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정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배는 빨랐다.
옥천이 언제 올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런 불확실한 정보만 믿고 산책하듯 느리게 가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갈 때와는 달리 땀을 뻘뻘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말을 마구간 지기에게 건넨 후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 근처에 이르자 시종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아! 큰 도련님!”
날 발견한 꼬마 시종은 큰 목소리로 날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더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가주님이 큰 도련님을 부르셨습니다.”
“아버지가?”
“네.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나?
과거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20세의 내 기억은 텅 빈 곳이 너무 많았다.
1년의 8할 이상을 술에 취해 살고 있었으니, 십중팔구 전생의 오늘도 여전히 술에 꼴아서 방에서 퍼질러자고 있었겠지.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드려.”
“네, 알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깊게 고개를 숙인 꼬마 시종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열심히 일하는구나.”
내가 결혼만 좀 일찍 했다면 전생에 저만한 아이가 있었을 텐데.
···물론 내가 받는 월봉이 나 혼자 먹고살기도 벅찼을 터.
말단의 정보요원은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아버지와의 저녁 식사라···얼마 만이지?”
전생에서 집에 살 때도 식사는 대부분 밖에서 먹거나, 집 안에서 먹어도 방 안에서 홀로 먹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가족끼리 식사하는 일이 많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의 성화로 계모를 들이고 나선 그것도 없어졌다.
···여러모로 존경하고 있는 할아버지지만, 고작 친구와의 약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를 잊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를 강제로 혼인까지 시키신 점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가야겠군.”
세 시진 간 말도 타고 다니고, 동굴에도 기어들어 간 덕분에 온몸은 땀에 흠뻑 젖고,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이런 상태로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간, 백중날 이후가 아니라 오늘 당장이라도 쫓겨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힐끔, 독고삭에게서 권능을 얻고 나서부터 생겨난 왼팔의 문신을 응시했다.
[남은 시간 : 22:55]
아까와는 분명히 달라진 숫자.
“이것에 대해서도 좀 고민해봐야 하니까.”
***
그에게 권능을 받은 이후로 생겨난 양팔의 문신.
손끝부터 어깨까지 붉은색 인주로 이루어진 문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걸 얻은 지 반 시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문신은 이미 나와 평생을 함께한 듯 딱 달라붙어 손으로 문지르고, 물로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았다.
즉, 이걸 없애버리려면 내 피부를 뜯어내기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그 방법은 아직 미뤄두고 있지만.
입구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갑자기 생긴 문신에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걸 봐선 일단 다른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 듯했으니까.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지만.
그리고 왼팔에 붙은 채로 끊임없이 변하는 숫자의 의미도 대충 알 수 있었다.
“반 시진이면 앞의 숫자가 하나 줄어들고, 한 식경이면 뒤의 숫자가 30만큼 줄어드는구나.”
욕탕에 몸을 담근 채 사루계(沙漏計: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었다.
권능을 얻은 이후에도 딱히 달라진 느낌은 없었다.
내 단전엔 한 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고, 몸도 근육 한 점 없이 흐물흐물하기만 했다.
‘앞의 글자가 남은 시간인 걸 봐선 이게 다 끝나면 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쪽이건 확실한 건 없었다.
첨벙!
물 안에 담가놨던 팔을 들어 올렸다.
세 시진 간 고삐를 꽉 쥐고 다녔음에도 자국 하나 남지 않은 부드러운 손.
굳은살과 흉터가 빼곡하던 전생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과연 그 권능이라는 걸 얻는다고 내가 바뀔 수 있을까.”
삼류.
마치 뗄 수 없는 꼬리처럼 평생 나를 따라다녔던 그 단어.
1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했지만, 내게 남은 건 콩알만 한 내공과 싸구려 기생의 춤사위와 다를 바 없는 창법,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금나수뿐이었다.
전생에는 언제나 외면했지만, 사실 내가 마교에서 살아남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무공을 배운 티가 나던 사형제들과 달리, 나는 무공의 수위가 너무 낮아 어디선가 무공을 배워왔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후우.”
혹시, 하는 기대와 설마, 하는 부정.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에 목만 빼고 온몸을 담근다.
“아냐, 아직 어떤 힘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필욘 없지. 일단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생각하자.”
촤악!
욕조 밖으로 빠져나와 시종이 미리 가져다 놓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시간 엄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다.
안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에 약속 시각을 어기기라도 했다간, 정말로 눈밖에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수건 옆에 놓여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욕실 밖을 나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식사를 대부분 밖에서 해결한지라 식당의 위치가 가물가물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까 아버지의 전언을 알려준 꼬마 시종이 욕실 밖에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큰 도련님”
“그래, 가보자꾸나.”
내가 대답하자 꼬마 시종은 내 앞에 서서 식당으로 인도했다.
“조금 천천히 걸어도 된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뛰다가 넘어질라. 어차피 술정시(戌正時 : 오후 8시)까지 가면 되니, 조금 천천히 걷자꾸나. 방금 몸을 씻어서 땀도 흐르니 말이다.”
내 말에 시종은 그제야 발걸음 속도를 늦췄다.
거 참, 아까 내게 있던 적도 없던 자식을 겹쳐서 봐서 그런가.
왠지 나도 모르게 정감이 가네.
···어차피 식당까지의 거리도 멀겠다, 갈 때까지 할 짓도 없겠다. 궁금했던 거나 물어볼까.
“최근에 널 본 적 없던 것 같은데,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것이냐?”
“아닙니다. 원래 식당에서 일하다 이번에 시종으로 새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비와 어미도 여기서 같이 일하느냐?”
“네. 아버지는 동남쪽 문지기로 일하시는 중이고, 어머니는 나물류 요리부에 일하고 계십니다.”
동남쪽 문지기···는 그렇다 쳐도, 나물류 요리부는 대체 뭐냐.
우리 가문이 나물 하나에만 사람을 여러 명 써야 할 정도로 크다는 거야?
전생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가문의 부가 지금은 절절히 느껴졌다.
“그래, 두 사람 다 고생이 많겠구나. ···그런데 너는 이렇게 어릴 때부터 일하는 건 괜찮으냐? 한창 뛰어놀 나이에 일하는 게 힘들진 않으냐?”
전생에서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을 아이의 모습이 지금은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해야만 했던 내 회귀 전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왠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힘들다고 대답하면 내 전낭을 털어서라도 서당에 보내줄 생각이었다.
“힘들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아이는 웃는 얼굴로 내 말에 답했다.
“힘들긴 하지만 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곳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서당보다 이곳에서 더 배울 수 있는 것이 더 많고요.”
“···그래, 착한 아이구나.”
‘전생의 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새에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다 왔습니다,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인 꼬마 시종은 아까보단 조금 더 편안한 발걸음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식당에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제일 안쪽, 상석에 앉아 자그마한 잔으로 술을 홀짝이던 그분은 문을 열고 들어온 날 보고 담담히 말했다.
“왔느냐.”
아버지.
내 기억 속 모습과 단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아버지를 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15년의 세월.
내 삶의 절반 동안 한때는 그리워하고, 한때는 분노했고, 한때는 의심했던 그분.
“예, 아버지.”
천마의 앞에서보다 더욱 떨리는 심정으로 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는다.
연기할 겨를 따윈 없었다.
폭발할 것처럼 마구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죽이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너무나 반갑다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치고 싶었고, 어째서 날 그렇게 쫓아낸 거냐고 욕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창양가에 암살 의뢰를 맡긴 게 사실이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모두 억지로 눌러 내렸다.
지금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 상황에서 혼자 저런 말을 지껄였다간, 망나니 아들놈이 망나니 미친놈이 됐다며 당장 쫓아낼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밖에 나가지 않았느냐?”
“아버지와의 식사 약속이 있는데, 어찌 나가겠습니까.”
“흠, 그래?”
“아버지는 오늘 어찌하여 절 부르셨습니까?”
“아비가 자식과 식사를 하고 싶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같이 식사하는 거지.”
거짓말이다.
정보요원의 안목 같은 걸 쓸 필요도 없었다.
아버지는 모든 일에 반드시 의미를 두셨으니까.
“그렇지요. 가족끼리 같이 식사하는 게 무슨 큰일이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말하진 않는다.
그저 나도 당신처럼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자꾸나. 총관, 음식을 들여오게.”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내 위치에선 보이지 않는 객잔의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총관이 대답했다.
잠시 뒤, 식당 옆문이 열리면서 열댓 명의 시종이 각자 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귀한 재료나 긴 시간이 필요한 요리는 없었지만, 음식의 맛은 뛰어났다.
싱싱한 재료와 뛰어난 숙수.
그리고 15년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입맛 덕분이었다.
그렇게 한창 식사를 즐기던 도중, 아버지께서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천천히 관찰하시더니, 이상하다는 듯 내게 질문하셨다.
“식사 예절은 어디서 배웠느냐?”
“네? 식사···아, 저, 서재에서 그에 관한 서책을 몇 번 읽어봤을 뿐입니다.”
갑자기 식사 예절 운운하는 아버지의 말에 무슨 소린가 했는데, 그제야 내가 전생에서 식사하던 대로 식사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육체적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적 피로 때문인진 몰라도 20대 중반부터 급격히 떨어진 소화 능력 때문에 식사 시마다 지키는 게 있었다.
육류보단 과채류를 먹고, 입에 넣는 음식은 소량으로.
그리고 소화가 잘되도록 여러 번 씹는다.
살기 위해서 바꿨던 식사 방법이 아버지의 눈에는 제대로 된 식사 예절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서재라···그래도 공부를 하긴 하는 모양이구나.”
“그저 잡지식을 쌓을 뿐입니다.”
“잡지식도 쌓이고 쌓이다 보면 보물이 되곤 하지. 서재는 언제나 열려있으니, 원할 때마다 들어가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전생은 물론 현생에도 한 번 들어가 본 적 없던 서재의 출입권을 얼떨결에 얻게 된 나는 남은 식사도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식사를 마친 후. 총관이 직접 우려낸 차를 한 모금 마신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미래에는 무얼 하고 싶으냐?”
“네?”
“미래의 꿈 말이다. 무언가 생각해둔 것은 없느냐?”
···이거였구만.
일부러 식사 자리를 만드신 이유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려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관에 도전하려 하는 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내 뒤를 이어 경영을 배우려 하지도 않으니, 네 아비로써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
지금인가.
아버지가 날 신창양가로 귀양을 보내려고 마음먹으신 순간이.
본래대로라면 이미 한참 전에 집을 나가 술에 잔뜩 취해 있었을 때니,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기회고 뭐고 제대로 대답할 정신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기회를 얻긴 했지만, 여기서 잘못된 답을 꺼냈다간 결국 신창양가로 팔려나가 마교로 보내지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
“···아니, 됐다. 바로 대답하긴 어려운 질문이지.”
침묵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받아들이신 아버지께서 내가 답을 하기도 전에 먼저 질문을 거두었다.
“고민은 해보도록 해라.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네,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이러실 계획이었구나.
잠깐의 유예는 주겠다, 이 생각이신가?
전생에는 알 수 없던 아버지의 행동이나 말투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12년간 정보요원으로 일해오면서 쌓은 눈치 덕분이었다.
거기에다가 이렇게 식사 자리까지 만들어서 저런 질문을 꺼내시는 걸 봐선 둘 중 하나.
아버지가 날 신창양가로 보낼 준비를 마치셨거나, 날 내보내려는 계모의 압박이 심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지금 아버지가 고민 중이라는 건 분명했다.
곧 미래에 대한 확답을 드려야겠군.
“다음 식사 전까진 네가 답을 준비하길 바란다.”
“예.”
내가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만족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남아 있던 차를 한입에 들이켰다.
“이만 가지.”
“예, 알겠습니다, 가주님.”
“총관,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식당을 떠나는 아버지의 뒤를 따르던 총관이 내 부름에 발걸음을 멈췄다.
“제 전속 시종을 한 명 두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내 질문에 총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재 유가장은 전속 시종을 두기보단,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시종을 두고 그 시종이 그에 관련된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그래야 각자 업무에 관한 숙련도도 더 뛰어나고, 후임을 만들기도 쉽다는 아버지의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속 시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계모만 해도 그녀를 따라다니는 전속 시종이 열 명은 넘었으니까.
“전속 시종···말입니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원하시는 시종이 있습니까?”
“이번에 주방에서 새로 시종으로 직책을 바꾼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전속으로 두고 싶습니다.”
“흠···알겠습니다. 누굴 말하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내일 정오까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내게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총관.
그건 그렇고, 내일 정오라.
그 아이가 올 시간까지 생각하면,
[남은 시간 : 17 : 56]
권능의 정체도 밝혀지겠지.
*****
“총관 생각은 어떤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방.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많은 부분이 변하셨더군요. 오늘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에 걸쳐 봤지만, 세 번 모두 제가 알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부분에선 나도 동감이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일시적인 변화인지, 아니면 영원히 바뀐 건지 알고 싶은 거네.”
처음 나왔던 그 목소리보다는 더욱 밝은, 한편으론 기쁨까지 언뜻 보이는 대답에 아까보다 더욱 무거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아침의 멀쩡한 모습과 백여 마리의 말이 있는 마구간에 열 마리밖에 없는 북해의 말을 한 번에 골라내는 눈. 갑자기 훌쩍 늘어난 승마 실력. 그리고 오늘 저녁에 보였던 모습까지. 제가 확답을 드리는 건 많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다릅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까지 느껴지는 그의 대답에 다시 방안은 침묵이 짙게 깔린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빛 한 점 없던 방 안에 창문 너머로 달빛이 살짝 내려와 두 사람의 얼굴을 밝힌다.
유가장의 장주 유강과 그의 총관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변화에 충격을 금치 못한 유강이 정확한 사정을 듣기 위해 총관과 비밀 별실에 온 것이다.
“특히 개인 시종을 들이겠다는 그 말씀. 이건 즉 자신의 개인 세력을 저택 내에 만들겠다는 뜻이지요.”
“흠···지금 와서 권력에 눈을 떴다, 이 말인가?”
“어찌 감히 도련님의 의중을 확언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제 생각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총관의 대답에는 숨길 수 없는 확신이 있었다.
가문 내에서 유현의 어머니를 싫어하던 사람은 없었지만, 총관은 특히나 그녀를 아꼈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녀를 마치 딸처럼 대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녀를 아끼던 마음이, 그녀가 죽은 뒤엔 유현에게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유현의 변화한 모습에 이렇게 기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총관의 대답에 유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를 아주 미세하게 비틀 뿐.
“···알겠네. 그럼 그 시종을 유현이에게 보내주도록 하지. 단, 원래 일하던 곳에 제대로 된 인사를 하고 가도록 하게.”
마음을 정한 듯, 유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총관에게 말했다.
“자네의 생각대로라면, 그 아이가 원래 있던 곳에 돌아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일세.”
“예, 가주님.”
유강의 명령에 총관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걸로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유현이 이 유가장에 자신만의 세력을 만드는 것을.
그렇게 유현 본인도 모르는 새에 그를 인정한 두 남자의 비밀 회담이 끝을 맞이했다.
< 인정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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