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창양가(1) >
감숙성은 예로부터 정파 무림인들에게 조금 생소한 곳이었다.
청해성 만큼은 아니지만, 마교의 근거지인 신강에 크게 인접하여 있기도 하고, 이름이 알려진 문파도 공동파 정도를 제외하곤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정파는 분명히 존재했다.
대부분이 영세한 규모였지만, 각자 마음에 정과 협을 믿고 살아가는 그런 이들.
그리고 그런 정파 중 한 곳에선 지금 연회가 진행 중이었다.
“하하하! 자, 자! 모두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거라! 오늘은 기쁜 날이니!”
가장 상석에 있는 중년인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잔에 있던 술을 한입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로 옆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훤칠한 청년 검사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스승님, 너무 급하게 달리시는 거 아닙니까? 이 제자가 따라가기도 박찹니다.”
“허어, 그런가? 제자들이 곧 세울 큰 공을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기뻐서 너무 빨리 마신 모양이야.”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아니, 여기 있는 모두가 똑같은 마음일 겁니다. 안 그러냐, 사제들아!”
네! 맞습니다! 청년의 말에 그보다 아래에 있던 사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정말 진심으로 웃으며 대답하는 건 두 사람이 있는 상석에 가까운 사내들뿐.
뒷자리에 있는 사내들은 뭐 씹은 표정으로 그저 잔만 들어 올릴 뿐이었다.
뒷자리에 있는 사내 중 인상이 매서운 사내가 텅 빈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젠장, 술이라곤 쥐꼬리만큼 줘놓고 뭘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라는 거야?”
“그뿐인가. 먹을 것도 여긴 죄다 풀밭이고, 고기니, 생선이니 먹을 만한 건 다 위쪽에 있지 않은가.”
그의 옆에 있던 장발의 사내의 말에 그 근처에 있던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연회라고 하길래 모두 기뻐하며 나왔거늘, 이런 처사라니.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 의기양양하게 웃는 얼굴 좀 봐라. 젠장, 저놈들이나 우리나 무공수위는 다 거기서 거기인데. 왜 저놈들이 그런 자리에 뽑힌 거야?”
처음 불만을 내뱉었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상석에 있는 열 명의 사내들을 바라봤다.
온갖 고급요리를 잔뜩 늘어놓은 채, 서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즐겁게 연회를 즐기고 있는 사내들.
앞에 있는 음식은 물론, 분위기만 봐도 이 연회의 주인공이 저들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처음 말을 꺼낸 사내의 반대편에 있던 볼이 홀쭉한 사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허약해 보이는 사내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소매로 훔쳐내며 말했다.
“저, 저들이 가는 곳이 어디 보, 보통 곳인가? 그···.”
꿀꺽, 볼이 홀쭉한 사내는 그곳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두렵다는 듯, 말을 잠깐 멈춘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 마교에 가는 것인데. 마지막일지 모르니 잘 먹이기라도···.”
“흥! 마지막은 무슨!”
그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린 매서운 인상의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우리 무공 수준은 누구나 다 아는데, 설마 정말 그 위험한 곳에 일부러 보내겠나? 신강 외곽이나 산책하듯 살짝 둘러보고 오겠지.”
“허, 허나 외곽이라도···.”
“아, 이 친구! 참으로 답답하네! 그런 불시의 위험을 피하려고 대사형도 같이 출정하는 것 아닌가!”
사내의 말에 모두가 가장 상석, 중년인의 옆에 있는 청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웃으며 술을 마시는 상황에서도 숨길 수 없는 고수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오는 청년.
그가 바로 이들의 대사형이었다.
“사실 말이 사형이지, 사부님보다도 무공이 더 높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런 사람이 같이 출정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어. 그냥 놀고 오면서, 공을 세웠다고 말하게 해주려는 거지. 그것도 저.”
상석의 열 명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엔 숨길 생각조차 없는 분노와 혐오가 담겨 있었다.
“잘난 가문의 자제님들에게 말이야.”
그의 말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감숙성 토박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전국에서 올라온 ‘있는 집 자제분들’이었다.
다만, 앞에 ‘가문에서 버려진’이라는 말이 붙은 게 문제지만.
그렇다. 이 문파는 보통의 문파가 아니라, 가문에서 망나니 취급을 받는 이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무공까지 가르쳐주는, 말하자면 성인용 보육 시설 같은 곳이었다.
최근 여러 지방에서 생겨나고 있는 정파의 주 수입원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가문에서 버려진 사람들이라는 동질감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것도 처음 몇 개월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각자 가문의 부나 권력에 따라 서로 파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본인들을 10대 제자라 자칭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저 상석에 있는 열 명의 사내가 바로 그 10대 제자였다.
이들의 표정이 고까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평상시에 그리 사이도 좋지 않은 인간들이 공을 세운다고 하니 배알이 꼴린 것이다.
“젠장, 곧 집에 가봐야 뭘 하나. 어차피 이 모양, 이 꼴로 가봐야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건 똑같을 텐데. 하다못해 여기서 뭔가 공이라도 세우면 모를까···.”
장발의 사내의 말이 곧 여기 모두의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상석을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더욱 썩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젠장. 차라리 누가 와서 다 뒤집어주기라도 했으면 좋겠구만.”
“하하하! 그래, 그럼 차라리 흥이라도 좀 돌겠군.”
“뭐, 물론 꿈같은 이야기지. 어느 미친놈이 공동파 바로 아래에 있는 우리 문파로 쳐들어올···”
쾅!
사내들의 대화는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끊기고 말았다.
아니, 그 대화뿐만이 아니다. 저 위쪽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와 그들만의 연회도 끊기고 말았다.
“여기가.”
그리고 굳게 닫힌 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복면의 사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창양가가 맞나?”
“네, 네놈은 누구냐!”
상석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던 중년 사내. 신창양가의 장문인이 복면의 사내를 삿대질하며 물었다.
“나?”
신창양가의 제자 스물한 명이 모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던 사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선타파(僞善打破). 너희 거짓된 정파를 부수러 온 사람이다.”
*****
내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위기.
누구 하나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화순만이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캬! 분위기 좋고! 상황 좋고! 시간 좋고! 아주 그냥 삼박자가 골고루 들어맞네!]
···진짜 좋은 거 맞냐? 저 인간들 전부 딱딱히 굳어있는데.
[에헤이, 의심하지 말라니까? 네 등장이 너무 좋아서 그런 거야. 원래 연극도 그렇잖아? 주인공이 나타나면 모두 하던 거 다 멈추고 와! 하고 놀라잖아. 그런 거야.]
하아, 이걸 진짜 믿어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좌중을 훑어봤다.
익숙한 얼굴 몇,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얼굴 몇.
그리고.
으득.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대사형. 아니, 마멸검의 얼굴과 나를 속였던 신창양가 장문인의 얼굴.
그들의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을 보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살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사실, 여기 오면서 조금 걱정했다.
혹시나 그들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의 감정이 사그라든 게 아닌가, 하는 그런 걱정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건 한낱 기우였을 뿐.
둘의 얼굴을 마주하자, 회귀 전의 삶이 떠오르며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
“위, 위선타파?”
“이놈이, 말장난을···!”
상석에 가까운 제자 몇 사람이 화난 표정으로 뭐라 말했지만, 딱히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아는 얼굴이다. 저놈들의 무공수위라 해봐야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그런데 그것보다 연회 자리 배치가 왜 이따위야? 왜 저것들이 모두 상석에 모여 있지?
[응? 무슨 문제라도 있냐?]
아니, 회귀 전엔 이러지 않았거든. 분명히 자리도 마교에 가는 놈, 안 가는 놈 섞여 있었고, 음식도 저쪽에만 제대로 차려놨고, 여긴···.
[음, 금방이라도 뱀이 튀어나올 것처럼 생기긴 했네.]
화순의 말대로였다.
식탁이라기보단 풀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만한 식탁과, 사람 수보다도 더 많은 고기 요리가 널려있는 식탁.
누가 봐도 차이가 극심한 식탁에 이상함을 느끼다가, 문뜩 회귀 전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기억났다.
[응? 뭐가?]
저 새끼들. 우리가 왔을 때 위아래를 나눠 놨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가 버는 돈에 비해서 식사나 시설이 엄청나게 열악하거든. 놈들은 거기서 생길 수 있는 불만을 자기들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서 풀어내도록 이간질을 했고.
[호오, 그래서 식탁 꼬락서니가 이 꼴이라는 거구만.]
그때는 내가 나서서 어차피 다 가문에서 쫓겨나온 인간들이 여기서까지 위아래 나누고 싶냐고 화내서 그런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앞서서 이야기를 꺼내는 인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더더욱 나를 화나게 했다.
인간은 대체 어디까지 추악할 수 있는 건가.
사람을 죽여서 돈을 버는 인간들이, 자그마한 불만조차 자신들이 죽여버릴 인간들에게 몰아내는 꼴이라니.
그렇게 고고하게 보이고 싶었나, 그렇게 정의로워 보이고 싶었나.
정말로 그리 보이고 싶었다면, 스스로 그리 행동하면 될 것을.
스윽.
내 앞자리에 있던 술병을 들고 앞으로 향했다.
몇몇 사람이 나를 막아보려 했지만, 한 번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 내가 가진 내공은 2갑자.
겨우 10년짜리 내공을 가진 그들은 수백 명이 몰려와도 내 앞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눈앞의 이 사내. 신창양가의 대사형.
“네놈···누구냐.”
아니, 마멸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와 분위기에 주위의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겨우 이런 시골 문파의 대사형이라곤 믿기 힘든 기세를 뿜어내는 그의 모습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기세를 뿜어내는 이유가 다름 아닌 두려움 때문이란 걸.
그만큼 그와 나 사이엔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귀가 막혔냐? 아까 말했잖아. 위선타파라고.”
조르륵.
놈의 머리 위에 가져왔던 술병을 뒤집자, 그 안에 있던 술이 아래로 쏟아졌다.
하지만 원래 바닥에 고여있던 술은 흘러내리기는커녕, 놈의 머리카락조차 제대로 적시지 못했다.
나는 전부 비어버린 술병을 저 멀리 던져버리며 말했다.
“쯧쯧, 저 사람들한테 술 좀 많이 주지 그랬어? 그럼 네 몸에서 나는 악취가 조금이나마 씻겨나갔을 텐데”
“이, 새끼가!!!”
쿵!
그 순간 분노로 공포를 이겨낸 마멸검이 식탁을 박차며 검을 뽑았다.
그 궤적이 마치 하얀 실선처럼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의 발검.
그것은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심지어 신창양가의 장문인조차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쾌검이었다.
그에게 불행한 소식은 딱 하나.
틱.
“선빵 쳤네?”
이 자리에서 그 검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에게 검을 뽑았다는 사실이었다.
< 신창양가(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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