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의 권능(1) >
“기침하셨습니까, 도련님.”
전생의 딱딱한 침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푹신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막 일어났네.”
“그렇습니까. 그럼 지금 바로 세숫물을 들여놓을까요?”
“그래. 부탁하지.”
대답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기척.
첩자 겸 정보요원으로 살아가면서 인기척을 지우는 데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감탄을 금치 못할 실력이었다.
팔이 푹 빠질 정도로 푹신한 침상에서 벗어나 한켠에 있는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준비된 주전자에 불을 붙였다.
금방 방안을 가득 채우는 향긋한 차향. 적당히 따뜻해진 차를 찻잔에 따라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자 입안 가득 차오르는 향긋한 차향.
같은 무게의 금으로도 구할 수 없다는 고급 차향을 음미하다, 잔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적응이 안 되네.'
푹신한 침상도, 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도,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따뜻한 고급 차도.
지금의 내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티를 내진 않는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니까.
정확히 어떻게 내가 회귀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이 기적이 얼마나 엄청난 건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누군가에게 밝혀지기라도 했다간, 무림을 넘어 전 중원에서 그 기적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나를 납치하려 들리라.
'그리고···.'
힐끔. 왼팔로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글자와 숫자.
[남은 시간 : 6 : 22]
'이것 덕분에 이미 마교에서도 열심히 날 찾고 있을 테니까.'
아직 정확히 무슨 능력인진 모르지만, 천하제일인에 가장 가깝다는 천마 교주 독고삭이 귀중히 여기는 능력이다.
당연히 원래 주인인 마교는 눈에 불을 켜고 날 찾고 있겠지.
열심히 구르고 있을 정보요원에게 후배 겸 선배로서 그들의 명복만 고이 빌어줄 뿐이다.
하지만 날 찾긴 꽤 어려울 거다.
마교의 정보요원이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사람을 추적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깔끔하게 지워뒀으니, 거기 있는 정보론 날 찾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똑똑.
“도련님. 세숫물을 가져왔습니다.”
“음. 들어오게.”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바로 대답을 날리자, 소리 하나 없이 열린 문 사이로 두 명의 시종이 들어왔다.
한 명은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세숫대야를, 다른 한 명은 팔에 수건을 걸친 채였다.
두 가지 모두 가지런히 탁자 위에 내려놓은 두 시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세수가 끝나면 불러주십시오. 아침 식사를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래, 항상 고생이 많군.”
내 대답에 두 시종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바로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갔다.
···그래, 원래 내가 그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행동을 옛날의 나처럼 바꿀 생각은 없다.
15년간 만나는 모두가 윗사람인 말단 정보요원으로 살았는데, 이제 와서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 행세를 어찌하겠는가.
차라리 하루아침에 정신을 차려서 개과천선했다는, 무리한 설정을 부여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일부러 전속 시종도 총관에게 부탁했다.
일에 미숙한 어린 시종을 부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날 전혀 모르는 어린 시종은 갑자기 변한 내 모습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을 테니까.
세수를 끝내고, 정보요원 시절 생일상보다 더 푸짐한 아침 식사도 끝내고 난 뒤.
시종이 확실히 멀리 떠난 걸 확인한 나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텅 빈 서책과 묵과 벼루. 그리고 붓을 꺼내 들었다.
이유는 당연히, 내 머리에 있는 정보를 제대로 필사해놓기 위함이었다.
정보요원으로 살면서 많은 걸 배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정보를 얻으면 반드시 어딘가 기록해둬라.
기억력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그렇다고 평생 그 기억이 변이되지 않고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심지어 내 머릿속에 담긴 정보는 어느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무림의 정세부터 무림명숙의 생사와 미래의 사망일. 중원 백 대 상단의 주요 정보와 각종 물건의 시세. 그리고 중원을 넘어 세외 세력의 흥망성쇠까지.
물론 그 정보들 모두 내가 입수했을 땐 이미 효력을 다한 정보들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하나하나가 최신의 최신.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입수할 수도 없는 미래의 정보들이다.
이 정보를 잘만 다룰 수 있다면, 내 생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신창양가를 안 가는 거지만.'
그나마 희망적인 건 어제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하셨다는 정도일까.
아버지는 누구보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하신 분이다.
만약 내가 갱생할 수 없고, 가문에 누가 되기만 할 뿐이라고 이미 마음속으로 정하셨다면 답도 없지만, 어제의 그 모습을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일단은 정보다, 정보. 중요한 정보일수록 확실히 기록해둬야지. 언제, 어느 때 사용할 수 있게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정보요원 시절. 보고서를 작성하듯 상황도, 시간도, 장소도 잊은 채, 서책에만 집중했다.
*****
탁.
다섯 번째로 완성한 서적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이걸로 대충 다 적었나.
한 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설마 다섯 권이나 적을 줄이야.
그래도 이걸로 앞으로 제일 중요한 정보는 확실히 다 적어넣었다.
설사 내 기억과 다른 상황에 닥쳐도, 이 다섯 권의 책만 있으면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파라라락.
서적 중 하나를 들고 어디 잘못 적은 부분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중원의 것과도, 세외의 것과도 다른 독특한 글자들.
오직 나 말곤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는, 15년 후의 마교 암호였다.
물론 세뇌에 가까운 교육 덕분에 내 머릿속엔 한순간에 해석이 되지만 말이다.
'좋아. 확실하군.'
다섯 권의 서책을 침상 밑에 만들어둔 비밀 보관함에 넣었다.
실금 하나 없이 맞춰진 보관함은 내가 아니면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시간도 잊고 서책에만 집중하느라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몰랐다.
조금 전에 점심을 들이겠다는 걸 거절했으니 지금 시간은 대충···.
띵~
시간을 짐작하고 있던 내 귓가로 자그마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들어본 종소리 중 가장 맑고 시원한 종소리에 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종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 날 덮쳤다.
“크억!”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을 혈관과 내장에 마구 박아넣는 듯한 소름 끼치는 고통!
억지로 당한 고문 교육에서도 느껴본 적 없던 통증에 방바닥을 구른다.
하지만 날 소름 돋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우둑! 우두둑!
꽈득! 까드득!
내 몸속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
이런 소리를 전생에도 들어본 적 있었다.
딱 한 번. 큰 죄를 지은 정보요원이 있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누명일지도 모른다.
그가 흑호단인가 흑랑단인가 하는 단의 부단장과 다툼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고문당하는 모습은 뇌리에 똑똑히 남아있었다.
분근착골(分筋錯骨). 한 번 전개하면 피시전자가 죽기 직전까지 죽음의 고통을 당한다는, 가장 끔찍한 고문 수단.
그때 그에게서 들렸던 소리와 지금 내 몸 안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끄어어억···.”
나도 모르게 벌려진 입에서 말이 되지 못 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단 짐승의 그것에 가까운 소리.
하지만 지금 그런 소리에 신경 쓸 새는 없었다.
그저 밖에서 돌아다니는 수많은 시종 중 하나가 내 상태를 최대한 빨리 발견하기만 바랄 뿐.
[또 시작이군.]
그런 끔찍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해줘, 도와줘, 살려줘!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밖에서 내 비명을 들었던 시종이 들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시종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땅바닥 구르는 거 하나는 잘난 놈, 못난 놈 가릴 것 없이 똑같냐?]
반투명한 몸체와, 세 치가량 떠 있는 육신. 그리고 날 한심한 듯 바라보는 눈까지.
그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내 정신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눈을 뜨고 본 천장은 너무나 익숙한 천장이었다.
···그러니까, 가문 내 있는 의방의 천장이란 뜻이다.
집에서 쫓겨나기 직전까지 나는 날마다 술에 절어 있었고, 시종들은 대부분 내 방보단 의방에 나를 데려다 놓았다.
어차피 깨어나면 끔찍한 숙취에 비명을 지르며 의방에 데려달라고 소리칠 테니, 그냥 처음부터 의방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덕분에 의방의 천장은 내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천장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내가 일어나자마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의방에서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허 의원이었다.
“시종들에게 갑자기 실려 오실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냥 흔한 숙취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치곤 너무 심각하게 고통을 호소하고 계셔서 일단 간단하게 마취를 해놨습니다.”
그래서 내 몸이 침으로 뒤덮여 있었던 거구만.
“고맙습니다, 허 의원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허허, 무얼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혹시 가주님에게 무슨 특별한 영약이라도 얻어 드셨습니까?”
“영약···이요? 그런 건 얻어 먹어본 적 없는데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뇨, 저번에 진맥할 때만 해도 분명 주독으로 몸이 크게 상해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깨끗해서 말입니다. 이만한 주독을 없애려면 그 독을 모두 땀으로 뺄 정도로 힘든 운동이나, 독을 씻어내릴 정도로 좋은 영약이 필요한데, 지금 도련님의 근육량을 보면 운동은 아닌 듯하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영약도 아니라니···.”
마취용 침을 뽑는 허 의원에게 나도 모른다는 의미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뇨, 딱히 짐작 가는 곳은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푹 쉬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허 의원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웃는 얼굴로 의실 밖을 나섰다.
자신의 궁금증보단 내 안정을 중요시한 것이다.
그것보다 내 몸이 달라졌다, 라.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의 말대로 몸이 무언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분명 내공 한 점 없는 육체인데도 불구하고 머리 꼭대기부터 발끝까지 활력이 넘치는 것도 그렇고, 무겁게만 느껴지던 팔다리를 너무 손쉽게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내 몸이 어딘가 달라진 건가?
[당연히 달라졌지.]
“응?”
방금 그 대답···누가 한 거지?
[몸이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는지, 뼈랑 혈도 몇 개 고치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냐?]
이번에는 말이 좀 길었기에 그 위치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방 안, 오른쪽 구석, 천장.
···천장?
“저, 저건 뭐야!”
오른쪽 천장 모서리에서 턱을 괸 채 무료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반투명한 사내.
기절하기 직전 내가 환각이라 생각했던 그가 거기에 있었다.
[응? 뭐, 벌레라도 있나?]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지, 오히려 고개를 뒤로 돌리며 자신의 뒤에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잖아. 이놈은 대체 뭘 보고 놀란 거야?]
“다, 당신은 누구요! 사, 사람이요, 아니면 귀신이요?!”
[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던 사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말을 멈추더니, 잠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 설마 내가 보이냐? 내 목소리도 들리고?]
“보이고, 들리니 이리 묻는 게 아니오!”
[허···세상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잠깐 생각하더니, 곧 입가를 비트며 입을 열었다.
[마침내.]
“뭐요?”
[마침내 날 보고,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났구나! 으하하하! 드디어 이 오랜 시간의 침묵이 보상받는구나! 으하하하하!!!]
박장대소. 아니, 박장광소(拍掌狂笑)를 지르는 반투명한 사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대 천마시여.
제게 도대체 무엇을 맡기신 겁니까?
< 천마의 권능(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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