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봉대전(4) >
야심한 밤.
도인현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림맹에 와선 몸이 굳지 않게 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련 외에 화산의 검술은 수련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거야 원.’
눈가까지 내려온 땀을 훔치며 도인현은 생각했다.
‘설마 내일 대결이 기대돼서 잠도 안 올 줄이야.’
본래는 원래 수면시간에 맞춰 숙면하려 했지만, 내일 대결에 관한 논검을 머릿속으로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너무 늦은 시간이 된 것이다.
그쯤 되니 억지로 잠을 청해보려 해도 잠이 오지 않고, 그렇다고 밤을 새우고 비무장으로 가는 건 내일 비무의 상대, 유현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최고의 상대에겐 최고의 상태로.
그러지 못한다면 평생 미련만 남을 뿐이니까.
그래서 차라리 그 불면의 연계를 완전히 끊어보려고 땀에 흠뻑 빠질 정도로 열심히 수련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치 사부님이 처음으로 화산파 아랫마을에 데려가겠다고 하셨던 때 같군.’
그때도 밖으로 나가 이렇게 땀을 흠뻑 흘리다가 사부님에게 들켜서 머리를 쓰다듬어졌었지.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과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쓴웃음을 지으며 숙소로 향하던 길.
‘응?’
어딘가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유 소협?’
손에 무언가를 꽉 쥔 채 숙소 밖을 빠져나가는 유현의 모습에 손을 들어 그를 부르려던 찰나.
“쉿.”
갑자기 자신의 입을 막고 귀에 무어라 속삭이는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막히고 말았다.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 반격하려던 도인현은 곧 그것이 자신이 아는 사람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바로 뒤를 돌아보자.
“잠이 안 오긴 서로 마찬가지였나 보오.”
“···남궁 소협.”
도인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푸는 남궁무진.
그의 신색을 확인한 도인현이 이마에 작은 주름을 만들며 물었다.
“무슨 소리를 듣고 숙소에서 잠시 빠져나온 건 아닌 듯하군요.”
완벽하게 외출복을 갖춰 입고 나온 남궁무진은 도인현의 말에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려고 눕긴 했는데, 내일 두 사람의 싸움이 눈에 아른거려서 잠이 안 오더란 말이오. 그래서 내일 어떻게 싸울 생각인가, 유 소협에게 물어보려고 가던 길이었지.”
“그걸 유 소협께서 진심으로 말해주리라 생각했소?”
“안될 것이 무어가 있겠소. 어차피 싸우는 사람은 둘이고, 나는 구경꾼일 뿐인데.”
내일 비무를 하는 건 본인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토록 태평한 모습이라니.
도인현은 이해할 수 없는 마음과 행동이었지만, ‘남궁무진이니까.’라는 한마디로 정리한 후 그에게 다른 걸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입은 왜 막은 것이오? 유 소협을 불러선 안 될 이유라도 있소?”
“딱히 그런 건 아니고···그냥 재밌어 보여서 말이오.”
“재미?”
“야심한 밤에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숙소를 빠져나가는 한 사내. 다급한 얼굴을 한 사내의 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쥐어져 있다.”
흥겨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던 남궁무진이 도인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유추되는 답이 뭐가 있겠소?”
“···잘 모르겠구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오?”
하지만 그런 남궁무진의 미소도 둔감한 도인현의 말엔 결국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여동생이 그토록 자신을 향해 투덜거렸는지 깨달은 남궁무진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속세와 멀리 떨어져서 사는 도사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경우는 보통 밀회를 생각하기 마련이죠.”
“밀···회요?”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문은 어디 비견할 곳 없이 좋고, 인물도 저 정도면 괜찮고, 무엇보다 그 뛰어난 무공까지. 여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슴 속에 안아보려는 사내 아니겠소?”
남궁무진의 말에 도인현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부정하기엔 자신은 여인을 너무 몰랐고, 눈앞의 사내는 여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인현의 머리에서 더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라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요? 이제 제가 입을 막은 이유도 아시겠군요.”
“네, 감사합니다, 남궁 소협.”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큰 실례를 할 뻔했다.
자신이 유현을 불러서 그가 다시 숙소로 되돌아가기라도 했다간, 이 야심한 밤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여인에게 정말 몹쓸 짓을 한 것이니까.
도인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무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그럼 이제 알겠구려. 자, 갑시다.”
“···네?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 유 소협이 낭자와 밀담을 나누는 걸 몰래 훔쳐보러 가는 게 아니겠소.”
“·········.”
너무나 예상외의 발언에 잠깐 정신이 나갔던 도인현은.
“아니! 그게 무슨!”
바로 목소리를 높이다가 지금이 야심한 밤임을 깨닫고 다시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말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지만 목소리는 낮췄을지언정, 그 말에 담긴 감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오?”
“뭐가 잘못된 일이오?”
“뭐가, 라니···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잘못된 일이지요.”
“허어, 역시 도사라 그런지 밀담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구려.”
쯧쯧, 하고 혀를 차던 남궁무진이 입을 열었다.
“본래 밀담이란 관객이 꼭 필요한 법이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생각해보시오. 이 야심한 밤, 비밀스럽게 만난 남녀 두 사람의 사랑을 증언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겠소? 옛 시인의 말처럼 달과 별, 풀과 나무가 증인이 되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말이 안 되는 소리지. 그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소, 아니면 그들을 위하여 축배를 들어줄 수 있소?”
움찔. 남궁무진의 말에 도인현은 순간 몸을 떨었다.
분명 자신의 상식으론 잘못된 일인데, 이렇게나 당당한 모습이라니.
혹시 자신이 정말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엇보다 이건 남녀 두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하오. 이토록 야심한 밤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은 낮이 되면 서로 모른 체하겠지. 하지만 바로 그때, 여인에게 다가가는 다른 남자! 남자는 그를 막고 싶지만, 이유도 없이 사랑을 위해 맹목적으로 다가가는 남자를 막을 순 없는 법. 바로 그때!”
턱.
자신도 모르게 남궁무진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던 도인현은 그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되찾았다.
“그 밀회의 숨겨진 증인인 우리가 그 외인을 조심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끄는 것이지요. 그렇게 점점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의 밀담을 보러 가야 하는 이유요. 알겠소?”
“아니, 그래도, 저···.”
···진짠가? 지금 이 남자의 말이 맞나?
분명 뭐라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을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던 도인현은 결국 그의 말이 정말로 사실인가, 하고 착각에 빠져들었다.
자세히 파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요, 당장 집어치워야 할 개소리인데도, 화산파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그는 결국 그 이상한 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듣고 보니···맞는 말······같기도·········.”
“이야, 역시 도 소협이라면 이해해 줄 줄 알고 있었소. 자, 그럼 얼른 갑시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시작 부분 놓치겠소.”
···시작 부분? 뭐가 시작 부분인데?
머릿속으로 그런 질문이 순간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도인현은 남궁무진의 뒤를 따랐다.
앞서가고 있는 그가 웃겨 죽을 것 같다는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로.
*****
여긴가.
나는 손에 있던 서찰을 꽉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서찰에 적힌 위치는 무림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숲이었다.
숲이라고 해봐야, 엄청나게 울창하거나 그런 건 아니고 몇십 그루의 나무에 둘러싸인 작은 공터 같은 곳이었지만 말이다.
어느 마을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공간.
하지만 이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단하네.]
그리고 그것은 내 옆에 있던 화순도 마찬가지였다.
[풀벌레 우는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숲이라···내공으로 압도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운신하고 있진 못하겠지.
하지만 지금 내 몸은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웠다.
절대 내공이나 다른 무언가로 주위를 압박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
결국 나오는 답은 딱 하나.
[다 쫓아냈군.]
나와 똑같은 답을 도출해낸 화순이 웃으며 말했다.
[풀벌레 한 마리의 목숨도 소중히 여기겠다, 이건가? 불도(佛道)라는 건 진짜 평생을 가도 이해 못 하겠어.]
나도 딱히 그 뜻은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알 것 같은데.
일부러 풀벌레 한 마리까지 모두 도망치게 했다는 건.
“곧 여기에 그런 일을 벌이겠다는 소리겠지.”
껄껄껄껄껄!!!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숲을 뒤흔들 기세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엄청난 내공!
“큭!”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힘에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심상 수련에서 몇 번이고 싸웠던 독고삭과 그 위력은 비슷할지 모르나, 그 성질은 전혀 다르다.
독고삭의 기운이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폭풍우라면 지금 내가 감당하고 있는 기운은 마치 천근의 바위와 같았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잃으면 휘말리게 되는 폭풍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짓눌러져 버리는 바위.
상반된 기운이지만, 그 위험성만큼은 다를 바가 없었다.
재밌는 놈이로구나! 이것까지 버텨내다니!
쿠웅!
신승의 말이 다시 한번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조금 전 느껴지던 압박감이 배는 더 강해졌다.
육합전성(六合傳聲)에 자신의 기운까지 실어서 보내는 경지.
괜히 그가 정파 무림의 태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아무런 대책 없이 찾아온 건 아니다.
화순.
[그래, 준비해놨다.]
화순의 대답에 눈을 감고 천천히 마음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갔다.
신승과 접촉? 공격? 당한 후 보름이란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왜 갑자기 내 심상으로 빠져들었는가였다.
지금까지 내가 마음먹지 않는 한 심상으로 들어가는 일 따윈 없었는데, 그땐 왜 갑자기 그렇게 된 걸까?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내가 원해서 한 일임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안에 깃든 권능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이유? 당연한 것 아닌가.
“이쪽이 더 생존할 확률이 높으니까.”
감았던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있던 공터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전후좌우,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그리고 내 앞에 앉아서 나를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석가여래.
신승의 진신 내공이자, 보름 전만 해도 그저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던 존재.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흡!
한 번의 호흡으로 순식간에 십여 장을 뛰어올라 가부좌를 틀고 있던 석가모니여래의 무릎에 올라탔다.
언제나의 심상 수련처럼. 아니, 그보다도 훨씬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한 육체!
보름간의 준비. 그리고 지금 나를 옆에서 도와주고 있는 화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시간은 딱 이 각밖에 안 돼. 그 사이에 뭐라도 해내라고!]
주변의 기운을 억제하고 있는 화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크게 뛰어올랐다.
전과 비교해도 훨씬 강해진 신승의 기운.
그의 부름에 찾아온 나에게 이런 기운을 보낼 이유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딱 한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기운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두 번째 시험은 내가 용봉대전에서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가를.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시험이자, 마지막 시험에선.
“당신의 기운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거 아니요, 신승!”
이런 무지막지한 시험이라니.
조정의 관리를 뽑는다는 과거 시험도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내게는 겨우 보름의 시간밖에 주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치르게 만들다니,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시험을 받는 내 입에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내게 지금 시련을 내리고 있는 존재가 누군가.
신승!
정파 무림의 태두이자 위대한 스승!
내가 회귀하기 몇 년 전에 갑자기 행방불명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파의 큰 어르신으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던 인물이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더없이 흥분되게 만들었다.
하찮은 삼류가, 시시한 말단이 지금 여기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더욱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챙!
어느새 내 양손 위로 나타난 두 자루의 창을 꽉 쥐고 와류를 일으켰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낸 와류 중 가장 크고, 강력한 와류를.
콰과과과.
내보내기도 전부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는 와류.
조금만 더 쥐고 있다간 창은 물론 내 손까지 부숴버릴 듯한 거대한 와류를.
“가라앗!”
그대로 눈앞의 석가여래, 신승의 진신 내력을 향해 내던졌다.
철혼(鐵魂)의 차갑고 푸른 폭풍과 진양(眞陽)의 뜨겁고 붉은 폭풍.
하나로 합쳐진 거대한 폭풍이 석가여래의 코앞에 다가간 그때!
콰앙!
“큭?!”
갑자기 휘몰아치는 거대한 기운에 나는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명중했다?
아니, 그건 아니다. 지금껏 수십 번 와류를 썼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마치, 와류가 막히기라도 한듯한···막혔다?
설마, 그럴 리가, 분명히 코앞까지 다가갔고, 그 손은 전법륜인(轉法輪印; 부처의 수인 중 하나)을 취하고 있어서 막을 방도 따윈.
“하.”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린 그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광경.
“하하하.”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내뱉었다.
“석가여래에 천수관음(千手觀音)까지···.”
그의 등 뒤로 일어나 있는 셀 수도 없이 무수히 많은 손.
그리고 그중 두 개의 손이 그의 얼굴 앞에서 와류를 막아선 걸 보고 나는 웃던 걸 멈추고 이를 꽉 물었다.
이것이 바로 신승이 가진 힘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오는 수십, 수백의 손가락, 주먹, 손바닥.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마!”
파앙!
양다리에 온 내공을 담아, 다시 한번 뛰어오른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날아오른 육신과 그 뒤를 따라오는 수백 개의 손.
가장 앞서 있던 주먹이 나를 후려치려는 그 순간.
“흡!”
내 몸이 마치 누군가에게 끌어당겨 지기라도 한 듯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천근추(千斤墜). 몸의 어느 부분에 많은 내공을 부여함으로써 공중에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예.
그것으로 팔에 올라탄 나는 바로 그의 팔을 타고 그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막기 위해 떨어져 내려오는 수십 개의 손바닥.
막는다, 라는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서 떠오르지도 않았다.
하나를 막는 순간 그 위에서 차례로 떨어질 수십 개의 손바닥을 막을 힘은 내게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전심전력으로.
지금껏 단련한 근육과 임무로 얻은 내공을 모두 사용해서 최대한의 속도로 앞으로 뛰어갔다.
양발의 근육이 비명을 내지르고, 단전의 내공이 마구 사라지며, 주변의 광경이 마치 여러 색의 실선이 겹쳐진 것처럼 보인다.
쿵! 쿵!! 쿵!!!
그리고 그런 내 뒤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굉음.
하늘에서 떨어지던 손바닥들이 갑작스레 속도를 높인 날 따라오지 못하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 소리는 분명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내겐 닿지 않는다.
그 사실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 손 위에 나타난 진양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다시 한번 창끝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의 바람.
그것이 태양적석으로 이루어진 창날과 만나자, 거대한 회오리로 변한다.
와류.
양발에 온 내공을 쓰고 있느라 아까처럼 거대한 와류는 일으킬 수 없지만, 지금은 이 정도라도 충분했다.
저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신승의 진신 내력을 향해, 조금의 상처라도 남길 수 있다면!
콰직!
양다리가 버티지 못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상 안이라 그런가? 아니면 지금 고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서 그런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내가 원하던 건 달성했으니까.
“맞아라!”
서로 눈까지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진 그 순간.
수십 개의 손이 내 주위로 구체를 형성하며 나를 잡으려 다가오는 그 순간.
내가 보름 전부터 그토록 바라던 그 순간.
와류가 깃든 창을 앞으로!
쩡!
와류가 그의 코끝과 맞닿는 순간, 온 세계에 맑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직후.
와장창!
나를 향해 미소짓고 있던 석가여래가 마치 무너져 내리듯 천천히 부서졌다.
금박을 씌운 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몽환적인 광경.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왜소한 누군가.
엇?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나를 향해 마른 손을 느릿하게 뻗었다.
반응?
할 수 없다.
···왜?
모른다.
텅 빈 단전과 부서진 육신 때문에?
그럴 리가 있나. 이미 모두 회복된 지가 언젠데.
몸을 돌리기만 해도 피할 수 있고, 팔을 올리기만 해도 막을 수 있으며, 창을 찌르기만 해도 반격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다.
하고 싶지 않다.
내 본심을 자각하고 나서야, 내 눈앞의 이 왜소한 누군가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깨달았다.
거대한 부처 안에 있는 진짜 신승.
그야말로 진정한 신승의 진신 내력이라는 사실을.
딱!
그가 내 이마에 딱밤을 먹이는 순간, 심상 속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수십여 그루의 나무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공터.
아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광경 속, 누군가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허름한 가사와 이마에 찍힌 계인.
그리고 허허로운 미소가 가득 새겨진 얼굴까지.
심상 속에서 느꼈던 그 강맹한 기운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존재가 바로, 내가 찾던 그 사람이라는 걸.
나는 크게 심호흡하며 포권을 취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를 담아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강호의 말단 후배가.”
조금 전 심상 속에서 봤던 그 석가여래보다 크기는 작을지언정, 그 안에 담긴 힘은 훨씬 거대한 거인(巨人)에게.
“신승 어르신을 뵙습니다.”
< 용봉대전(4) > 끝
ⓒ 거믄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