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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으로 무림최강-2화 (2/185)

< 유가장 >

촤악!

가만히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내 머리로 물줄기가 쏟아졌다.

온몸을 덮쳐오는 냉기에 머리와 사지를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업! 품! 푸! 뭐, 뭐야?!”

“유현 도련님, 정신 차리쇼! 하룻밤 내내 마신 술값은 계산해야 할 것 아니오?!”

하룻밤 내내 술을 마셔? 내가? 그럴 리가 있나.

그럴 돈도 없고, 그럴 몸도 안되며, 그럴 직책도 안 된다.

내 봉급으로는 하루 한 잔 마시기도 힘들 지경인데, 하룻밤 내내 마신다니.

갑자기 물벼락을 맞은 탓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반쯤 감긴 눈으로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주, 주인장, 누구랑 헷갈린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주인장이 착각을···.”

“착각은 개뿔. 섬서에서 주공자(酒公子)의 얼굴도 모르고 누가 객잔과 주점을 운영하오?”

주공자라니. 대체 언제 적 이야긴가. 15년 전에 내가 놀러 다닐 때나 듣던 소리를···.

···잠시만, 섬서라고?

번쩍!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불빛이 눈을 부시는 걸 넘어 고통스럽게 만들었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지는 않았다. 주위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객잔의 내부 광경이었다. 천장의 장식과 탁자. 그리고 의자까지.

지금 내 월봉으로는 출입조차 불가능할 만큼 고급스러운 물건만 사용하는 객잔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에 익다. 마치 과거의 기억 속 한 켠, 어딘가에 보관된듯한 익숙함···.

아니, 그 전에.

“난···죽은 게 아니었나?”

“저도 그게 신기하긴 합니다. 어제 아주 그냥 죽기 마음먹기라도 하신 듯 끝없이 들이키시더니, 용케도 살아계시네요.”

옆의 점장이 비아냥거리는 말에 뭐라 한마디 할 겨를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말투에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호객잔(千好客棧)···.”

“아이고, 이젠 저희 이름도 잊고 있으셨습니까?”

“아니, 아냐, 그냥, 잠깐···자, 여기, 술값은 알아서 가져가게나.”

품 안에서 전낭(錢囊)을 꺼내 그에게 던지듯 건넸다. 근 15년 넘게 느껴보지 못한 두둑한 전낭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지만, 그걸 받아낸 점장은 익숙하게 그 안에서 은전 몇 개를 꺼내 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객님. 야야! 우리 최우량 고객님 숙취로 머리 아프시단다! 빨리 뜨끈한 꿀물 한 잔 타와라!”

그래, 이 사람은 그랬지. 돈만 내면 성격이 돌변하는 사람.

이 사람의 말투나 얼굴이 정겨워서라도 여기를 자주 찾아왔지.

점소이가 후다닥 가져온 꿀물을 한입에 들이켜자, 따뜻한 달콤함이 머릿속의 고통을 씻어내듯 지워줬다.

잔을 바닥에 내려놓자, 잊고 있던 한기가 몸을 덮친다.

취기가 가시자 아까 맞은 냉수의 차가움이 다시 몸을 덮친 것이다.

“···지금 세수를 하고 싶은데, 물 한 통 가져다줄 수 있나?”

“아이고, 물론입죠. 야야! 아직 아무도 안 들어간 목욕물 한 통 있지? 거기서 물 한 통만 퍼와라. 그래, 우리 최고 단골님 세수하고 싶으시단다! 얼른, 얼른!”

점장의 부산에 점소이는 경공의 고수처럼 날아가듯 욕실로 뛰어 들어가더니, 물이 가득 채워진 나무통 하나를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놨다.

나무통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내린다.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바로 그 얼굴.

“20살의 나···.”

마교에서 고생하느라 생긴 주름도, 매일 무공 수련을 하느라 까맣게 탔던 피부도, 맞다가 생겼던 흉터까지 전부 없어진 말끔한 얼굴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내 원래 얼굴과 닮아있는 건 딱 하나.

인생의 세파를 겪는 동안 죽어버린 눈동자뿐이었다.

“정말로···돌아온 건가?”

“네? 돌아오다뇨?”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물 고맙네.”

“네? 아, 아뇨. 뭘, 저도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허허허.”

칭찬에 엄청나게 약한 것도 똑같네.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얼굴을 대충 씻어내고 객잔 밖을 나섰다. 아까의 달빛 하나 없던 하늘이 거짓말인 것처럼 창창한 하늘에서 태양 빛이 내리쬔다.

이 태양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빛이 내리쬐는 거리를 걸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

물건을 팔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장사꾼. 잠깐의 점심시간 동안 반주를 맛보는 노동자들. 자신의 할 일은 이것이라는 것처럼 열심히 뛰어노는 아이들까지.

과거에는 하찮게만 보이던 그 광경들이 지금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점점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깨닫자 발걸음이 자연스레 늦춰졌다.

점점 익숙해지는 거리와 골목, 그리고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자,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집으로 향하고 있었나.”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 몸은 여전히 집으로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지금 나는 거기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가고 싶었다.

15년. 무려 15년이다.

그동안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소식을 들어본 적도 없는 집에 어찌 가기 싫을까.

하지만 발걸음이 더 떨어지지 않았다.

과거···아니, 전생이라고 말해야 하려나. 그때 마멸검에게 들었던 그 말은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누가 날 죽이라고 의뢰를 한 걸까.”

내가 죽길 바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술집에서 소란을 피운 적도 없고, 오히려 마시고 나면 곱절로 돈을 보태줬다.

외부에서 시비를 틀기는커녕, 기분이 좋은 날에는 대신 술값을 내기도 했다.

집안에서도 그리 나쁘게 군 적은 없다. 다만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와서 시종과 시녀를 귀찮게 만들었을 뿐.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날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딱 네 사람밖에 없다.

계모와 그 두 아들. 그리고···.

“···아버지.”

부디 그분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긴 했지만, 정보요원으로 살아가면서 발달한 육감은 그도 용의 선상에 올려놔야만 한다고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내게 신창양가에 가라고 말했던 사람도 아버지였고, 암살 의뢰를 맡길 만큼의 큰돈을 원하는 대로 꺼내 쓸 수 있을 사람도 아버지뿐이었다.

본래 권력(權力)과 금력(金力)을 물려줄 땐 피바람이 부는 법.

어쩌면 아버지는 자식이나 아내 대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로 하신 걸지도 모른다···하는 의심이 꽃피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아니, 그래도 설마 아니겠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내가 집을 나가는 그 순간까지 계모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질투할 정도로 생전 어머니와 아버지는 금슬이 깊었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사랑 때문에라도 아버지는 날 죽이고 싶어 하실 리 없었을 것이다.

···라고 진심으로 믿고 싶었다.

아무리 느려진 발걸음이라도 결국 도착은 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정문인 만마도문(萬魔道門)과 비견될만한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위에 붙은 현판을 소리 내 읽었다.

“유가장.”

어색하다.

12년 마교 생활 동안 혹시라도 들킬까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던 그 이름에 왠지 모를 향수를 느끼며 쿵쿵, 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친숙한 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울컥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차올랐다.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관님. 접니다.”

“아, 유현 도련님이셨군요. 지금 바로 문을 열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르르 문이 열린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에서 총관의 얼굴이 보였다.

조부 때부터 3대째 우리 집안을 모신 총관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 눈빛 하나만은 젊은 사람도 감히 바라보기 힘들 만큼 강한 힘이 담겨 있었다.

나도 뭔가 잘못한 날에는 그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술을 마시고 오셨습니까?”

“음,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셨습니다.”

“유현 도련님의 몸에서 풍기는 주향(酒香)을 봤을 때 조금은 아닌 듯합니다만.”

“마시던 도중에 술을 좀 쏟았는데,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사실인지 아닌진 나도 모른다. 지금의 내게 어젯밤의 기억은 흥청망청 술을 마셨던 때가 아니라, 마멸검에게 가슴이 뚫렸던 때였으니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총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흠···일단 알겠습니다. 심하게 취하신 건 아닌 듯하니, 그 말씀을 믿겠습니다.”

15년 전 술에 취하면 혀가 꼬이고 머리가 아픈 기색을 내는 둥 술에 취했다는 티를 낼 수 있는 건 다 내는 나였기에, 평상시처럼 말하는 내 모습을 보고 더 의심할 순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외박했다는 걸 아십니까?”

“저한테 물어보진 않으셨지만, 아마 아실 겁니다. 여기 섬서성 내에 그분이 모르시는 건 없으시니까요.”

“절 부르신 적은 없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아직 날 신창양가에 팔아넘길 계획은 아직 없다는 건가. 그건 다행이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

어떤 짓을 하든, 어떻게 하든 결국 난 여길 떠나야 하는 처지다.

지금 와서 망나니짓을 멈추고 정상적으로 돌아오겠다고 공언해도 날 믿을 사람은 가문 내에 없을뿐더러, 내 암살 계획을 획책했던 인간들이 있는 곳이다.

결국 늦든 빠르든, 여기에 계속 있었다간 결국 죽은 목숨이라는 소리다.

“점심은 방에다가 준비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별로 생각이 없네요. 차나 한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따뜻한 차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내가 술 때문에 밤을 새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로 총관이 대답했다.

집이 하도 넓은지라 내 방으로 가는 길을 까먹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몸은 아직 방으로 향하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 살던 집보다 곱절은 넓은 방 안에 있는 침상에 몸을 뉘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피곤한데도 잠을 잘 수 없다는 게 옳은 말이리라.

아직도 내 심장에 칼이 꽂히던 그 감각이 생생한데 어찌 그냥 잠에 빠질 수 있을까.

내가 그런 짓을 당하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이곳에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 온몸에는 소름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날 불렀던 때가 언제였지?”

이미 15년이나 지난 일이라 조금 흐릿하긴 했지만, 대충은 알 수 있었다.

“분명 백중(百中. 중국의 명절로 음력 7월 15일을 뜻한다.)은 지났었어. 그때 술친구들을 만나서 한잔 거하게 했었으니까. 그렇다면···잠깐, 오늘이 며칠이지?”

이런, 젠장. 제일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 오늘이 언젠지 알아야 내가 쫓겨날 때까지 살아날 계획을 짤 텐데!

내가 탄식하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방 안으로 말을 건넸다.

“유현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누군가?”

“총관님이 차를 보내셨습니다. 지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따뜻한 차를 보내겠다고 말했지. 미래에 관해서 생각하느라 흘려듣고 있어서 까먹었다.

“문은 열려있으니 들어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온 시종은 들고 있던 차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도련님.”

“그래···아, 참. 잠깐만.”

내가 왜 날짜를 모른다고 고민했지? 그냥 눈앞에 있는 시종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말단에서 일한 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이런 당연한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오늘이 며칠인지 아는가?”

“6월 보름입니다, 도련님.”

“6월 보름이라···알겠네. 이만 물러가게.”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6월 보름이라, 그렇다면 최소한 한 달의 시간은 있다는 소리인가?

···그런데 뭔가 이상하네. 왜 이렇게 6월 보름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릴까. 왠지 너무 친숙한데.

무슨 특별한 기념일이었나? 아니, 내 생일도 아니고, 어머니 기일도 아니다. 전생의 상사의 생일도 아니고, 뭔가 특별한 일은···아, 잠시.

“그날은 분명히···.”

전생의 상사에 관한 기억을 하고 나서야 그날이 무슨 날인지 그제야 떠올랐다.

“전대 천마의 기일 전날이잖아!”

정파의 협공으로 큰 내상을 입고, 섬서성과 호북성의 경계에 있는 어느 동굴에서 자신의 후대. 즉 현 천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죽은 그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아니, 잠깐 분명히···전대 천마가 이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지?”

마교의 교도라면 천마에 대한 건 자세히 알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무림 방파와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인다곤 하지만 마교도 결국 종교.

교주이자 신인 천마의 행보는 그 하나하나가 신성시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그가 지존이 되는 때. 즉, 전대 천마에게 천마의 자리와 함께 천마의 힘을 물려받는 때는 마교 내에서는 마치 신화처럼 널리 퍼졌다.

물론 당시에는 비밀스럽게 진행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인즉, 지금은 중원의 그 누구도 당대 천마가 죽어간다는 걸 모른다는 소리.

“···가볼까?”

그곳은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말을 타고 가면 두 시진이면 도착할 거리다. 물론 간다고 해도 뭘 얻으리란 장담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가서 무언가를 얻어낸다면···.”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천마의 무공은 나도 전생에 몇 번밖에 실견한 적 없다.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한두 번 본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그 광경은 지금도 선명했다.

일검에 하늘을 가르고, 일장에 땅을 부수는 그 모습은 내가 꿈꾸던 절대 고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니까.

재능도 삼류, 무공도 삼류인 내겐 꿈만 같은 광경이었다.

“···좋아, 한 번 가보자.”

덜커덩. 벗어놓은 옷가지를 다시 갖춰 입고 방 밖을 나섰다.

천마의 무공!

하늘 아래 대적할 자 없다는 그 무공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내 가슴을 뛰게 했다.

< 유가장 > 끝

ⓒ 거믄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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