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명일룡 >
꿀꺽.
남궁무진은 생각보다 크게 울린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다행히 옆에 있던 도인현이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진 않았다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찰나.
“자네들은 누군가?”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목이 꺾일 정도로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 신승 어르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앞에 있던 신승이 자신들의 뒤에 나타난 것이다!
남궁무진의 경악에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던 신승은 뭔가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향을 보아하니 이쪽은 화산의 아이인 듯하고, 그쪽은 옷이나 검을 보아하니···남궁의 아이냐? 검왕 놈이랑 무슨 사이냐?”
“저, 저희 조부이십니다.”
“허어, 그렇다면 네가 그 녀석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남궁무진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평상시엔 긴장이라는 단어와 무관한 사람인 양 살아가는 남궁무진이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고 해도 정파의 살아있는 전설인 신승의 앞에서도 당당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상시 예의 바른 도인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신승을 보자 몸이 딱딱하게 굳은 남궁무진과 달리, 바로 오체투지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숙이고 있었으니, 더하다면 더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껄껄껄! 그리 고개 숙이고 있을 필요 없으니 두 사람 다 고개를 들어라.”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퍽 즐거운지, 신승은 기분 좋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말투부터 행동까지 모두 너무 딱딱한(사실은 그런 척을 하고 있던 거지만) 유현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도 무거운 척, 근엄한 척 꾸미느라 피곤했는데, 이렇게 재밌는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이다.
‘쩝, 이 두 놈이 검선과 검왕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놈들만 아니었어도···아깝다, 아까워.’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 더 필요할까.
“혹시···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유 소협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제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던 신승의 귀에 전혀 의외의 질문이 들려왔다.
오체투지라도 하듯 온몸을 숙이고 있던 도인현이 고개만 들어서 신승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냐?”
“예,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신승께서 유 소협을 내공으로 압박하다가, 곧 그것을 풀어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봤을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신승은 생각했다.
‘일부러 너희에게 들리지 않도록 기막으로 막고 있었으니 말이다.’
유현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두 사람을 파악하고 있던 신승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기막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가 했던 이야기도, 유현이 했던 이야기도 바깥에 알려졌다간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야기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질문하는 도인현과, 그 옆에서 경청하고 있는 남궁무진의 모습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도 검성이 다른 누군가와 심각해 보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면, 반드시 알아내려고 애썼을 테니까.
“우리 두 사람 간의 이야기다. 너희가 듣는다고 해서 좋은 일은 없으니, 그저 잊고 살 거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앞으로 정파를 이끌어가야 할 두 명의 훌륭한 후기지수가 듣기엔 위험한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고 또 하나.”
그래도 이 정도라면 말해줘도 되겠지.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신승은 입을 열었다.
“나는 먼저 압박을 풀지 않았다.”
“···네?”
“그 녀석이 혼자 내 내공을 이겨낸 것이란 소리다.”
다만 그 내용이 두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했을 뿐.
“신승 어르신의 힘을···받아낸 것을 넘어 이겨냈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한번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을, 그렇게 재차 확인까지 받아야겠느냐?”
일부러 대답을 피하는 신승의 말투에 두 사람은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만한 거리에서도 생생히 느껴지던 신승의 내공.
과연 정파의 최고수다, 과연 전설이라 불릴 만하다.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 둘 다 신승의 내력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유현은 그것을 이겨냈다고?
마치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들은 듯 경악에 온몸을 굳히고 있던 두 사람에게 신승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거라.”
명백한 축객령.
충격적인 사실과 뒤이어 날아온 신승의 단호한 태도에 두 사람은 무어라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품은 채 침상으로 들어설 뿐.
그날 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잠드는 이는 없었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용봉대전 결승.
가장 높은 단상 위에 모인 무림맹 수뇌부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비무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비무대를 바라봤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용봉대전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일 년 일찍 열리긴 했지만, 그 시작부터 끝까지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16강까지 올라온 선수 중 하나가 기권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특히 수뇌부 중 두 사람.
화산파와 남궁세가의 사람들의 표정은 다른 수뇌부보다 더욱 밝았다.
용봉대전의 우승자는 곧 다음 대 정파무림을 이끌어갈 인물이라는 뜻이고, 그 말인즉 그가 소속된 문파가 앞으로 정파무림을 이끌어갈 문파란 것과 일맥상통했으니까.
그 둘이 그토록 기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지금 겨루고 있는 두 사람은 바로 화산파와 남궁세가의 제자.
도인현과 남궁무진이었다.
지금껏 환호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다른 대결과 달리, 두 사람의 대결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비무는 지금껏 이뤄졌던 비무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안 그래도 이번 용봉대전동안 다른 후기지수들과 비교해도 두 수 이상 차이가 난다는 평가를 받던 두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실전을 방불케 할 만큼 무공을 발휘하는 걸 볼 수 있는 사람이 관객 중 몇이나 있겠는가.
본선에 진출했던 이들 대부분도 그 흔적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수준 높은 싸움이라고 해도 결국 승패는 나뉘는 법.
그리고 그 대결의 승자는.
“와아아아아!!!”
“도인현! 도인현! 도인현!”
“화산의 매화가 남궁의 창천을 뒤덮었다!”
화산 제일의 기재, 화산신룡 도인현이었다.
지금껏 참아왔던 환호를 모두 뱉어내겠다는 속셈인지, 관객들의 환호 소리는 면면부절 이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멈추기는커녕 줄어들지도 않는 환호 소리에 그것이 멈추면 수상을 진행하려던 원초의 계획을 수정, 여전히 환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시상자가 올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무대 위로 시상자가 올라오자, 환호 소리가 조금 줄어들더니 두런두런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대회의 시상자도 역시 검성님이군.”
“다음 대회 전에 금분세수(金盆洗手; 은퇴식)를 치를 거라는 예상이 다분하니, 아마 이번이 마지막 시상이겠지.”
“허허, 그렇다면 이번 시상은 어떻게 보면 지금껏 정파를 이끌어온 거인이, 앞으로 정파를 이끌어갈 후인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군.”
한 호사가의 말에 주위의 관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의 명성은 여전히 천지를 위명했지만, 그 나이는 숨길 수 없는 법.
일 년 일찍 용봉대전을 연 이유 중 가장 유력한 것이 ‘아직 맹주가 멀쩡할 때 용봉대전을 열자는 수뇌부들의 의견 때문이다’일 정도였으니 말이 더 필요할까.
그렇기에 이 광경이 무림인들에겐 더욱 마음에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축하하네. 아주 훌륭한 비무였어.”
“·········.”
하지만 비무대 위에 있는 도인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맹주의 칭찬에도 굳은 얼굴로 침묵만을 지킬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애가 타는 건 주위 사람들이었다.
멋들어진 시상식 겸 계승식을 기대하던 관객은 물론, 문파 제자의 우승에 웃고 있던 화산파의 수뇌부 역시 얼굴 딱딱하게 굳힌 채 비무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도인현의 그런 무례한 태도에도 검성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열어 도인현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말을 꺼낼 뿐.
“···그 아이 때문인가?”
검성의 그 말에 드디어 도인현의 얼굴에도 표정의 변화가 생겼다.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그것이 꼭 좋은 쪽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잔뜩 경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인현의 모습에 검성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친구가 이야기해주더군. 이번 대회 우승자가 충격이 좀 클 거라고 말이야.”
검성의 말에 도인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친구가 누군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나도 들었네. 대단하고, 또 훌륭한 아이더군. 하지만 자네가 가는 길과 그 아이가 가는 길은 다르네. 그러니 지금은 가슴을 당당히 펴고, 승리를 만끽하게.”
“···네, 알겠습니다.”
검성의 설득에 도인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용봉대전의 우승자에게 내려지는 승천검을 받기 위한 준비였다.
도인현의 행동에 검성도 입을 열었다.
“제18회 용봉대전의 우승자, 화산파의 도인현에게 승천검을 내리니, 우승자는 겸허히 그 영광을 받들라!”
와아아아아!!!
검성의 말에 관객들은 무림맹이 떠나가라 환호를 내질렀다.
잠시 끊기긴 했지만, 그래도 용봉대전의 마무리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우승자 시상식이다.
그것을 어떻게 환호 한마디 없이 지켜만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환호도.
콱!
갑작스러운 도인현의 행동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네···.”
“이 검은 제 것이 아닙니다.”
검성에게 받은 승천검을 곧바로 비무대에 박아넣는 그 행위에 모두가 놀란 와중에도, 도인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비무가 끝나고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던 검을 꺼내, 승천검이 꽂힌 자리 옆에 조금 더 깊게 박아 넣고선 큰소리로 외쳤다.
“저는 한낱 이룡일 뿐이니, 이 자리가 올바른 제 자리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도인현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그대로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본래라면 그를 막아서야 할 검성도 눈을 감은 채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도인현의 행동에 모두가 놀라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비무대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조금 전 도인현과 겨뤘던 남궁무진이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승천검에 다가간 남궁무진은 승천검의 자루를 꽉 쥐고 외쳤다.
“이 검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다시 한번 경악하는 관객.
설마 남궁무진이 도인현을 봐준 것인가? 도인현은 그것을 알아챈 것이고?
하지만 관객들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남궁무진은 바로 검을 놓고 중얼거렸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리 말하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그린 남궁무진은 도인현과 똑같이 자신의 검을 뽑아, 승천검 옆에 박아넣었다.
스릉, 콰직!
옆의 두 자루의 검보다 조금 더 깊이 박힌 검.
마치 세 번째 단상처럼 보이도록 검을 꽂은 남궁무진은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을 완전히 지운 채 도인현처럼 큰소리로 외쳤다.
“아직은 삼룡밖에 되지 않으니, 지금 이 자리로 만족하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남궁무진은 마치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바로 다시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두 사람의 행동에 관객도, 수뇌부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를 상황에서 유일하게 비무대 위에 올라와 있던 검성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용봉대전의 시상식을 모두 마치겠소.”
그 말을 끝으로 역시 다른 두 사람처럼 비무대 위를 내려가는 검성.
영문을 전혀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돌발행동과 그것을 만류하지 않는 검성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지만, 셋 중 누구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역대 제일 훌륭하게 진행되었다고 하는 18회 용봉대전은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라는 커다란 오점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창천삼룡(蒼天三龍), 매화이룡(梅花二龍)이라는 두 사람의 새 별호와 그 두 용 위에 있다는 무명일룡(無名一龍)의 이름만을 남긴 채로.
그리고 그 시각. 자신도 모르게 무명일룡이란 이름을 받게 된 유현은···.
“특이한 의뢰?”
“네, 그렇습니다.”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전혀 의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무명일룡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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