 웬만한 무인도 버티기 힘든 압박으로 인해 평온하던 그의 얼굴에도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호객꾼일 뿐입니다. 당신을···.”
하지만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덧붙였다.
“저의 주인에게 모셔다드리기 위한 호객꾼이지요.”
“주인?”
“네, 최대한 빨리 모셔오시라고 하더군요. 드디어 자신의 의뢰를 받으러 오셨다고요.”
···젠장, 그랬던 건가.
잡고 있던 멱살을 풀자,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날 감시했던 건 언제부터였지?”
“성문을 통과한 직후부터 이미 저의 주인께선 폭풍단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역시 그랬나.
감시의 눈길을 파악조차 할 수 없었던 건, 애초에 그 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가.
이 자의 주인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라면, 그 정도야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일 터.
“안내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가 고개를 숙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여실히 나타나는 자부터, 무공은커녕 서당에나 들어갔을지 의심스러운 어린아이까지.
한순간에 한적해진 거리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 가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양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거리를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따랐다.
그가 말한 황농 객잔은 명의 수도인 북경에 있다곤 믿기 힘들 만큼 낡고 허름했다.
과연 그분이 여기 있을까?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런 생각까지 떠올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그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것이 고급, 고급, 고급.
입구부터 저 끝까지.
바닥부터 천장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최고급의 물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가장에서조차 보기 힘든 작품들이 거지 소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법한 허름한 객잔에 널려있는 모습이라니!
그런 해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조차, 객잔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 드디어 왔군, 폭풍단장. 오랜만이야.”
명나라 전군을 지휘 · 감독하는 대장군.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폭풍단장.”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밝고, 고운 안색의 한 여인.
그녀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취하며 대답했다.
“공주 마마.”
기묘한 의뢰의 주인.
그 정체는 바로 명나라의 공주이자, 내가 옛날에 치료했던 환자.
성하 공주였다.
< 정체불명의 의뢰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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