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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41화 (41/185)

< 용봉대전(5) >

“그래, 그래. 반갑구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건 처음인가?”

“네, 그렇습니다, 신승 어르신.”

“헐헐헐, 그렇구먼. 그런데 어찌 이리 반가울꼬. 마치 십 년은 못 본 혈육을 보는 기분이구나.”

신승이 웃자, 그의 주름진 얼굴이 마치 하나의 가면처럼 변했다.

설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쉬이 친근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미소.

···만약 심상 속에서 그와 맞상대하지 않았다면, 나도 경계심을 모두 풀어버릴 만한 미소였다.

하지만 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심상 내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나와 화순에게만 일어난 일이고, 그는 그저 내공으로 나를 압박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만한 고수를 상대해 본 건 처음인 만큼 만약의 사태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약에라도 내 무공의 근본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공격이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일은 없을지 몰라도, 이 뒤에는 평생 무림맹의 추살대에게서 도망치는 인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신승은 날 공격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는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느냐?”

“고절한 무공을 지닌 분이라곤 생각했지만, 신승 어르신의 이름은 감히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물론 신승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뛰어난 고수가 자신에게 내공을 보냈다는 걸 아는 정도라면 그저 재능 넘치는 후기지수에 불과하겠지만, 그의 정체까지 파악했다면 그건 재능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마치 야심한 밤, 무수히 많은 감시병이 있는 적군 진지를 정찰할 때처럼 신중히 말해야 했다.

“아니, 아니다. 이미 은거해서 뒷방 노인네 취급을 받는 늙은이를 어찌 떠올리겠느냐.”

다행히 신승은 내 거짓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웃는 얼굴로 내 말을 받았다.

“네 나이가 몇이더냐?”

“약관을 맞이한 지 사 년이 지났습니다.”

“허어, 그만한 나이에 그런 경지에 올랐단 말이더냐? 허허, 정파 무림의 홍복이로다!”

“과찬이십니다.”

“아니다. 그만한 능력을 갖춘 아이라면 이만한 칭송이야 들을 만하지. 그건 그렇고···.”

말끝을 흐리는 동시에 돌변하는 그의 얼굴.

조금 전 내게 보였던 미소가 그가 말한 것처럼 평범한 뒷방 늙은이였다면, 지금 세상을 좌시하는 절대 고수의 면모가 보였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찾아왔는지 아느냐?”

서로의 얼굴에 금칠하는 시간은 이걸로 끝.

이제 진짜 본론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신승 어르신의 높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그저 숙소로 돌아오자 서찰이 놓여있고, 거기에 신승 어르신의 성명이 적혀 있길래 찾아온 것뿐이지요.”

“그래, 그렇더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훅.

그가 입을 열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고.

“고설과 싸운 것이더냐?”

그의 말이 나오자 그것이 얼어붙었다.

내공을 뿜어낼 필요도 없이 그저 입을 열고,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절대 고수.

내가 심상 수련에서 매번 싸우고 있는 독고삭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 평가받는 무인의 힘!

“네게 내공을 보낸 이가 나라는 걸 모른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일부러 본선에 오르는 편한 길을 택하지 않고, 고설과 싸움을 벌였던 것이냐?”

마치 일 장 높이의 눈에 깔린 듯한 무거움과 한기에 순간 몸을 떨었지만, 그것을 어떻게든 버텨내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것이···저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했습니다.”

“너를 알릴 수 있는 수단?”

“예. 처음 신승 어르신께서 제게 내공을 보낸 첫날, 어찌하여 다시 제게 나타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움찔.

내 말에 신승의 백미가 움직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시험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지만, 그만한 내공을 이겨낸 것이 그리 쉽진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흠, 그래. 쉬운 일이 아니긴 하지.”

내 말에 신승은 턱을 쓰다듬으며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여 혹시 일행 중 누가 어르신의 내공을 이겨낸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여 찾아오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싶었고, 그것이 저임을 알리려고 일부러 가장 힘든 방식을 택하였고, 그것이 소림의 무승과 싸우는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한 번 고개를 깊이 숙이고.

“그리고 오늘, 서찰을 보고 저에게 내공을 보낸 분이 신승 어르신임을 알고, 우연이 겹쳐 필연이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허허, 그래, 그렇더냐?”

9할 9푼의 진실에 1푼의 거짓을 섞는다.

이것이 바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하는 방법.

원래는 정보 요원인 걸 적에게 들켰을 때 빠져나올 방법으로 배운 것이지만, 지금도 긴급 상황인 건 맞으니까.

내 말에 신승이 만족한 듯 웃자, 주변의 분위기가 다시 일변했다.

“미안하구나. 사람이 늙으면 의심만 는다더니, 그게 지금 딱 내 모습이로구나.”

“아닙니다. 저를 뽐낼 방법만 생각하다 의심을 산 것이니 오히려 제 잘못이 크지요. 일부러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한 마디에 분위기가 좀 더 많이 누그러졌다.

“허허, 마음가짐 역시 올바른 것이, 역시 정파의 아이답구나. 널 가르친 스승이 누군지 궁금해지는구나.”

[야, 저리 말하는 데 내 얼굴 좀 말해줘라. 나도 정파의 고수한테 제자 잘 가르쳤네 소리 좀 들어보자.]

“아쉽지만 저도 사 년 전 고인께 가르침을 받고 난 이후, 그분을 다시 뵌 적이 없습니다. 본인을 이름도 없이 그저 바람을 따라 세상을 유랑하는 이라 말씀하셨을 뿐이지요.”

화순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나는 내게 스승을 물으면 으레 하던 변명을 내뱉었다.

“허어, 그렇더냐?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더니, 딱 거기에 어울리는 고인이로구나.”

내 스승이라 생각한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한 번 남긴 신승은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어찌하여 너를 부른 것인지 알겠느냐?”

“고인의 뜻을 제가 어찌 짐작하겠습니까. 그저 부르심에 찾아왔을 뿐이지요.”

“허허, 그래, 그것까지 알면 네가 신승이겠지. 자,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말문을 튼 신승은 갑자기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너는 저 하늘을 보면 무엇이 보이더냐?”

“하늘···말입니까?”

신승의 말에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 눈에는 별과 달만이 보이는군요.”

“허허, 그래, 그렇지. 밤하늘을 보면 별과 달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

···뭐지? 갑자기 왜 밤하늘을 보라는 거야?

설마 무슨 선문답을 하겠다, 이런 의미인가?

하지만 신승은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하늘을 보고,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지.”

나와 똑같이 밤하늘을 바라보던 신승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그리 말하는 신승의 자그마한 눈에는 마치 밤하늘처럼 수많은 별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깊으신 뜻인지, 아니면 잠깐의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주 조금은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지.”

“그 말씀은···?”

“최근 십 년 내로 천기가 아주 크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조화인지, 아니면 귀신의 조화인진 알 수 없으나, 있어선 안 될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있어선 안 될 일?

신승의 말에 순간 머릿속으로 지금껏 있었던 여러 사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승이 제자를 죽이고, 아들이 아비를 죽이며, 정파가 청부살인을 받는 것.

말 그대로 역천(逆天)의 죄가 아닌가.

꿀꺽.

예상치 못한 신승의 말에 나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신승께서···그것을 고쳐보려 하시는 겁니까?”

“천기를 고친다···그리 고상한 생각으로 하려는 일은 아니다. 그저 가장 먼저 쓰레기를 본 사람으로서 그걸 치울 생각을 하려는 것뿐이지.”

싱긋.

그는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그리며 내게 말했다.

“그것이 부처님이 구태여 나 같은 불량한 제자에게 이런 신통력을 내려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말이다.”

“저는 부처님의 뜻은 알지 못하지만···어르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는 알겠습니다.”

“허허, 고맙구나.”

“그럼 혹시 저를 부르신 이유도 그런 이유이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도 없을 터.

내 말을 들은 신승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너와 비무를 하였던 고설이라는 아이를 데려가려 했다. 우리 소림에서도 큰 기대를 하는 후기지수이지.”

고설이 그런 인물이었다고? 그런데 왜 회귀 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거지?

신승이 기대를 품고, 그와 함께했던 인물이라면 이름도 널리 알려져야 했을···.

오, 이런.

그제야 왜 내가 고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는 이미 내가 회귀 전 목숨을 잃었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고수, 신승과 함께 천기를 고치러 떠났다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설의 이름을 몰랐던 이유도, 신승이 행방불명 됐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승은 지금 자신이 말하는 그 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뛰어난 아이를 찾았으니, 일부러 그럴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그 길을 이번에는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는 것이고.

도대체 지금 그가 걸어가려는 길 앞에 무엇이 있길래, 이만한 고수조차 죽음을 피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제 생각 말씀입니까?”

“그래.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나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조차도 목숨을 건지지 못할 일일지도 모르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읽은 듯,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하는 신승.

“그러므로 지금 네가 돌아간다 해도 나는 너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도, 비판도, 실망도 없을 거라 약속하마.”

그런 그의 눈에는 오직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 뒤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생각과 뜻을 존중해 주겠다, 그런 의미인 듯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제안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물론 나와 고설 간의 무력 차이는 크다.

오의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작지 않은 차이였으니, 오의를 사용한다 치면 그 차이는 더더욱 클 터.

거기에다가 비무 상황이 아닌, 목숨이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선 무수히 많은 전장은 전전한 나와 그저 소림에서 무공만 익혔던 고설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목숨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지금 내가 그에게서 얻으려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나는 여기서 무슨 답을 꺼내야 하는가?

여러 고민이 떠오르던 그때, 내 귀로, 내 머리로 화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욕심대로 해.]

내···욕심대로?

[그래, 어차피 지금껏 네가 움직인 것도 다 그거잖아? 가는 사람은 다 죽는다던 국경부대에 찾아간 것도, 실패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는 공주의 치료에 도전한 이유도, 전부 네 욕심 때문이잖아? 원하는 대로 해.]

쿵!

녀석은 웃으며 가슴을 두드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네가 죽을 장소로 간다고 해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막아줄 테니까 말이야.]

하···그래, 그것참 믿음직하네.

말투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진심이었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죽을 뻔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뭐···그 죽을 뻔한 경험 대부분이 이 녀석이 등 떠밀어서 들어간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곳에서 살아날수록, 나는 점점 더 강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화순의 설득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신승 어르신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허허, 고맙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그렇게 말해줘서.”

“아닙니다. 세상에 큰 혼란이 온다고 하는데, 어찌 그것을 외면하겠습니까. 신승 어르신이 데려가지 않겠다 하셔도 제가 억지로 찾아갔을 겁니다.”

어차피 가기로 정한 이상, 거기에 금칠 좀 더 한다고 나쁠 건 없겠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여기로 찾아온 이유는 절대 잊지 않았다.

“그리고 어르신, 이것···.”

나는 말문을 열면서 품 안에 있던 두둑한 종이뭉치를 함께 꺼내 들었다.

“음? 이건 뭔가?”

“제가 무림맹으로 온 이유입니다.”

내게서 종이뭉치를 받은 신승은 바로 맨 앞에 있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신승 같은 절대 고수에게 이 정도 내용을 읽는 건 어렵지 않을 터.

그리고 내 예상대로 그는 그것을 쉽게 읽었고, 경악에 들어찬 눈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이, 이게 전부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내가 쳐들어갔던 신창양가를 포함한 여덟 개의 정파에서 얻은 정보들.

일명 제자들의 생사부였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내리던 신승이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혹시 최근 떠들썩 한 위선타파에 관해 자네가 연관되어있나?”

“정확히는 그들 중 한 사람이 저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도 모두 사실이라는 소리군. 허어···어찌 정파라는 작자들이 이런 짓을 벌인 것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찌, 어찌 말을 반복하는 신승.

그 모습에 옆에 있던 화순이 팔짝을 낀 채로 말했다.

[어째 반응이 좀 밋밋한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좀 더 경악하면서,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낼 줄 알았는데.]

수십 년간 수양을 쌓아온 불가의 고수잖아. 이 사람이 이 정도로 반응한다는 건, 다른 사람으로 치면 경악하다 못해 기절한 거나 다를 바 없지.

[뭐···틀린 말은 아니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화순을 뒤로한 채, 나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는 신승에게 덧붙여 말했다.

“이번 용봉대전이 저번보다 더 일찍 열린 이유도 이번 일을 덮으려는 속셈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맹의 수뇌부에서 이런 일을 벌인 자가 있다는 건가?”

“지금은 번역되어 있지만, 본디 이것들은 전부 맹의 일급 암호로 적혀 있던 것들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최소 세 가지 이상의 암호로요.”

내 말에 신승의 이마에 새겨져 있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도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수준 높은 암호를 그렇게 많이 열람할 권한이 있는 건 오직 맹의 수뇌부뿐이지···왜 자네가 그런 대답을 꺼내게 되었는지도 알겠구먼. 그리고.”

스윽.

그가 허름한 가사 안으로 종이 뭉치를 집어넣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것을 왜 내게 맡기었는지도.”

“신승 어르신이 아니었다면 맡길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신승 어르신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네. 이미 은거 고인 취급받는 늙은이지만, 아직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여럿 있네. 그들이라면 누가···.”

그는 말하기 힘든 듯, 잠깐 말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악행을 벌였는지 알 수 있을 게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자네도 이 늙은이의 부탁을 목숨 걸고 받아들였는데, 나도 이 정도야 당연히 들어줘야지. 내가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선 모두 끌어모아 보겠네.”

“감사합니다.”

이걸로 무림맹에 와서 계획했던 일은 다 해결됐다. 이제 남은 건, 용봉대전에서 우승을···.

“아, 그리고 용봉대전은 이제 그만 나가게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이 늙은이가 왜 갑자기 이번 일이랑 전혀 상관없는 용봉대전은 나가라 말라야?

“용봉대전은 본래 앞으로 정파를 이끌어 갈 영웅들을 뽑는 대회네. 예를 들어서···내 친우인 검성처럼 말이네.”

“검성께서 육십여 년 전 열렸던 용봉대전에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건 유명한 일이지요.”

“그래, 그렇지. ···그렇기에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세. 그곳은 정파의 심장과도 같은 자리. 이 일을 파헤치다가 용봉대전에 우승한 사내가 목숨이라도 잃었다간, 정파 무림의 정기가 크게 훼손될지도 모르네.”

쓰읍, 후우.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다시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자리지.”

···이거 내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려서라도 막을 기세인데.

여기서 거짓말로 하고 대회에 나갔다간···.

[정보는커녕, 너한테 속았다면서 추살대라도 하나 꾸릴지 모르지.]

젠장, 외통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용봉대전에서 우승할 때까지 접촉하지 말걸.

내내 쭉정이만 상대하다가 이제야 좀 싸울 재미가 있는 인간들만 남았는데, 그걸 다 포기하고 가야 한다니.

아깝다, 진짜 아깝다.

[···뭐, 포기할 건 포기해. 어차피 싸움이야, 이번 일만 끝나도 가능할 테니까.]

그 싸움 좋아하는 화순까지 말릴 정도로, 신승의 눈은 진심 그 자체였다.

그래, 싸움이야···젠장···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 본심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흘러나와.

“···알겠습니다. 신승 어르신의 뜻이 그러하니, 어찌 제가 저의 욕심만 부리겠습니까.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행이 있는지라, 숙소에 늦게 들어갔다 의심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허허, 그리하게나. 이 늙은이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아랫것들이 시끄럽지 않으니 말일세. 그럼 천기의 흐름이 크게 요동치면 자네를 부르겠네. 그때까지 부디 몸을 보중하게나.”

신승은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언제 사라지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는 엄청난 신법이었다.

부럽다. 나는 신법도 없어서 그냥 뛰어만 다니는데.

[원하면 마교에 쳐들어가서 천마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 놈을 아무나 하나 잡아 죽이던가. 그럼 천마의 무공을 하나 얻을 수 있으니까.]

미쳤냐. 그 조건에 만족하는 건 옥천 말고 없잖아. 마교에 가서 천마랑 싸우라고?

화순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마디로 일축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신승과 만남은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으로 끝났다.

< 용봉대전(5)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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