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으로 >
유가장의 아침은 빠르다.
많은 이들이 아직 잠들어있을 동틀 무렵부터 사람들은 숙소에서 나와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건 분명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것에 불만을 품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자는 없었다.
“일은 모두 잘 되고 있는가?”
“아! 총관 어르신! 어서 오십시오!”
사실상 유가장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총관부터가 솔선수범하여 일을 하는데 감히 누가 불만을 품겠는가.
물론 총관이 그저 돈 버는 것에만 혈안인 무능한 상사였다면 모두 무시했겠지만, 그는 전혀 무능하지 않았다.
“총관 어르신, 이건 어따가 갖다 놓을깝쇼?”
“그건 동쪽 5번 창고로 옮겨놓게. 점심쯤에 황금루에서 가지러 올 테니 그때 챙겨주고.”
“예이. 알겠습니다.”
머릿속에 오늘 할 일을 모두 암기하고 있는 건 물론.
“자네 괜찮나? 안색이 파리한데.”
“아···어제부터 몸이 좀 찌뿌둥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어허! 몸이 가장 귀중한 재산인 법인데, 어찌 몸을 해하며 돈을 벌려 하는가. 오늘은 일한 거로 쳐줄 테니, 얼른 의방에 가보게.”
자기 아랫사람을 누구 보다 아끼며.
“여기 이번 달 봉급일세. 일하느라 고생 많았네. 몇 푼 더 챙겨뒀으니, 딸내미 옷이라도 한 벌 사주게나.”
“아이고, 감사합니다, 총관 어르신!”
무엇보다 월봉을 두둑하게 챙겨주는 배포까지.
괜히 그 덕분에 유가장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도는 게 아니었다.
사방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총관을 보던 짐꾼이 자신과 함께 일하고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총관 어르신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시는구만. 나이도 적지 않게 드셨는데 참으로 정정하기도 하셔.”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최근 들어서 뭔가 더 힘이 넘치시는 것 같지 않나?”
사내의 말에 짐꾼은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봤다.
마치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 걸 혼자만 모르냐는 책망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짐꾼이 입을 열었다.
“자네 정말로 몰랐나?”
“응? 뭘 말인가?”
“총관 어르신이 힘이 넘치시는 이유 말이야. 다 저 뒤에 있는 저 녀석 덕분 아닌가.”
짐꾼은 그리 말하며 아까부터 총관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는 청년을 가리켰다.
6척이 넘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그리고 수려한 외모까지.
아가씨 여럿 울리고 다녔을 법한 잘생긴 청년은 총관의 뒤에서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적고 있었다.
“저 친구가 누군데?”
“나물 요리부에 공씨 누님 알지? 그 누님 아들내미야.”
“그 애라면···설마 첫째 도련님의?!”
“그래, 그 애야.”
짐꾼의 말에 사내는 훤칠한 청년. 신기정을 바라봤다.
3년 전 갑자기 행방불명 된 이후, 가문 내에서 첫째 도련님을 언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주나 총관이 직접 나서서 막은 건 아니지만, 모두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총관 어르신이 직접 저 아이를 거두신 거군?”
“그렇지. 전속 시종이 됐다고 좋아했을 텐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어찌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
유현이 북방 국경부대로 떠났다는 걸 아는 사람은 유가장에서도 단 세 사람뿐이었고, 그들 모두 그것을 입 밖으로 함부로 꺼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가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유현이 결국 망나니짓을 하다가 쫓겨난 거로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쌍해서 거둬준 건 알겠는데, 총관 어르신 뒤를 따르는 건 어째선가?”
“그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인데 말일세···.”
휙휙, 입을 열기 전 좌우를 살피던 짐꾼은 자신을 보는 이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사내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총관 어르신이 저 아이를 후계자로 기를 생각이신 모양이야.”
“뭣?! 후···읍! 읍읍!”
사내가 놀라 소리치려는 그때, 짐꾼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이 친구가! 내가 괜히 귀에다 대고 말한 줄 아나? 조용히 하라고 그런 것 아닌가!”
“켁, 켁···미,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그만···그런데 그거 정말 사실인가?”
헛기침을 내뱉는 사내를 한 번 째려본 짐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떨어져서 말했다.
“저번에 우연히 총관 어르신이랑 술자리를 가졌던 놈이 말하던데, 저 아이를 무척 아끼신다고 했던 모양이야. 근래에 보기 힘들 정도로 성실하고, 똘똘해서 마음에 든다고 말이야.”
“허어···그래서 저렇게 뒤를 따라다니면서 총관 어르신의 일을 배우는 거군?”
“그렇지. 덕분에 다음 총관 자리를 노리던 놈들은 다 나가리 됐다, 이거지.”
“뭐, 나는 총관 어르신만큼 우리를 잘 대해준다면 누가 되든 상관없지만, 그놈들은 닭 쫓던 개꼴이 났다는 거군.”
“그런 거지.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자, 자. 빨리 일어나게. 이걸 오늘 점심 전까지 다 옮겨야지.”
“아, 그래. 그래야지.”
다시 자신들의 일에 집중하는 짐꾼과 사내.
지금 유가장 내에선 두 사람이 하던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정작 그 당사자인 두 사람은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기정이는 영원히 유현의 전속 시종이었으니까.
아침의 일이 모두 끝나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점심을 먹기 위해 하나둘 일터에서 떠나갔다.
거기에는 물론 총관과 기정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잠깐 그를 향했다 바로 다시 식판으로 돌아갔다.
티만 내지 않을 뿐, 모두가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 한켠에 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이미 따뜻한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다.
총관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자, 그제야 기정이도 자신의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둘 다 비슷한 속도로 식사를 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무래도 소화력도 좋고, 나이도 젊은 기정이가 좀 더 많은 양을 먹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총관은 화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기정이를 바라봤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그저 주책이라 생각했던 그 말을 총관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창 그의 모습을 보고 있던 총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기정아.”
“네, 총관 어르신.”
총관의 목소리에 기정이는 움찔, 하고 몸을 떨며 젓가락을 내렸다.
거기엔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자책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총관은 그것을 탓하려 그를 부른 게 아니었다.
“오늘 일은 어떻더냐. 어렵진 않든?”
“아, 네. 일이 적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 적어놨습니다.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배울 생각입니다.”
“음. 좋은 버릇이구나. 도련님께 배웠느냐?”
“네. 그저 듣고 보는 것으로는 모두 다 기억할 수 없다. 중요하다 생각하는 건 반드시 기록해둬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기정의 말에 총관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처음 기정이를 유현에게 부탁받았을 땐, 그저 조금만 가르쳐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유현이 올 때까진 긴 시간이 걸릴 테니, 그동안 교육도 해줄 겸 말이다.
하지만 기정이는 유현의 말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영특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둘을 아는 건 물론, 그 둘을 잊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기도 했다.
그 때문에 배우는 속도는 조금 느릴진 몰라도, 한 번 가르쳐 주면 그 이후에는 잊지 않고 익혀서 왔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이젠 자신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관리원이 되어있었다.
처음 그를 맡았을 때만 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잘했구나. 아, 참. 이걸 잊을 뻔했구나.”
총관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자, 기정의 얼굴이 더없이 밝아졌다.
“도련님의 편지입니까?”
“그래. 이번에 또 보내셨더구나. 자, 받으려무나.”
“감사합니다!”
편지를 받은 기정은 잠시도 기다리기 힘든 듯 바로 거기서 봉투를 뜯어 열었다.
3년 전엔 글도 모르는 기정이였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편지를 읽을 수 있었다.
여러 장으로 이루어진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기정의 얼굴은 천변만화했다.
어쩔 땐 웃음을, 어쩔 땐 걱정을, 어쩔 땐 행복을.
여러 심정을 담아 편지를 읽던 기정의 눈이 맨 마지막으로 향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총관 어르신, 여기···?”
“그래, 읽었느냐?”
“이,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그래. 가주님과 내게 보낸 서신에도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더구나.”
마치 내일 생일을 맞이할 생각에 흥분한 손자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총관은 말했다.
“그럼 정말로?”
“그래. 곧 첫째 도련님이 돌아오실 거다.”
두 사람이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누, 누구 시라고요?”
유가장의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앞에 있는 사내에게 되물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 사내는 더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가장의 장남. 유현이 돌아왔다 알리라고.”
*****
내가 돌아온 그 날, 유가장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물론 내가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긴 했지만, 그 속내를 파고들면 조금 복잡했다.
[복잡은 무슨. 완전 폭소 거리던데?]
네 일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지마, 이 자식아. 나는 엄청 심란하다고.
···설마 세 사람 모두 내가 북방 국경지대로 떠났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줄이야.
덕분에 나는 가문 내 사용인들에게 망나니로 살다가 쫓겨나, 결국 밖에서 객사한 바보 같은 도련님···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아니, 아무도 나 혼자 잘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길거리에서 객사가 뭐야, 객사가.
[솔직히 내가 없었으면 객사할 위험을 여러 번 겪긴 했지.]
그중 팔 할은 네가 없었으면 경험하지도 않았을 위험이거든?!
하지만 지금 내게 그들의 오해를 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급한 일이 있었으니까.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그래, 어서 오거라.”
집에 오는 동안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지 생각해봤다.
울면서 절을 할까? 꽉 안아줄까? 큰 목소리로 소리칠까?
하지만 그런 예상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재회는 밋밋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녀왔다 말하고, 아버지도 웃으며 나를 반겨주실 뿐.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순간 내 마음속은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마치 어젯밤 인사를 드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만난 듯한 이 가벼움.
내가 원래 있었어야 할 장소로 돌아온 듯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래, 이것이 바로 고향이구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총관과도 아버지처럼 인사를 나누고, 기정이는···.
“도련님~!”
···내가 생각했던 세 가지를 모두 다 따라 하더라.
설마 나를 껴안은 채 울면서 큰 목소리로 도련님, 도련님 연호할 줄이야.
생각했던 대로 안 하길 정말 잘했다.
[···아직 색싯감 구해주는 건 먼 것 같다.]
그래, 그러게 말이다.
아버지의 집무실로 모인 우리 네 사람은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허어,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북해와의 전쟁부터, 대장군님. 그리고 공주마마까지···.”
“하하하!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이미 다 지나간 지금도 제가 겪었던 일이 진짜였나, 생각하곤 합니다.”
이야기가 슬슬 막바지에 이르자, 나는 짐에서 챙겨왔던 선물을 꺼냈다.
“아, 참. 여기 선물입니다.”
“선물? 네가?”
“네. 군에서 공을 세워 받은 것입니다. 처음 받았을 때부터 꼭 아버지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내 말에 아버지가 감격한 표정을 지으시며 눈가에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았다.
“허허, 유현이 네게 선물을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당신께 매일 받기만 하던 것이 죄송하여 하나 준비했던 건데 이렇게 기뻐하실 줄이야.
역시 챙겨오길 잘했다.
감싼 천을 벗기자,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불상이 그 모습을 보였다.
보통의 옥과 다르게 옅은 파란색으로 조각된 불상을 본 아버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건 청옥(靑玉)이 아니냐?”
“아시는 물건입니까?”
“허허, 네가 이 아비의 안목을 시험하나 보구나. 이런 귀한 물건을 아느냐고 묻다니.”
응? 귀한 물건이었어?
나는 그냥 공주님이 치료의 대가로 주신 물건 중 제일 괜찮아 보이는 걸 들고 온 것뿐인데.
“서역의 일부 지역에서밖에 나지 않는 귀한 보석이지. 손톱만 한 것도 그 몇 배는 되는 무게의 금과 거래되는 보석인데, 이만한 크기라면···.”
잠깐 속으로 계산을 해보던 아버지도,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셨다.
“···참으로 큰 공을 세운 모양이구나. 이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 황실밖에 없을 텐데, 이런 걸 상으로 받아오다니.”
“예, 뭐···큰 공을 세우긴 했죠.”
나는 아버지의 말에 그냥 하하 웃으며 넘어갔다.
공주와 만난 걸 넘어서, 그녀를 치료까지 했다는 말을 들으면 기절초풍하시겠지.
“자, 이건 총관님 선물입니다.”
“오, 제 것도 있습니까?”
“옛날부터 제 투정을 다 받아들여 주시던 분인데 어찌 잊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챙겨왔지요. 여기, 고려 인삼 열 뿌리입니다.”
“허어, 이 귀한 고려 인삼을 제게 주시다니.”
“제 탓에 총관님의 주름이 몇 줄은 늘어났을 테니, 그걸 조금 줄여드려야죠.”
“하하하! 그건 그렇지요. 그럼 한 뿌리도 남한테 주지 않고 제가 다 먹겠습니다.”
총관의 말에 아버지께서 그를 째려보자, 바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정말 혼자 다 먹을 건가?’
‘당연하죠, 도련님이 주신 건데.’
순간 두 사람 간의 대화가 들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두 분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도, 도련님···.”
그런 두 분을 웃으며 지켜보던 도중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잔뜩 기대한 얼굴의 기정이가 보였다.
아하, 자신은 선물이 없냐고 묻고 싶은 거구나.
“미안하지만 네 선물로 챙겨온 건 없구나.”
“아···괘, 괜찮습니다.”
괜찮긴 무슨, 바로 비에 젖은 멍멍이처럼 축 쳐져놓곤.
나는 실망으로 축 늘어진 기정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너에겐 더 좋은 걸 가지고 왔으니까.”
“네? 더 좋은 거요?”
“그래, 기정아.”
이 말을 들으면 기정이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랑 같이 일 하나 하자.”
< 집으로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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