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5 회: 조락(凋落)의 계절(유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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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별궁으로 옮겨 피한을 즐기고 있는 황제 이진에게 속속 유럽의 상황이 전해졌다. 이를 듣고도 황제는 적극적 개입을 전혀 지시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군 편에 서겠노라는 코사크 기병대를 출전 대기시켜 놓은 채 시시각각 무쌍하게 변하는 전세를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요는 저들의 자중지란으로 힘이 약화되기만을 기다린다는 자세였다. 아무튼 이렇게 황제 이진의 명에 의해 조선이 방관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저들은 점점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 전황을 기술하면 이러 했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이 참전하기로 결정한 까닭은 확실하지 않았다. ‘신교도로서 박해받는 다른 신교도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라지만, 북독일 지역이 황제에게 장악되면 발트 해가 독일의 패권 아래 들게 되고, 그러면 덴마크의 국익에 치명적인 영향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해서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가 막상 독일 땅에 발을 디디고 보니, 신교도이거나 황제의 전횡을 못 마땅히 여기는 군소 영주들은 크리스티안을 지지하지만 영향력이 큰 선제후들은 냉담하다는 게 밝혀졌다. 그들 중에서 황제권을 못 마땅히 여기던 브란덴부르크나 작센의 선제후조차도 신교도 편에 서서 싸우거나 외국인과 손을 잡는 일을 거절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도 초조한 참이었다. 제후들이 자신에게 창끝을 돌리지는 않아도 병력 지원 등에는 소극적이었던 데다, 스페인이 다시 네덜란드를 탄압하려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새로 전쟁을 벌이기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보헤미아 진압에서 공을 세운 발레슈타인과 그가 이끄는 구교제후 연맹의 입김이 점점 더 세어질 가능성도 염려되었다.
이때 마침 틸리 백작이라는 사람이 황제에게 연락을 해왔다. 자신은 아무 사심 없이 황제를 지원 하겠노라고. 크게 기뻐한 황제는 발렌슈타인 군과 합세하여 싸우라 했다. 이에 발렌슈타인은 루터 암 바렌베르크에서 크리스티안과 싸워 그를 물리쳤다.
여세를 몰아 그는 파죽지세로 북독일의 반 황제 도시들 전체를 점령해 나갔으며, 슈트랄준트 항구를 제외한 발트 해 연안이 모조리 그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황제 측의 일방적인 승리였으며, 그것도 페르디난트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대승이었다. 북쪽의 불안요인을 단숨에 제거하고, 그 땅에 황제의 권위를 떨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 이상의 승리는 곧잘 오만함을 가져오고, 오만함은 냉정한 상황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공로를 기려 메클렌부르크 공작의 작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발렌슈타인의 보잘 것 없는 출신에 대한 쑥덕공론과 함께 ‘황제가 제후의 영지를 마음대로 빼앗고 수여할 수 있는가?’하는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발렌슈타인을 시켜서 덴마크를 우회하여 북해와 발트 해를 직접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게 했으며, 그것은 북독일 한자동맹 도시들의 이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으므로 그들을 철저한 반 황제파로 돌려놓았다.
또 이어 그는 ‘만투아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스, 독일과 접경이던 이탈리아의 만투아 공국이 프랑스 왕의 신하인 샤를 공(Charles Gonzaga)에게 넘어가자 이에 반대해 병력을 파견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와의 적대관계를 맺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가 지금까지 샤를 공을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다음 해 3월에는 악명 높은 ‘토지반환령’을 선포했다. 예전에 가톨릭 교회령이던 토지를 일체(신교, 가톨릭을 구분하지 않고) 몰수하여 교회에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교도뿐 아니라 구교 제후와 영주들에게도 참을 수 없는 조치였다.
이에 따라 황제에 대한 비난이 물 끓듯 했으며,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제후회의에서는 토지반환령을 철회할 것과 그러지 않을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최후통첩을 황제에게 전달했다.
이런 불만을 모른체 할 수 없었던 페르디난트는 결국 발렌슈타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그가 ‘최근의 모든 불온한 움직임’의 장본인이라는 식의 정보를 흘리고는, 그의 등을 떠밀어 사임시켰다. ‘토사구팽’이랄까.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인 토지반환령을 그대로 두고서는 불만을 근본적으로 잠재울 수 없었다. 게다가 사냥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토끼는 잡았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사자가 북방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냉정하면서도 과단성이 있고, 다혈질이면서도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재임 시 재정개혁을 단행해 스웨덴의 국고를 풍족하게 하고, 사법권을 일원화하고, 병원, 구호시설, 우편제도, 교육제도 등을 확충하는 등 내정에서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런 개혁의 효력을 떠나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는 강했다. 그가 늘 진중에서 솔선수범하며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자세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운 존경심이 저절로 강한 군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병사들과 함께 땀 흘리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갈증에 시달렸으며, 열다섯 시간이나 말에서 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피와 오물 따위는 그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피가 발목까지 차오르는 전장도 마다하지 않는 성품이었다.
이런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붙은 별명이 있으니, ‘북방의 사자 왕’이라는 별명이 그것이었다. 지금 이 사자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 신구전쟁에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과 마찬가지로 신교도에 대한 동정심과 발트 해의 패권을 독일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방어적 관점과, 독일에 스웨덴 영토를 확보하겠다는 공격적 관점이 함께 작용했다 할 것이다.
다만 보급이 문제였는데, 구교 측과 틀어진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가 그에게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침내 그는 포메른 항에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상륙했다.
마침내 이들의 참전으로 이 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을 뚜렷이 띠게 되었다. 크리스티안이 개입할 때는 신성로마제국 내의 한 영지의 영주 자격을 내세웠으므로, 그전까지는 독일의 내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웨덴과 프랑스가 한 축을 이루어, 스페인과 독일에 맞서는 구도가 갖춰졌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그런 사태의 급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발렌슈타인이 “스웨덴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포메른을 봉쇄해야 한다”고 한 조언도 묵살했고, 얼마 뒤에는 아예 그를 사임시켜 버렸다.
그는 다시금 충성을 맹세한 틸리에게 황제군의 지휘봉을 맡겼는데, 틸리는 군대를 출동시키자마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앙심을 품은 발렌슈타인이 그동안 거의 전적으로 책임져온 군량 보급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사자왕은 포메른을 손에 넣고는 슈트랄준트에서 슈제친에 이르는 발트 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독일 제후들은 크리스티안 때와 별 차이 없이 소극적인 자세로 구스타프 아돌프를 대했다. 그래서 보급이 원활치 않은데다 행군조차 지연되는 사이에 틸리의 군대가 신교파의 마그데부르크를 함락시키고 눈뜨고 볼 수 없는 학살과 파괴를 자행, 유령의 도시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생겼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분개한 브란덴부르크, 작센 등이 구스타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돌아섰으며, 구스타프 아돌프와 틸리는 브라이텐펠트에서 대치했다. 구스타프 아돌프 군은 작센 군 1만을 포함하여 4만 7천이었고, 틸리의 군대는 3만 6천이었다.
틸리군이 밀집방어 대형으로 포진한 한편 구스타프군은 왼쪽에 작센군, 오른쪽에 스웨덴군이 자리했으며 스웨덴군은 전방에 포병대를 배치하고, 그 뒤에 T자 형태로 대형을 이룬 보병대가 왔으며, 그 양 옆을 기병대가 지켰다. 그야말로 몽고메리의 말처럼 ‘그리스의 밀집방진이 로마 군단의 도전을 받는 셈’이었다.
구스타프군의 오른쪽에서 스웨덴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어 틸리군의 좌익을 두들겨 부쉈다. 그러나 그 반대쪽에서는 틸리군의 우익이 작센군을 공격, 스웨덴군과는 달리 오합지졸이었던 그들을 30분 만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게 했다.
틸리는 아마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것으로 병력은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스웨덴군은 지금 우세하다고는 해도 좌익 쪽의 공격에서 손을 뗄 수 없을 테니, 우리 우익이 빠르게 측면에서 공격하면 우리가 이긴다.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하면 어떨까? 질주하는 말 위에서 머스킷을 쏘아대는 모습이 마치 날면서 불을 뿜는 용과 같다고 드라군(용기병)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새로운 병종은 스웨덴군 진영에서 쏜살같이 달려나와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틸리군 우익을 습격했다.
뜻밖의 공세에 틸리군이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는 가운데, 스웨덴군의 화포는 기민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적진을 맹폭했다. 병력이 비슷해봤자, 기동력과 돌파력, 그리고 훈련과 사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스웨덴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틸리군은 2만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7천 명은 포로가 되었다가 구스타프군에 흡수되었다. 나머지는 화포와 물자를 모두 버리고 정신없이 퇴각했다. 틸리도 온몸에 부상을 입은 채 간신히 달아났다.
이 승리로 북부와 서부 독일이 황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신교 진영이 승기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사색이 된 황제가 꺼낼 카드는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발렌슈타인 기용이 그것 이었다.
구스타프가 곧바로 황도 빈(Vien)으로 진격하지 않고 먼저 라인란트를 점령하여 스페인군이 혹시라도 지원해올 통로를 끊는 사이에, 발렌슈타인은 다시 황제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에 비해 전술의 재능은 떨어졌으나 전략적 두뇌는 매서웠던 그는 스웨덴 왕의 최대 약점은 보급이 원활치 않은 독일 땅에서 싸우고 있다는 점임을 간파했다.
그래서 속전속결을 바라던 구스타프를 이리저리 피해다니며, 마치 한니발(Hannibal)을 상대하던 파비우스(Quintus Fabius Maximus)처럼 적군이 제풀에 지치기를 노렸다. 그리고 구스타프를 돕는 작센 등을 먼저 치면서 스웨덴 왕을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러다가 결국 구스타프 아돌프는 뤼첸에서 발렌슈타인의 목덜미를 잡았다. 황제군은 병력과 장비에서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브라이텐펠트에서와는 다르게,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싸웠다. 그래도 사자의 이빨과 발톱을 당할 수는 없었고, 발렌슈타인은 다리에 총을 맞고 절뚝이며 전장에서 달아났다. 나머지 병력도 패주했다.
하지만 스웨덴군은 승리의 기쁨을 채 만끽 하기도 전에, 적진 한가운데까지 돌진했다가 쓰러진 왕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의 시신을 가운데 두고, 돈밖에 모른다고 소문이 난, 유럽 각지에서 온 용병단도 통곡을 했다. 소식을 들은 페르디난트 황제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적은 동시에 그 생애에서 유일하게 존경스러운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발렌슈타인은 존경스럽지 않은가? 황제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유능했으나 충성스럽지 않았고, 배포가 컸지만 비열했다. 거의 밑바닥에서 올라와 공작이 된 그는 독일이 스페인과 영영 손을 끊고 독일인만의 독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 말이 황제에게는 발렌슈타인 자신이 황제 자리를 노린다는 말처럼 들렸다.
사자 사냥까지 끝난 이 마당에 못 믿을 사냥개를 키울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발렌슈타인을 두 번째로 해임했다. 바뀌는 운명의 바람 발렌슈타인의 뒤를 이어 황제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사람은 황제의 아들인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왕을 잃은 스웨덴군을 뇌르틀링겐에서 격파했고, 사망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황제가 되었다. 그 사이에 전황은 제법 유리해져 있었다. 스페인이 프랑스령인 트리에르를 점령하자, 마침내 프랑스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엉뚱하게도 먼저 네덜란드부터 점령하려고 군의 주력을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보냈다가, 그만 참패하고 말았다. 이를 본 페르디난트 2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도움을 받는 스페인군은 한때 파리 근교까지 진출, 독일-스페인 동맹과 프랑스-스웨덴 동맹의 싸움은 인구 최대의 구교 국가인 프랑스와 황제가 대결하는 이상, 구교 대 신교 측이라는 진영 구도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싸웠던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손을 잡았다. 이에 프랑스와 스웨덴이 정식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제 바람은 거꾸로 불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했고, 따라서 스페인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전쟁 초에는 신교도 영주들이 외로운 싸움을 하고 황제 편에는 스페인도 교황도 있었지만, 이제는 반대로 황제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튀르크까지 반 황제 진영에 가담하여 제국의 남동쪽에서 치고 올라왔다.
이쯤 되니 이제는 강화를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뉘른베르크의 제후 회의에서 그런 결의가 나오자, 이듬해의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에서도 추인되었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황제 측이 불리해지는 가운데 계속해서 해를 넘기고 있었다.
이듬해 봄.
마침내 웅크리고 있던 조선군의 용병(?) 코사크 기병대가 전격적으로 기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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