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단(2) >
둥둥둥둥둥~
뿌우~
한창 적진을 유린하고 있던 도중, 양쪽 본진에서 들리는 북과 뿔피리 소리에 휘두르던 창을 멈췄다.
“응? 이 소리는···?”
싸움을 멈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 옆에서 한창 전과를 올리고 있던 우리 단원들과 그런 그들과 싸우고 있던 북해의 전사들도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모두 몸을 뒤로 돌려 전장을 빠져나갔다.
적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갑작스레 멈춘 전투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더 벌이는 자는 없었다.
그 북과 뿔피리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에서 동시에 무조건 후퇴명령을 내리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위에서 보니 북해의 천막이 조금 시끄럽던데. 저쪽에서 뭐라고 한 모양이야.]
내 혼잣말에 답해준 건 공중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던 화순이었다.
[거리가 좀 있어서 목소리는 못 들었지만, 병사 하나가 나와서 백색 깃발을 들고 우리 쪽으로 가더라고.]
‘백색 깃발?’
보통 백색 깃발은 항복, 혹은 전언의 의미 가진다.
하지만 북해의 전사들은 대부분 항복을 할 바엔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 그쪽은 제외다.
그렇다면 전언이라는 건데 말보단 주먹이요, 주먹보단 칼이라는 북해에서 적에게 전언을 보낼 일은···.
아, 아니다. 하나 있었다.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멈출 이유가.
[너도 비슷한 생각인가 보네.]
화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자그마한 가능성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본 부대 제일 앞에서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일장군의 모습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저쪽의 대장이 전언을 보내왔네.”
“생사결 신청입니까?”
내 말에 일장군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처음 들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자네는 그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군.”
“그에게 남은 패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이미 전투는 크게 기울어 있었다.
그들이 맹신하고 있던 순병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내 뒤를 이어 들어 온 폭풍단원들은 나와 함께 적을 유린하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1만의 본진은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으니, 이대로 쭉 전투를 이어나가면 우리의 승리는 자명했다.
저들이 그런 상황을 뒤집을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미안하네. 폭풍단이 최선을 다해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이 제안을 포기할 순 없었네.”
“아뇨, 괜찮습니다. 장군님은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일장군이 일기토를 받아들인 이유 역시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기가 떨어지고,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해도 북해의 전사다. 병사 한 명, 한 명의 질은 우리 병사들을 한참 상회한다.
전쟁에서 패배할 린 없지만, 저들이 진열을 가다듬고 다시 반격이라도 한다면 우리 측 피해가 클 건 분명했다.
일장군은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번 생사결을 받아들인 것이다.
“자네를 믿은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게.”
“걱정하지 마십쇼.”
과연 자신이 정말로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얼굴에서 짙은 후회를 보이는 일장군에게 웃으며 답했다.
“장군님은 절대 틀린 선택을 하시지 않으셨으니까요.”
*****
“적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잔뜩 피로한 기색으로 천막에 되돌아와 소식을 전한 전령에게 쿠팔라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고생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해라.”
다분히 계산적인 행동.
이미 본인의 성격을 보여준 만큼, 그것을 어떻게든 숨기기 위한 보여주기식 친절에 불과했다.
그런 미래를 생각하는 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은 복마전인 북해빙궁에서도 꽤나 이름을 날리던 고수다.
하지만 상대는? 죽으러 온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국경부대의 병사 중 하나. 비교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고수라는 소문은 있으나, 오합지졸 중 고수라고 해봐야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당당히 결투장에 나섰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원형의 장소. 한쪽은 북해의 전사로, 반대편은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결투장에는 북해라곤 믿기 힘든 기이한 열기로 가득했다.
본래 명과 북해의 전쟁에선 생사결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자부심이 가득한 북해의 전사들은 명의 고수를 인정하지 않았고, 명나라에서도 귀찮게 생사결 같은 걸 성립시킬 바엔 그냥 병사로 밀어붙이는 싸움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병사를 아끼는 장군과, 패배해선 안 되는 새 부족장 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희귀한 경우가 아니면 성립될 리 없었던 생사결이었다.
그런 대사건을 직접 보는데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끓어오르는 흥분 속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북해빙궁의 고수, 쿠팔라.
국경지대의 전신, 유현.
서로를 향한 투지를 숨기지 않고 뿜어내는 두 사람과 그런 그들을 보며 더욱 흥분하는 주위 사람들.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건 쿠팔라였다.
“이상한 주술은 사용할 생각 하지 마라. 위대한 북해의 신의 이름 아래,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도록 해라.”
“내가 할 말이다. 너야말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도록.”
유현의 말에 쿠팔라의 눈이 커졌다.
북해의 언어로 말을 건넸는데, 그걸 알아들은 유현이 유창한 북해의 언어로 답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을 할 줄 아는군?”
“3년간 칼을 맞부딪히며 살다 보면 말 정도는 알아들어야지.”
“크흐흐, 이거 아쉽군.”
유현의 대답에 쿠팔라가 등에 있던 대검을 꺼내 들었다.
보통의 장정이라면 드는 것조차 버거웠을 대검을 한 손으로 자유자재로 휘두르던 쿠팔라가 씩, 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의 말을 할 줄 아는 명나라 인간은 희귀한데, 그걸 내가 죽일 줄이야.”
“걱정하지 마라.”
챙! 그에 맞춰 유현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날부터 몸통까지 통짜 쇠로 이루어진 묵색 창.
그가 집을 떠나올 때부터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바로 그 무기, 철혼(鐵魂)이었다.
“너희 나라에 북해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은 많을 테니까.”
“···이놈!”
순간 유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멈칫했던 쿠팔라는 늦게나마 그 말을 이해하고 화를 냈다.
북해의 땅에 북해의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은 많으니, 너 같은 건 얼마든지 죽여주겠다, 라는 뜻이란 걸 알아챈 것이다.
“한순간에 끝내주마.”
“나야말로.”
거기까지 말한 두 사람은 다시 멀어졌고, 그 두 사람과 비슷한 거리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천막에서 쿠팔라의 옆에 있던 그 사내였다.
“지금부터 생사결의 규칙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승패는 누구 하나가 항복하거나, 목숨을 잃을 때까지 진행됩니다. 설사 항복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 생살여탈권은 승자에게 돌아갑니다. 만약 생사결에 누군가 끼어든다면, 그렇게 끼어든 편을 패배로 간주, 항복했을 때와 같이 판정합니다. 동의하십니까?”
두 사람 모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결투장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둘만 남은 결투장.
시작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준비하라며 숫자를 세는 사람도 없었지만, 주위의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쾅!
먼저 움직인 건 쿠팔라였다.
땅을 박차고 나간 그는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는 대검을 마구 휘둘렀다.
쾅! 쾅! 쾅!
안 그래도 쿠팔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유현이, 대검에 비해서 얇은 창으로 막아내는 건 너무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에 북해 측 병사의 사기가 찌를 듯 오르고, 그에 반비례하듯 명 측 병사의 사기가 내려갔다.
하지만 직접 맞상대하는 두 사람의 상황은 달랐다.
‘철벽같다!’
쿠팔라는 이를 꽉 깨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첫 번째 공격으로 창과 함께 위아래로 유현의 몸을 반 토막 내버리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지만 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어두워졌다.
그 모든 공격이, 전력을 다한 공격이 모두 하나도 통하지 않은 탓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한 단어.
패배.
‘그럴 리가 없다!’
쿵!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내공을 끌어모아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의 모든 검격을 합친 듯한 강력한 한 방!
쾅!
단숨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병사들의 환호와 절망이 들린다.
승패가 났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딱 한 사람.
유현을 빼곤.
후웅.
최후의 일격을 날린 직후, 승리에 기쁨에 취해있던 쿠팔라는 문뜩 생각했다.
바람이 분다, 라고.
콰아아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결투장의 중심지에서 강력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자욱한 흙먼지가 가라앉은 그 자리에는 반쪽짜리 검을 든 채 멍한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는 쿠팔라와 창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유현.
그리고 아직도 유현의 팔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강력한 기의 와류(渦流)가 있었다.
그 순간 쿠팔라는 깨달았다.
그 누구도 뚫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순병을 어떻게 뚫었는지.
‘이것이···’
그리고 왜 그가 폭풍이라 불리는지도.
‘···전신!’
“패배를 인정하나?”
누가 봐도 자명한 승패.
쿠팔라가 졌고, 유현이 이겼다.
주위의 병사들은 물론, 세 살 먹은 아이조차 알만한 상황이었지만 쿠팔라는 일어섰다.
“아직, 이다!”
반쪽짜리 검을 잡고 쿠팔라는 이를 악문 채로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무모한 행동, 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직접 무기를 맞대본 유현의 내공은 절정의 경지에 있는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현이 조금 더 내공이 많을 순 있었지만, 승패를 나눌 만큼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공격이 자신들의 내공 수위에서 두 번 이상은 사용할 수 없는 무공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미 순병을 쓰러뜨리느라 한 번, 그리고 자신에게 쓰느라 두 번.
그게 바로 놈의 한계다.
그렇게 생각한 쿠팔라는 검을 들고 유현을 향해 휘둘렀다.
저 당당한 모습도 한낱 허세일 뿐이다. 저자는 지금 서 있을 힘도 없다!
그리 생각한 쿠팔라의 옆구리로, 한 줄기의 바람이 흘렀다.
그리고.
콰아아앙!!!!
세 번째 와류가 전장에 휘몰아쳤다.
*****
생사결이 끝나자, 북해의 전사는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부족으로 돌아갔다.
물론 아무것도 내놓지 않고 돌아간 건 아니었다.
기마병이 타고 있던 300필의 군마와 함께 아직 부서지지 않았던 순병의 방패를 포함한 무기들을 모두 놓고 갔으니까.
[거기에 그놈 머리도 하나 있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머리를 어디에다 두라는 거야?’
[···네 숙소?]
“미친놈.”
“네?”
“아, 아냐. 나한테 싸움을 걸었던 그놈 얼굴이 다시 생각나서.”
“하하하! 확실히 멍청이긴 했죠. 우리 단장님한테 당당히 생사결을 거는 꼬락서니라니!”
화순의 헛소리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대답에 변명하자, 정철이가 잔뜩 흥분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들어줄 만했던 찬양이 좀 심각한 영역으로 들어서자 바로 그 말을 멈췄다.
참고로 머리는 얻고 싶다고 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미 놈은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천마창법 5성 오의. 와류(渦流)의 힘은 그 정도로 강력했다.
나와 똑같은 절정의 무인이라고 해도 승부조차 안 될 정도로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권능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승패를 승복하지 못한 쿠팔라-패배 후 후퇴하던 이들에게서 그의 이름을 들었다-가 달려든 건 사실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내가 두 번째 와류를 썼을 때, 난 내 모든 내공을 사용했으니까.
그가 몰랐던 건 딱 하나.
내 몸에 깃든 권능의 존재였다.
‘왜 천마가 괴물이라고 불렸는지 정말 몸소 느끼는 중이야.’
[당연하지. 이 정도도 안 된다면 어떻게 권능이라 불리겠어?]
두 번째 와류를 쓴 직후, 내 내공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권능은 임무로 획득한 내공을 순식간에 회복시켜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가진 내공. 즉, 1갑자 반의 내공 안에서는 끝없이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진 무공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능력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성안으로 복귀하자 어마어마한 환영인파가 우리를 맞이했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부터, 성에서 생활하는 민간인들까지. 성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모여 우리의 승리를 축하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리의 승리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당연히 총사령관이었다.
“충! 일 장군,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충! 폭풍단장, 작전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하하하! 일 장군, 폭풍단장! 어서 오게! 모두 고생했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우리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총사령관에게 우리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그 순간 우리의 머리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미성.
들어본 적 없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면사를 뒤집어쓴 여인과 그녀를 호위하듯 뒤에 딱 붙어있는 사내가 보였다.
“특히 폭풍단장, 당신의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봤습니다. 정말 훌륭하더군요.”
“가, 감사합니다.”
그 정체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말투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고귀함에 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높은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아득히.
흠칫. 순간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에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시대에, 이 나이대에, 고귀한 자리에 있는 여성이라면 설마···.
하지만 바로 그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불가능하다. 그녀는 지금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최소한 3개월 후에야 있을 사람이었다.
“아,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이번 전쟁의 영웅 두 분에게 얼굴을 가린 채로 맞이하다니.”
그리 말하며 스르륵, 자신이 뒤집어쓰고 있던 면사를 벗는 여인.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까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인사하시게.”
황실의 일원.
“황실의 일원.”
황제 폐하의 금지옥엽.
“황제 폐하의 금지옥엽.”
그리고.
“명나라의 보물인 성하 공주마마시네.”
명나라의 배신자, 북해악녀 성하.
그녀가 내 앞에서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폭풍단(2) > 끝
ⓒ 거믄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