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림맹(1) >
“소식 들으셨습니까?”
용봉대전이 열릴 거라는 소문이 돈 다음 날.
도인현은 아침나절부터 내 방으로 찾아와 그 말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최근 일주일간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자주 나눴기 때문일까.
그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이제는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도 소협이 이렇게 찾아오실만한 일이라면···역시 용봉대전입니까?”
“역시, 소식을 들으셨군요.”
“지금 섬서. 아니, 전 중원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하니까요. 어제도 시종들이 그 이야기로 시끌시끌하더군요.”
평상시 무림의 이야기에 큰 관심이 없던 이들이라도 용봉대전에는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는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겠죠.”
“하하하! 말씀대로입니다.”
내 말에 도인현은 유쾌한 듯 큰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쪼르륵.
탁자 위에 있던 차를 따라 한 모금 삼킨 도인현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로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땐 그들과 다를 바 없이 흥분해 버렸습니다. 참, 기껏 쌓은 정신수양이 다 무색하더군요.”
“도 소협께선 도사인 동시에 무림인이 아닙니까. 무림인에게 이토록 가슴 떨리게 만드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하, 유 소협께서 오히려 저보다 더 도사다우십니다그려. 그래도 그 한 마디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요.”
진심으로 안도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는 도인현을 바라보며 그처럼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뭐,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화산파 내에서는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다른 곳에서도 먹힐지 궁금하겠지.
도사보다는 무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그에게 이번 용봉대전은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었으니까.
그런데 기분 참 싱숭생숭하네.
[그러게. 거기서 우승할 놈이 이렇게 벌벌 떨고 있다니.]
벌벌 떠는 건 아니지, 벌벌 떠는 건.
저건 그냥···으음···뭐, 흥분해서 떠는 것도 떠는 건 맞으니 그렇다 치자.
나는 화순의 말에 대꾸하며 탁자 아래서 떨고 있는 도인현의 다리를 힐끔 쳐다봤다.
본래 지금보다 2년은 뒤에 열릴 용봉대전의 우승자가 이렇게 떠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지.
화산의 검은 강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인현은 용봉대전에서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랐고, 결승에선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무현을 꺾고 우승자가 받는다는 승천검(昇天劍)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화산 제일의 후기지수는 천하제일의 후기지수가 되었고, 화산검선의 눈에 띄어 그의 진전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이 사람 진짜 어마어마한 사람이었구만.
일주일간 이 사람과 차나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10년 내로 천하에 위명을 떨칠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도 소협은 용봉대전에 나가십니까?”
“아, 네. 안 그래도 어제 본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에게 좋은 경험이 될 터니, 사제들을 이끌고 한 번 가보라고요.”
역시 그렇겠지.
도인현이 후기지수 중에서도 손꼽히게 강하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은 역시 화산파일 테니까.
도인현은 물론 그를 길러낸 문파의 이름을 높일 기회를 화산파에서 버릴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위선타파라는 괴한의 일로 세상이 흉흉한 이때 무림맹에서 참으로 좋은 결정을 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비꼼은 담겨 있었지만,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렇지. 덕분에 우리가 가서 무림맹을 파악할 수 있게 됐으니까.]
가서 정확히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진 깜깜했지만, 최소한 가보지 않는 것보단 나을 터.
어차피 덮어질 사건이라면, 이런 기회라도 챙기는 편이 좋았다.
“네, 일주일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화산파에서 내려온 것이니까요.”
···일주일 전에 그런 말을 나눴나? 그런데 왜 내 기억엔 없지?
[네가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에 말했으니까 그렇지. 너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느라 바빴잖아.]
아, 그랬구나.
화순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차피 사건을 파악하는 건 공동파가 다 하고, 명목상으로나마 다수의 문파가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내려왔다고 했던가.
“그래서 용봉대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화산파에서 바로 허락을 한 것이군요.”
“네, 어차피 그 사건은 공동파의 동도들이 모두 처리할 테니, 본 파에서도 경험이나 쌓을 겸 다녀오라고 하던 거니까요. 어차피 하는 일도 없이 옆에서 구경만 하는 것보단 이쪽이 제 마음에도 들고요.”
이게 당연한 반응이겠지.
어차피 그들이 신창양가로 가봐야 조사를 하는 건 공동파 뿐일 테니까.
기껏 임무를 받아 화산파를 내려온 도인현에겐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할 것이다.
곁가지 세 사람이야 애초에 절보단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도 소협 일행은 모두 무림맹으로 떠나는 겁니까?”
“아뇨, 원래 계획은 그랬지만···음···.”
내 질문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내 눈치만 보는 도인현.
입을 열려다 다시 닫기를 반복하는 그를 보며 대충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제 두 동생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어흠, 네. 그렇습니다.”
내 말에 도인현은 헛기침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은 최소 예전처럼 팔을 움직이려면 최소 일 년 이상의 요양이 필요하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께서 외출 엄금을 명하셨으니까요.”
“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을 제외한 남은 일행끼리 가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난처함이 가득한 도인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실수는 민 씨가 빌었던 것도 있고, 화산파에 3년간 보내서 정신수양 겸 무공 수련을 하는 거로 어느 정도 상쇄가 되었지만, 이번 실수는 아버지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심지어 그 실수도 전에 했던 실수와 하나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놈들은 다른 시종한테는 겉으로나마 잘 해주면서 왜 기정이한테만 이 지랄이지?
[왜긴 왜야, 네 시종이니까 그렇지.]
···하긴, 갑자기 내가 정신 차리면서 자기들 자리가 위태로워졌으니, 전과 같은 내숭은 못 부리겠지.
덕분에 유환이 그놈은 애가 타겠네.
도인현을 여기 데려온 이유도 인맥 만들려고 그랬을 텐데, 그게 전부 허사가 되었으니.
그것 때문에 울분이 터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뭔가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도 정말 여러모로 변태야. 알지?]
쉿, 조용히, 이 자식아.
“그래서 말인데···혹시 저희와 무림맹에 같이 가시겠습니까?”
“네? 저 말씀입니까?”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도인현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라 그를 바라봤다.
“네. 유 소협께서 이야기하시는 걸 들어보니, 아무래도 용봉대전에 관심이 있으신 듯해서 말입니다. 혹시 제가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서 놀라신 거라면···.”
“아, 아뇨. 아닙니다. 저도 마교에 맞서 무림을 수호하는 무림맹의 위용을 직접 식견 하고 싶었던 참입니다.”
내가 놀랐던 건 그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내 심정을 알아차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설마 이 도사님에게 내 심경이 읽힐 줄이야.
일주일간 너무 편하게 대화를 나눴던 모양이다.
“아, 그럼 같이 가시는 겁니까?”
“네, 어차피 최근 크게 할 일도 없으니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할 일을 거의 없애놨다는 게 맞는 말이지만.
도인현과 처음 대화를 나눴던 그때부터 용봉대전이 열릴 걸 직감하고 물밀 듯 밀려오는 표행 의뢰 중 나 없이 기정이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일로 가려서 받고 있었다.
아직 무공을 가진 표사는 모집하지 못했지만, 짐을 옮겨나를 쟁자수는 충분히 구해놨으니까, 혼자서도 할 수 있겠지.
그나마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두 놈 중 한 놈은 의실에서 최소 일 년은 요양해야 할 병자가 되었고, 다른 한 놈도 내가 다녀올 때까진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하, 다행이군요. 혹시 거절하시면 어쩌나, 가슴 졸이고 있었습니다.”
“아뇨, 제의를 해주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제가 먼저 함께 가시겠냐고 여쭤볼 생각이었습니다.”
용봉대전의 우승자와 친해져서 나쁠 일은 전혀 없을 테니 말이야.
한점의 거짓도 없는 말에 도인현은 입가에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말씀만으로도 기쁘군요. 그럼 내일 묘시정(卯時正; 오전 6시)에 출발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럼 준비를 끝내고 그때 정문 앞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미래의 우승자를 일행으로 한 여행이라···그것도 괜찮은 경험이겠지.
잔에 남아있던 차를 모두 비운 나도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기정이에게 내가 없는 동안 할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으니 말이다.
*****
그렇게 다음날부터 시작된 여행은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저···대사형에게 듣기론 북해 국경부대에서 종군하셨다던데 정말입니까?”
일행 중 가장 어린 제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3년 동안 거기서 종군을 하다 전역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
이미 통성명을 마쳤기에 나는 편하게 대답했다.
“그럼 북해의 고수들도 직접 보셨습니까?”
“보기만 했을까. 직접 칼과 창을 맞대고 싸우기도 했는걸.”
오오오, 내 대답에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제자는 물론 옆에서 듣고 있던 일남일녀도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그, 그럼 정말로 북해의 전사 모두가 무공을 익히나요?”
“물론이지. 그들에겐 무공은 곧 삶이거든.”
북해의 전사들이 명의 병사보다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병사로 태어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꿈이 병사일 순 있지만, 그렇다 해도 태어나자마자 싸움을 배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북해의 전사는 태어날 때부터 전사다.
“혹한의 땅에서 태어난 그들은 무공이 없으면 무엇도 할 수 없지.”
“아아, 그렇군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사람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세 사람은 내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사회경험이라 해봐야 화산파에서 3년간 수련한 것 말곤 없는 도련님과 아가씨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북해의 이야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명나라 군인들의 삶부터 북해의 고수. 심지어 내 첫 표행에 관한 이야기까지.
처음에는 나를 무서워하던 세 사람도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다 보니 금방 나를 친근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우러러볼 만한 요소는 이야기뿐만이 아니었다.
짤그랑.
탁자 위에 떨어진 다섯 냥의 은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객잔 주인을 향해 말했다.
“이걸로 이 도시의 명물 요리를 배불리 먹고 싶은데, 가능한가?”
“아이고, 물론이지요! 지금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돈이라면 죽은 사람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주인장은 바로 주방 안으로 뛰어가 주방장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도인현을 포함한 네 사람이 나를 향해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유 소협 덕분에 매일 저녁을 배불리 먹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있는 사람이 남에게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내가 이 여행의 물주로서 그들이 먹고 자는 돈을 모두 내는 것도 나에 대한 경계를 낮추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물주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속가제자 세 사람은 속칭 있는 집 자식이었고, 도인현은 중원에서 이름 높은 화산파 제일의 기재였으니까.
돈이 없을 이유라곤 하나도 없는 이들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돈을 한 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내 멍청한 두 동생. 유성과 유환이었다.
처음 화산을 나설 때부터 그들이 앞장서서 물주 노릇을 자처한 것이다.
그 때문에 화산파에서는 길을 떠나는 여섯 사람에게 여비 한 푼 주지 않았고, 그것은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나마 돈을 챙겨온 내가 그들의 물주가 된 것이다.
그럼 내게 손해뿐인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보름 남짓밖에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거니와, 돈이라면 공주님을 치료하면서 받은 게 아직 한참 남아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내가 지금 먹여주고, 재워주는 이들이 누군가.
세 사람은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가문의 장남과 장녀고, 도인현은 화산파 제일의 기대주다.
누구라도 은혜를 입히고 싶어서 안달 난 인물들이란 소리다.
그리고 그건 두 동생 놈들도 마찬가지고.
아마 처음부터 물주 노릇을 자처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놈들이 기껏 짠 계획이 무색하게 그 모든 이득이 내게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즉, 죽 쒀서 개 준 꼴이 됐다, 이 말이지.
그렇게 나에 대한 네 사람의 호감이 두 동생 놈을 넘어설 때쯤.
“다 왔습니다.”
우리는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정파 무림의 심장.”
회귀 전 나와 사형제를 죽였던 진짜 범인이 있는 곳.
“무림맹입니다.”
무림맹에.
< 무림맹(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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