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8 회: 2부 카자흐 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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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년 봄이 찾아왔다.
그동안 러시아에 파견된 밀정들로부터도 속속 그들의 상황에 대해 정보가 들어왔다. 이런 그들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지금 러시아는 개판이었다.
즉 1584년 이반 뇌제가 죽은 후 병약한 표도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실권은 그의 처남 보리스 고두노프가 장악했다. 보리스는 크림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평화정책을 폈다. 이반 뇌제가 통치하는 동안 전쟁과 공포정치로 국토가 황폐해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테러, 기근, 질병을 못 이겨 남부와 동부로 대거 도주해갔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농민의 이주를 금지하여 토지에 묶어두는 정책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반 뇌제의 말기에 전후 2주일 동안 농민의 이주를 허용하는 ‘유리의 날’을 폐지하는 칙령이 발동됐으나, 보리스는 그것을 항구화하고 도망 농민에 대한 지주의 수색, 연행기간도 5년으로 늘렸다. 이로써 러시아의 독특한 농노제가 사실상 완성됐다.
1591년 표도르의 하나뿐인 동생 디미트리가 죽었다. 항간에 보리스 고두노프가 자객을 보내 죽였다는 설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1598년 표도르가 죽은 후에 열린 전국회의(젬스키 소보르)에서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로 선출됐다.
왕위에 오른 보리스는 로마노프 가와 슈이스키 가 등 명문귀족들을 정계에서 추방하고, 사족들을 축으로 삼아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는 유능한 젊은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웃 나라들과 화평을 유지하는 한편, 시베리아를 경략하고 무역을 장려하는 등, 의욕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하늘은 그를 돕지 않았다. 1601~1602년 이태 동안 연이어 냉해와 혹한으로 수확이 격감하더니, 1603년에는 대기근이 닥쳐왔다. 국민의 1/3 가량이 죽어 거리에 시체가 나뒹굴었다.
굶주린 이들이 고양이와 개, 심지어는 사람의 시체까지 먹어댔고, 나무껍질이나 풀로 연명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농민도 노예도 다투어 도망쳐 카자흐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 사람들 사이에 구세주를 기다리는 기대가 높아갔다.
디미트리 왕자가 보리스에게 살해된 것이라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소문은 ‘디미트리는 살아 있다. 곧 우리에게 돌아와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라는 기대로 발전했다. ‘구세주 차르’의 신앙이 대두한 것이다. 이윽고 1604년 폴란드에서 한 청년이 자기가 바로 디미트리 왕자라면서 카자흐와 폴란드 귀족의 지지를 얻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로써 러시아어로 ‘스무타라 불리는 동란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두 명의 가짜 디미트리를 비롯해 차르와 왕자를 참칭하는 자가 여럿 나타나 러시아인을 현혹시키고,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며, 외국군이 러시아 국토를 유린하는 등, 기괴스러움과 파괴가 극에 달했다. 말 그대로 동란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동란시대는 러시아 국민의 힘으로 진정되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디미트리 왕자가 러시아 영내에 들어오니 사람들은 열광하여 그를 맞았다. 보리스는 ‘그 사람은 가짜다. 수도원에서 도망친 사제 그리고리 오틀레피예프다’라고 외쳐댔지만 사람들은 보리스의 얘기를 믿으려 들지 않았다.
1605년 1월 5,000으로 늘어난 가짜 디미트리의 군대는 보리스의 군대에 패하여 밀려났다. 그러자 더 많은 러시아인이 그에 가담하여 세가 더욱 불어났다. 가짜 디미트리는 보리스의 권력과 대 귀족으로부터의 해방을 내걸고 민중들에게 자유를 약속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10년간 세를 거두지 않겠다고 포고하기도 했다.
그해 4월 보리스가 급사하면서 보리스 진영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6월에는 왕비와 왕자가 크렘린에 난입한 민중들에게 살해됐다. 차르 참칭자는 모스크바에 입성하여 7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가짜 디미트리도 난국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끌고 온 폴란드인들은 사사건건 러시아인들과 충돌했다. 그 사이에 남쪽에서는 한 청년이 있지도 않은 전 차르 표도르의 아들을 참칭하고 나서 ‘표도르 왕자’로 행세했다.
가짜 디미트리를 차르로 받들어 모시고 있던 대 귀족들은 민중의 불만에 편승하여, 1606년 5월 폴란드인들을 죽이고 가짜 디미트리를 처형했다. 새로이 차르에 오른 것은 대 귀족 바실리 슈이스키였다.
그가 즉위함으로써 대귀족의 입지는 크게 강화됐으나 민중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 다시 ‘디미트리는 죽지 않았고, 죽은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각지의 도시들의 슈이스키에게 충성을 거부했다.
노예 출신의 이반 볼로트니코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때였다. 볼로트니코프의 군대는 농민과 카자흐, 노예, 일부 사족의 지지를 받아 급속히 팽창하여 수만으로 늘어났고, 10월에는 모스크바 진공을 개시했다. 한때 모스크바 성문 앞까지 진입했으나 슈이스키군의 반격에 밀려 후퇴했다.
이후 사족들이 이끄는 군대가 떨어져나가 세력이 약해진 볼로트니코프는 이번엔 ‘표도르 왕자’의 군대와 합세하여 툴라에서 정부군에 맞섰다. 1607년 네 달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반란군은 결국 정부군에 항복했다. 볼로트니코프의 거사는 러시아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일컬어졌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두 번째 가짜 디미트리가 나타났다. 작년에 귀족들에게 죽은 디미트리는 다른 사람이고 자신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해 도망쳤다면서, 제2의 가짜 디미트리는 급속히 세를 규합해갔다.
어느 모로 봐도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첫 번째 가짜 디미트리의 왕비였던 폴란드 귀족의 딸은 그를 자기 남편이라고 인정했고, 얼마 후에는 그의 아들까지 낳았다. 카자흐와 폴란드 귀족의 도움을 받고 있던 제2의 가짜 디미트리는 러시아 깊숙이 진공해 들어와 서부의 많은 도시를 점령했다.
그리고는 모스크바에서 그리 멀지 않는 투시노에 본영을 두고, 1610년까지 슈이스키와 러시아를 양분했다. 많은 귀족들이 투시노의 가짜 디미트리에게 붙어 그를 섬겼다. 이어 외국의 직접 간섭이 시작되었다. 슈이스키는 스웨덴 왕과 동맹을 맺었고, 가짜 디미트리 2세 측의 귀족들은 폴란드 왕과 결탁했다.
가짜 디미트리 측 러시아 귀족들은 1610년 가짜 디미트리를 버리고,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에게 사절단을 보내 폴란드 왕자를 차르로 맞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모스크바의 지배를 노리고 있던 폴란드 왕은 이에 모스크바 공략군을 파견했다.
이해 7월 슈이스키는 퇴위되고 모스크바의 대 귀족은 폴란드 군의 모스크바 점령을 허락했다. 이로써 모스크바는 폴란드 수중에 들어갔다. 폴란드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돼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에 해방투쟁을 부르짖는 격문이 나붙었다. 모스크바 총주교 게르모겐은 모두 일어나 정교 신앙을 지키자고 전국에 회신을 발송했다.
각지에서 농민, 카자흐, 귀족, 사족, 상인들이 일어나 해방군(국민군)을 결성하고 모스크바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빈약하게 무장한 해방군을 무참히 살육하여 퇴각시키고는 크렘린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해방군마저 분열하여 힘을 잃었다. 북쪽에서는 스웨덴까지 밀고 들어왔다. 러시아는 그야말로 캄캄한 암흑 가운데에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가 최악의 상황임을 파악한 황제 이진은 주저 없이 러시아 및 우랄산맥 이동의 정복을 명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많은 군대도 필요 없을 것 같아 10만 명만 파견하기로 했다.
총사령관 겸 대원수에 언약한 대로 곽재우를 임명하여 부절을 하사하고 원정길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그 대신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밀정들의 정보는 1차적으로 총사령관 곽재우를 통해 정보부로 보고케 했다.
당연히 전쟁을 치르는 당사자로써 그들에 대한 정보 획득은 필수였기 때문에 취한 조처였다. 아무튼 이렇게 곽재우 군단을 파견한 황제 이진은 오월 달이 되어 날이 서서히 더워지자, 친정을 핑계 삼아 천해로 명명한 바이칼 호의 이궁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 북경 외곽을 사수할 군사 15만을 남겨둔 채, 곽재우의 군단에서 3만 명을 차출하고 자신의 친위군만 대동한 채였다. 이 행렬에 전 각료가 포함되었음은 물론 황태후 박 씨를 비롯해 허 황후 그 외의 귀비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신 조선에 있던 황태자 정을 북경으로 소환해 상주케 했다. 이제 조선 민심은 완전히 황제에게 귀복해 그곳에 더 이상 머물지 않아도 반란의 우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취한 조처이기도 했다.
이무튼 황제 이진이 놀이 삼아 천천히 이궁에 도착하니 어언 6월 중순이 되었다. 남쪽은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겠지만 이곳 날씨는 가을 날씨만큼이나 선선했다. 이궁 주변에는 하얀 속살의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단풍나무도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또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생화들. 황제 이진은 모든 시름을 내려놓고 이런 속을 거닐었다. 황태후 박 씨를 모신데다, 허 황후를 비롯한 귀비들이 그런 황제 이진의 뒤를 활짝 핀 얼굴로 따르고 있었다.
황제 이진은 이 순간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잊었다. 더더군다나 번거롭게 지천인 야생화의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웃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에델바이스는 유별나게 봐 둬야 할 야생화가 아니었다.
흔해서가 아니라 너무 천진난만하기 때문이었다. 겨울바람에 터진 빠알간 볼을 숨기려는 듯 수줍어하며 싸리문 문간에기대어 숨던 시골집 대여섯 살배기 맑은 계집애 얼굴 같아서였다.
대부분의 야생화는 키가 작았다. 환한 얼굴을 하고 모두 연애하는 것 같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햇빛과 입맞춤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남아 있는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난 두 달 동안 겨우 목만 내민 그들의 삶이었다. 한두 달만 더 지나면 순환하는 계절 따라 모두가 하얀 눈 속에 묻혀버릴 것이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거나 거드름을 피울 때가 아닌 것이다.
긴 겨울을 지내려면 그럴 수 없다. 그러니 남방의 꽃들처럼 키가 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얼굴에 꽃단장 할 여유도 없다. 빨리 몸매를 가다듬고 벌을 맞이해, 연애하고 새로운 씨앗을 퍼트려야 하기 때문이다.
야생화는 황제 일행에게 밟히는 게 고문 같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고 일행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발걸음보다 더 무거운 눈(雪)도 참아낼 줄 아는 지혜가 있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온 길, 우리가 살아온 삶은 끼우뚱거림의 연속이다. 야생화는 그 어떤 압력도 버텨낸다. 잎사귀와 꽃이 무참하게 찢겨 나가도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참아낼 줄 안다. 눈 내리기도 전에 서로가 다른 봄을 약속하면서 회심할 줄도 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권력과 암투, 전쟁과 평화, 서로 주고받고, 의리 그런 것들 따지다 보면 고달파진다. 야생화는 북방의 거친 바람과 적은 햇살에도 몸을 부대낄 줄 안다. 서로가 삶에 연결돼 있다는 것을, 태어날 때부터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지천으로 핀 야생화 군락지를 걷고 있노라니 사람이 감성적이 되는 대신 정서적인 안정이 찾아왔다. 격무에 시달릴 때 과도하게 분비되던 아드레날린도 정상치로 돌아왔다. 이를 황제 이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따르는 황태후나 부인들 또한 연신 찬탄을 금치 못하며 쾌적한 기온만큼이나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워했다. 이 또한 황제 이진에게는 크게 위안이 되는 모습이었다. 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황제 이진이 황태후 박 씨를 향해 물었다.
“오길 잘 하셨죠? 어마마마!”
“그래요. 황상의 말을 따른 보람이 있네요. 마치 꿈꾸던 소녀 적으로 돌아간 듯 해 흐뭇함을 금할 수 없군요.”
“하하하........! 오늘만은 어마마마께서도 비록 머리에는 서리가 내려앉았으나 마음만은 꿈꾸는 소녀시로군요. 그렇지요?”
“호호호.......! 그래요.”
이때 허 황후가 말을 받았다.
“신첩 또한 그러하옵니다. 황상!”
그러나 반발하는 이 하나 있으니 신립의 딸 신 귀비였다.
“이딴 야생화가 뭐가 좋다고. 신첩 배고프니 어서 환궁이나 하시옵소서.”
“저런, 저런.........! 그렇게 감정이 메말라서야........”
나의 탄식에도 신 귀비는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심술이라도 부리듯 힘주어 발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야생화 따위야 비명을 지르던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이에 내가 나서서 힐난하려고 하는데 누루하치의 장녀인 고륜동과공주가 아련한 얼굴로 말했다.
“신첩 또한 북방에서 뛰어놀던 때가 생각나 아련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사옵니다. 황상!”
이를 받아 영창공주가 말했다.
“신첩에게는 그런 추억은 없지만, 구중궁궐에서의 호사만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하하하........! 모두 즐거운 기분이라니 다행이군. 단 하나 즐겁지 않은 사람만 이곳에 남아 좀 더 삶의 여유를 찾는 게 어떻겠소?”
“그렇잖아도 배고프다는 사람에게 이곳에 남으라 하심은, 너무 가혹한 벌이시옵니다. 황상!”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우습지도 않은 신 귀비의 말에 황제 이진이 대소를 터트리고 일행 모두가 즐거워하는 것은, 모처럼 모두가 마음의 여유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 * *
한편 러시아로 진군한 곽재우 군단은 우랄산맥의 남쪽 대초원에 머물며 다시 한 번 돌아가는 러시아 정세를 살피고 있었다.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니주니 노브고로트의 상인들이 장로 쿠지마 미닌의 제창에 호응하여 군자금을 각출한다고 했다.
또 이를 계기로 제2차 해방군이 결성되고 있다고도 전했다. 이로 인해 포자르스키 공작이 이끌게 된 러시아 해방군이 폴란드 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고, 미하일 로마노프 공작이 백성들로부터 강력한 신망을 얻고 있다는 정보도 속속 전해져 왔다.
이 모든 정보를 종합 판단한 곽재우는 이들이 이전투구의 진흙 밭 개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기존 이들이 점령하고 있는 우랄산맥 동쪽 땅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실제로 전투로 부리는 군대는 기병 3만이 전부였다. 나머지 7만은 긴 보급로에 군량미 및 여타 보급품을 조달하기도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곽재우는 결심이 서자 기마여단장들은 물론 함께 수행중인 카춤 칸과 야율성률 또한 대원수 막사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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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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