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하 공주(2) >
우리가 싸우기 위해 연회장 밖을 나설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걸 상정해서 만든 연회장이었던지라, 중앙을 비우기만 하면 금방 커다란 비무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비무장 위로 올라간 단무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쓰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창은 쓰지 않는 건가?”
창? 갑자기 창은 왜?
혹시 총사령관이 말씀하셨나 싶어 올려다보니, 그의 옆에 있던 공주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에 찬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모습에 대충 상황을 알아챘다.
두 사람 다 내가 전쟁에서 싸우는 모습을 본 거구나. 그리고 그 출처는 당연히 옆에 있는 높으신 분일 테고.
“창으로는 사람을 해하는 법밖에 몰라 비무에선 잘 쓰지 않습니다.”
“···흠, 그렇군.”
내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였지만, 표정은 밝지 않다. 아마 내가 전력을 다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 창으로 비무를 못하는 건 아니다. 나는 내 힘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와류는 순수한 살상용 기술. 비무에서 쓸만한 기술이 아니다.
만약 나보다 하수라는 확신이 있다면 와류를 봉인한 채로도 싸워서 이길 수 있겠지만···.
번뜩!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려 하는 경지 모를 고수한테까지 봉인하고 싸울 수 있을 것 같진 않거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봐주면서 싸운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저는 금나수에도 일가견이 있으니까요.”
천마금나수 역시 천마창법과 똑같은 경지에 있으니까.
“···그래, 기대하지.”
하지만 단무혁은 말과는 달리 전혀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인상만 쓴 채로 미리 준비된 자신의 자리로만 갈 뿐이었다.
아마 내가 입에 발린 말을 한다고 생각한 걸까.
하긴, 와류를 쓰는 걸 보고 나서 그런 말을 들으면 믿기 힘들다는 건 나도 이해한다.
천마창법의 오의를 얻은 후, 천마금나수의 오의를 얻었을 땐 뭐 이리 시시한 오의가 다 있냐고 화순에게 투정을 부렸으니까.
하지만 그때 그가 말했다.
[오의의 격에 높고 낮음 따윈 없다.]
···이 오의 덕분에 죽을 고생을 몇 번이고 넘기고 나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겨우 깨달았지.
양손에 힘을 주며 나도 내 자리로 향했다.
서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위치에 서자, 총사령관이 한껏 기대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북이 세 번 울리면, 그때 비무를 시작하겠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무공을 아낌없이 선보여주길 바라네.”
총사령관이 눈빛을 보내자, 커다란 북 옆에 있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
저 건너편에서 그가 매섭게 날 노려봤다. 마치 생사 대적을 바라보듯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둥!
검병에 손을 올렸다. 진검. 그것도 지금껏 본 적 없던 명검이다.
사람의 살과 뼈 정도는 힘주지 않아도 쉽게 잘릴 명검.
둥!
그리고 그런 검을 든 살기 가득한 고수가 내게로 달려왔다.
그와 나 사이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단무혁 수준의 고수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제약도 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발 구르기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는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속도도 속도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힘은 더욱 어마어마했다.
자신을 막는 건 모두 베어 넘기겠다는 듯 전심전력을 담은 일격!
그가 이 비무를 길게 이어갈 생각도 없다는 걸 이 공격으로 알 수 있었다.
진심을 보여서 창을 들게 하겠다, 이런 계획인가.
딱 봐도 호승심 넘치는 사내가 생각할만한 전법이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난 진심이었다.
탱!
그의 검과 내 왼팔이 맞닿은 순간, 들릴 리 없는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마치 쇠와 쇠가 서로 강하게 부딪힐 때나 들릴법한 소리에 나를 상대하고 있던 그도, 주위 관객들도, 무엇보다 먼 거리에서 나와 그의 싸움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공주도 눈을 크게 뜨며 그 광경을 바라봤다.
놀라지 않는 건 딱 두 사람뿐.
이미 내 무공을 알고 있던 총사령관과, 그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던 나였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몸과, 불과 쇠로 이루어진 검이 부딪히면 승자는 누구인가.
당연히 그 승자는 검이다.
절대로 깨지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
하지만 그런 절대적인 진리조차도 부술 수 있는 무공이 있다.
천마금나수 5성 오의. 불파(不破).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 한 쌍의 팔.
설사 천하의 명검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무적의 방패!
이 두 팔 덕분에 나는 보통의 인간은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예를 부릴 수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방심한 상대의 공격을 튕겨내는 것 같은 걸 말이다.
단무혁은 튕겨 나간 검을 다시 회수해 어떻게든 공격에 나서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온 힘을 담았던 검이 튕겨 나가자 그 안에 담겨 있던 거력은 그대로 그를 덮쳤고, 자연스레 수많은 허점이 드러났다.
그리고 남은 한 자루의 방패는, 날카로운 창으로 변해 그의 허점을 노렸고.
팡!
바람보다도 빨리 그의 눈앞에 도착했다.
내 손이 멈춘 곳은 그의 얼굴 바로 앞.
반 치만 더 뻗어도 양 눈을 파버릴 수 있는 위치.
물론 손가락을 더 뻗진 않았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이미 그의 양 눈은 내 손 위에 있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비무였다.
“그만!”
총사령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이미 승부는 난 듯하군. 두 사람 모두 고생했네.”
그의 입에서 직접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모두가 승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환호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올 수 없었다.
내가 쓰러뜨린 상대는 공주의 호위.
만약 여기서 내 승리에 환호했다간, 공주의 진노를 사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짝짝짝.
상석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 다 대단합니다. 무척 훌륭한 비무였어요.”
공주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주의 행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마치 허락이라도 받은 듯 모두가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유현! 유현! 유현!”
“와아아아!!!”
“대단하다, 폭풍단장!”
사과를 받긴 했지만, 아직 마음속에 조금씩 남아있던 굴욕감.
그런 굴욕조차 완벽하게 설욕한 승리에 모두가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환호했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많은 걸 배웠습니다.”
“나도···그렇네.”
단무혁은 그리 말하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분노하고 있다.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만약 자신이 좀 더 진지하게 싸움에 임했다면, 이번 싸움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물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싸웠다고 해도, 순순히 패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고개를 숙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은 언뜻 씁쓸해 보였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번 패배로 말미암아 그가 한층 성장할 거라는 사실을.
“폭풍단장. 이곳으로 와주시겠습니까?”
갑자기 나를 부르는 공주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본인이 직접 훌륭하다고 칭찬하긴 했지만, 본래 권력자의 마음이란 갈대보다도 더 이리저리 흔들리는 법.
내가 뭐 하나만 잘못해도, 바로 그걸 꼬투리 잡아서 너 같은 놈이 내 호위를 이겨 먹어?! 하면서 화낼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출처는 회귀 전의 나다.
잘했다고 어깨 두드려주던 놈이 그날 저녁 회식에서 고기 한 점 더 먹었다고 쌍욕을 날릴 줄은 몰랐지.
하지만 확실히 공주는 그 빌어먹을 놈과는 달랐다.
내가 올라올 때까지 만면의 미소를 그대로 유지하던 그녀는 총사령관의 손에 있던 잔과 술병을 받아들이곤 말했다.
“무척 훌륭한 비무였습니다. 황실에 있을 때도 금군 고수들의 비무를 여러 번 본 적 있는데, 오늘 본 둘의 비무도 그에 전혀 뒤지지 않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공주마마.”
“제가 늦게나마 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북방 국경지대의 최고수인 당신에게 술을 내려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가문의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공주마마!”
오오오! 아까의 환호와는 또 다른 의미의 환호가 아래에서부터 들려왔다.
일반 병사가 황실의 일원에게 무언가를 하사받는다? 구국의 영웅 정도가 아니라면 전례가 없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마시면 사라질 한 잔의 술이라고 해도 말이다.
···미래에 그녀가 어떻게 불릴지만 몰랐어도, 조금 더 순수히 기뻐했겠지만.
[흐음···.]
그리고 턱을 괸 채로 공주를 훑어보고 있는 화순만 없었으면 더더욱 그렇겠지.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뭔가 찾기라도 했어?
[이걸 찾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으음, 확실치가 않네.]
인상을 쓴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화순에게 더는 시선을 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에게 술잔을 받는 귀중한 순간에 인상이라도 썼다간, 정말로 황실 모독죄로 목이 잘릴지도 모르니까.
다행히도 그녀는 내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아무런 말 없이 받은 잔 위로 술을 따라줬다.
주향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진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려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귀로 꽂히는 화순의 목소리에 나는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알았다. 이 여자···.]
그의 목소리는 무서우리만치 담담하면서도.
[···구음절맥(九陰絶脈)이야.]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처럼 단호했다.
*****
그 뒤로도 연회는 쭉 진행되었다.
모두가 원하는 만큼 먹고 마시며, 이번 승리를 자축하고, 그 주역인 나와 일 장군을 칭찬하며, 황실과 그 일원인 공주를 칭송했다.
물론 나도 연회를 즐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대한 그런 척을 했다는 게 맞겠지만.
어떻게 마음 편히 놀고 있을 수 있겠냐.
“구음절맥이라니···공주가 일 년 내로 죽는다니···.”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데 구음절맥인 건 대체 어떻게 알았냐? 무슨 맥을 잡아본 것도 아니잖아.”
[맥까지 잡아 볼 필요도 없어. 용천혈이 막혀서 발바닥을 다 닿지 않게 걷고, 천돌혈이 막혀 호흡이 가쁘고, 견우혈이 막혀 어깨 이상으로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해. 어떻게 숨겨보려고 애쓰는 티는 났지만, 가까이서 보면 금방 알지.]
“그걸 다 알아봤어?”
[한 번에 네 몸뚱어리가 삼류라는 것도 알았는데, 그렇게 가까이서 본 사람 몸도 모를까? 좀 믿어라, 이것아.]
“하아, 그래, 알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순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돌아오는 건 미약한 희망조차 끊어내는 확답뿐. 그 대답에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하 공주가 구음절맥에 걸렸다는 사실에 좌절한 건 아니다.
물론 그녀가 구음절맥이라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럼 내가 아는 미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회귀 전 경험해 본 미래와 현재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북해의 왕비가 된 성하는 대체 누구지? 어떻게 7년 뒤까지 살아서 3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거야?”
내 질문에 화순은 잠깐 고민하더니, 혹시, 하고 입을 열었다.
[북해의 비술을 사용한 걸지도 모르지.]
“북해의 비술?”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에 화순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중원인들은 모르지만, 북해에는 예부터 내려온 수많은 비술이 있어. 산채로 영원히 잠들게 만드는 빙면(氷眠), 철에 얼음의 기운을 담아 만드는 만년한철(萬年寒鐵),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라는 빙정같이 말이야. 그리고 그런 비술 중엔···중원에선 불치병이라는 불리는 절맥을 치료할 방법도 있지.]
화순의 말에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미 북해의 인간들과 3년간 살과 창을 맞부딪히며 살아왔기에 알았다.
중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북해에는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을.
“그럼, 설마 그녀가 여기에 온 이유도···?”
[아마 구음절맥을 치료받으러 북해에 가기 전 잠깐 들른 거겠지. 북해로 넘어가기 위해선 여길 반드시 들러야 하니까.]
화순의 설명에 그제야 왜 그녀가 북해로 갔다는 정보가 전혀 없었는지 깨달았다.
민간에선 어느 정도 교류가 있다곤 하지만 북해는 분명히 적국이다.
그런 곳에 황실의 공주가 치료를 받기 위해 넘어간다고 하면 아무리 모두의 사랑을 받는 그녀라 해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처럼 연회라도 있었으면 공주가 여길 찾아왔다는 소문이라도 돌았겠지만···.”
[권능이 없었으면 오늘의 전투는 당연히 대패였을 테니까. 공주가 전면에 나왔을 리도 없고, 연회를 열었을 리도 없지.]
“···거기선 권능이 아니라 내가 없었으면, 이라고 해줄래?”
뭐,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어쨌든 치료를 위해 그녀가 북해에 넘어간 사이, 황실에선 황제의 독살과 황태자의 처형이라는 대사건이 터진다.
그렇게 북해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그녀는 빙궁주를 유혹하여 왕비가 되고, 그렇게 북해의 대군을 이끌고 복수를 위해 명나라로 찾아오게 된다.
“···그렇게 된 이야기군.”
[길거리 연극 같은 이야기지만, 앞뒤는 대충 맞네.]
“그래. ···그 끝이 절망적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야.”
명에서는 잔인한 배신자라 불리고, 북해에선 몸을 팔아 권력을 얻은 창녀라 불리는 게 그녀의 미래다.
길거리 연극으로 했다간 약 하나 팔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다.
[뭐, 결국 역사는 바뀔 수 없다는 거지. 그래도 좋게 생각해. 네가 공주 얼굴을 제일 가까이서 본 마지막 백성···.]
“야, 화순. 너 북해의 비술에 대해서 잘 안다고 했지?”
[···응? 어, 뭐, 그렇지. 근데 그건 왜?]
혹시, 이 새끼···하는 눈초리로 날 바라보는 화순에게 미소를 보여주자,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떨었다.
3년간 같이 살았더니 내 웃음만 보고도 내 생각을 아는구나.
“그 잘난 북해의 구음절맥 치료법. 하나하나 상세하게 읊어봐.”
이제 역사가 바뀌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바꿔주마.
< 성하 공주(2)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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