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단(1) >
[전원 출전은 오랜만이네.]
‘응, 그러게.’
화순의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이 대화법도 이제는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역시 신병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런 것도 있지만, 역시 저쪽 대장의 무력이 신경 쓰여서 말이야.’
[응? 저쪽 대장이 누군지 벌써 알았어?]
‘아니, 아직 파악은 못 했지만, 대충 누군지 짐작은 가서. 저번에 북해빙궁에서 누군가 쫓겨났다는 소식이 들어온 적 있잖아?’
[아, 그때 그거?]
내 말에 화순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쉬이 들어오는 일이 없는 귀중한 북해빙궁의 정보라 금방 떠오른 것이다.
[한 멍청이가 술에 취해서 일궁주의 말을 참수했다는 소식 말이지? 듣고 한동안 바닥을 굴렀지. 그런 또라이가 있구나, 하고.]
‘그래, 그때 그거. 내 예상이지만 아무래도 그놈이 바로 저놈들을 이끄는 수장 같아.’
[뭐? 정말로?]
‘북해빙궁의 기마병이 300명이나 나타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함께 나갔다는 기마병의 수도 일치하는 걸 보면 아마 맞겠지.’
[흐음, 그렇구만. 그래서 네가 아까 그렇게 당당히 총사령관 앞에서 말했던 거군.]
‘뭐,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지만.’
어차피 적의 정체를 파악했다! 라는 걸로 사기를 높일 속셈이었다. 그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정보를 얼마나 진실인 듯 말하냐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폭풍단 신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
“첫 출전이 두렵진 않나?”
“결국 언젠가 일어날 일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단장님의 옆에서 첫 전투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아까 객잔으로 찾아왔던 신병, 정철의 힘찬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총사령관이 그렇게 말을 한 이유를 설명한 덕분일까, 내 예상보다도 훨씬 활기찬 목소리였다.
신병은 이런 게 참 좋아. 좌절했다가도 금방 털어내고 일어서거든.
내가 신병일 때도이랬지.
4년짜리 내공 믿고 첫 전투부터 선봉으로 달려들었다가 크게 다칠 뻔했을 때도 털어내고 일어섰고.
반년 차에 포로가 된 장군을 탈출시키려다 2주간 겨울의 북해에서 생존했던 그때도 털어서고 일어섰고.
갑자기 높아진 명성 때문에 북해의 절정 고수들이 나와 싸우고 싶다고 몇 명씩 달려들어 왔을 때도 털어서고 일어섰지.
·········.
힐끔, 위풍당당한 얼굴로 내 옆을 걷는 정철이를 바라봤다.
···내 신병 시절은 왜 이따위였냐.
[뭐, 거의 자업자득이지만 말이야.]
···반박을 못 한다는 게 슬플 뿐이다.
하지만 내 뒤로 들어온 녀석들부턴 그런 끔찍한 신병 시절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내가 그런 꼴을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장팔아! 얘 옆에 딱 붙어서 잘 지켜줘라!”
“걱정하지 마십쇼, 단장님! 세 살짜리 아이한테 붙어있는 어미처럼 딱 붙어서 지킬 테니, 크하하!”
내 몸에서 5할 정도 살을 덧붙인 몸집을 가진 장팔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옆구리에는 똑 닮은 커다란 도 한 자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폭풍단은 항상 활기차군. 이런 큰 싸움 앞에서도 말이야.”
“덕분에 다루기도 힘들기 그지없습니다.”
내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던 일장군이 발걸음을 늦추더니, 나와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건넸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다루기 힘들기는커녕 어찌 써먹지도 못했을 걸세. 그냥 말썽꾼 취급이나 받았겠지. 그들이 이런 정예 병력 취급을 받는 것도 다 자네의 공이야.”
“저는 그저 살고 싶어 하는 놈들끼리 뭉쳐 놓은 것뿐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주신 건 총사령관님과 일장군님이시죠.”
당시 장군이던 총사령관과 그의 부관이었던 일장군이 아니었다면 폭풍단장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믿어 준 두 사람은 폭풍단 설립을 끝까지 추진했고, 그렇게 우리는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준 건 자네였네. 그리고 이번 전투도 말이야. 자네가 없었다면 이번 전투도 훨씬 힘들었겠지.”
“과찬이십니다.”
“그러니 잘 부탁하네, 폭풍단장. 이번에도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게나.”
탁탁. 내 어깨를 두들긴 일장군이 다시 말을 몰아 앞으로 향했다.
[얼굴에 너에 대한 신뢰가 가득하네. 우리의 승리를 정말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어.]
그의 표정을 보고 온 화순이 내게 바로 설명했다.
그러시단 말이지.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게 보답을 해드려야지.’
끼기기긱.
거대한 성벽의 문이 열리고, 그 너머로 광활한 평야와 함께 그들이 보였다.
우리의 적. 북해의 전사들이.
*****
같은 시각. 성벽 위.
총사령관은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채 거기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의 부대장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천막에서 아까의 자신들처럼 이번 전투에 대해 회의를 하는 걸까?
총사령관은 눈가를 찌푸리며 그것을 바라봤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그것을 투시할 능력은 없었다.
한참을 그곳을 째려보고 있던 그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군요, 총사령관님.”
마치 은쟁반 위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 곧 전쟁이 벌어진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에 총사령관은 반색하며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두꺼운 면사를 쓴 한 명의 여인과, 그 뒤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아, 공···크흠, 오셨습니까.”
그녀를 부르려던 총사령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벽 위를 지키고 있던 병사는 여전히 있었다.
면사를 쓴 여인은 그런 그의 모습에 킥, 하고 웃음을 짓더니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넸다.
“당연히 사령관실에 계실 줄 알고 찾아가 봤는데 없으시더군요. 찾아오느라 고생하였습니다.”
“허허, 죄송합니다. 이번 전투만큼은 꼭 보고 싶은 마음에 말씀도 드리지 못하고 왔군요.”
“호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총사령관이 전투를 보는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겠습니까?”
“거짓말.”
총사령관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여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저 면사 아래로는 날 흘겨보고 계시겠지. 오랫동안 모셔왔던 만큼 그녀의 성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던 총사령관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저까지 잊고 가신 전투가 그냥 평범한 전투라니, 제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요?”
“허어, 이거 이 늙은이의 심장이 버티질 못할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럼 말해주세요. 왜 저까지 잊고 이 전투를 보러 오신 건지.”
출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벽의 문이 열리는 동시에 일장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던 총사령관도 바로 전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명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총사령관님?”
아, 이건 큰 실수다. 여인의 목소리에 그는 직감했다.
“아깐 장난이었지만, 이젠 진심이에요. 정말 왜 그러시는지 말씀해주시기 전까진, 절대 자리를 안 벗어날 거예요.”
“허, 허허. 이거 너무 주책이었군요.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죠.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린 총사령관은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국경부대의 선두.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한 남자를.
“보여드린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저자는···누구죠?”
“저희 국경지대의 자랑이자, 북해의 공포. 폭풍단의 단장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건 바로 유현이었다.
주위의 다른 기마병이 타는 것에 비하면 훨씬 유약해 보이는 말을 탄 유현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겨우 선두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남자가 그리 대단한가요?”
“허허, 물론이죠. 다른 이들은 그를 전신이라고도 부를 정도입니다.”
“전신이요?”
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총사령관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면사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그녀를 모셨던 그는 그녀가 면사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총사령관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녀 대신 뒤에 있던 사내에게 물었다.
“저 친구에게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겠나?”
“싸우는 모습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무표정을 고수하던 사내는 총사령관의 질문에 이마를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승마 솜씨는 좋은 듯하군요. 저 나귀와 다를 바 없는 말로도 꿋꿋이 선두를 지키는 걸 보면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지, 승마 솜씨 또한 우리 부대에서 둘째가라면 서럽지. 하지만.”
휘잉.
총사령관이 말을 멈춘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항상 매섭기 그지없는 북해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마치 포근히 감싸지는 듯한 부드러운 바람에 면사의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무공 솜씨는 그 이상이지.”
“이럇!!!”
저 멀리서 성벽 위까지 들리는 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세 사람의 대화 주제였던 유현이 본대와 멀리 떨어져 혼자 적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저자는 대체 무얼 하는 겁니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면사 여인 뒤에 있던 사내였다.
방금의 무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사내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앞에서 순병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저렇게 홀로 돌진하다니! 자살행위입니다! 당장 저자를 막아야 합니다!”
“허허허, 걱정하지 말게. 처음 보면 다들 놀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를 말리는 총사령관의 얼굴은 평온. 아니, 그것조차 넘어선 무언가였다.
여인은 생각했다. 그것의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신뢰라고.
총사령관은 폭풍단장이라는 사내를 그 정도로 믿고 있었다.
“허나 걱정하지 말게. 그는 자신을 가지고 달려가는 거니까.”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짙게 깔린 믿음의 목소리에 여인은 유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믿음의 이유와 결과를 알고 싶었다.
그 순간 여인은 알아차렸다.
저 남자가 양손에 꽉 쥐고 있는 두 자루의 창에서, 아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던 바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바람은 곧이어.
콰아앙!!!
폭풍이 되어 적을 덮쳤다.
*****
“뭐냐!”
처음에는 착각이라 생각했다. 적은 한낱 일반 병사들. 그중에서 자신조차 두려움을 느낄 고수가 있으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막을 박차고 들어온 전령의 급박한 목소리와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의 폭풍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저, 적의 공격입니다!”
“뭐얏?! 순병은, 순병은 뭘 하고 있던 거냐!”
“저, 정면의 순병은 몰살당했습니다!”
“뭐라?!”
콰직!
자신에게 보고하고 있던 전령의 목을 낚아챈 쿠팔라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공포에 잠식된 전령의 눈. 과연 그 공포는 자신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쿠팔라는 까득, 이를 갈며 그에게 말했다.
“순병이 모두 몰살당했다고? 거기에 한 치의 거짓도 없느냐?!”
“그,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중갑기마병이라도 데리고 온 것이냐, 아니면 포를 끌고 온 것이냐?”
둘 중 하나라면 네놈의 목숨은 없다! 쿠팔라는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전령을 노려봤다.
그 두 가지 가능성 외엔 답이 없다고 쿠팔라는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과 휘하 기마병도 삼중으로 방어 중인 순병을 뚫을 순 없다.
그런데 일반 병사가 그것을 뚫는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전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쿠팔라의 기대를 한참 벗어났다.
“저, 적은 홀로 쳐들어왔습니다! 혼자서 정면의 순병을 몰살시키고 파고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한참 멀리.
“뭐, 뭐라고?!”
“폭풍단장이야···.”
믿을 수 없는 전령의 말에 깜짝 놀란 쿠팔라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풍단장이 직접 참전한 거야, 그거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야!”
사내의 말은 마치 마른 풀에 붙은 불길과도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만연하던 취기는 이미 씻은 듯 가셔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숨길 수 있으니까 두려움.
그리고 공포였다.
“폭풍단장이 직접 참전했다면 이번 전투는 답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후퇴를···.”
“헛소리!”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의 말에 쿠팔라는 상 위에서 발을 구르며 크게 소리쳤다.
쨍그랑!
위에 있던 술병과 음식이 담긴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폭풍단장이 주는 공포와 쿠팔라가 내뿜는 살기를 버티는 것에 모든 신경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괴상한 주술을 쓴 게 분명하다! 홀몸으로 삼중으로 이루어진 순병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거기엔 쿠팔라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자신뿐만 아니라 북해빙궁에 널려있던 자신 이상의 고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명나라의 병사 따위가 그걸 뚫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쿠팔라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폭풍단장? 흥! 그 삼류 놈의 거짓부렁이 주술을 내가 직접 부숴주겠다! 네놈!”
“네, 넵!”
가장 가까운 곳에서 쿠팔라의 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전령이 일어섰다.
공포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지만, 억지로 버텼다.
여기서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자신의 목숨은 끝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적장에게 달려가서 알려라!”
으득.
쿠팔라는 이를 갈았다.
설마 북해빙궁에 있을 때부터 무시하던 명나라의 병사에게 이렇게까지 당할 줄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 전투부터 패배했다간, 아무리 무공이 강하더라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쿠팔라가 폭풍단장과 생사결을 원한다고!”
< 폭풍단(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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