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봉대전(3) >
호로록.
도인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남궁무진의 제안으로 후기지수의 모임에 오긴 했지만, 그는 지금 너무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머, 미수산(美秀山) 산채의 산적들을 모두 퇴치하신 게 제갈혁 공자님이셨나요?”
“하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야만적이고 근본도 없는 산적 놈들 따위, 저희 제갈세가의 무공 앞에선 바람 앞의 낙엽과 다를 바 없지요.”
“어머나, 역시 제갈세가의 공자님다운 멋진 말씀이세요.”
앞으로 무림 정세에 관한 이야기나, 각자가 가진 무공에 대한 견실한 토론 따윈 없이, 오직 서로의 얼굴에 금칠만 하는 지루한 모임 따위, 그가 보기엔 밖에 나가서 행하는 일 다경(茶頃)의 수련보다도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시간도 문파 간의 교류 중 하나로 무척 중요한 일이란 건 알고 있다.
아니, 그런 의도도 없었다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여기서 뛰쳐나갔을 것이다, 라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차라리 마음이 맞는 남궁무진이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모를까, 그는 자신을 여기로 초대하고 어디로 갔는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으니···.
‘남궁 소협의 초대고 뭐고, 그냥 유 소협과 사제들이랑 예선 구경이나 하러 다닐 걸 그랬나.’
본다고 무언가를 깨달을 정도로 수준 높은 비무야 찾기 힘들겠지만, 최소한 이렇게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았겠지.
“도인현 공자님.”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허공을 보고 있던 도인현에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아, 명화 소저.”
“많이 지루하신가 보네요?”
남궁명화.
발이 딱히 넓지 않은 도인현이 그나마 친우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남궁무진의 여동생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아뇨, 저는 전혀···.”
“후후, 억지로 거짓말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눈부터 지루하다고 말씀하고 있는걸요. 그리고.”
그녀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지루하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원래는 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한테 강제로 끌려 나와선···도인현 공자도 마찬가지죠?”
“네, 아, 네···그렇지요.”
친구를 위해 억지로나마 거짓을 말하려던 도인현은 그녀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고 진실을 내뱉었다.
그녀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독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궁무진의 옆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만은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랑 같은 괴짜 오라버니의 피해자네요.”
“아, 네, 그렇군요···.”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방금까지 마시고 있던 찻잔으로 손을 뻗어 입으로 가져가 보지만.
‘윽!’
아뿔싸.
이미 텅 빈 찻잔.
후기지수 간의 시시한 군상극(群像劇)을 관람하는 동안 한 모금씩 홀짝였던 것이 이미 바닥을 보이었던 모양이다.
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찻잔으로 손을 뻗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경험에 혼란스러운 그때, 도인현의 귀로 꽂히는 남궁명화의 목소리.
“이렇게 지루한 곳에 있지 말고···저랑 같이 나가실래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 혼란이 그녀의 한마디로 정리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려던 찰나.
쾅!
“으하하하! 모두 모임은 재밌게 즐기고 계시는가!”
그의 등장에 모든 것이 멈췄다.
남궁무진. 이 모임의 주최자이자,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던 그 사내.
그리고 도인현을 여기로 끌고 온 범인이.
“으음, 표정을 보아하니 즐거워하는 것 같아서 다행일세.”
남궁무진은 늦었다는 사실에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입구 옆 탁자 위에 있던 커다란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행색에 몇몇 이들은 눈가를 찌푸렸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후기지수 간의 모임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누군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안 되는 강호행 동안 자신의 무력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함을 당당히 증명한 사내.
이미 이 용봉대전의 주인공이라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도는 인물을 상대로 누가 감히 불평의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한 병의 술을 다 비울 때까지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병을 내린 남궁무진은 오히려 그게 마음이 들었는지 씩 웃으며 인파를 가로질러 도인현의 옆에 앉았다.
“이야, 이거, 불러놓고 미안하오. 사실 좀 재밌을 줄 알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지루하더구려. 그래서 그냥 바깥 구경이나 하다 왔소.”
초대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뻔뻔한 말이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도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정도 고마움도 있었다.
만약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남궁명화와 함께 밖으로 나갔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저도 충분히 즐기고 있었으니까요.”
다시 아까처럼 편안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도인현이 대답하자, 남궁무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사실이오? 들어올 때 봤던 얼굴은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떠보는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는 걸까.
잠깐 그의 의중을 파악하던 도인현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사실을 고했다.
둘 중 어느 쪽이건, 사실을 말하기 전까지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궁 소협과 비슷한 심정입니다. 이런 모임은 역시 제 성격엔 맞지 않는군요.”
“하하하! 역시! 저와 비슷한 마음일 줄 알았습니다. 어이쿠, 명화야, 옆으로 좀 가보거라. 이거 내가 앉을 자리도 없구나.”
“하아···오라버니······.”
조금만 더 늦게 오지, 아니, 차라리 오지 말지···이런 생각을 담아 남궁무진을 쏘아 봤지만, 어디 그가 그걸 알아들을 사람인가.
결국 좀 더 옆으로 자리를 피한 남궁명화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래서, 밖은 좀 재밌으셨습니까?”
“그리 재밌지는 않더이다. 어차피 대충 알만한 사람들만 나와서 간단히 삼승을 챙기고 본선 진출권을 받아가니 말이오. 뭐, 그런 싸움도 아주 시시한 건 아니지만, 원하던 건 보기 힘들었지요.”
이 괴팍한 남궁무진이 즐거워할 만한 싸움이라,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역시 그렇···.”
“딱 하나.”
도인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남궁무진이 그 흐름을 끊고 입을 열었다.
“소림사 무승의 비무를 빼곤 말이오.”
소림사 무승의 비무?
남궁무진의 말에 도인현은 이마를 찌푸렸다.
용봉대전의 예선 칠주야간 소림사 무승이 하루에 한 명씩 나와 다섯 번의 비무···아니, 무공 시연을 보인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류 이하의 무인이나 구경하러 나온 양민이나 즐겁게 볼만한 구경거리일 뿐.
눈앞의 사내가 기뻐할 만한 종류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으셨습니까?”
반쯤 예의로 꺼낸 질문이었다.
남궁무진이란 사내를 이미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또 시시한 대답을 꺼내겠지, 그런 도인현의 예상과는 달리, 남궁무진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외의 인물이 나왔다.
“유 소협 말이오.”
움찔.
도인현의 몸이 크게 떨리자, 남궁무진은 만족한 표정으로 더욱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림사의 무승과 대결에서 아주 당당히 승리하더군요.”
덜커덩!
도인현이 의자 채로 남궁무진에게 가까워졌다.
“어마어마한 대결이었소. 한시도 눈을 떼기 힘든 대결이었지. 소림사의 무공이 그저 명성에 기대기만 할 뿐인 시시한 무공이라 지껄이는 얼치기 호사가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부끄러움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텐데!”
꿀꺽.
도인현은 남궁무진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신도 단 한 번도 식견 해보지 못한 소림무승의 진짜 무위.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비무대 위의 진짜 주인공은 그가 아니었지.”
그리고 그의 두근거림이 더욱 강해졌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도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소림의 무승을 한줄기의 바람으로 무너뜨리는 모습은 마치 바람을 부리는 풍신과 같았지. 거기에다가 그 뒤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칼바람은···.”
으음. 자랑하듯 말을 이어나가던 남궁무진도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것이 남궁무진 본인이라면 과연 막을 수 있었을까?
비무를 실견(實見)했던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오지 않는 해답을 억지로 지워내듯 머리를 흔든 그는, 다시 미소를 그리곤 말했다.
“정말 대단했지. 강맹한 공격 이후의 빈틈을 절묘하게 파고든 바람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었소.”
거기에 자신도 포함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무는 모두 끝났소?”
“응?”
“유 소협의 비무 말이오. 본래 예선전에는 총 세 번의 승리가 필요한 것으로 아는데?”
“아, 그것 말이오? 아쉽게도 벌써 끝났소.”
“세 번의 비무가 다 끝났단 말이오?”
“아니, 그건 아니고···고설 스님을 이기는 걸 본 다른 무인들이 지레 겁먹고 올라오지도 않았단 말이오.”
그 사실에 남궁무진은 물론, 도인현도 딱히 놀라진 않았다.
지금 여기 있는 본선 예정자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아니, 오히려 몇몇 이들보다는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고설이다.
그런 그에게서 승리를 거머쥔 유현을 상대로 누가 싸움을 하려 들겠는가.
다만 아쉬울 뿐이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더 보지 못한 것이.
덜커덩.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도인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무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시오, 도 소협?”
“가봐야 할 것 같소.”
“어디로 말이오?”
벗어둔 겉옷을 다시 입은 도인현의 눈에는 참을 수 없는 호승심이 차올라 있었다.
거기엔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유현의 창과 맞선 고설과, 그것을 본 남궁무진에 향한 부러움도 함께 있었다.
“유 소협에게.”
*****
“네, 죄송합니다, 네, 이 부분은 다음에 얘기하죠.”
“하지만, 유 소협···.”
쿵!
갑자기 내 방으로 들이닥친 도인현과 남궁무진을 밖으로 내보낸 뒤, 일부러 세게 문을 닫았다.
이 정도라면 내가 누구도 들여보내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겠지.
[왜? 조금 대화상대라도 해주지? 둘 다 잔뜩 기대한 얼굴로 들어온 것 같던데.]
“내가 그럴 겨를이 있어 보여? 지금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평상시였다면 후대에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로 성장할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겠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이제 봉화를 피워 올렸으니, 거기에 답신하는 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지. ···다른 사람이 있다면 알리기도 힘들 것 아냐.”
이미 나는 소림사 무승을 쓰러뜨림으로써 내가 여기 있소! 하고 신승에게 내 존재를 알렸다.
만약 내가 그가 원하던 수준을 만족했다면 분명히 그가 내게 먼저 접촉해올 터.
하지만 내게도 본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조용히 내공만 보내온 신승이 다른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다가올 린 만무했다.
[뭐, 네 행동이 일리는 있다만···괜찮겠냐? 너무 오래 사람을 피하면 저 녀석들도 의심할 텐데?]
“그럼 아까 못 썼던 변명을 여기서 써야지.”
[변명···설마 내상 말이야?]
이마에 인상을 잔뜩 쓴 화순이 언짢은 듯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어차피 본선은 오늘을 제외하면 육일 뒤부터 진행될 테니, 그동안 내상을 좀 치유한다고 하면 크게 의심받진 않겠지.”
[쳇, 천마의 권능이 있는 놈은 내상은 무슨···.]
이 녀석, 왠지 인상을 쓴다 했더니 그 때문이었나.
“어차피 변명이잖아. 이런 건 거짓말을 좀 섞어줘야 하는 법이라고.”
[그게 아니면 이미 화나서 소리 지르고 난리 났어.]
말로는 괜찮다 하면서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날아다니는 화순.
이 녀석은 다른 건 다 괜찮아하면서도, 권능과 조금이라도 관련됐다 싶으면 성격이 바뀐단 말이지.
[대신 확실히 성공시키라고. 그 잘난 계획.]
“걱정하지마.”
녀석의 일그러진 얼굴조차도 압도할 만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시킬 테니까.”
*****
같은 시각. 무림 맹주실.
“아니, 대체 왜 안 된다는 건가?”
신승은 답답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검성을 닦달했다.
“내가 뭐 대단한 문파의 제자를 내놓으라 했나? 그냥 평범한 상인 가문의 자식을 데리고···.”
“그래, 자네 말대로 평범한 상인 가문이지.”
사실 섬서의 유가장은 절대 ‘평범한’ 상인 가문 따위로 치부할 순 없었지만, 두 사람은 평생 무림에서만 살아온 무림인이자, 이미 속세와 연관도 없는 도사와 중이다.
그들에겐 길거리의 접시 장사꾼이나, 유가장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였단 소리다.
그럼 왜 이토록 검성이 신승의 의견을 반대한 것일까?
“그것도 무림맹이랑 전혀 연관 없는 상인 집안이지.”
바로 유현이 정말 무림맹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림맹 내부의 인원을 차출하는 것도 해당 문파는 물론 타 문파와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전혀 상관없는 외부의 인물을, 그것도 자네가 원하니까 들이자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으음···그래도···.”
“그리고···정말 그가 맞긴 맞나?”
“으응?”
갑작스러운 검성의 질문에 신승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물론 무명의 무인이 소림사의 무승에게 승리를 거둔 일이 몇 번 없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달리 말하자면, 또 몇 번은 있었다는 소리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검성이나 신승이 현역일 때도 그런 적이 두 번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본선 예정자인 후기지수들과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었네. 아니, 오히려 수준을 논하자면 본선 예정자가 한, 두 수 더 앞서가는 경우가 많았지.”
거기까지 말한 검성은 입술을 삐죽 내민 신승을 직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자네는 그라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
질문을 꺼낸 검성은 잠시 있다가, 인상을 쓰며 또 다른 질문을 덧붙였다.
“···설마 또 내공을 보낸 건 아니지?”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송장 치울 일 있어?!”
“그건 다행이군. 만약 그랬다면, 이번엔 진짜 생사결이였네.”
거짓 한 점 없이 진심만이 담긴 검성의 목소리에 신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해보길 잘했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신승에게 검성이 되물었다.
“그럼 왜 그라고 확신하고 있는 건가?”
검성의 질문에 신승은 인상을 쓰며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감?’이란 답을 내놓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친우가 칼을 꺼내 들고 자신의 목을 향해 찔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답을 꺼내기도 힘들었다.
정말로 천안통(天眼通)이라도 얻은 듯, 그가 승리하는 순간 ‘분명히 이 녀석이다!’하고 깨달은 거니까.
“사실 자네가 만족할 만큼 확신은 없네.”
“그렇다면, 이번 요청은···.”
“하지만!”
쿵!
신승은 검성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탁자를 내려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확실한 증거를 보이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건 또 무슨 소린가?”
“16강.”
신승은 검성과 눈을 마주쳤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확신이 담긴 눈빛.
설사 검성의 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굳건한 믿음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 올라간다면, 그가 내가 시험해 본 그라는 게 분명해지겠지.”
“16강이라···그렇다면 차라리 우승은 어떤가? 자네 말대로라면 우승도 충분히 가능할 듯한데 말이야.”
“그건 안 될 말이지. 그랬다간 놈을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질 테니까.”
지금 신승이 원하는 건 정파에서 내세울 수 있는 영웅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요동치는 천기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
그것이 바로 신승이 원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 조건이라면 자네도 만족하겠는가?”
신승의 말에 검성은 바로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6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신승을 만나왔던 검성이지만, 그가 이토록 누군가를 바라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포기하는 걸 자주 봤지.
그는 마치 성불만을 바란다는 듯 천하만사와 연관되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얼마 전부터 갑자기 천기가 뒤틀린다고 말하더니, 언제부턴가 후기지수들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늙어서야 정파 무림을 위해 지금껏 받아왔던 걸 돌려주려는 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후기지수들을 시험해볼 게 아니라, 자신의 심득을 소림의 제자들에게 밝히고 가는 편이 훨씬 도움 되었으니까.
그럼 이 친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뭘까.
60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우의 진심을 알 수 없었던 검성은 결국 그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욕구에 패배하고 말았다.
“알겠네. 16강. 자네가 말한 그 아이가 거기까지 올라가면 만남을 허락하지.”
“좋아. 16강에 들어가기 전까진 보지도 않지.”
“그리고 그가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땐 깔끔하게 포기하게. 억지로 무력이나 명성을 내세우려 하지 말고.”
“그것도 받아들이지.”
좋아, 이 정도라면 욕심을 부린 것에 대한 속죄는 어느 정도 되겠지.
검성은 그리 생각하며, 자신의 앞에 있던 차를 호로록 삼켰···.
“윽!”
다 식어서 쓰고 떫은 맛만 가득했다.
딱 지금의 검성 심정처럼.
*****
곧 신승이 찾아올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용봉대전 예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되는 순간까지도 신승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이보다 더 높은 경지의 사람이다, 이 뜻이겠지.”
심상 수련 중 이 상황에 대하여 화순에게 묻자 나온 대답이었다.
역시 신승···이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더 보여주면 될 일이지.
그런 마음가짐으로 올라간 용봉대전 본선 첫 번째 대결.
광서성에서 유명한 낭인, 이라는 건 대충 들었지만 크게 인상에 남진 않았다.
회귀 전에도 딱히 들어본 적 없던 걸 보면 중요한 인물은 아니겠지.
그리고 결과 역시 예상대로였다.
단 삼 초식.
그것만으로 그는 먼저 패배를 시인하고 내려갔다.
64강에서 만난 상대는 조금 더 강했다. 자신을 호남성 100대 고수 중 하나라 하던가.
하지만 그 역시 회귀 전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 걸로 봐선···.
“내, 내가 졌소.”
역시나.
십 초를 넘어가기도 전에 무기를 내려놓는 그를 보며 나도 무기를 거두었다.
32강의 상대는 나도 제대로 이름을 들어 본 상대였다.
회귀 전은 물론, 회귀 후에도 말이다.
“설마 유현 공자께서 본선까지 오를 실력자일 줄 몰랐습니다.”
“아뇨,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 운도 이 정도라면 실력으로 봐야겠지요. 물론···.”
챙!
“어느 쪽이건, 그것도 여기서 끝이겠지만요.”
“···그거 기대되는군요.”
점창파의 본선 예정자, 십분쾌룡 풍천.
눈 깜짝할 새에 상대를 열 조각으로 나눈다고 하여 그런 별호를 얻게 된 그의 성명 절기는 바로 점창파의 사일검법.
이름대로 무척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지만.
“크윽···!”
그것도 어디까지나 무공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근력과 내공이 뒷받침되고 나서야 진짜 힘을 발휘하는 법.
“더 하시겠소?”
“아니···나의 패배요···.”
그런 점에서 그의 쾌검은 도인현의 것보다도 못했다.
괜히 미래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순간 실감했다.
또한 내가 무공을 단련하는 방법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지.
“하하! 16강 출전, 축하드립니다, 유 소협.”
“이제 저희와 맞붙게 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감사합니다.”
내 앞 경기에서 이미 16강 출전을 확정받았던 두 사람의 축하를 들으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두 사람 다 내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모양새였다.
도인현이야 그렇다 쳐도, 남궁무진은 내가 싸우는 걸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아는 거지?
···어디서 내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했나?
나를 인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나오면 좀 찝찝한데.
그리고 두 사람 다 그 기대하는 눈빛은···어휴.
순간 신승이고 뭐고, 도망쳐 버릴까 하고 고민하게까지 만들 지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가 나갈 때와는 달라진 모습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이건···.”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장의 서찰.
누가 봐도 수상쩍고, 누가 봐도 위험함이 가득했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이 누가 보낸 것인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서찰 앞에 적힌 한 줄의 단어로 확신으로 바뀌었다.
신승 발(發).
신승이 드디어 대면을 허락한 것이다.
< 용봉대전(3)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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