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 독고삭(1) >
“워, 워, 워. 자, 자. 진정해.”
푸르릉. 마치 더 달리고 싶다는 듯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힌다.
“두 시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지친 기색도 안보이다니···명마는 명마구나.”
어릴 땐 가문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전혀 몰랐지만, 물건의 가치를 아는 지금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설마 가주 전용 마구간도 아닌 평범한 마구간에 북해 출신의 말이 있을 줄이야.”
회귀 전에는 살아생전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던 북해의 명마가 시장의 좌판에 널린 물건처럼 널려있다니!
순간 ‘이 정도라면 나눠주기 싫다고 암살 의뢰까지 넣을 만하지.’하고 동감까지 해버렸다.
근처에 있던 나무에 고삐를 묶고 말의 안장에 걸어놓은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멘 후, 앞에 있는 동굴을 바라본다.
그저 짐승의 굴로 보일 자그마한 동굴.
도저히 백만의 교도를 자랑하는 마교의 교주이자, 만마의 주인이라는 천마가 숨어있는 곳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이러니 그를 공격했던 정파의 인간도 그가 여기 숨어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겠지.
하지만 미래의 기억이 있는 내겐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꽉. 어깨에 멘 활을 꽉 잡고 몸을 숙여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입구는 몸을 억지로 구기면 들어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좁았지만, 어느 정도 들어가자 안도 점점 넓어졌다.
숙이는 것에서 무릎을 꿇는 것으로. 무릎을 꿇는 것에서 서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멈춰라.”
···그가 보였다.
마치 사자의 갈기와 같은 풍성한 머리카락과 수염.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반짝이는 안광.
그리고 건장한 장정 셋을 뭉쳐서 합쳐놓은 듯한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몸까지.
전생의 마교의 방이라면 대부분 붙어있던 전대 천마의 초상화와 쏙 빼닮은 남자.
현시대 최강의 고수 중 하나라고 불리는 당대의 천마. 독고삭(獨孤朔)이 내 눈앞에 있었다.
*****
독고삭은 목구멍 너머에서 올라오는 피를 억지로 삼켰다.
이 동굴을 발견한 건 그에게 천운이었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상처를 입은 독고삭은 최대한 먼 곳으로 도망쳐 나왔다. 숨어있을 곳이 있으리라는 희망은 애초에 접어둔 상태였기에 이 동굴을 발견했을 땐 기적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어봤자 결국 놈에게 들킬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놈은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무척 가까워야 가능한 일이지만, 놈이라면 이미 자신이 도망친 위치 따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멍청한 놈. 자신의 제자 옥천(玉踐)이라면 말이다.
제자를 욕하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만의 힘으로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면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
마교는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의 세계.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은 스승에게도 무한한 기쁨이었으니까.
하지만 놈은 그러지 못했다.
평생토록 자신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자책과 절망. 그리고 좌절 끝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마교 외부의 힘을 사용해 자신을 암살하기로 한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호위대와 기괴하면서도 강력한 무공을 가진 고수의 합공.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이에 등을 찌르는 검까지.
천하제일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고수 중 한 명인 자신이라고 해도 그 모두를 막을 순 없었다.
열두 번째 습격자의 목에 검을 박아넣은 후, 신법을 발휘해 여기까지 도망쳐왔다.
하지만 그 최후의 발악도 여기서 끝이다.
안 그래도 내상을 입은 몸으로 억지로 내공을 끌어모으느라 내상은 더욱 심해졌고,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상처에는 고름까지 생겼다.
이제 독고삭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뿐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죽거나, 결국 자신을 찾아낸 제자에게 천마의 권능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거나 둘 중 하나.
하지만.
“거기 누구 있소?”
또 다른 길이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났다.
*****
“네놈은 누구냐.”
목숨이 위태로운 상처를 입은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목소리 하나만으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싶게끔 만드는 그런 힘!
가장 높은 좌(座)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낼 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진짜 천마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것을 알아챘다는 걸 티를 내진 않았다.
아무리 정파 고수의 협공으로 깊은 내상을 입었다곤 하지만 그는 절대 고수. 아무런 무공도 익히지 못한 지금의 내겐 상처 입은 호랑이보다도 두려운 존재다.
그런 그에게 내가 그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어감을 보였다간, 그 순간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나, 나는 호북 순가장의 장남으로, 사냥을 나왔다가 도망치는 짐승을 쫓아 여기까지 왔소. 그,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오?”
정체를 알 수 없는 건장한 남자 앞에 선 부잣집 도련님처럼, 말을 떨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권위를 내세우며 그에게 묻는다.
너무 바짝 긴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마음 편하게 풀어지지도 않는다.
이 미세한 균형이, 전생의 내가 12년간 정파의 간자이자 마교의 정보요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었다.
뭐···있는지 없는지 모를 내공도 한몫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짧은 순간 내 등 위로 튀어나온 활과 화살집, 그리고 사냥에 어울리지 않는 비단옷을 보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추격조는 아니군.”
“추격조라니···설마 당신, 누군가에게 쫓기는 중이었소? 호, 혹시 죄인은 아니겠지?!”
“걱정할 필요 없다. 본좌는 죄인이 아니니 말이다. 지금 조용히 나가면 네놈에게 피해갈 일은 없을 거다.”
추격조라는 말에 무림의 이야기가 아니라, 군의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내 모습에 남아있던 의심도 모두 털어낸 듯 긴장을 푸는 천마.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 따윈 단숨에 쳐죽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긴장을 푼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죄인이 아닌데 추격자가 있고, 거기에다가 심한 상처까지···호, 혹시 당신은 무림인이오?”
“흐흐, 눈치 없다는 말, 많이 듣지 않나?”
그의 한 마디에 내 연기가 완벽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미소를 숨긴 채,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을 돌린다.
“크흠, 못 알아본 건 미안하오. 내 식견이 짧음을 용서하시오.”
“양민이 무림인을 한눈에 알아본다는 게 더 이상하니 본인을 더 탓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무림인이 어찌 이곳에 있는 곳이오? 그리고···그 상처는 무엇이고.”
마치 방금 알아차린 듯 그의 아래에 희미하게 묻은 핏자국을 가리키며 묻자, 그는 미소인지, 아니면 분노인지 모를 뒤틀린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답했다.
“무림이란 원래 그런 곳이지. 한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 이것도 다를 바 없다.”
그가 몸을 가리고 있던 손을 들자, 그 상처의 실체가 보였다. 구멍 너머가 보일 정도로 깊은 관통상.
피는 물론이거니와, 내장까지 흘러나오려는 그 상처를 직시하곤 숨을 들이켠다.
저만한 상처를 입고도 마치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저렇게 편안한 목소리와 분위기로 대답하다니.
인간을 초월한 존재에 대한 경외심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 상처를 멍하니 쳐다본다.
“몸에 구멍 하나 더 뚫리겠다. 그만 좀 봐라.”
“아, 음,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그런데 그런 상태로 있을 바엔, 차라리 치료를 받는 게 어떻소? 중한 상처긴 하나, 당신 정도의 고수라면 치료만 받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지 않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살 방법은 없다는 걸.
오장육부(五臟六腑) 중 7할을 잃었다. 전설의 화타가 다시 살아 돌아와 그를 직접 치료한다 해도 살아날 방도는 없다.
무지한 양민이나 할법한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헛된 고생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난 더 살 수 없어. 애초에 삶에 대한 미련도 이젠 없다.”
잠깐 말을 멈춘 그는 아련한 눈으로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남은 말을 이어갔다.
“···스승 된 자로서, 제자의 배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죗값이라고 생각해야지.”
···뭐라고?
뒤이어 천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가 알던 정보와 다르다.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숙련된 정보요원으로서 절대 해선 안 될 크나큰 실수.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것을 제자가 스승을 죽인다는 패륜적 행위에 대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무림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그에게 질문했다.
“비일비재, 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종종 튀어나오긴 하지. 무공의 경지가 스승을 뛰어넘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스승을 죽이려 드는 미친놈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의심할 것도 없다.
그의 제자이자 내 전생의 천마, 옥천이 스승을 배신했음이 확실했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건 놀라웠지만,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독고삭은 역대 천마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들어갈 만한 재위 기간과 그에 걸맞은 강함을 가진 천마였다.
옥천은 그런 그를 뛰어넘기는커녕, 어쩌면 천마의 자리에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을 터.
그런 그가 스승을 배신하는 건, 어찌 보면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그럼 내가 가진 정보는 어디까지 사실인 거지?
일단 정파의 협공은 확실한 거짓이다. 그가 여기까지 몰린 이유는 제자의 습격 때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뒤에 옥천이 그를 찾아오게 되면···.
오싹. 이후에 있을 일을 생각하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본래 계획은 크게 다친 독고삭의 최후를 지켜 그에게 무공을 배우고, 그 후 스승을 찾아올 옥천에게 ‘내가 당신 스승의 최후를 지켰다’같은 말로 환심을 살 생각이었다.
내가 아는 미래의 옥천은 자신의 스승에게 지극정성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전제조건부터 틀렸다.
이제 난 ‘자신 스승의 최후를 지킨 의인’이 아니라,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된 버러지’가 된 것이다.
“확실히 일반 양민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군.”
내가 긴장한 이유를 착각한 독고삭이 무어라 말했지만 그 말이 귀로 들어오진 않았다. 마구 경종을 울리는 생존 본능에 따르고 싶은 생각뿐.
지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얼굴은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무림의 생리란 게 그런 법이겠지요.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최후를 지켜드리고 싶었지만, 계속 있었다간 제 목숨조차 위험해질 것 같군요.”
“크흐흐,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양민의 목숨을 버리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이만 가보···.”
휙!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섬전처럼 손놀림으로 내 손목을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내가 무어라 반응하려는 찰나, 손목을 통해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이 파고든다.
내가 전생에 15년간 노력하며 모았던 콩알만 한 내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세찬 파도 같은 기운에 압도되어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손목을 통해 들어왔던 기운이 다시 손목으로 빠져나가자, 눈을 감고 있던 독고삭이 천천히 눈을 떴다.
“혹시나 했는데···.”
그의 눈 안에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환희.
“설마 진짜일 줄이야.”
확! 그가 입을 연 순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정신을 놓는 순간 휘말려 버릴 듯한 거친 기의 풍랑 속에서 아련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는 알고 있었나?”
“무, 무엇을 말이오?”
“자신의 피가 누구의 피인지 조차 몰랐다는 거군. 우연인가? 아니면 천명인가? 아니, 그건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내 목숨이 사라지기 전, 네가 나타났다는 거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그가 남은 손으로 내 반대쪽 손목을 잡았다. 꽉 잡힌 양쪽 손목으로부터 다시 한번 기운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다.
이번에 몸에 파고든 기운은 아까의 그 거센 기운과는 달랐다.
몸을 헤집는 것 같았던 아까의 기운과는 달리, 이것은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스스로 내 몸 안에 자리 잡았다.
이제는 흐릿한 어머니의 품 같은 기운에 몸을 맡기려는 그 순간.
“크윽!”
왼팔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혈족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권능 이전(權能 移轉)을 시행합니다.]
[남은 시간 : 24:00]
붉은색 인주가 내 팔 위에서 글자를 이루기 시작했다.
< 천마 독고삭(1)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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