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5 회: 명의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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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진은 전 문무 대신들이 참여한 가운데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먼저 행한 일이 전국 주요 거점에 조선 군대를 파견한 일이었다.
일단은 군사적으로 이 땅을 완벽히 지배한 상태에서 다른 사업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음에 한 일로는 남방에서와 같이 모든 자리에 정(正)은 조선인 한 사람을 두지만 부(副)는 두 자리를 만들어 조, 명 동수를 임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지식인들의 비협조가 그것이었다.
청 왕조가 그랬듯이 이진에게서 가장 곤혹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명 치하의 지식인들 중 유명한 인물일수록 관작을 내려도 받지 않았고, 과거를 통해 등용할라치면, 아예 과거에 응시를 하지 않거나, 대충대충 아니면 시나 지어 자신의 소회나 밝히는 등 지식인의 동조화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이에 이진은 단안을 내려 대대적인 편찬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일단 이들의 역사인 ‘명사(明史)’를 편찬한다고 고시하고 사람을 모으니, 유명인들도 서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이는 조선인들의 손에 의해 자신의 역사가 날조되는 것이 두려워 참여하겠다는 심보였다.
이에 착안한 이진은 청대 건륭을 본받아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사업을 시행했다. 이 사고전서는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분야로 나누어, 당시 명에 나돌던 모든 책을 모아, 이를 채록(採錄)하는 사업으로 그 규모가 방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또 명의 지식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또 하나는 자전(字典) 편찬사업이었다. 이 사업 또한 방대하기 짝이 없어서 명 치하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명 치하의 지식인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에 열려 하나 둘 관료의 길에 들어서는 자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이진으로서는 조금 더 진전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 왕조가 그들의 부르짖음대로 혼일사해(混一四海)는 이루었지만 끝내는 저들이 한인을 정복한 것인지, 한인들이 이들을 모두 흡수한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진 것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청 왕조도 사실 이것을 두려워하여 만주인들을 우대하여 각종 지위를 내리되, 자식 대에게서는 한 등급씩 받은 지위가 내려가도록 하는 정책을 취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지만 끝내는 만주 팔기부터가 부패하여 각 종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이진은 전 중국인들을 조선화 시키는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일단 이진은 군대부터 이를 시행하기로 했다. 즉 조선 병사 1인에 한인 병사 4인을 붙여주어 이들을 병졸화 하는 것이었다.
청 체제에서는 녹영(綠營)이라 해서 한인 병사들만 모아놓았지만 별 재미를 못 보았다. 그래서 취한 조치이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해서 초기 중국의 전토를 지배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한인 군대는 전부 해체되어 조선군의 편제 밑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또 부족한 병사는 새로 모집해 충원케 하니 조선인 1개 여단이 졸지에 5만 대군이 되어, 이진은 이를 1개 군단(軍團)이라 칭하도록 했다.
또 이를 수군에도 적용하니 수군 또한 졸지에 5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집단이 되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적으로 예산이 문제가 되었다. 기(騎), 보군(步軍) 즉 통틀어 육군이 100만에 수군이 50만 이니 무슨 수로 이들을 감당하겠는가.
해서 이진은 새로 모집한 신병들은 의무 복무 병으로 규정해, 3년간을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집연령에도 제한을 두어 18세에서 21세까지로 한정했다. 이렇게 되니, 중앙군을 채우고도 남는 병사가 생겨, 이들은 지방군(地方軍)에 편성하여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이진이 취한 조치는 한양에 ‘사범대학(師範大學)’이라는 명칭의 학교를 세워 신입생을 모집한 것이다. 4년제로 매해 1천 명을 모집해 배출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훈장으로 임명되는 순간 나라에서 녹을 받는 일종의 관리가 되게 하는 제도였다.
이진은 이들에게 4년 동안 한문, 한글, 명나라 말, 왜어, 영어와 스페인어를 배우도록 하고, 여타 사서오경, 기하학, 과학, 천문학, 지리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그리고 졸업하면 아예 선생(先生)이라는 칭호와 함께 조선12도에 세운 3년제 초등학교의 선생이 되도록 했다.
처음에는 이를 최하급 단위인 현까지는 실시할 수 없으니, 대 도시부터 차츰 지방으로 증설해나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들이 졸업할 때면 또 4년제 중고를 설립해 이는 개인 부담으로, 이들에게만 대학 입학 자격을 부여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궁극에는 이 제도를 명과 여진 등 조선이 점령한 땅에는 모두 실시해 조선말과 한글이 모든 백성들의 공용어가 되도록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분명 많은 세월이 흐르겠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심정으로 출발을 시킨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이를 시행하라 명하고 보니 이진으로서는 뭔가 미진한 감이 들었다. 이제 통치하는 인구가 1억이 넘는데 관료조직이나 직제부터가 뭔가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마치 등치는 더 커졌는데 소아(小兒)의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진은 내친 김에 모든 제도를 현대화하기로 했다. 직제도 보다 세분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현대의 제도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도도 발전과 발전을 거듭해 현대의 제도가 된 것이 아닌가.
물론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것은 폐하고 도용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히 제 분야를 도입하기로 하고 늦은 밤 홀로 이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이진은 검토와 검토 끝에 제 행정조직과 교육제도를 바꾸기로 했다. 행정제도는 영토가 방대해지고 인구가 불어난 만큼 보다 통치의 효율을 기함이고, 교육제도는 타민족의 조선화에 중점을 두는 한편 보다 세분화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런 기저 속에 이진은 황제 직속의 내각을 구성하기로 하고, 그 내각의 수반을 ‘수보(首補)’라 하고 다양한 부서를 두기로 했다. 즉 총무, 국방, 재무, 교육, 외무, 내무, 법무, 건설, 교통체신, 보건복지, 상공, 농축산업, 해양수산, 동력자원, 과학기술 부 등 총15개 부서를 두어 그들의 장을 장관(長官)이라 명명했다.
또 황제직속으로 감찰원(監察院)을 두어 제 관리들의 업무 평가는 물론 비리를 조사하도록 했다. 또 별도로 사법부를 두어 삼심제를 도입함으로써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했다.
여기에 행정체계는 백성들의 편의성을 위해 성(省)과 도(道)를 동격으로 하여, 그 밑에 시군구읍면동을 두도록 하여 보다 체계를 합리화 했다. 그리고 교육제도로는 한양과 북경에 각 종 4년제 대학을 설립하여 보다 세분화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도록 했다.
즉 인문대학, 법학대학, 사범대학, 경상대학, 자연과학대학, 의과대학, 외국어대학, 예능대학 등을 만들어 전문 인력을 배출토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분야만큼의 각종 과거시험 제도를 시행하여 여기서 합격한 자들을 행정과 교육 부분에 충원하도록 했다.
이를 시행하는 데만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으므로 이진은 일단 이 부분의 개혁을 발의하고, 행정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조직의 수장부터 먼저 임명했다. 그 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았다.
내각 수보: 유성룡
총무처장관: 이항복
국방부장관: 강홍립
재무부장관: 김신국
교육부장관: 이덕형
외무부장관: 신충일
내무부장관: 이이첨
법무부장관: 유영경
건설부장관: 한백겸
교통체신부 장관: 유몽인
보건복지부장관: 남이공
상공부장관: 장만
농축산부장관: 이원익
해양수산부장관: 나대용
동력자원부장관: 이수광
과학기술부장관: 한효순
또 황제 직속의 내각대학사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여 명나라 유신들을 포섭하여 그들의 자문을 받을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직속의 비서실을 두어 송익필을 비서실장에 임명하는 등 그들의 조언 또한 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비서진으로는 송한필, 지함두, 허균, 원숭환, 김상헌 등을 임명하였다.
조각이 완성되어 내각 명단이 발표된 10일 후 첫 각료회의가 열렸다. 이는 조선에 살던 사람도 있었으므로 그들이 북경까지 오는 시간을 감안하여 열린 회의였다. 면면들을 살펴 본 황제 이진이 가벼운 웃음을 띠고 입을 열었다.
“우둔한 사람은 신료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자리가 세분화 되었군요. 아무튼 좋습니다. 오늘 새로운 조직이 생기고 나서 첫 회의이니 짐이 몇 가지 안(案)을 상정하려 합니다. 듣고 토의에 임해주길 바라오.”
여기서 일단 말을 멈추었던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재무부에서는 일 년 예산도 편성해야 하고 이를 결산도 하려면 업무가 너무 과중하오. 해서 별도로 세금을 징수하는 ‘국세청’을 신설하려 하오. 하고 내무부 또한 지방행정 조직을 관리하기도 벅찰 텐데 치안업무까지 담당한다는 것은 업무가 너무 방대하므로, 포도청을 별도조직으로 두려하오. 또 여기에 지금껏 음지에서 고생해온 세작들을 양지로 이끌어내어 대우도 해주고, 더한 전문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정보부 또한 창설하려 하오. 어떻소?”
“합당한 안이 아닌가 합니다. 황상!”
총무처 장관 이항복의 말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온당한 것 같사옵니다. 황상!”
“가합니다. 황상!”
제 대신들의 찬성 속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 사람이 발언 신청을 하였다. 이진을 그를 바라보니 법무부 장관 유영경이었다.
“할 이야기 있으면 해보오.”
이진의 승낙에 그가 발언을 시작했다.
“조선의 옛 제도를 버리고 너무 번잡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 제도로 환원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황상!”
“일껏 새 제도를 마련해놨는데 뭔 말이 그러오. 짐이 이 제도를 운영하고자 함은 일찍이 그 취지를 발표한 바와 같이, 인구와 백성은 늘었는데 통치조직은 너무 단순하여 제 영역과 업무를 온전히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오. 즉 기 단순화된 조직으로는 업무량이 너무 방대하여 다 처리할 수 없단 말이지요. 그러니 이에 대한 반론은 더 이상 제기하지 말아주길 바라오.”
“알겠사옵니다. 황상!”
내각 수보 유성룡의 찬성 속에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대신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새 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으니, 짐은 그 업무 영역이나 중점 시책, 특히 주의해야할 점 등에 대해서 잠깐 잠깐이라도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하오. 우선 인사의 실무를 담당하게 된 총무처는 그 무엇보다도 공평한 인사를 지향하고 정실에 의한 인사를 지양해야 하오. 무릇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가장 중요한 점이니 명심해주기 바라오.”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황상!”
“다음으로 국방부의 강홍립 장관은 들으시오.”
“네, 황상!”
“나라의 안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항상 이를 염두에 두고 운용하면 큰 차질이 없을 것이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주의할 점은 신상필벌이오. 공적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그 출신 성분에 의해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진급 또한 마찬가지요. 특히 틈왕의 군사와 왜의 동정에 신경을 쓰도록 하오.”
“네, 황상!”
“다음으로 재무부. 아! 이 부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소. 기존 명의 화폐를 모두 회수하고 조선의 화폐로 대체하려하면 당분간 엄청난 돈을 주조해야 될 것이오. 그런 즉 산하에 ‘화폐주조청’을 별두로 두고, 물가조절 기관인 ‘상평청’도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이 좋겠소. 어떻소?”
“그 보다는 당분간은 명의 화폐와 조선의 화폐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큰 혼란이 없을 것인즉 그렇게 시행하다가 점차 명의 화폐는 조선의 화폐로 대체하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첩경이 아닌가 합니다. 황상!”
“그렇게 하도록 하오. 경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이, 그런 혼란이니 장관의 의견이 합당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진의 말에 머리를 조아리는 재무부 장관 김신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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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요!^^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