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표국(4) >
“위, 위선타파!”
중년인이 내 말에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전 두 사람의 대화 주제이자, 자신들에게 닥친 심대한 위협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겠지.
그에 반해 옆에 있는 청년의 대응은 그보다 조금 더 빠르며, 극단적이었다.
챙!
청년은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그대로 나를 향해 내려쳤다.
쾌속하고, 날카로운 일격.
기습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이만한 반응을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헤쳐온 수라장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쩡!
“뭇?!”
하지만 내가 헤쳐나온 수라장은 그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곳이었다.
불파를 두른 손으로 청년의 검을 막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공의 경지는 마멸검보다 조금 못한 수준.
그런 그의 검이 절정의 고수도 뚫지 못한 불파를 뚫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청년의 눈에는, 내가 무슨 괴이한 사술을 쓴 것처럼 보였을 터.
아무리 많은 수라장을 거쳐왔다고 해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선 그 누구라도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찰나의 방심.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컥!”
그대로 놈의 멱살을 잡아 온 힘을 다해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 바닥과 그 위로 고이는 피.
맥을 잡아볼 필요도 없는 즉사였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중년인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가만히 서 있던 청년이 어느새 바닥에 꽂힌 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내가 바라던 상황도 딱 이런 상황이었다.
강한 무력을 지닌 아군이 한순간에 당하고, 정보를 손에 쥔 자가 혼란스러워하는 이때.
이때가 정보요원이 가장 정보를 캐내기 쉬운 순간이니 말이다.
“네놈.”
“히익! 네, 네!”
“일어나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벌떡 일어서는 중년인.
“네가 칠성권문의 장문인 정선명이 맞나?”
“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정선명입니다!”
“외부에서 들여온 열두 명의 제자를 이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도 맞나?”
“네! 모두 제가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짜 정보요원 맞아?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강철같은 정신력을 바란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쉽잖아.
혹시 함정 아니야?
내 궁금증에 대한 답은 잠시 뒤, 그에게서 튀어나왔다.
“누우라면 눕고, 기라면 기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시옵소서.”
“···그게 무슨 소리지?”
“정철이 그놈의 목숨을 거두신 게 위선타파 어르신 아닙니까?”
“정철? 신창양가의 장문인을 말하는 거냐?”
“예, 그놈, 그 싹수없는 그놈 말입니다!”
싹수없는 그놈···이라. 이걸로 둘 사이가 대충 어떤지 알겠다.
“제발! 저한텐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자식. 그리고 여든 먹은 여동생과 아직 어린 노모가 저만 보고 있습니다! 제발!!!”
···그리고 이 인간이 왜 그런 취급을 받은 지도.
토끼 같은 아내에 여우 같은 자식. 거기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동생에 어린 어머니?
명색이 정보요원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횡설수설 말하는데, 어떻게 비교가 안 될까.
물론 신창양가의 장문인 그 인간이 좋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능력은 있었다.
그에 비해 이 사람은···에휴.
같은 정보요원의 눈으로 봐도 한심스러운 인간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네 일은 잘 해결될 것 같은데?]
그래, 그게 유일한 위안거리지.
“난 그놈은 모른다. 그놈을 처리한 건 다른 놈이니.”
“다른 놈이라니···두 분이 같은 위선타파 어르신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우리는 단수가 아니다. 정파의 위선에 분노한 이들이 합심하여 만든 존재일 뿐.”
스윽.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복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복면 안에 있는 건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그런 신념이다. 알겠나?”
“네, 네! 알겠습니다! 네!”
내 말에 중년인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게, 무슨 마교 광신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옆에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화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와···이걸 믿네.]
···그러게.
[야, 그냥 너는 마교 가서 천마 해라. 저 인간 눈깔이 아주 그냥···어우···.]
광신도라면 질리도록 봐왔을 화순까지 고개를 돌려버리게 만들다니.
오히려 이 정도면 이 인간이 대단한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뜩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내 할 일은 해야겠지.
“내가 필요한 건 정보다. 그것만 준다면.”
툭툭. 이미 싸늘하게 식은 청년 검사를 발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이 인간의 꼴은 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지.”
“아이고,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중년인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닌 걸 내게 보여주려는 속셈인지, 손수 비밀 보관함을 열어 그 안에 있는 걸 모두 내게 건네주었다.
저번에 봤던 것보단 훨씬 얇은 종이 뭉치와 훨씬 큰 돈주머니.
그 두 가지만으로도 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정보는 이게 단가?”
“네. 저희 쪽에는 여기 맡겨놓을 사람들에 관한 신상명세 말곤 보관된 정보가 없거든요. 대신···.”
스윽.
그는 웃는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비밀 보관함 안에 있던 것보다도 더 크고, 묵직한 주머니.
“···이건 뭐지?”
“저희한테 저놈들을 맡겨 둔 가문에 서찰 한 장 보내주면, 그래도 몇 푼씩은 보내주지요. 이건 그걸 모은 주머니입니다.”
“즉, 작전 외 수익이란 소리군?”
“헤헤, 그렇습죠. 혹시 몰라서 한 푼, 두 푼 모아둔 것인데, 저 같은 놈보단 진짜 협객분들이 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디 받아주시지요.”
“···그래, 이건 잘 쓰도록 하지.”
내가 품 안으로 주머니를 넣자, 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마 이걸로 자신이 살 수 있을 확률이 늘어났다, 그리 생각한 것이겠지.
사실 이런 게 없어도 난 약속대로 그를 살려주려고 했다.
일부러 내가 손에 피를 더 묻힐 필요도 없이, 그는 본부로 복귀하는 그 순간 고문을 동반한 정보 캐내기 끝에 목숨을 잃을 테니까.
나를 신창양가에서 나타났던 위선타파와 다른 사람이라고 속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를 일개 개인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제3의 집단으로 생각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가 신창양가를 박살 낼 때부터 이미 무림맹에선 이미 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얻기 힘들 것이다.
제대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끄나풀 두 사람은 이미 내 손에 목숨을 잃었고, 신창양가의 제자들도 이미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을 추궁해서 정보를 얻을 순 있겠지만, 그렇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기억하긴 힘들 터.
그만큼 헷갈리는 정보도 많고, 잘못된 정보도 많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어느 집단에 소속된 자라는 정보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흔적을 쫓는 동시에 존재하지도 않는 집단 역시 같이 쫓기 시작하겠지.
그거면 충분하다.
나를 향한 추적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이 정도 거짓말이야 얼마든지 내뱉어줄 수 있었다.
주머니 두 개를 모두 품 안에 넣은 나는 그에게 받은 종이를 바라봤다.
신창양가에서 봤던 암호와는 확연히 다른 암호.
이 역시 지금 무림맹에서 1급 암호로 사용되고 있는 암호 중 하나였다.
“어이. 이 암호는 뭐지? 해독해라.”
“네? 해, 해독을 못 하십니까?”
“우리라고 무림맹의 모든 암호를 아는 건 아니다. 무림맹 내부에 있는 정과 협을 품고 있는 친우들의 도움으로 몇 개는 알 수 있었지만, 그들도 모르는 건 모르지.”
“아, 알겠습니다. 바로 해독해드립죠.”
공손하게 종이를 받아간 중년인은 바로 탁자 위에 그것들을 올려놓고 하나하나 해독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저 암호는 알고 있다.
아니, 저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무림맹에서 쓰고 있는 거의 모든 암호를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것을 모르는 척 그에게 해독하라며 넘겼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이 암호를 안다는 사실을 놈들이 알 수 없길 바랐으니까.
내가 신창양가에서 암호를 알아보자, 단 한 달 만에 다른 암호로 바꾸는 놈들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이 암호를 똑같이 순식간에 해독했다는 게 알려지면 또 다른 암호로 바뀔 것은 당연지사.
만약 그 암호가 내가 아는 암호가 아니라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걸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아는 정보를 최대한 숨기는 것에 주력해야 했다.
저번 같은 경우에야 놈이 하도 대쪽같아서 암호해독 방법 같은 걸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 이 인간은···내가 명령하는 건 죽으라는 것만 빼면 뭐든 다 할 것 같으니까.
“여기, 해독이 다 끝났습니다.”
“음, 좋군.”
해독이 다 끝난 종이를 받아 들고선, 아까 읽었던 종이와 다른 것이 있는지 곁눈 짓으로 확인했다.
좋아, 없군. 제대로 해독했어.
“여기에 거짓은 없겠지?”
“물론입죠! 정보라 할 것도 없는 신상명세뿐인데, 이걸로 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믿어주십시오.”
“좋아. 믿지. 다른 건 없나?”
“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모두 드렸습니다.”
중년인은 내 말에 다시 한번 웃으며 손을 비볐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설사 여기에 정보가 더 있다고 해도 신창양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겠지.
“그럼, 이제 그만 떠나라.”
“네?”
“이곳은 곧 피바람이 불 터. 거기서 가만히 있다가 혈사의 범인으로 오해받는 걸 원하는 건 아닐 테지?”
“무, 물론입지요! 지금, 지금 바로 떠나겠습니다!”
우당탕탕! 중년인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더니, 겉옷만 겨우 갖춰 입고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거, 참. 도망치는 속도는 신창양가의 그놈보다도 더한데?]
저런 놈도 자기 목숨 귀한 줄은 알겠지.
파라락.
화순에게 대답하며 중년인이 넘겨준 정보를 읽어내려갔다.
[이쪽엔 몇 명이나 보내냐?]
딱 두 명. 이놈들은 마교가 아니라 녹림으로 보내는 거로 되어있네.
[이야, 녹림으로도 보내냐? 아주 꼼꼼하게 써먹네그려.]
그러게 말이야.
콰직.
진실을 밝히는 데 사용할 두 명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제외한 나머지 종이를 꽉 쥔 채 힘을 주자.
화르륵!
뜨거운 열기가 내 손에서 일렁거리더니, 그대로 종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삼매진화(三昧眞火).
2갑자의 내공을 얻으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된 잔재주 중 하나였다.
종이가 천천히 타오르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거의 꺼지기 직전에 이르자 그것을 시체 위로 던져버렸다.
태울 것을 다 태워 꺼질락 말락 하던 불길은 새로운 태울 것이 생기자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 불길이라면 이 각(30분)이면 장문인실 전체를 태울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일을 처리하기엔 충분했다.
촤륵.
아까 중년인에게 받은 주머니에서 50냥씩 꺼내 아까 남겨놓은 종이에 잘 감쌌다.
이 정도라면 어딘가로 떠나서 정착할 정도는 되겠지.
제자들의 숙소는 장문인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불길이 번질 걱정은 없었다.
할 일을 모두 끝낸 장문인실에서 나와 바로 숙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내 정체를 가능한 숨길 생각이었다.
내 모습과 목소리를 보이면 내가 들킬 확률이 높아질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장문인실이 멀었던 덕분에 제자 중 잠에서 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 고향으로 돌아갈 열 명의 제자에겐 10냥씩, 나머지 두 명에겐 아까 잘 싸놓은 종이를 하나씩 머리맡에 올려놓고 조용히 칠성권문을 빠져나왔다.
“부, 불이다! 불이야!”
내가 빠져나오기 무섭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제자 중 밤눈이 밝은 자가 불길에 눈이 뜬 모양이었다.
[아슬아슬했네.]
그러게 말이야.
화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복면을 벗은 채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반 시진.
그만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객잔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스윽.
“후우···.”
침상에 앉아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 던지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순, 나 어땠냐? 안 어색했지?”
[괜찮던데? 나도 까딱 속아 넘어갈 뻔했어.]
“크크크, 칭찬 고맙다.”
오랜만의 첩보 임무라 긴장했는데,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모양이다.
신창양가에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그곳과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는 문파는 전국에 최소 15개.
그리고 거기에 소속된 제자들은 300명을 넘었다.
그들을 모두 구하겠다, 같이 성자의 마음가짐으로 이 일에 시작한 건 물론 아니다.
그저 회귀 전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작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
아버지에게서 의뢰를 받을 때 제일 먼 곳으로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고 그곳을 전부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럼 내일은 또 여행인가. 이것도 꽤 재밌네. 매일 연공실에만 처박혀 있는 천마들 보는 것보단 좋아.]
“그래,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내일의 여행을 기대하는 화순에게 웃으며 대답한 뒤, 침상 위로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화순.”
[왜?]
“오늘은 조금 더 강한 천마로 부탁해.”
[···하아, 그래. 알았다.]
내 말에 바로 들뜨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화순.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미안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지금 내가 상대하려 하는 적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었으니까.
눈을 감고 조용히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싸움을 경험하여, 더욱더 강해지기 위해서.
*****
처음 여행을 떠날 때의 긴장이 무색하게, 우리의 표행은 너무나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돈과 무력. 둘 중 하나만 있어도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요소를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밝힐 수 없었던 표행의 진짜 이유에 관해서도 똑같이 잘 진행되었다.
복건성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녹림의 산채들은 대부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대부분의 표국도 똑같은 계약을 맺고 있거니와, 여행 중반쯤부터는 내 이름이 그들에게 알려졌는지 내가 제안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짐에 침을 흘린 산적 놈들은 모두 때려눕혀서 관에 넘겨버렸다.
객잔과의 계약도 비슷한 처지였다.
계약금 명목으로 돈이 좀 많이 들긴 했지만, 표행을 하면서 들어오는 돈도 두둑했기에 내 주머니에서 직접 돈이 빠져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이유도 잘 진행되었다.
물론 들리는 도시마다 모든 문파를 처리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놈들이 내 위치를 특징지을 수도 있었으니까.
애초에 거기 있던 모든 문파를 털 생각도 처음부터 없었다 나를 잡으려고 그들이 함정을 팔 수도 있거니와, 어느 정도 그들의 ‘사업’을 방해하다 보면 결국 포기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예상이 10할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에게 이런 짓을 계속했다간 손해만 볼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할 순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행 한 달 하고도 보름째.
총 12개의 녹림채와 통행 계약을 맺고, 27개의 객잔과 할인 계약을 맺고, 8개의 문파를 털어버린 끝에.
“드디어 도착했네요.”
“그래, 고생 많았다.”
우리는 복건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복건성에 있는 가문 내 상단의 지부에 찾아가자, 이미 연락을 받은 지부장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큰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복건성 지부장. 여기 수령 증명서입니다.”
내가 건넨 두 장의 종이에 모두 도장을 찍은 지부장은 그중 한 장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45일 동안의 표행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런데 정말 한 달 보름 만에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놈이 힘이 좋아서 말입니다. 덕분에 매일 강행군을 해도 말 한 번 바꿀 필요도 없었죠.”
툭툭. 나는 우리가 타고 온 말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호오, 이런 작은 노새 같은 녀석이 말입니까?”
“겉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힘이나 체력은 지금껏 봤던 어떤 말보다도 대단한 놈입니다.”
“허허, 다른 사람 말이라면 믿지 못하겠지만, 그 증거를 이리 보여주셨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군요.”
지부장은 대단한 말이구나, 하고 말을 향해 칭찬의 손길을 뻗었다.
다른 사람의 손길은 그리 반기지 않는 녀석도, 자신을 칭찬하는 건 알아듣는지 의외로 내빼지 않고 그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음 저 녀석을 잡았을 때도 저리 순했으면 그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아, 참. 제가 부탁한 물건은 준비되어있습니까?”
내 질문에 지부장은 바로 말과 놀던 것을 멈추고, 뒤에 있던 시비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커다란 통을 지부장에게 건넸다.
“네, 물론이죠. 여기 최고급 철관음(鐵觀音)입니다.”
지부장이 건넨 통의 뚜껑을 열자, 향긋한 우롱차 향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과연 봄 철관음이 제일이라 하더니, 그 말 그대로구나.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덕분에 아버지께 드릴 좋은 선물을 가져가는군요.”
“허허허, 뭘요.”
내 말에 기분 좋게 웃던 지부장이 무언가 생각난 듯 내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본가 소식 들으셨습니까?”
“네? 본가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갑자기 나온 본가의 이야기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기정이도 가까이 다가왔다.
“아···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이번에 돌아오신다던 소문이 있어서 여쭤보려 했는데 말입니다.”
“돌아오다니, 누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의 얼굴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군가‘들’이라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런 슬픈 예감은.
“둘째 도련님과 셋째 도련님이 화산파에서 가문으로 곧 돌아오신다고 하더군요.”
틀린 적이 없었다.
< 현정표국(4) > 끝
ⓒ 거믄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