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역 >
“단장님!”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자, 복삼이 놈이 기다란 젓가락을 들고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또 고기 구워 먹냐!”
“헤헤헤, 그렇지요, 뭐! 한 점 드시겠습니까?!”
“그래! 지금 가마!”
어차피 할 얘기도 있겠다, 잘됐다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이미 많은 병사가 모여 거기서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오늘은 뭐냐?”
“양고기랑 소고기가 반반씩입니다. 어느 걸로 드시겠습니까?”
“고기 말하는 게 아니잖아. 저 독에 담긴 것 뭐냐고.”
복삼의 뒤에 정렬하고 있는 커다란 독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얀 구름이 올라오고 있는 것 하나와, 겉면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것 하나.
그걸 본 녀석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흐흐, 역시 바로 알아보시네요. 어떤 거로 드시겠습니까?”
“이 추운 겨울에 차가운 술이 들어가겠냐. 그건 너 같은 동사냉(凍死冷; 얼어 죽어도 차가운 술) 족속들이나 마시는 거지. 뜨끈한 거로 한 병 가져와 봐.”
“예이. 알겠습니다.”
내 말에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척! 한 복삼은 커다란 술병에 아까 그 하얀 구름을 피워내던 술을 받아왔다.
쪼르륵.
옅은 호박빛의 액체가 잔을 가득 채우고, 부드러운 향기와 미약한 온기가 가득 피어오른다.
그것을 한입에 털어 넣고 삼키자, 따뜻한 온기가 입에서부터 목으로. 목에서부터 위로 차례로 옮겨갔다.
“···좋은 소흥주네. 어디서 났냐?”
“이번에 장군님들 보급으로 들어온 녀석 중 하나입니다.”
“장군님 거라고?”
과연. 복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나라의 어떤 부대보다도 보급이 풍부한 국경부대지만, 이만한 고급술은 병사가 구하긴 하늘의 별 따기다.
이 정도 수준의 술이라면 장군급의 인물이 아니면 순번이 돌아오기도 힘들다.
그 말인즉, 복삼이 이놈이 보급받은 건 아니란 소린데···.
“···훔친 건 아니지?”
“아니! 절 뭐로 보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진심으로 억울한 듯, 가슴을 퉁퉁 치며 눈물까지 반짝이는 복삼.
온몸으로 결백을 보이는 녀석의 모습에도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전과가 있잖아, 전과가.”
···전에도 이러다가 당한 적이 있거든.
다행히 일장군의 보급품이라 가볍게 넘어가긴 했지만, 진짜 처음 들었을 땐 간담이 서늘했다.
“나는 이번엔 못 막아준다. 네가 알아서 해라.”
“아이고, 단장님. 이번에는 정말 아니라니까요. 이거 훔쳐 온 게 아니라 받아온 겁니다.”
“받아와? 누가 주신 건데?”
“총사령관님이요. 저희 할 일 없다고 술이나 한잔하라면서 주신 겁니다.”
“총사령관님이? 돌아오셔···아, 일장군님 말하는 거구나.”
“···그거 총사령관님이 들으시면 섭섭해하신다고요. 앞에선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복삼의 타박을 들으며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다시금 입과 코를 간지럽히는 주향을 느끼며, 선선한 겨울바람을 만끽했다.
옆에서 살얼음이 낀 백주를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켜던 복삼이 입을 훔치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겨울날에 이렇게 술판, 고기 판을 펼치고 있다니. 제 군 생활 동안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 해봤는데···.”
“그러고 보니 너 나보다 전부터 여기에 있었지? 올해로 몇 년째냐?”
“딱 5년째입죠. 뭐, 탈영도 몇 번 했으니, 정확하게 부대에 있던 시간을 따지자면 좀 더 짧지만요. 아! 그래도 단장이랑 있고 나선 안 그럽니다?”
“징그러워, 이 자식아.”
말은 그리했지만, 내 옆에 살며시 다가오는 복삼이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
내가 국경부대에 처음 왔을 때부터 살갑게 굴어준 복삼이 덕분에, 여기에 좀 더 빨리 적응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공주님이 들르셨던 이후로 참 많은 게 바뀌었죠. 안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지.”
복삼의 말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성하 공주가 황실로 돌아간 지도 벌써 5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흘짜리 짧은 만남에 불과했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그 뒤에 있던 많은 변화의 시발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떠난 뒤로 국경부대도 여러 변화가 있었다.
후텁지근하던 늦여름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이 되었고, 어리바리한 신병티를 온몸으로 뽐내던 정철이도 후임을 세 명이나 받았고, 또 그만큼 다른 단원들도 밖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말하자면 역시.
“벌써 북해 놈들이 안 쳐들어온 지 이 주째인가?”
“정확히는 이주하고도 삼일입죠. 덕분에 가을날 말처럼 옆구리에 살만 찌고 있습니다.”
매일 세 번씩 꼬박꼬박 국경부대를 침공하던 북해 전사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는 사실이겠지.
물론 갑자기 그놈들이 전쟁을 싫어하게 됐다거나, 이상한 전염병이 돌아서 다 죽어버렸다, 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지금 당장 성 위를 올라가서 북해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팔팔하게 돌아다니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북해의 부족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힘 좋은 놈들이 지금 이곳을 향해 쳐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확실히 평화협상이 잘 진행되고 있나 보군요.”
“그래야지. 지금처럼 자기 집안 다스리기도 힘든 상황에 남과 싸운다고 힘 뺄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잘 구워진 양고기 한 점을 입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가 예정보다 일찍 황실로 돌아가면서 미래는 크게 바뀌었다.
원래 미래와는 정반대로, 황제와 일황자는 살고 이황자와 삼황자는 죽었다.
죄목은 역모.
내가 알고 있던 정보는 일황자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었는데, 실상은 이황자와 삼황자가 꾸민 일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몰랐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본래 이런 황실의 비사 같은 건 수백 년이 지나도 밝혀지기 힘든 일이다.
하물며 당대를 살아왔던 내가 알 수 있을리가 있나.
이황자와 삼황자의 처형 이후, 황제는 일황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해독이야 독의 종류를 알아냈으니 금방 끝났지만, 아무래도 자식들이 한 짓에 대한 충격을 버티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은 느리게나마 회복하고 있다고 하니, 곧 본래의 신색을 되찾을 수 있을 터.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황실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있냐고?
그야 당연히, 당사자에게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사령관님···아니, 이젠 명나라의 대장군님이구나.”
아직 좀 어색하네요, 하고 복삼이 웃으며 말했다.
“그분이 황실에서 힘써주고 있으시단 뜻이겠죠.”
그리움이 가득 담긴 복삼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술잔만 들어 올렸다.
총사령관이 황실의 부름을 받아 북경으로 올라간 것도 그때쯤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그만한 믿음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춘 일황자였지만, 아무리 절대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혼자로는 한계가 있는 법.
하물며 황제 독살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니,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의 필요성은 그 여느 때보다도 절실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황자와 공주, 이 두 사람 모두에게 높은 신임을 받는 총사령관이 황실로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
지금은 명나라의 모든 군사병력을 총괄하는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저번에 대장군이 일장군···아니, 현 국경부대 총사령관을 만나러 왔을 때 대장군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근황이었다.
“크아, 좋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잔으로 모자라 커다란 바가지로 술을 퍼마시던 복삼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 뭐가?”
“아뇨, 저기, 본부 쪽에서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잠깐 총사령관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다녀왔다. 뭐, 딱히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총사령관님이라면···혹시?!”
눈을 찢어지라 크게 뜨며, 마시던 바가지까지 떨어뜨리는 복삼.
녀석은 좌우를 휙휙 둘러보더니, 내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드디어 가시는 겁니까?”
“···뭐가.”
“뭐긴요! 드디어 대장군님을 따라서 황실에 올라가시냐는 거죠!”
···이놈은 대체 뭐라는 거야?
“캬아!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장군님이야 여길 맡길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지만, 단장님이 왜 황실로 가시지 않나, 하고요. 누가 뭐라 해도 총사령관님의 제일 최측근 아닙니까?! 그런데 드디어 그 기회가···아악!”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 자식아.”
퍽!
헛소리를 지껄이는 복삼의 머리에 손날을 세워 때려 박았다.
그러자 녀석이 비명을 내지르며 데굴데굴 땅바닥을 굴렀다.
불파를 두른 손은 쇠몽둥이와 다를 바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황실을 왜 가, 황실을.”
“아야야, 그럼 대체 왜 본부에서 오신 겁니까? 저기서 이야기하실 분이라고 해봐야 총사령관님밖에 없으시잖아요.”
내가 때린 부분을 살살 쓰다듬던 복삼이 입술을 빼죽 내밀고 물었다.
우뚝.
녀석의 질문에 입가로 술잔을 가져가던 손을 멈췄다.
과연 여기서 대답해줘도 될까, 순순히 그냥 받아들일까, 녀석이 너무 과민반응하진 않을까.
여러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곧 사라지고, 나온 대답은.
“···나, 전역하려고.”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가볍고, 툭 던지는 듯한 말투였다.
“에이, 난 또. 전역 이야기를···하신···네?”
“이제 슬슬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3년이나 여기서 있었으면 오래 있었잖아?”
“아니, 그게 무슨···.”
믿기 힘들다는 복삼의 표정을 눈길을 살짝 돌림으로써 피했다.
“···총사령관님이 떠나셔서 그런 겁니까?”
잠깐의 침묵 이후에 나온 복삼의 목소리는 내 목소리와는 달리 무겁기 그지없었다.
녀석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왜 떠나시는 겁니까?”
대답하기 전, 나는 아까 마시지 못했던 술을 단번에 삼켰다.
바깥에 얼마 있었다고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린 술. 하지만 그 냉기 덕분에 뜨거워지던 속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놀면서 녹봉 받아먹기도 그렇고, 돈도 이제 많이 모았고, 3년이나 못 본 사람들 얼굴도 보고 싶고. 무엇보다.”
쭈욱. 이번에는 술잔이 아니라 술병 채로 입안에 부어 넣었다.
조금 전 싸늘하게 식었던 술과는 대조적으로 화끈한 열기가 내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갔다.
다 마신 술병을 툭, 던지듯 내려놓고 복삼의 눈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더 싸울 수 없으니까.”
결국, 가장 큰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싸울수록 강해진다, 라는 말이 보통의 무림인에게 실전 경험을 많이 겪으라는 격언으로 존재한다면, 내게는 분명한 사실이요, 현실이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 어디보다도 많은 싸움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여기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것도 옛말이 되었다.
지금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평화협상은 곧 결실을 볼 테고, 그렇게 되면 이제 여기는 전쟁터가 아닌 북해와의 연결고리로 남게 될 테니까.
“···단장님한테 그렇게 전투광스러운 면모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러냐.”
“그럼 언제 떠나시는 겁니까?”
“내일. 아마 아침에 떠날 거다.”
“내, 내일 아침이요?! 그럼 이별식은···!”
“이별식은 무슨 이별식이야.”
녀석이 아까 떨어뜨린 표주박을 들어 거기 남아있던 술도 모조리 마셔버렸다.
조금 전 소흥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독한 주향이 입안에 가득 들어찼지만, 참고 억지로 삼켰다.
지금은 술에 취해야 할 때다.
취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하니까.
“그냥 사람 한 명 떠나는 거뿐이야. 항상 있던 일이잖아?”
“하지만···.”
입술을 살짝 핥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지어내 내뱉었다.
“별일 아니야. 너희는 그냥 언제나처럼 보내면 된다. 거기에 내가 없을 뿐이지.”
툭툭.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복삼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단장은 장일이나 너, 둘 중 하나가 맡아서 해라. 아니면 아예 다른 단을 만들어도 되고. 총사령관님한테 말씀드리면 잘 해주실 거다.”
“정말로···가시는 겁니까?”
“그게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다. 너희도 단장이 돼야 녹봉도 더 많이 받고, 인정도···.”
“누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복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위에서 눈을 부라리며 날 노려봤지만, 무섭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누가 단장 자리 같은 거 원한다고 했습니까!”
녀석의 눈 안에 담긴 슬픔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자리 원한 적도 없다고요! 전 그저···그저···!”
거기서 복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뒤돌아 내게서 멀어져 갔을 뿐.
녀석은 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걸로 된 거냐?]
어느새 내게 다가온 화순이 옆에 서서 물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며 떠나더니, 나와 대화를 나누던 복삼이 떠나자 바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2달간 안 떠나고 있던 게 이런 꼴 보려고 했던 거냐?]
“조용히 해.”
내 말에 화순은 콧방귀를 한 번 크게 뀌더니,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억지로 화순의 입을 다물게 한 건, 내가 그의 말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본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2개월 전에 여기서 나가야 했으니까.
이미 대장군과 만나 더는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던 그때, 나는 여기를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떠나자, 떠나야 한다, 떠나야만 된다.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때마다 녀석들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하루만, 하루만 더 늦추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화순이 나를 탓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했으니 금방 날 잊겠지.”
[·········.]
웃으며 좋은 이별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서로 정이 사라질 정도로 험악한 헤어짐이 낫다.
그럼 빨리 잊어버릴 수라도 있으니까.
“···자, 가자. 빨리 짐 정리해야지. 내일 아침이면 이제 다 비워 줘야 하니까.”
내 말에 화순은 여전히 침묵한 채로 내 뒤를 따랐다.
그의 침묵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나는 덤덤히 그 무게를 받아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
다음날 이른 아침.
얼마 없는 짐을 싸고 내려오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떠나십니까?”
“네, 이제 가야지요.”
자신은 나이 따윈 잊었다며, 항상 자신을 이순(耳順; 60살)이라 소개하는 늙은 주방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인사는 다 나눴고요?”
움찔.
정곡을 찌르는 그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가, 바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충이요.”
“허허, 그렇군요.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단장님은 무언가를 계속 숨기는 느낌인지라, 이번에는 인사까지 숨기고 갈까 걱정이었거든요.”
“그런가요? 저도 참 못난 놈으로 보였군요.”
“허허, 그리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거 참. 못난 놈이라는 말을 부정해주시지는 않는구만.
뭐, 애초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랫동안 신세 졌습니다.”
“아뇨, 저야 말로요. 단장님이 오신 이후로 여기 국경부대도 활기가 넘쳤으니까요. 이젠···그것도 옛말이 되겠지만요.”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에 고인 침을 억지로 삼켰다.
“허허, 떠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실없는 소리인지. 노망난 노인의 헛소리라 생각하고 잊으십시오.”
“노인이라뇨.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정정하신걸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은 주방장은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단장님. 당신이 있기에 즐거웠습니다.”
“네, 주방장. 저도 당신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나도 마주 고개를 숙여준 뒤, 얼굴도 보지 않고 얼른 밖으로 나섰다.
그 얼굴을 봤다간, 기껏 굳힌 마음이 또 흔들릴 것 같았다.
객잔 옆에 붙어있는 내 전용 자그마한 마구간에서 말을 꺼냈다.
언뜻 보면 노새로 보일 만큼 작고 비루해 보이지만, 내가 와류를 쓰는 걸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말이었다.
푸르릉, 왜 이렇게 일찍 깨웠냐며 투정 부리는 녀석의 안장 위에 짐을 올렸다.
미래의 정보를 담은 서책과 내가 가진 두 자루의 창. 그리고 집에 갈 때까지 쓸 여비였다.
작은 무게가 아니건만, 녀석은 위에 뭐가 실렸냐는 듯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자, 가자.”
툭툭.
엉덩이를 두어대 쳐주자 앞으로 걸어 나가는 녀석. 그 옆에서 나도 따라 걷는다.
녀석의 위에 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제 둘 뿐인 여행길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야 할 터인데, 벌써 녀석의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엔 경비 한 명 없었다. 혹시 마지막으로 녀석들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역시 그런 행운은 없었다.
그래, 이게 맞지.
무슨 낯으로 녀석들의 얼굴을 마주할까.
그런 심정으로 문에 손을 대고 쭉 밀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광활한 대지.
“와아아아아!”
“폭풍단! 폭풍단!”
“폭풍단장님!!!”
─를 가득 채운 수많은 인파였다.
“이, 무슨?!”
“허허, 이제야 나왔나, 폭풍단장.”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경악에 빠진 내 앞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일장군님···?”
“어허! 총사령관이라니까.”
“아, 음.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너무 충격적이라···그런데, 이게 대체···?”
“뭐겠나? 자네 전역을 축하해주러 나온 전우들이지.”
“이 사람들···전부요?”
“그럼. 아, 참고로 내가 억지로 끌고 나온 거 아니네. 모두 자발적으로 나온 거야.”
언뜻 세어봐도 만 이상의 인파다. 이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건, 전쟁을 제외하곤 공주가 왔을 때밖에 본 적 없었다.
그런데 그만한 사람이 설마 나를 위해서 여기에, 그것도 이런 이른 아침부터 나와 있을 줄이야.
“단장님!”
익숙한 목소리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장일과 복삼. 그리고 백 명의 폭풍단이 보였다.
“너희들···!”
“부단장 장일!”
“부단장 복삼!”
“외 폭풍단 일백 명! 전원 소집 완료했습니다!”
쿵쿵! 장일의 말이 끝나자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을 구르며 내게 군례를 올렸다.
아무런 말 없이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여 명의 전우들.
여전히 소란스러운 인파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침묵은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뭐하나, 폭풍단장.”
그런 그들의 모습을 눈도 떼지 않고 보던 내게 총사령관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군례를 받아줘야 저놈들도 손을 내리지. 평생 군례만 하고 있게 할 생각이야?”
“아, 네. 그렇지요.”
그의 말에 순간 허둥지둥하다가, 바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군례에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쿵쿵! 백여 명의 병사가 발을 구른 것보다 더 크게 발을 구르며 군례를 받았다.
“모두 이렇게 모여주느라 고생했다! 이 어리석은 단장의 뒤를 따라주느라 모두가 고생했다! 나는 지금 이리 떠나지만! 모두 잊지 마라! 폭풍은!”
“영원하며!”
“폭풍단은!”
“불멸이다!”
쿵쿵! 남은 한팔에 있는 각자의 무기로 땅을 강하게 내려치자, 나 역시 말의 안장 위에 뒀던 짐에서 창을 꺼내 그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모두 돈 다 떨어지고, 할 것도 없으면 섬서성에 있는 유가장으로 와라!”
어느새 눈가에서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 술값 벌 일자리 정도는 마련해 줄 테니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이 대답했다.
“잊지 말고 꼭 와라! 명령이다!”
“네! 꼭 가겠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뒤로하고, 수많은 인파로 이루어진 길을 걸어갔다. 언제나처럼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이미 내 마음속에 가득했으니까.
그렇게 더 이상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이명이 생길 정도로 커다랗던 환호성도 사라질 무렵.
“야, 화순.”
[응?]
나는 내 옆에서 웃으며 날고 있던 화순에게 말을 걸었다.
“너, 알고 있었지.”
[뭘?]
“사람들이 나 기다리고 있는 것 말이야.”
[아~니? 내가 어떻게 알아?]
이놈이 어디서 발뺌이야.
“어제부터 내가 성문 밖을 나설 때까지 계속 입 다물고 있고, 내가 문을 열자마자 바로 히죽거리고 있었으면서 몰랐다고?”
[너 떠난다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입 다물고 있던 거지,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헛소리하네. 지금도 웃고 있으면서!”
화순은 내가 만질 수만 있어도 불파로 마구 패주고 싶을 정도로 징글맞게 웃고 있었다.
[크큭, 사실 어제부터 알고 있었어.]
“역시! 그런데 어떻게?!”
[너 짐 쌀 때 밑에 주방장이랑 장일이 얘기하고 있는 거 들었거든.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뭐,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우울해 있었지만 말이야.]
큭, 주방장도 한패였나. 그러고 보니 사람 마음은 기가 막히게 잘 읽는 그분이 떠난다는데도 별말 없이 넘어갈 때부터 의심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하아, 젠장. 완전히 넘어갔구만.”
[그래도 잘됐잖아?]
내 앞으로 날아온 화순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까의 그 능글맞은 미소가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를.
[너나, 그 녀석들이나 모두 원하던 이별을 했으니까.]
“···그래, 잘됐지.”
나는 녀석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냐? 바로 섬서성으로 가는 건 아니라고 했지?]
“그래,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지.”
화순의 말에 씩 웃으며 대답을 날렸다.
“감숙이라고, 아주 개같은 놈이 사는 곳에 말이야.”
< 전역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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