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9 회: 명의 반쪽 땅을 차지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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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6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인 항주(杭州).
백낙천이나 소동파의 시에 등장하는 서호(西湖)를 안고 있는 경승지의 하나로,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이라고 할 만큼 소주와 함께 낙원의 알려진 도시.
이 도시로 신립이 거느리는 조선의 6만 기병이 상륙했다. 항주만을 거쳐 전당 강을 거슬러온 조선 해군에 의해 이들이 차례로 하선하니, 이때부터 이 땅은 명의 국토가 아니게 되었다.
절강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이기도 한 이 도시에 6만의 기병이 상륙해, 순무가 거주하는 관아로 내달으니, 이 성의 방위를 책임진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만세덕(萬世德)으로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래도 왜구의 준동에 대처하던 중앙군이 물러나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낙상지(駱尙志)에게 급히 소집된 2개 위(衛)의 병사를 떼어주고, 자신은 계속 징집되고 있는 병사를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6만 기병은 그야말로 꿈에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대 군세였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나라의 녹을 먹어 온 관리로서 국난을 맞아 이 시점에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무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 만세덕은, 겨우 소집된 1개 위 5,600명을 이끌고, 옥황산(玉皇山)을 급히 내려왔다.
연신 올라오는 소(所)의 급보에 따라 적이 향한 곳을 가늠해보니 아무래도 성청(省廳)이 있는 청태가(淸泰街)였다. 조급한 마음에 빨리 가려하나 모두 당황한 눈빛으로 허둥거리는 보군들의 걸음 헛놓이고 일쑤이고, 자신은 그래도 지위가 있어 말을 타고 달리나, 아무리 급해도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다행히(?) 평소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비루먹은 말이 헐떡거리니, 그런대로 보군과 얼추 보조를 맞춰 달려갈 수는 있었다. 어찌 되었든 허위허위 달려와 보니, 아뿔사! 벌써 성청은 적의 기병에 의해 몇 겹으로 포위되었는지, 도대체가 그 육중하게 여겼던 성청이 보이지를 않았다.
이제 와서 적이 많다고 물러서는 것은 무인의 기개가 아니라. 벌써부터 상대 군세에 위축된 아군 병사들이 겁먹은 얼굴로 창 자루 거꾸로 잡고 자신을 애절하게 바라보나, 이는 평소 같았으면 태형이라도 가할 일.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위엄 세워 에헴~! 점잖게 성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름 대갈일성을 토하는 만세덕이었다.
“적장이 누구냐? 이름 있는 무부라면 본관을 괄시하지 않을 터. 나와 모든 걸 말로 해결하자.”
아이들 싸움도 아니고, 일껏 위신 세워 목청 토해낸다고 토해냈으나, 자신의 목소리 너무 기어들어갔는지, 하찮은 말단 기병마저 조롱하는 눈으로 반응이 없었다. 분기탱천 그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르려고 목청을 가다듬는데, 몇 겹으로 포위되었던 포위망 트이며 한 가운데 길이 났다.
“아니, 두(杜) 대인(大人) 아니시오?”
“허허........! 그래도 나라 위급하다고 달려와 주다니 그대의 충의가 놀랍소.”
“무슨.........?”
‘무슨 쓸데없는 소리요. 당연히 할 일이지.’라고 외치려 하는데, 뒤에 서 있는 적장과의 관계가 너무 친밀해 보여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만세덕 이었다. 그러다 보니 말이 중간에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자가?’
아무래도 의심은 금할 수 없는 만세덕이었다.
뒤에 여유로운 웃음으로 서 있는 적장의 모습이 백번 생각해보아도 서로 적대시하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 부임해 온 순무(巡撫) 저 두 대인이라는 작자 즉 두사충(杜思忠) 역시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순무보다 더 높은 이부상서(吏部上書)까지 지내던 인물이, 뭐가 아쉬워 그보다도 직급이 낮은 절강 순무를 자처해 내려왔으며, 회식 자리에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하니, ‘곧 때가 이를 것이다. 그 때는 괜히 기울어가는 배에서 멈칫거리지 말고, 쥐처럼 재빨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니라.’
이 말이 꼭 오늘을 이르는 것 같아 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만세덕이었다. 그런 그에게 두사충이 접근하며 말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소. 저 병력으로 진정 대항이 되겠소? 시류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신립 장군이시오. 인사드리시오.”
“하면 너는 지금 나라를 배신한 것이 아니냐?”
“배신이라기보다도 내 사위의 안면을 좀 보아주는 것뿐이라오.”
“사위?”
“진린(陳璘)이라고 석년에 조선에 귀의한 수군 도독이 내 사위라오. 얼마 전 서신을 보내와 곧 가라앉을 난파선에서 기웃거리지 말고, 가문이나 보존하라는 사위의 청을 들어준 것뿐이라오.”
“이런, 배신자들.........!”
분노로 코를 벌름거리나 아무래도 벌써 때가 늦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는 만세덕이었다.
“애꿎은 병사들 희생시키지 말고 만세의 부귀영화를 함께 누려봅시다.”
“네 놈이나.........! 컥........!”
어느새 접근한 신립이 한 손으로 목울대를 움켜잡고 들어 올리니 공중에 대롱대롱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만세덕이었다.
“뭣들 하느냐? 항복하는 놈들은 살려주고, 저항하는 놈들은 모조리 싹 쓸어버려라!”
“네, 장군님!”
낭패아한이 뭐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약삭빠른 역관이 제 몫인 양, 명나라말로 외치고 있었다.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라는 분부시다. 아닌 자는 모두 죽이라 하시니, 선택하라!”
장사나 하고 농사나 짓다가 급히 소집된 자들이 이 말에 모두 희색이 만면하여, 병기를 던지고 제자리에 얼른 꿇어앉으니 서있는 자들만 금방 눈에 띠었다. 편전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슉, 슉, 슉.........!“
“으악.........!”
곧 비명 소리 난무하는 가운데, 늦을 세라 신속히 주저앉다보니 얼결에 아들 놈 옷 주워 입고 온 놈, 밑이 터져 바지가 찢어지는 줄도 몰랐다.
곧 포승에 묶인 만세덕이 뒤의 군졸이 흔드는 대로 걸음 휘청 휘청, 성청의 감옥으로 향하는데, 항복한 병사들 곧 줄줄이 엮이어 성청으로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 * *
항복한 자들 가운데 백호쯤 되니 비루먹은 말이라도 한 필 지급되어 있어, 졸지에 전령이 되어 절강 성에 속한 각 현으로 떠나야 했다.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면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 죄다 죽인다니, 전낭 속에 들은 문서가 순무며, 강탈당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인장이 찍혀 있는지 아닌지는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항복을 종용하는 문서가 되었든, 떨쳐 일어나라는 문구가 되었든 그조차 알바 아니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대하여 가족과 대면하는 것만이 송(宋) 백호(百戶)라는 자의 유일한 소망이었으니까.
이렇게 손도 안 대고 강남의 요충 절강을 손에 넣는다 싶은 순간, 신립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났다. 영파(寧波)의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 사대수(査大受)의 저항이 그것이었다.
그곳으로 파견 나갔던 백호의 목이 덜렁 잘려 상자에 담겨온 것이다. 대노한 신립은 곧 1개 여단을 그곳으로 급파했다. 명을 받은 낭패아한이 밤낮을 무릅쓰고 달려가는 즈음 영파의 오분의 삼쯤 왔다고 생각한 자계(慈溪)에서였다.
관도를 따라 맹렬히 질주하고 있는 그들에게 일성 포향과 함께 난데없이 숲속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뜻밖의 기습에 얼마의 피해를 보았지만 낭패아한의 일성에 전 기병이 용맹하게 숲속으로 뛰쳐들었다.
“닥치는 대로 죽여라!”
와아.........!
곧 여기저기서 비명소리 난무하는 가운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왜구를 쫓던 도지휘첨사(都指揮僉事) 낙상지(駱尙志) 부대와 하필 조우한 것이다. 양군의 쪽수는 비슷했다. 낙상지 또한 2개 위를 거느렸던 바, 1만1천 명 정도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고, 낭패아한 또한 1만 기병을 거느렸으니, 군사의 숫자는 양측이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병과 보군이라는 차이가 있는 반면에 명군은 풀숲에 은신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래도 기병 앞에 보군이라는 것은 성에 의지하지 않으면,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곧 여기저기서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적의 목이 풀숲에 우수수 떨어졌다. 전투로 단련된 기병 대 소집된 지 얼마 안 되는 지방군. 애초부터 되지 않는 싸움을 건 지도자 낙상지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아니 그의 충성심이 문제였을 지도. 어찌 적을 보고 비겁하게 도망가랴. 비록 싸움에 패할지라도 명예롭게 죽자고 한 그의 결심이 애꿎은 병사들만 지금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탕 탕 탕.........!
슈 슈 슉.........!
창 창 창.........!
곧 곳곳에서 총성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 요란한 가운데 궁병들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적을 향해 시위 당기나, 갈수록 명군의 저항은 초라해졌다. 곳곳에서 날뛰는 전마의 울음소리 요란하고 명군은 비명 소리만 점점 많아졌다.
“적장은 어디 있느냐? 아까운 생목숨 버리게 하지 말고 어서 나와 항복하라!”
명을 칠 때는 예하 부대 단위로 역관 몇 명쯤은 따라 붙는 법. 역관의 외침에 들려오는 답은 시위 소리 뿐이었다. 대노한 낭패아한이 역관을 밀치듯 떠밀고 시위소리 나는 곳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곳 그곳을 향해 조총소리 난무하니 풀숲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끝으로 부근이 잠잠해졌다. 곧 부하들을 그곳으로 급파하니 총탄에 맞은 자 하나가 아직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옮겨져 왔다.
“네가 적장이냐?”
사력을 다한 그의 외침이 통역되어졌다.
“곧 조정의 대군이 몰려오는 날 네놈들도 내 꼴을 면치 못할 것. 하하하.......!”
웃던 도중 목이 뚝 꺾이는 낙상지였다.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는 살려준다!”
낭패아한의 고성이 풀숲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은신한 자들이 곳곳에서 뛰쳐나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중에는 애국심 없는 정천호(正千戶) 부천호(副千戶)는 물론 정백호(正百戶)도 있었던 듯 상관의 항복에 부하들이 떼 지어 항복하고, 이를 본 나머지 병사들 역시 사기 급전직하로 꺾이어 다투어 병기 버리고 항복 대열에 합류했다.
그래도 아직 망설이는 자들 있자 낭패아한의 목소리 냉엄하게 숲속에 울려 퍼졌다.
“쓸어버려라!”
곧 전마들 숲속으로 내닫고 곳곳에서 다시 한 번 처절한 비명소리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산 자들 어마뜨거라, 숲속에서 뛰쳐나와 두 손 번쩍 치켜들었다.
곧 샅샅이 수색이 진행되고 무작정 도망치던 자들이 굴비 엮이듯 끌려나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었다. 일개 초만 남아 이들을 감시하라. 출발!”
“출발!”
곧 전마들의 지축음 또 다시 관도에 울려 퍼지고 항복한 자들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신세 어찌 될지, 그들이 쏟아내는 탄식 소리만 괴괴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
* * *
영파성(寧波城)의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 사대수(査大受)는 항복하려는 지방관들마저 모조리 목 자르고 스스로 사법, 행정, 군사의 수장이 되어 움직일 수 있는 성민들은 모두 동원해 성루에 세우고 앞치마를 두르게 했다.
채 임전 태세를 마치기도 전에 적들 눈앞에 들이 닥치니, 그 번개 같은 속도에 놀라마지 않는 사대수 이하 명군들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목숨을 건 사투만 남았을 뿐, 사대수는 겁먹은 병사와 성민들을 다독여 일전을 결할 태세를 갖추었다.
펑, 펑, 펑..........!
쾅, 쾅, 콰쾅........!
슈 슈 슉.........!
그런 그들에게 날아오는 것은 적의 화기 사(司) 부대원들의 포 공격이었다. 말 위에 실려 있던 천지현황 각종 포는 물론 신기전, 여기에 비격진천뢰마저 날아드니 부근에 있던 자들이 마지막으로 붕 떠서 세상 구경을 하였다.
곧 성문이 깨질듯 위태위태했다. 이에 악을 쓰며 독전하는 사대수였다.
“성문이 열려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라!”
“네, 장군님!”
부하들이 씩씩한 복명 소리를 들으며 자부심에 빛나는 눈으로 부리부리 전방을 살피는 사대수였다. ‘곧 죽어도 좋다.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명예롭게 죽는 자의 자부심이었다.
“비록 오늘 죽을 지라도 그 이름 천고에 빛나리니, 영원히 사는 길이니라!”
자신의 속내 부하들에게 들려주며 독전을 거듭하고 있는 사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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