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하 공주(1) >
어째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걸까.
지금 내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절대 이곳에 있을 수 없다. 아니, 있어선 안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따르면 지금 그녀는···.
“···장님? 단장님? 벌써 취하셨습니까?”
“어? 응?”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을 돌아보자, 장일이 걱정 어린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어, 잠시 뭐 좀 생각하고 있느라 말이야. 무슨 일이지?”
“이번 승전에 대한 축사 말입니다. 단장님이 마무리하셔야죠.”
아, 그래. 지금 승전 기념 연회 중이었지.
원래라면 저녁에 해야 할 일이지만, 오늘 저녁에는 북해악녀···아니, 공주마마가 직접 주관하는 연회가 있어서 점심에 미리 열었다.
“크흠, 그래. 모두 잘 해줬다. 장일이와 복삼이도 부단장답게 부하들을 제대로 이끌어줬고, 다른 녀석들도 모두 잘 싸워줬다. 특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정철이!”
내 말에 저 뒤편에 앉아있던 정철이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아까 총사령관님과 사건 때문에 술을 무서워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
“처음으로 전투에 참여한 것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하게 싸웠다. 잘했다, 정철아!”
“잘했다, 잘했어!”
“으하하! 첫 싸움에 지리나 안 지리나 내기했는데, 이기는 쪽에 걸길 잘했군!”
“젠장, 크게 잃었지만, 쓸만한 신병 들어온 거로 만족해야지!”
내 축사에 모두가 왁자지껄 정철에게 한 마디씩 건넸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그 녀석도, 모두가 자신을 환영한다는 마음은 똑같은 걸 알고 웃으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들었던 잔에 담긴 술을 모두 싹 비운 뒤, 다른 사람들처럼 웃으며 정철이를 바라보던 장일에게 말했다.
“장일아. 네가 애들 잘 먹이고, 숙소에도 제대로 보내놔라. 내일 조회는 오시정(午時正; 12시 정각)에 한다니까 너무 늦게까진 하지 말고.”
“엇, 벌써 올라가시는 겁니까?”
“신병 환영식에 내가 오래 있어 봐야 뭐하겠냐, 방해만 되지. 원래 이런 자리에 높은 사람은 빠져주는 게 예의야. 너도 언젠가 단장 자리에 올라갈 걸 대비해서 기억해둬라.”
“명심하겠습니다.”
“자, 이걸로 술값 계산하고. 남은 일은 네게 맡긴다.”
은자가 가득 담긴 자그마한 주머니를 하나 꺼내 장일에게 건네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으로 주머니를 넣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의 명령, 확실히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한 장일에게 고생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맡기기엔 만사를 설렁설렁 지내는 복삼이보단, 조금 진지한 장일이가 믿을 만했다.
총사령관님도 내일 조회는 조금 늦게 연다고 하셨으니, 녀석들이 취해서 늦을 일은 없겠지.
방으로 올라가자마자 바로 문을 잠근다. 물론 함부로 내 방에 들어올 간 큰 놈은 저 아래에 없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선 나쁠 게 없었다.
[어, 왔냐.]
방에 들어서자마자 날 반기는 화순. 웬만하면 내 옆에 붙어있는 그였지만, 연회가 벌어지는 날에는 방에 있기를 원했다.
자신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는 걸 보는 모습이 썩 즐겁지는 않다나 뭐라나.
혹시나 해서 술 한 잔 올려놓고 제사도 해봤지만, 어림도 없더라.
욕만 죽도록 들었다.
[저녁 연회 때문에 일찍 올라온 거냐?]
“그것도 있고, 마실 정신도 아니니까. 있어선 안 될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는데 어떻게 마시고 있냐?”
[뭐, 그렇긴 하지.]
이미 미래의 이야기를 내게 들어서 알고 있던 화순은 내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짜야? 그 여리여리한 아가씨가 미래에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믿기 힘들다는 듯 내게 묻는 녀석에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녀가 정말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믿기진 않았다.
실물을 직접 본 지금은 물론, 회귀 전에도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수많은 명나라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런 어여쁜 공주님이 미래에 황제를 독살하고 북해로 도망쳐버리다니···.]
사람은 겉으로만 봐선 모를 일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하는 화순의 모습에 나도 이마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나라의 보물이라 불리며 만백성의 사랑을 받던 그녀는 패륜과 반란. 이 두 가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대죄를 동시에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히.
“권력이란 무서운 법이지. 자신의 피붙이에게도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으니까 말이야.”
황제라는 자리 때문이었다.
[당대 황제가 나이가 몇이었지?]
“작년에 종심(從心; 70세를 이르는 말)을 넘었어. 거기에다가 당시 세간의 소문을 들어보면 20년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하다고 하더라고.”
[그 정도라면 일황자도 몸이 달아오를 만하지. 태자로 책봉된 지만 해도 20년은 넘었잖아?]
“정확히는 23년이지.”
화순이 어림짐작하며 넘어간 연도를 정확히 수정해준다.
내가 태어난 그해, 일황자가 태자로 책봉되었다고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말씀하셨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자라면 무척 훌륭한 사람이 황제가 될 거라면서 기뻐하셨던 것도 말이다.
다른 건 모두 맞추신 어머니도, 그것까진 맞추지 못하셨다.
“모두가 속았지. 황제가 붕어(崩御)한 날, 그가 우는 소리가 북경 전역에서 들려왔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정성을 보인 사람이 그런 짓을 벌였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하지만 들켰으니까 미래에도 알려진 거겠지?]
“당연하지.”
일황자의 죄악을 밝혀낸 사람은 바로 이황자와 삼황자였다.
정정하던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수상히 여기던 두 사람은 일황자의 뒤를 캤고, 결국 일황자와 그의 동조 세력이 황제를 암살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 사실이 공표되자, 조정은 물론 전 중원이 발칵 뒤집혔다.
한낱 천민의 집안에서도 벌어지면 몇 개월은 세간에서 오르내릴 패륜의 죄가 다름 아닌 황실에서 벌어졌다!
모두가 경악했고, 곧 그 경악은 격렬한 분노로 변해 일황자에게로 향했다.
만민의 지지를 받던 일황자의 명성은 바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에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는 소리가 북경 전역을 뒤엎었다.
단 하루도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마교 북경 지부에서 날아온 한 줄의 말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조 세력의 수장이자, 그의 친동생이었던 성하 공주의 행방은 당시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일황자가 죽기 직전에 빼내 어디론가 보냈다, 일황자를 마지막까지 믿고 따르던 충신이 그녀를 숨겨줬다, 어느 조정의 높으신 변태에게 팔려나갔다, 온갖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중 무엇하나 밝혀진 건 없었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진 건 7년 뒤.
내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았던 30살 무렵이었다.
“설마 북해로 넘어가서 그곳의 왕비가 되어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그리고 명나라 침략 부대의 총사령관이 됐을 것도 말이야.”
그녀가 부리는 북해의 부대는 정말 파죽지세라는 말이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북방을 헤집어놨다.
본래라면 그것을 막아내야 할 병사들도 너무나 부족한 상태였다 바로 이황자와 삼황자 간의 내전 때문이었다.
일황자를 끌어내린 것까진 좋았지만, 두 사람의 동맹은 딱 거기까지였다.
다음 황제의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은 다투기 시작했고, 곧 그 싸움은 황실과 조정을 넘어 전 중원까지 퍼졌다.
피로 강을 이루고, 시체로 산을 쌓은 내전 끝에 결국 이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동안 약화한 국력이 누군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순식간에 회복될 리가 있나.
결국 북방의 삼성을 점령당한 명나라는 북해에 항복에 가까운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내밀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내가 회귀하기 직전까지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명나라의 보물이라 불리던 성하 공주는 북해의 악녀라 불리며 모두의 공포와 분노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 말이다.
[그런데 넌 용케도 그걸 다 안다? 마교에서 말단이었다면서?]
놀랐다는 듯 묻는 화순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정보란 원래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거든. 특히나 호사가들이 좋아할 만한 이런 이야기들은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며칠만 흘러도 금방 전 중원에 나돌아. 그걸 규합하는 거야 간단하지.”
원래 그런 걸 하는 게 내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하지. 원래 그녀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북경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것도 황태자의 옆에.”
황제의 독살 사건은 정확히 3개월 뒤, 초겨울에 벌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그녀가 북해에 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자기 사람을 보러 온 거 아냐? 너희 총사령관 말이야.]
“일년 사이에 건강하던 황제가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는 소문이 북경에 파다해. 그런데 지금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로 최측근을 보러 온다? 그건 말이 안 돼. 정말 급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쓰겠지.”
[흠, 그건 그렇네. ···그럼 대체 告?]
“그걸 모르니 답답하다는 거 아냐. 하아···설마 내가 한 일 때문에 뭔가 미래가 바뀐 건 아니겠지?”
[겨우 부대 하나 만든 것 때문에 공주가 여기까지 온다고?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알지?]
“그건 그렇지···.”
서로 여러 의견을 꺼내 보지만,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지금 여기 있을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화순은 에잇! 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우리 둘이서 머리 맞대고 평생 고민해봐야 답은 안 나와. 그러니 가보자.]
“어디로?”
[그 공주님을 보러. 오늘 저녁 연회 있잖아. 거기에 나도 한 번 가보게. 가까이서 보면 뭔가 나오겠지.]
화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역시 침상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느라 알지 못했지만, 이미 창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곧 연회가 시작될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주최하는 연회가.
*****
내가 화순과 함께 연회장에 도착했을 땐, 다행히 연회가 아직 시작하기 전이었다.
본래라면 흔히 열리는 연회에는 뒷자리였던 내 자리도 오늘만큼은 상석에 가까웠다.
아니, 가깝다 수준이 아니라 그냥 바로 총사령관 옆이었다.
누구보다도 공주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자리.
[운이 좋네. 저 멀리서 어떻게 보나, 고민하고 있었거든.]
웃으며 말하는 화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착석했다.
‘대화나 표정 변화도 조금도 놓치지 말고 자세히 읽어내. 상황에 따라서 여기서 나갈 시간을 조정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겉으로 그렇다는 거고, 마음속으로는 최대한 그가 움직여야 할 방향을 잡아주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하나, 둘 사람이 들어서자 조용하던 연회장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례 없던 대승에 대한 기쁨 어린 목소리부터 부대를 지휘한 일장군에 대한 칭찬. 그리고 무엇보다 갑자기 나타난 성하공주를 찬양하는 목소리까지.
점점 사람들의 대화보단 그저 목소리를 높일 뿐인 고성에 가까워지던 그때.
“공주 마마와 총사령관님 납십니다!”
순식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보통은 쉬이 볼 수 없는, 장군갑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총사령관의 모습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 뒤에 집중되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아름다운 여인과 그 뒤를 호위하며 뒤따르는 멋들어진 청년.
마치 옛 이야기책에서나 볼법한 공주님과 호위무사의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니, 진짜 공주님과 진짜 호위무사가 맞잖아.]
···뭐, 그렇긴 하지.
어쨌든, 그녀의 등장에 모두가 하던 말도 멈춘 채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살면서 한 번 보기도 힘든 공주의 실물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 전에 미모 때문에라도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흠···.]
‘···미모에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관찰해라?’
[아니, 미모 때문이 아니라···아니다, 그냥 착각이겠지.]
웬일로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화순의 모습에 놀리듯 말을 던지자, 녀석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무 큰 관심은 아서라. 어차피 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여러 의미에서 말이야.
제일 상석으로 향한 총사령관은 잠시 좌중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는 우리 모두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의 금지옥엽. 성하 공주마마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자리네. 자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도로, 원하는 만큼 즐기도록 하게나.”
“예! 알겠습니다!”
총사령관의 웃음기 섞인 당부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뜻이냐?]
‘너무 취해서 추태를 부리지 말라는 거야. 총사령관님이 연회에 참석하시면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지.’
그렇구만. 이렇게 큰 연회에는 참석해본 적 없던 화순이 내게 뜻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 아닌 공주가 열어준 연회에서도 저걸 말할 줄이야. 참 여러모로 유쾌한 분이야.
총사령관의 말을 알아들은 듯, 입을 가리고 쿡쿡 웃던 공주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총사령관께서 축사를 해주셨으니, 저는 이번 연회의 주인공에게 한 잔 올리지요. 일 장군?”
“예! 공주마마!”
마치 자신을 호명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일 장군은 공주의 말에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물론 잔을 가져가는 건 절대로 잊지 않았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장군들이 바로 우리 명나라의 기틀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전투에서도 지금과 같은 훌륭한 전과를 기대하겠습니다.”
“네! 공주마마! 설사 백만의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온 힘을 다해 막아서겠습니다!”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 장군을 잔뜩 치하하던 공주는 그의 대답에 만족한 듯 웃으며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잔에 가득 따라진 술을 바로 한입에 들이켠 일 장군은 절을 올리더니, 바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총사령관은 마치 그녀의 행위를 이어받듯,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어 올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제 부하에게 술을 내려주셨으니, 저도 공주마마의 부하에게 술을 내리는 것이 맞는 이치겠지요. 자, 자네도 한잔하게나.”
그가 술병과 잔을 내민 상대는 공주의 뒤에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호위였다.
일선의 군에서 흔히 보이는 잔 나누기다.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화친을 도모하는 일로, 주로 외부에서 누군가 찾아왔을 때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선의 이야기. 저런 머리가 굳은 딱딱한 사내라면···.
“말씀은 감사하지만.”
아, 역시나.
뒤를 더 들어 볼 필요도 없이 이미 앞에서부터 이야기의 결말이 짐작된다.
그리고 그걸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역시 다른 장군이나 참모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공주님을 호위해야 할 몸으로써 가능한 임무 중 술은 삼가고 있습니다. 그 잔은 다른 자에게 건네도록 하십시오.”
뭐, 정론이다. 임무 중에 술을 참는 건 칭찬할 일이지. 나도 전쟁 전엔 가능한 술을 삼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통 상황에서 이야기고, 지금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잔 나누기는 기본적으로 화친을 도모하기 위함이지만, 또한 선전포고의 수단이기도 하다.
잔을 받지 않음으로서 우리는 당신들과 화친을 맺지 않겠다, 라고 밝히는 것이다.
그 뒤는? 당연히 전쟁이지. 바로 눈앞에서 선전포고를 때리는데 웃으며 넘어가 줄 군인이 어딨겠는가.
그것도 비밀 회담같이 둘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군 내 중요인사 대부분이 모이는 연회에서 말이다.
저 콧대 높은 호위분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란 건 당연히 여기 있는 모두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론 이해 못 하는 일이란 게 있잖아?
[지금 너도 그러고 있어. 공주의 호위병한테 콧대 높은 호위분이 뭐냐.]
···어쨌든, 그 한 번의 거절 때문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닥까지 떨어졌다.
총사령관과 공주의 앞이라 들고 일어서지만 않을 뿐, 그의 행동에 누구 하나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마치 불붙은 진천뢰처럼 지금 당장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
“단무혁!”
그런 급박한 분위기를 환기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총사령관님이 주신 술을 거절하다니!”
“하지만 공주님···.”
“여긴 저의 제안으로 열린 연회입니다. 그런데 제 호위라는 사람이 그들을 믿지 못해 술을 입에도 데지 않으려 한다면, 누가 우리를 반기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젊은 호위는 뭔가 더 변명을 해보려 했지만, 서슬 퍼런 공주의 목소리에 결국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주위의 분위기도 한껏 풀어졌다.
그의 행동에 분노하긴 했지만, 공주가 직접 화를 냄으로써 군의 자존심을 살려준 덕분이었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총사령관에게 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총사령관님.”
“허허허, 아닐세. 자신의 임무를 우선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공주마마께서 믿을만한 심복을 얻은 게 기쁘네. 하지만···기껏 들어 올린 술잔을 그냥 내리긴 아깝군.”
힐끔, 그 말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내게 눈치를 주는 총사령관.
저 눈빛. 알고 있는 눈빛이다.
뭔가 수상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눈빛이다.
분명히 이 흐름대로라면···.
“아하! 그렇다면 이렇게 하지.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으니, 비무로 한 번 흥을 돋우는 걸세. 이 술은 승자에게 주도록 하고. 어떤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알겠습니다.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좋네, 좋아. 그럼, 유현!”
“네, 총사령관님.”
“자네도 그를 도와 흥을 돋워 줄 수 있겠나?”
역시나.
“···명에 따르겠습니다.”
“허허허, 좋군, 좋아. 금군의 젊은 기재와 북방 국경지대 최고 고수의 대결이라! 아주 대단한 대결을 보게 됐어!”
처음부터 이러실 속셈이었으면서, 말은 참 잘하셔.
그래도.
공주의 뒤에 서 있던 단무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흥미와 호승심이 반씩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도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도 한 번쯤은 금군의 고수와 싸워보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진짜 고수와 겨뤄봄으로써 알고 싶었으니까.
< 성하 공주(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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