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창양가(3) >
물론 개소리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던 놈이지만,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제갈세가의 천재도, 전 중원의 모든 천재가 모인다는 한림원도, 황실의 두뇌라는 국자감에서도 보자마자 암호를 풀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천재들이 모여서 대가리 빡세게 굴려서 만든 게 바로 이런 암호니까.
···말이 좀 험하게 들린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머리 좋은 인간들이 만든 걸 억지로 외워야 했던 입장으로선 삼일 밤낮을 욕해도 모자랄 판국이니까.
하지만 덕분에 외운 암호는 보는 순간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암호해독 능력은 발달했다.
그뿐만 아니다.
본래 암호라는 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도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집단에서 암호를 써야 한다는 소리는 그런 암호를 풀려고 노력하는 인간들도 있다는 소리니까.
그리고 그들이 암호를 푸는 방법을 밝혀내면, 그 순간 그 암호의 가치는 나락으로 추락한다.
결국 그들의 하위 집단에서나 쓰는 삼류 암호로 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암호도 그렇게 삼류로 떨어지게 된 암호 중 하나다.
지금이야 일급 암호 취급을 받고 있을지 몰라도, 회귀 전에는 삼류 중의 삼류. 거의 쓰는 사람도 없는 암호로 떨어져 버렸다.
이 암호의 해독법을 가르쳐줬던 교관도 ‘10년 전에 망한 가문을 파헤치다 보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외워둬라’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땐 왜 그런 옛날 암호를 가르쳐 주냐고 속으로 욕했지만, 지금은 감사할 뿐이다.
물론 아주 조금. 그 인간이 굴렸던 것만 생각하면···.
어쨌든, 나는 덕분에 지금 여기 적힌 그들의 인적사항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와 종이를 번갈아 보는 정보요원.
지금 아마 머리 팽팽 굴리고 있겠지.
내가 내뱉은 허풍처럼 정말로 나를 불세출의 천재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디선가 이 암호의 해독 방법을 우연히 얻은 인간이거나, 아니면···.
···자신과 똑같은 곳에 소속된 인간이, 자신을 버리려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그리고 흔히 그렇게 몰려버린 정보요원이 하는 행동은.
“거, 거짓말이야!”
역시나.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고! 내, 내가 너희를 왜 죽으라고 보내겠느냐! 내 귀한 제자들을 어찌, 어찌 그러느냔 말이다!”
“사, 사부님···.”
거짓말이 들켜버린 정보요원들은 일단 발뺌한다.
그렇게 행동한다고 반드시 살아날 수 있다, 같은 꿈과 같은 상황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발악하듯 막 내뱉을 뿐이다.
“그래···. 사부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마, 맞아. 사부님이 우리를 왜 사지로 보내겠어?”
“어쩌면 저놈이 마교의 주구일지도 몰라. 우리를 속이려고 찾아온 거지.”
그런데 이게 또 의외로 잘 먹힌다.
사람들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법이거든.
[이야, 네가 마교 사람이란 거 바로 알아차렸는데?]
조용히 해, 화순.
내 옆에서 시시덕거리며 웃던 화순을 조용히 시키고, 아직도 거짓, 거짓하고 연호하는 정보요원에게 다가갔다.
자기 말이 먹힌다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야.”
“뭐냐? 설사 나를 고문해도, 절대 진실은 숨길 수 없···.”
“아까 그 말 기억하냐? 두 번 질문하겠다고. 한 번 썼지?”
“···뭐?”
“이제 두 번째다. 내 말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씨익. 미소를 짓는 나완 대조적으로 절망적인 표정을 짓는 정보요원.
이제 놈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뿐이다.
계속 거짓을 말하다가 나한테 단칼에 죽던가, 아니면···진실을 말하고 살던가.
“나, 나는, 나는···.”
“나도 네 거짓말에 선동당할 거라고 믿고 계속 밀고 나가보던가. 뭐, 대가는 말 안 해도 알고 있지?”
우두둑.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손을 꺾자, 놈의 시선이 내 주먹으로, 그리고 아직도 쓰러져 있던 마멸검으로 향했다.
일류 고수도 맞으면 기절하는 주먹이다.
그런 주먹에 신법을 제외하면 삼류나 겨우 되는 정보요원이 맞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잠시 상상하던 놈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이 맞소. 우리는 저들을 죽이려 했소.”
“사, 사부님!”
누구보다도 장문인을 잘 따르던 진성우가 비명을 내지르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그 목소리를 외면한 채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 뒤에 있는 자들은 가문의 요청을 받아 우리 측에서 잠시 맡아놓은 거요. 밖에서 사고를 일으킬 바엔 그냥 밖으로 보내버린다는 생각에 그리 한 것이지.”
“앞의 놈들은?”
“그들은 청부를 받았소.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죽여달라고. 하지만 중원에선 어디서 죽든 그 증거가 남을 수밖에 없지. 딱 한 곳.”
여기 모인 모두의 절망 어린 표정을 무시한 채 그는 말했다.
“마교를 빼곤.”
“···좋아. 내 약속을 지켜줬군.”
“그럼 이젠 당신이 지킬 차례요.”
“그래, 좋아. 이젠 떠나도 돼. 대신 혼자, 아무것도 없이 떠나야 할 거야.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땐 네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
그 말에 놈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지만, 더 입을 열진 않았다.
어차피 노잣돈 정도야 자신이 아는 장소에 몰래 숨겨놨을 테니 돈이 급하진 않고, 지금껏 모은 정보도 내 손에 있으니까.
마멸검은···애초에 시선도 안 주는구만.
아까의 상처 때문에 신법을 쓰지 못하는 정보요원은 대문으로 나갔다.
대문으로 걸어가는 동안 제자들의 증오 어린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무시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창양가를 떠났다.
그리고 남은 이들.
“·········.”
망연자실.
그가 떠난 대문만을 응시한 채,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고 그런 침묵을 가르고 나온 한 마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내 말에 모두가 시선을 나에게로 집중했다.
“···무슨 말이오? 어떻게 할 거라니?”
대답은 뒤쪽에 있던 제자에게서 나왔다. 인상이 매섭고, 눈이 좌우로 찢어진 사내.
저 친구 이름이 분명···.
“···북경 위가장의 위성준. 맞나?”
“그렇소.”
그는 이미 내가 자신들의 신상명세를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지, 자신의 가문과 이름을 말했음에도 놀란 표정은 짓지 않았다.
“나는 방금 쫓아낸 그놈이랑, 지금까지 자는 이놈. 그리고 이것만 있으면 돼.”
나는 내가 들고 있던 두둑한 종이 뭉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희야 나랑은 크게 상관없는 인간들이니···너희가 원한다면 고향으로 갈 때까지 쓸 노잣돈 정돈 줄 수 있어.”
장문인 처소에 있던 비밀 공간에서 털어낸 돈은 내 생각보다도 많았다.
기껏해야 고향으로 보낼 이들에게 나눠 줄 노잣돈 정도밖에 안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 몇 배는 되는 돈이 나왔다.
아마 임무용 자금에 이들에게서 뺏은 돈.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어디선가 공수해 온 돈이겠지.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쁜 마음으로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반강제요, 몇몇은 가문의 시종에게 묶여서 던져졌을 정도니까.
그런 그들에게 고향은 보통 사람들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우, 우리는 어떻게 되오?”
아까 내가 나오자마자 말을 걸었던 사내. 복성운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고향으로 갈 수 있소?”
“원하면 너희한테도 노잣돈 정돈 줄 수 있어. 하지만···정말 가고 싶어?”
“무, 무슨 소리요? 고향으로 가고 싶은 건 당연한···.”
인상을 쓰며 말하면 복성운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방금 저 녀석이 했던 말 기억 안 나? 저놈이 청부를 받았다고 했잖아. 너희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내 말에 복성운은 말을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옛날부터 똘똘한 녀석이었으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먹었겠지.
“너희가 딱히 좋은 일 하다가 여기 끌려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죽을죄를 지었으면 호적이 파였거나 군에 끌려갔겠지. 그런데 그런 너희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이렇게 귀찮고, 오래 걸리는 데다가, 비싼 방법으로? 그런 인간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냐?”
그제야 다른 제자들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깨달은 듯했다.
“아냐, 하지만, 그럴 리가···.”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 하는 이들에게 쐐기를 박아 넣는다.
“너희 가문의 사람들. 다른 배에서 태어난 형제들. 다른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부모. 이 정도겠지.”
외면하려 했던 가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의 표정을 본 적 있는가?
말 그대로 새하얗게 변한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표정부터 근육, 동공까지 모든 게 풀려버린다.
나 역시 그런 그들의 모습을 마주하는 게 기쁘진 않다. 아니, 괴롭다.
3년간 가족처럼 지내왔고, 그 뒤로 15년을 보지 못한 친우들이다.
그런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어찌 기쁠까.
하지만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마주해야 할 건 마주해야 하는 법.
그리고 이어질 이야기를 위해선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그럼···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복성운이 입을 열었다.
“이젠 여기에 더 있을 수도 없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소. 우린, 우린 대체 어떻게···해야 하는 것이오······.”
말을 이어나가던 복성운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버려진 이들 중 가장 정신을 먼저 차리긴 했지만, 그 충격을 모두 이겨낸 건 아니었다.
“···너희를 살려주긴 했지만, 나도 너희를 거둘 순 없다.”
물론 유가장이라면 이들 모두를 수용할 수 있다.
여기 있는 열 사람 정도야 하루도 안 돼서 일자리부터 숙소까지 모두 찾아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곳은 무림맹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다.
중요한 수입원이자, 절대 밝혀져선 안 되는 치부라는 의미로 말이다.
그곳이 단 하루 만에 풍비박산이 나고, 거기에 중요한 정보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무림맹에선 당연히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전 중원을 이 잡듯 뒤질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열 명이 유가장에 있는 걸 밝혀내겠지.
그럼 그들이 범인을 누구로 생각할까?
그렇기에 난 이들을 구해줄 순 있어도, 거둘 순 없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
“무슨 방도 말이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열 명의 사내와, 고향으로 돌아갈 열 명의 사람들.”
내 말에 앞쪽에 있던 제자들이 뒤를, 뒤에 있던 제자들이 앞을 바라봤다.
“각자 한 명씩 데리고 가면 되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뒤에 있던 제자 중 장발의 사내. 진강표국의 강수빈이 내게 질문했다.
“어차피 여기 있는 모두 어느 정도 돈 있는 가문 자제들이잖아. 그러니 여기에 맡겨진 걸 테고. 그 정도라면 같이 수련하던 친구 일자리나 잠자리 정도는 구해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지.”
“그, 그건 맞지만···.”
내 말에 강수빈은 인상을 쓰며 말을 끌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던 강수빈은 절대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아니, 오히려 내가 이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 친우들은 내가 지킨다며 먼저 나설 친구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이렇게 망설일 정도라니.
두 집단 간의 감정의 골이 생각보다 깊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어찌할 방도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던 그때, 가장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한 사람당 한 명만 데리고 가면, 모두 살 수 있다는 것이오?”
광석이가 먼저 나서서 저렇게 말한다고?
[알던 놈이야?]
당연히 알지. 우리 중 제일 겁 많고, 유약하던 녀석이야. 뭘 하던 제일 마지막에 나서는 녀석이라 데리고 나오기도 힘들던 놈인데···.
그런 녀석이 설마 이 일에 제일 먼저 손을 들 줄이야.
“그래,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명. 한 명씩이면 된다. 어렵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그렇다면!”
응?
“다른 친구들이 데리고 가지 않겠다면, 제가 데리고 가면, 그럼 다 살 수 있는 것 아니오?”
으응?
[···이 녀석이 진짜 이 중에서 제일 유약하던 놈이라고?]
아니, 분명히 그랬는데···허···.
광석의 발언을 믿기 힘든 건 화순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뭔 일을 하던 다른 사람들이 다 정하고 난 뒤 맨 마지막에서야 의견을, 그것도 사람 많은 쪽만 선택하던 광석이가 맞나?
“그, 그건 그렇지. 하지만 네 부담이···.”
“서로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함께 동고동락했던 친우들이오. 한 번 버려진 그들을 다시 버리는 짓은···할 수 없소.”
광석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설마 이 친구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먼저 나서서 말할 줄이야.
[막다른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성격이라는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네.
“좋아. 그럼 너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희가 그걸 포기해도, 이 녀석이 모두 거둬줄 테니까.”
뒤에 있던 남은 아홉 제자에게 그리 말하자, 그중 제일 앞에 있던 위성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젠장! 우리 중 제일 약골이 이리 말하는데, 나서지도 않으면 남자도 아니지! 내가 남은 반을 데리고 가겠소!”
“성준이, 자네···?”
“그렇다면 거기에 나도 한 몫 보태지. ···좋은 일자리는 아니지만,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는 될 거야.”
“그렇다면 나도···.”
“거기에 내 손도···.”
“나도···.”
위성준이 먼저 나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들도 앞으로 나섰다.
그렇게 내가 처음 생각하던 대로, 한 사람당 한 명을 데려가도록 고르게 분배되었다.
“좋아. 그럼 모두 이거 하나씩 받아가라.”
그렇게 두 명씩 모인 이들에게 아까 비밀 공간에서 찾은 주머니를 하나씩 건넸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사용할 노잣돈 겸 창업비용이다.”
“창업비용···?”
“평생 친구 집에만 눌러살 생각이냐? 언젠가 독립도 해야지. 이건 그 돈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에 내 돈을 조금 보태줄 생각이었지만, 비밀 공간에 돈이 생각보다 많았던지라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니라, 너흴 데리고 간다고 나선 친구들한테나 해.”
돈을 받은 순서대로 대문 밖을 나서는 신창양가의 제자들.
이제 그들의 앞날이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확한 건, 원래의 역사에 비하면 훨씬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아있던 제자 스무 명이 모두 떠난 신창양가는 마치 흉가처럼 을씨년스럽게 변했다.
아니, 곧 흉가가 되는 건 사실이려나. 이제 여기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럼 이제 남은 일을 처리하러 가볼까.
나는 내게 남아있던 마지막 동행. 마멸검을 어깨에 걸쳐 메고 밖을 나섰다.
*****
신창양가를 빠져나온 정보요원은 바로 자신의 비밀 거처로 달려갔다.
물론 그곳으로 직진한다, 같은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숲과 숲, 골목과 골목, 그 사이와 사이를 파고들어 아무도 모르는 길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자그마한 움막.
나무 사이에 가려진 움막은 입구조차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움막에는 옷 한 벌과 자그마한 주머니가 하나.
구구국.
“그래, 그래. 잘 있었느냐?”
그리고 발목에 아주 작은 통을 하나 달고 있는 순백색의 비둘기가 한 마리 있었다.
그는 몸 하나 넣기도 힘든 움막 안에서 기술 좋게 옷을 갈아입고,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주머니를 챙기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물론 전서구를 데리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밝은 낮임에도 숲은 어두웠다.
무성히 자란 나뭇잎이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달된 정보요원에게 이 정도 어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을 더듬어 자그마한 종이에 원하던 글을 적은 그는 품 안에 고이 모셔왔던 전서구의 통 안에 그 종이를 넣었다.
이제 이것만 보내면 된다. 그렇게만 되면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그놈의 정체도, 그 복수도 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을 담아, 정보요원은 전서구를 띄웠다.
“자, 이제 날아가라.”
그렇게 최후의 희망을 담아 하늘로 날려 보낸 전서구는 곧 나뭇잎을 헤치고 날아오르더니.
서걱.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
반으로 갈라진 비둘기 사이에서 피가 쏟아지고, 그 시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그 광경에 정보요원은 순간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 뭐뭐뭐뭣!”
그리고 곧 정신은 되찾은 그가 입을 열려던 그때.
“이야, 역시 여기 있었네.”
그가 나타났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복면의 괴한.
어깨에 축 늘어진 사내를 멘 그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 지냈어? 이야~못 본 지 겨우 이각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나는 벌써 그립더라고? 보고 싶어서 혼났어.”
“여, 여길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정보요원에게 그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북서로 8리, 남서로 6리, 남동으로 4리. 만약을 대비해 그 위치에 비상 움막을 만들어둬라.”
“다, 당신 누구야! 대체 누구길래 이런 걸 다 아느냐고!”
더는 참지 못한 정보요원은 마치 발광하듯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들의 정체를 아는 것도, 일급 암호를 순식간에 해독하는 것도, 오직 무림맹의 정보요원밖에 모르는 비밀 움막의 위치를 아는 것도.
그 모든 게 그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 당신 덕분이야.”
“뭐라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정보들이겠지. 사실을 말하자면,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어.”
“너 대체 무슨 소리를···?”
“아, 그리고 말했지?”
스윽.
복면의 사내, 유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비어있던 손에 창을 들었다.
창날부터 창대까지 모두 통짜 철로 이루어진 먹빛의 창.
“또 만나면, 그땐 목숨은 보장하지 못한다고.”
“잠···!”
콰직!
그가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창이 그의 입을 관통했다.
절명이었다.
입에서 창을 뽑아내자 그의 몸이 힘없이 무너지며, 차가운 겨울 땅이 그의 피와 온기를 순식간에 앗아갔다.
빠르게 굳어가는 시신을 가만히 응시하던 유현은 자신이 여기까지 매고 온 사내를 그 옆에 눕히더니, 목 옆에 있는 혈도를 강하게 눌렀다.
“!!!”
“정신이 드냐? 아, 억지로 움직일 생각은 하지 말고. 어차피 마혈과 아혈을 집어놔서 움직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못 하겠지만.”
유현의 경고에도 누워있는 사내. 마멸검은 몸을 뒤척이려 했지만,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부분은 마구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뿐이었다.
결국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포기한 마멸검은 유현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 같은데, 포기해. 어차피 알려줘도 네가 알진 못할테니까.”
스윽.
유현은 그렇게 말하며 창을 들었다.
아까 정보요원을 죽였던 것과는 다른 창.
적색의 수정으로 만든 창날이 빛 한점 없던 숲에서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봐야 이젠 쓸 일도 없고.”
그 빛에 홀린 듯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마멸검은 정신을 되찾았다.
갑자기 꺼내든 무기와 방금 그 말투.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살기 어린 시선까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그리했으니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깨달은 그는 조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기 시작했다.
물론 움직일 순 없었던지라, 날뛴다고 해봐야 그의 육신에 혈도가 울긋불긋 올라오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정도론 유현의 점혈을 풀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수준 차이라면 내상을 대가로 풀 수 있었겠지만,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어느 정도’로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 이제 아혈을 풀어줄 거야. 하지만 잘 생각해. 어쩌면 이게 네가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한 마디가 될 수도 있으니까.”
최후라는 말에 그가 날뛰는 것도 멈추고 유현을 바라봤다.
끔찍한 공포. 참을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그의 시선 앞에서 유현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너도 이런 경우 많이 겪어 봤을 것 아냐? 뭐, 물론 반대 상황에서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네가 무슨 말을 들어야 살려줬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내뱉어봐.”
스윽.
유현의 손이 마멸검의 아혈을 스쳐 지나가자, 그는 다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됐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지만,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자신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나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딱 하나.
“사, 살려줘···.”
너무나 미약하고, 시시한 한 마디였다.
그 말에 유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그의 입을 조심스레 막고, 창을 짧게 쥐고 그의 목에 가져다 댈 뿐.
“읍! 읍! 읍! 읍!”
그가 날뛴다.
살아나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날뛴다.
얼굴이 붉어지고, 파래지기를 반복하며,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도드라진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창끝은 천천히 그의 목에 다가갔다.
“쉿, 쉬쉬쉬.”
그리고 미소가 보인다.
“이제 잠들 시간이야.”
푸욱.
목에서 느껴지는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마멸검의 정신이 조용히 육신에서 떠나갔다.
*****
[다 끝났냐?]
“그래, 다 끝났어.”
탁탁. 손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나는 화순의 말에 대답했다.
두 사람의 사체를 묻는 데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땅은 확실히 딱딱했지만, 움막 옆에 있던 삽과 단련된 육체. 그리고 군에서의 경험이 합쳐지자 마치 모래를 파내듯 팔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다 끝났냐고.]
“·········.”
이번 화순의 질문에는 전처럼 빠르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지금 내 복수가 모두 끝났느냐 묻고 있었다.
대답하기 싫었던 것, 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회귀 전, 내 죽음의 직접적인 이유 두 사람을 죽이고, 본래 죽었어야 했던 동문이자 친우들을 살려냈다.
분명히 기뻐하고, 행복해야 할 일이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싱숭생숭하기만 했다.
[그 종이에 적힌 내용 때문이냐?]
그리고 화순은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신창양가에서 얻은 종이뭉치.
그 안에는 제자들의 신상명세만 있었던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욱 깊고, 끔찍하며, 어두운 비밀이 적혀 있었다.
[완전 새 발의 피···아니, 호랑이의 털 한 올이라고 해야겠던데?]
“재밌는 비유네.”
호랑이의 털 한 올.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몸통은 거대했다.
내가 방금 처리한 신창양가 따위, 꼬리의 끝부분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뭘?”
[거기 적힌 놈들 말이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팍! 다 쓴 삽을 땅에 박아넣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 화순을 응시했다.
난 이미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하지만 화순의 그 한마디에 내가 원하던 걸 깨달았다.
“당연히 다 뒤집어버려야지.”
[그래, 그게 내가 원하던 대답이야.]
내 대답을 들은 화순이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내가 싸울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할 녀석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나와 화순은 남동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눈앞에 있는 거라곤 나무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지금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귀 전,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그 한마디.
“···고향으로 가야지.”
[그래, 그래야지. 아! 기정이 녀석이 얼마나 컸는지 보고 싶다!]
“이미 훤칠한 청년이 되어있을걸? 어쩌면 우리가 색싯감 하나 찾아줘야 할지도 몰라.”
[으하하하! 그것도 좋겠네!]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며 앞서가는 화순의 뒤를 따랐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내 가족이 있는 그곳으로.
< 신창양가(3)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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