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2 회: 전운(戰雲) -- >
1
서력 1609년 기사(己巳)년의 봄.
이진은 서른여섯째의 봄을 맞았다.
농한기를 맞아 겨울 내내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대운하 보수공사와 황하의 제방 축조 공사가 이루어졌다. 많은 빈민들이 이 공사에 참여하여 배고픔을 잊었다. 나라에서 이들을 강제 동원한 것이 아니라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망아가 제기한 자금성 내에 거주하던 환관과 궁녀들 중에서 정말 살기 어려운 사람은 선별해서 일부는 궁으로 들어왔고, 아닌 사람들은 나라 소유의 정전 중의 일부를 소작으로 받아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라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소를 잘못 올렸다가 머나만 남쪽으로 전 가족이 유배를 가는 유자들도 숫하게 생겨났다. 또한 일부 의병 활동을 하던 지식인들도 차례로 소탕되어 삼족이 유배를 가는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제일 먼저 여진족 세 명의 왕이, 기존 이진이 명한 대로 차례로 인도, 섬라, 월남으로 출전을 했다. 그 땅을 정복하러 떠난 것이다. 이런 속에 이진은 태탕한 봄을 맞이하여 어화원을 거닐며 한껏 봄빛을 즐기고 있었다.
이때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빛 속을 총총히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광해였다. 이를 발견한 이진의 마음속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멎었다. 그리고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황상, 큰일 났사옵니다.”
“결론부터 말해!”
이진의 짜증스러운 어투에 광해가 황급히 고했다.
“충장왕(忠壯王) 저력토(著力兎)가 반란을 꾀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의 저력을 잘 알고 있을 놈이, 저 죽을지 모르고 반기를 든단 말이야?”
“단독이 아닙니다. 외몽고 및 주변 일대를 영유하던 할하 3부족과 함께입니다. 아마 할하3부족을 통일한 카라쿠라란 자의 꼬임을 받은 것 같사옵니다. 황상!”
“그간 그 쪽 정보를 너무 소홀히 취급한 것 아니야?”
“면목 없사옵니다. 황상!”
이진의 책망에 고개를 푹 숙이는 광해였다.
“이제 와서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적세는 얼마나 되는 거야?”
“현재 들어온 정보로는 할하3부족이 6만, 저력토가 4만을 동원하여 감숙 방면으로 쳐들어 오고 있답니다.”
“전부 기병일 테니 만만치 않은 군세군.”
탄식 비슷하게 혼자 중얼거린 이진이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말했다.
“이이제이의 수법을 써서 제압해야겠어.”
다른 때 같았으면 이진의 말에 무슨 의견이라도 제시하련만,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고개만 숙인 채 말이 없는 광해였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몽골 부족에 대해 언급하면 이랬다.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붕괴된 후, 황금씨족이라고 불렀던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주로 내몽골에 거주하고, 그 서북쪽 외몽골 일대에는 오이라트부족이 각각 유목에 종사하고 있었다.
15세기 들어와 이들 몽골족들은 명나라 영락제의 계속된 토벌로 세력이 약해졌다가, 외몽골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오이라트부족에서 에센이란 자가 나타나, 전 몽골족을 통합하고 강력한 힘으로 명나라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1449년 명의 정통제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자신이 포로로 잡힌 토목의 변을 당한 후, 다시 오로도스 안쪽의 장성을 겹으로 쌓아야 하는 부산을 떨었으나, 1454년 에센이 피살된 후 이들 몽골 사회는 2 ~ 30 년간 다시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몽골의 타타르 부족에서 다얀 칸이 등장하여 장가구(張家口)와 귀화성(歸化城) 방면을 중심으로 세력을 증대하고, 몽골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칭기즈칸 계(系)가 권위를 회복하였다.
그는 몽골족을 1만호 단위로 6개로 나누어 아들 손자들에게 분봉 시키고, 자신은 차하르(察哈爾)를 직할령으로 유목을 하는 한편, 명나라와의 마시(馬市)를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고 양국관계는 평화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몽골족의 분화가 시작되었고, 그가 죽은 후 이들 친족 간 다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할하(Khalkha) 강 유역에는 다얀 칸의 여러 아들 중 두 명에게 흥안령(興安嶺) 북부, 즉 할하강(江)의 동쪽과 서쪽의 목지(牧地)를 주고, 공동으로 할하 만호(萬戶)를 삼았는데, 그 후 전자를 내(內)할하, 후자를 외(外)할하라고 불렀다.
다얀 칸으로부터 음산(陰山)산맥 부근을 영지로 받았던 알단은, 그의 조부 다얀 칸이 죽은 후 자주 명나라를 약탈하는 이른바 북로(北虜)의 무리가 되는데 이들이 지금의 소낭태길 부족이었다.
이들이 삼낭자의 죽음으로 둘로 나뉘니 한 갈래가 청해 쪽을 차지한 저력토 즉 충장왕의 부족이었다. 또 한 갈래는 장가구(張家口)의 북동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다얀 칸 직계의 차하르(Chakhar/察哈爾/찰합이) 부족으로, 이들은 알단의 압박을 받아 1547년 흥안령(興安嶺) 동쪽으로 이동한 후,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빈번하게 침범하였다. 이들이 조선의 사위가 된 찰합이 부족이다.
그 중 외몽골 일대에 자리를 잡고 있던 할하 3부족 중, 초로스(綽羅斯) 부족의 추장 카라쿠라란 자가 나타나, 그 서쪽에 흩어져 살던 에센 계통의 여러 부족들까지 통합해 군주를 자처하고는, 금번에 청해 쪽에 있던 저력토와 손을 잡고 감숙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인 것이다.
아무튼 이진은 즉각 비상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시간은 미시 무렵이라 각 부서에 근무하고 있던 각 장관들이 비상령에 즉각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으로 몰려들었다. 이진은 곧 비서진은 물론 광해를 데리고 태화전으로 향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보 유성룡을 위시해 각 부 장관들이 모두 참석한 것을 보고, 일단은 푸근한 안색이던 이진이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전이되어 명했다.
“정보부장은 상황을 보고 해라!”
“네, 황상!”
광해가 즉각 복명하고 제 대신들을 한 번 둘러보고 입을 떼었다.
“할하 3부와 충장왕의 군사 10만이 감숙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이는 작년에 외몽고 지역에 한발이 든 데다 시기적으로 지금이 춘궁기이다 보니 식량을 약탈하러 오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저력토는 저희 자체의 분석입니다만, 금왕이나 충렬, 충정 왕 등이 계속해서 타국 점령에 이용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느끼는 바 있어, 카라쿠라가 내민 손을 잡지 않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부족 이를 테면 충순왕(소낭태길)이나 충의왕(구유크) 등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이에 대한 대책도 금번에 세워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동왕 전하!”
“동감합니다.”
유성룡의 말에 광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이어 바로 입을 열었다.
또 하나의 추론은 서장의 달라이 라마의 꼬드김도 있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지요? 동왕 전하!”
이항복의 물음에 여전히 심각한 안색으로 광해가 답했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가 서장의 달라이 라마이기 때문에 그의 영향도 받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추정입니다만 그들과의 상관관계를 보면 아니라고 단정할 수 도 없습니다.”
광해의 말을 이해하려면 이들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부언하면 아래와 같다.
유목(遊牧)과 기마(騎馬), 이동을 전제로 살아가는 민족들에게 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어려움 중에는 힘에 의한 약탈과, 피가 피를 부르는 무서운 보복과 살육이 정당화 되는 풍조가, 한 시도 편하게 살기가 힘들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이런 관행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모두에게 손해라는 알게 되었다. 따라서 풍토에 알 맞는 신을 모시고, 인간이면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신의 법을 마련하여 그 계율을 지킴으로서 서로간의 행복을 보장 받기를 원했다.
샤머니즘을 숭배하던 그런 몽고족에게도 불교가 전래되고, 윤회(輪廻), 전생(轉生)의 불교적 가치관 또한 큰 매력이었으나, 살생금지의 계율만은 도저히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이를 교묘히 변형 발전시킨 것이 이른바 라마불교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라마교가 본격적으로 몽골 사회에 퍼지게 된 것은 16세기 중반으로서, 저 유명한 알단 칸으로부터 왕공 귀족들은 모두 그 후원자가 되었고, 넓은 초원 곳곳에는 흰색의 라마 사원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늑대보다 더 사납던 몽골족이 윤회사상에 겁을 먹고 많이 유순해졌으나, 그 대신 라마는 이들의 정신적 우상이 되어 정신 계 한편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와도 긴밀한 논의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광해의 추론이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아무튼 기왕 종교문제가 나와 조금 더 언급을 하면 만주족, 몽고족, 중국인들의 종교관이 다 달랐다.
샤머니즘을 믿고 있던 만주족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후로는 그들의 칸을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하였고, 중국에 들어가서는 유교(유학)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러다가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는 라마교 역시 아무 부담 없이 받아 들였다. 이런 것이 동이 계 인종의 신앙상의 특징이었다.
이에 반해 농경정착 생활을 했던 중국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 행복(福)과 재화(祿)와 장수(壽)를 바랄 뿐 윤회전생의 과거와 미래는 속임 수에 불과하다 하여 이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이런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전통이다. 따라서 만주족들이 아무 신앙이나 받아들이는 것을, 종교를 이용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간계라고 비난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흐흠.........!”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진이 침음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문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로는 저력토와 같은 자가 다시 출현해서는 안 되니,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금번에 서장의 달라이 라마까지 손을 보아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 세 번째는 이 토벌을 하는데 있어서 군사를 얼마나 동원하느냐 하는 것이오. 하니 이에 대해 논의하도록 합시다.”
“신 국방부장관 강홍립 아뢰옵나이다.”
“그렇지. 주무부서인 국방부 장관의 의견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얘기해 보오.”
“네, 황상!”
“기병을 보군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많은 바, 충의, 충순왕의 기병을 동원하고, 조선의 5개 군단을 동원하면 총 25만 명에, 그 중 기병이 5만이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하고 서장의 라마는 곧 한창 농사철이 다가오므로, 가을이나 도모하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상 소신의 의견을 말씀드렸사옵니다. 황상!”
“좋다! 타당하다. 더 논의할 것도 없이 그대로 행하라. 단 충의왕과 충순왕에 대한 대책이 빠졌다. 이에 대해 의견이 있는 대신은 말해보오.”
“차제에 저들을 완전히 멸해 저들의 영토를 이들에게 분할하여 주되, 이 기회에 이여송의 군대도 출전 명령을 내려 보심은 어떠 하온지요? 황상!”
광해의 의견에 이진이 흡족한 웃음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이 여송에게도 칙사를 보내 그들의 군사를 동원하도록 하고, 만약 불응하면 이들도 한꺼번에 차제에 토벌해버리자. 그렇게 되면 군사가 부족할 수도 있으니, 장성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권율의 20만 군사도 동원하도록.”
“네, 황상!”
국방부장관 강홍립이 즉각 부복하여 명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권율의 부대는 원래 조선군 4만이었다. 그것을 장성 전투에서 8만의 명나라 군사를 항복받아 받아들인 데다, 지난번 조선인 군사 1인에 4명의 한인 병사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8만이 더 그 휘하로 배정되어 20만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진의 명이 떨어지자 외무부에서는 황제의 칙서를 닦아 이를 전달하기 위해 분주했고, 국방부 장관은 병력 동원을 위해 즉각 달려 나갔다. 이진은 군사의 동원으로 인한 한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치안 유지에 좀 더 철저를 기하도록, 이이첨 내무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모두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속에서 이진은 앞으로 전개 될 여러 경우의 수에 대비하기 위한 토의를 계속해 나갔다. 이 자리에는 비서진과 광해만이 참석하도록 했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사항 중 하나는 이여송이 칙서대로 움직인다면 그에게 저력토의 영토를 하사해 서장을 견제하자는 안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 역시 불응하면 아예 이여송의 군대도 깡그리 뭉게도록 했다.
그리고 충순과 충의왕에게는 각각 할하 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을 나두어 주도록 하여, 이쪽 방면의 울타리 즉 번(樊)으로 삼아 북쪽의 영토를 수호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이 결정되자 이진은 조금 마음이 놓여 자신의 침소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