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음절맥(1) >
쾅! 사내의 발이 떨어진 곳부터 피어오르는 흙먼지에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지금 저곳은 흙먼지가 아니라 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겠지.
그 정도로 그의 각법(脚法)은 위협적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중심에 서 있던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나보다 훨씬 작은 키에, 유약해 보이는 인상. 그리고 싸우기 싫다는 듯 잔뜩 인상을 쓴 표정까지.
누가 봐도 하수로 보일 모습이지만, 그의 하체는 달랐다.
마치 전신에 거울이라도 단 듯 번쩍거리고 있는 다리.
마치 눈길을 걷듯, 보보(步步)마다 반 치짜리 발자국이 새겨졌다.
저기에 인간의 피륙은 닿는 것만으로도 부서지고, 찢겨나가겠지.
천마각법(天魔脚法) 5성 오의. 섬각(閃脚).
엄청난 속도로 진동(振動)하는 다리는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해버리는 파괴의 화신!
그리고 그런 파괴의 화신이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날아왔다.
십수 개의 잔영(殘影)을 흩뿌리며 날아드는 그의 발이 내 전신을 노려왔다.
단 하나의 허초(虛招)도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매서운 공격.
하지만 그것을 순순히 맞아 줄 생각 따윈 없었다.
d!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손톱을 세워, 짐승의 그것처럼 변한 손을 휘둘러 그의 양발과 부딪힌다.
쩡! 쩌저저저정!
다리와 팔.
아니, 창과 방패가 맞부딪혔다.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창!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 방패!
그렇게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창과 방패의 대결은.
“흐압!”
“크억!”
모순(矛盾), 이 아닌 방패의 승리!
아직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다리를 불파를 두른 손으로 잡은 나는 마치 몽둥이를 휘두르듯 그를 그대로 땅으로 내려쳤다.
쾅!
“크악!”
한 번.
쾅!
“끄억!”
두 번.
쾅! 쾅! 쾅!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의 육신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안면, 뒤통수, 어깨, 팔꿈치. 바닥이 닿은 부분은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심하게 부서지고, 훼손됐다.
거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망설임은 곧 패배요, 패배는 곧 죽음이다.
회귀 전부터 익혀야 했던 무림의 기본 규칙.
그것을 성실히 행할 뿐이었다.
쾅!
하지만 열세 번째로 그의 몸을 휘두르는 순간,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빠져나갔다.
아니, ‘그’가 아니다.
조금 전보다 훨씬 커다란 몸체.
유약함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매서운 얼굴.
마치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당당한 풍채.
그리고 무엇보다 양손에 쥔 커다란 봉까지.
조금 전 내가 휘두르던 사내는 어느새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사내가 거기에 서 있었다.
그와 같은 점이라곤.
휭!
그 역시도 나를 똑같이 쓰러뜨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쑥 늘어난 봉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불파로 막는다, 라는 선택은 애초에 없었다.
먹빛의 기로 이루어진 저 봉을 잡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럴까.
천마봉법(天魔棒法) 5성 오의. 여의(如意).
하왕조(夏王朝)의 시조인 우왕(禹王)이 황하의 치수를 쟀다던 봉처럼 정말로 길어지고, 또 커지는 무시무시한 무공이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끝없이 길어지고, 또 커지는 건 아니긴 하지만.
후웅! 후웅! 후웅!
···그렇다고 저 무공이 가지는 위력이 줄어드는 건 절대로 아니다.
갑자기 늘어나고 줄어들며, 커지고 작아지는 무공을 상대하는 건, 안 그래도 어려운 봉의 고수를 상대하는 데 엄청난 장애물이었으니까.
어떤 때는 갑자기 늘어나 내 몸을 노리더니, 그걸 막아서려고 하면 갑자기 커져서 위에서 찍어누른다.
마치 서로 다른 크기의 봉을 들고 휘두르는 여러 명의 봉의 고수를 상대하듯, 어렵고 난해하기만 하다.
만약 내가 천마금나수만 익히고 있었다면 상대하기 더없이 까다로웠겠지.
하지만 내겐 그것만 있는 게 아니다.
챙!
어느새 내 손 위로 그의 먹빛 봉에게도 지지 않는 진한 묵색의 창의 나타났다.
철혼(鐵魂). 집을 떠나던 그 날, 아버지에게 받은 그 무구는 이제 내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것을 꽉 쥐자, 한 줄기의 바람과 함께 창끝에서부터 강렬한 회전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회전이 창을 넘어 내 손까지 덮은 순간.
쾅!!!
강력한 와류가 그를 향해 휘몰아쳤다.
그는 어떻게든 봉을 늘리고, 키워서 막아보려 했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 폭풍을 막겠는가.
그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폭풍은 그렇게 거대해진 봉과 함께 그의 몸까지 집어삼켰고, 그 폭풍이 떠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확실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을 쓰러뜨리긴 했지만, 내 몸도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온몸에 그득한 잔 상처와 아직도 저릿저릿한 팔. 그리고 턱까지 차오른 호흡까지.
지금은 누가 내게 다가와 목에 칼을 찔러넣는다고 해도 일어설 수 없었다.
“괜찮네.”
그리고 그런 내게로 다가오는 한 사내.
익숙한 얼굴이면서도, 익숙지 않은 얼굴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흔히 보는 그의 얼굴은 항상 반투명한 상태였으니까.
“이젠 천마 두 사람과 연전을 벌여도 어렵지 않게 이겨버리는구나.”
완전히 보통 사람의 신색을 한 화순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두 사람이 천마 중 강함으로 치면 맨 끝자리에 있는 것만 아니면 훨씬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우습겐 보지 마. 두 사람 다 천마의 이름을 확실히 계승한 인간이니까. 거기에다가 각자의 오의도 있었고 말이지.”
그가 보통 사람처럼 걷고,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이지만 나와 그. 두 사람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이라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
“이젠 확실히 심상수련(心想修練)도 많이 적응했어.”
여긴 다름 아닌 내 머릿속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놀라워. 평생을 서고에만 박혀 살았던 천마와 매일 전쟁을 벌이다 나라님의 눈 밖에 나서 처형당해버린 천마의 무공수위가 비슷하다니.”
처음 상대했던 유약해 보이던 천마와 뒤에 내가 싸웠던 강건한 천마의 무공은 사실 비슷비슷했다.
당장 사용하는 오의만 봐도 각자 하나씩밖에 쓰지 못했고 말이다.
“결국 두 사람 다 직접 싸우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까.”
내 말에 화순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 놈은 평생 서고에만 있었고, 한 놈은 자기가 안 싸우고 남한테 돌진만 명령했지. 직접 싸우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어. 결국 두 사람 다 성격은 달랐을지 몰라도, 천마에는 맞지 않았다는 말이야.”
한심하다는 말투로 두 사람을 타박하던 그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씩 웃었다.
“그런 점에서 넌 잘하고 있어.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다니면서 강해지고 있으니까.”
“···그래, 칭찬 참 고맙다.”
비꼬듯 대답했지만, 화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 제 발로 온 것만 해도 죽을 곳을 찾아온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은 좀 먹고살 만하지만, 정말 처음 온 1년 사이엔 온갖 일을 다 당했지.
···아니, 억지로 떠올리지 말자. 우울감만 더 심해진다.
“그럼 이제 마지막 상대로 변해줘.”
“···진짜 할 거냐? 농담인 줄 알았는데.”
“말했잖아. 한 번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고. 제일 하수인 두 사람과 싸운 게 내 한계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 자, 얼른 변해.
그런 뜻을 담아 화순을 바라보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다. 몸 전체가 일렁였다.
그리고 그 일렁임이 가라앉자, 그곳에 나타난 건 한 명의 사내.
“이걸로 되겠나?”
“···그래, 그 정도면 되겠네.”
아니, 괴물이었다.
내 곱절은 되는 듯한 커다란 체격과 마치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 듯 삐죽삐죽 솟아있는 머리와 수염.
그리고 전신에서 휘몰아치는 엄청난 기운까지.
“그럼.”
전대 천마 독고삭이 전성기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시작하지.”
*****
[머리는 좀 괜찮냐?]
“으윽···말하지 마라···머리 흔들려···.”
[쯔쯧, 그러기에 내가 말했잖아. 독고삭 그 인간은 앞의 두 명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이 자식이, 말하지 말라는 데도 더 말하네.
한 마디 쏘아주려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말을 듣기만 해도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흔들리는데, 소리라도 질렀다간 정말 속에 있는 걸 모두 게워낼지도 모르니까.
심상 수련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육체적으로 직접 다치는 일은 없을지 몰라도, 정신은 그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여 내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흉터나 후유증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지금껏 나와 함께 했던 천마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간과 맞상대를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그 인간이 그런 무지막지한 인간이라는 거 듣고 참 놀랐지···.”
그러고 보니, 처음 독고삭에 관해 화순에게 들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게 말이 되냐고.
지금껏 이어져 온 마교의 역사 속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 만큼 강한 인간이겠냐고.
그리고 나는 첫 번째 심상 수련 상대로 독고삭을 만났고.
[지금보다도 더 처참하게 털렸지.]
···부연 설명, 참 고맙다.
하지만 화순의 말에 반박할 순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강했으니까.
한 번의 움직임에도 두, 세 개의 오의가 담겨 있었고, 공격이라도 하는 때엔 대여섯 개의 오의가 한 번에 내 전신을 노려왔다.
더군다나, 그가 가진 최강의 공격인 극의가 내 몸을 향할 땐 정말···.
“안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 것만 같았지.”
[덕분에 난 신명 나게 웃었고.]
“하아, 그래. 정말로 신명 나게 웃더라.”
내가 극의를 맞고도 살아있는 걸 알자 화순은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나를 약 반 시진 간 놀렸다.
···그땐 정말 권능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팔의 문신을 다 뜯어내 버릴까도 생각했지.
뭐, 지금에 와서 보면 유쾌···는 아니더라도,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추억이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한계는 왜 시험해 본 거냐?]
그때를 떠올리듯 미소를 짓고 있던 화순은 문뜩 생각이 난 듯 날 보며 물었다.
“어차피 휴일이겠다,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한 번 실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정신 통일의 이유도 한 몫 있었지.”
[정신 통일? ···너 정말로 공주님이 여기 올 거로 생각하는 거냐?]
“반드시 올 거야. 그것도 오늘 저녁에 말이야.”
그녀는 왜 연회를 주최한 걸까.
어제 연회에서 돌아온 이후, 끊임없이 그 이유를 생각했다.
물론 순수하게 우리를 치하하겠다는 이유에서 그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본인이 여기 있는 걸 알리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거기서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속셈이 있다는 사실을.
[설마 정말로 일반 병사를 호위로 쓰려고 한다고 생각하냐? 그것도 안 그래도 위험이 가득한 북해 행에?]
“정보요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합리적인 추론이야. 그렇게 매도하지 말라고.”
만약 그냥 연회만 열고 끝냈다면, 나도 그녀의 행동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나와 호위의 비무라는 전혀 의외의 행동을.
“그녀는 나를 시험해보려고 한 거야. 과연 내 무공이 자신을 지켜주기에 충분한지 말이야.”
이미 그녀가 흥미로워하는 눈치에서 내 무공을 한 번 봤다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때 순간 보여줬던 총사령관님의 눈빛.
거기서 두 사람이 어떤 속셈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병에 관해 화순에게 들은 그때, 예상은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북해로 넘어가야 하는 공주님은 무조건 오늘 저녁, 나한테 찾아올 거고.”
[그래서 어제 구음절맥의 치료법을 물어본 거냐? 네가 직접 치료하려고?]
“그렇지. 그녀로서도 매력적인 제안일 거야.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몇 달은 걸릴 북해행을 강행하는 건 그녀로서도 피하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선택할 방법이 하나 더 늘어난다? 그것도 훨씬 짧은 시간 내로 끝낼 수 있는 선택이?”
아무리 뛰어난 기재이자, 지극히 합리적인 존재라도 이런 기회를 그냥 포기하긴 힘들 터.
“그녀로선 절대 포기할 수 없을걸?”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하지만 어제 이미 들었잖아? 그 치료법은 지금의 네 능력으로는···.]
“그래, 지금은 힘들지. 하지만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잊었냐? 황제의 금지옥엽. 황태자의 유일한 친여동생이야.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걸 그녀가 줄 수 없을 확률은···.”
나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화순에게 보여주며 대답했다.
“0에 가깝지.”
[···좋아, 네 생각은 알겠어.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응?”
[만약 네가 치료를 해준다 쳐도, 회귀 전 그 상황으로 가지 말란 법은 없어. 아니,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모르지. 그 두 사람은 권력 때문에 자기 아버지까지 죽은 패륜아이자, 황상을 해한 반역도잖아. 그때보다 더한 지옥이 오지 말란 법이 있겠어?]
“물론···그렇지.”
[그런데 왜 그녀를 치료해주려 하는 건데?]
“사실, 나도 미래가 바뀔 거란 확신은 없어. 어쩌면 네 말대로 더 심해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잠깐 과거를 떠올렸다.
그 옛날 어머니가 살아계셨던 그때, 나를 당신의 무릎 위에 앉혀놓고 해주셨던 이야기를.
‘넌 축복받은 아이란다.’
내 이마를 쓰다듬어주시며 해주셨던 그때의 이야기를.
‘네가 태어난 날, 황태자로 책봉되신 분이 있단다. 아주 좋으시고, 착한 분이지. 그분이 황제가 되면, 너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다.’
“···어머니를 거짓말쟁이로 남겨놓긴 싫으니까.”
*****
내 예상대로 공주는 그날 저녁 내 방에 찾아왔다.
화순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는 꼴은 퍽 웃겼지.
하지만 그걸 웃고 있을 겨를은 없었다.
총사령관님과 호위를 대동하고 온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에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네. 아주 다급한 일입니다.”
화순의 생각대로 그녀는 북해빙궁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 이유야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구음절맥의 치료를 위해서일 테고.
“어려운 일은 아니나···왜 저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제가 국경지대에선 고수라 불리고 있으나, 황실에는 저 같은 건 발아래로 둘만큼 뛰어난 고수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죠.”
한치의 주저도 없이 바로 답을 내는 그녀.
아니, 그런 답이 나올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확답하실 필요는···.
내 기분 여하에 상관없이, 그녀는 쭉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들 모두 북해에 관해선 맹인에 가깝습니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절대 고수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안전히 북해빙궁에 절 데려다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 폭풍단장, 당신이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거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제의 연회도 혹시···?”
“물론 북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점도 중요하지만···그 무력이 뛰어나다면 더할 나위 없으니까요. 단무혁 호위에겐 못 할 짓이었지만, 저에겐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단무혁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히는 게 보였다.
이제 보니 총사령관님과 공주님의 작당 모의를 이 호위는 못 들었나 보군.
그러니 어제 순식간에 당해 버린 거겠지만.
“그리고 어제의 대결을 보고 확신이 들어 저에게 오신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나와 화순의 예상이 맞았다는 건 이제 이걸로 확실해졌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용건은 지금부터다.
“혹시, 북해빙궁으로 가려 하시는 이유가···.”
이 한 마디에 대한 그녀의 반응에 명나라의 미래와.
“···구음절맥을 치료하려고 가시는 겁니까?”
내 미래가 정해져 있었으니까.
“무···?!”
“네, 이노오오옴!!!”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단무혁이 호통을 치며 튀어나왔다.
“네 놈, 네놈이 어찌 그것을 아는 것이냐! 누가 그것을 알려줬느냐!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어느새 검집에서 뽑아낸 검을 내 목에 겨눈 채 나를 노려보는 단무혁.
만약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목에 칼을 밀어 넣겠다는 살기가 그의 안광에서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어떻게 아셨죠?”
어느새 진중한 기색을 되찾은 성하 공주는 아까와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정만 같을 뿐,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나 기색은 완전히 달랐다.
조금 전 그녀가 어디서나 쉬이 볼 수 있는 아가씨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그녀는.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의 운명은 물론, 당신과 연관된 사람 모두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대답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만인의 위에 있는 존재들만이 낼 수 있는 위엄을 물씬 풍겨오는, 진짜 공주로 변해 있었다.
“호흡이 가쁘고, 발바닥을 닿지 않고 걸으며, 가능한 팔꿈치와 어깨를 꺾지 않으시더군요. 하나의 증상만 나오는 질병은 흔하나, 세 가지 모두 한 번에 증상이 나오는 질병은 많지 않죠. 그리고 그 모두 황실 의원이라면 치료하기 쉬울 터고요. 딱 하나···.”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로 답을 말한다.
“···구음절맥만 제외하고요.”
“무공만 뛰어난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요.”
내 대답에도 그녀는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어마어마하게 독한 아가씨네.]
독하다기보단, 자기감정을 잘 다스리는 거겠지.
···어느 편이든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그걸 한눈에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죠.”
“그저 관찰력이 조금 좋을 뿐입니다.”
“관찰력이든 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중요한 건 이제 당신이 남에게 알려져선 안 될 비밀을 알았다는 사실이죠.”
싱긋, 그녀는 지금껏 보여준 적 없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선택지는 없어요. 당신은 저를 따라서 북해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거기서 치료를 받기 전까지, 당신은 무조건 저와 함께해야 하고요.”
“황실의 비밀을 파헤친 자에게 내리는 벌 치곤 가볍군요.”
“처벌이란 내리는 사람의 마음대로니까요.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참고로 저를 따르지 않는다는 선택도 가능합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제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도록 감옥에 있어야겠지만요.”
그럼 원래 역사대로라면 7년간 감옥에 있어야 한다는 소리인가.
그건 가능한 피하고 싶은데 말이지.
“선택지는 그 두 가지뿐입니까?”
“네, 두 가지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거기에 한 가지 선택을 더 늘려보죠.”
“···그게 무슨 말이죠?”
“만약 제가 구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흡!
내 말에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셋 중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사람은 딱 하나.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네. 가능합니다. 다만, 지금은 불가능하죠.”
“그게 무슨 소리죠? 가능하다면서, 지금은 불가능하다니. 무슨 귀중한 약초라도 필요한 겁니까?”
“아뇨, 약초는 필요 없습니다. 탕약이나 영물도 필요 없지요. 필요한 건 딱 하나.”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그녀에게 보여줬다.
그 손에는 검지, 중지, 약지. 세 개의 손가락이 들어 올려져 있었다.
“소환단 이상의 환단 세 개. 이것만 있으면, 제가 공주마마의 지병을 말끔하게 치료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구음절맥(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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