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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118화 (118/210)

< -- 118 회: 잠행(潛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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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사부 하락의 집에서 술과 함께 저녁까지 얻어먹은 후 그곳에서 하룻밤을 유하려 했으나, 제 측근들의 권유로 경호 상 보다 안전한 사저로 향하였다.

사저에 도착하니 이미 기별이 갔는지 사저에 있던 모든 종들은 물론 어의 허준마저 나와 이진을 맞았다.

“폐하! 이 밤중에 어인 행차시온지요?”

맨땅에 부복하는 허준 이하 제 종들을 둘러본 이진이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말했다.

“그만 예를 거두어라. 하고 어의는 짐 좀 봅시다.”

“네, 황상!”

이진은 제 비복들을 물러가게 하고, 허준을 데리고 자신이 거처하던 방으로 향했다.

간단한 주안상을 봐오도록 지시한 이진이 다시 부복하는 허준을 만류하며 물었다.

“어떻게 잘 지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후세에 길이 남은 역작을 완성하느라, 그간 고생이 많았소.”

이는 허준이 근 10여년을 연구하여 동의보감을 편찬한데 대한 치하의 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황상의 은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황상!”

하긴 그가 이 의서의 편찬에만 진력하도록, 이진이 뒤에서 열심히 뒷받침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찌 그의 노력에 비하랴. 시종 겸손한 허준을 편하게 앉힌 이진이 말했다.

“짐은 그대를 명일부로 내의원의 수장에 임명하려 하오. 태의(太醫)라는 직제를 신설하여 내의원의 모든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주려하오. 그러니 그런 줄 알고 보다 우리 조선의 의학 발전에 공헌해주길 바라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황상!”

허준의 감사의 인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개똥이 손수 여종들을 지휘하여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허준에게 손수 술을 쳐주며 말했다.

“그간 민초들의 삶이 많이 나아져 아무리 춘궁기라 해도 예전 같이 못 먹어 부황이 들거나 할 정도는 아니니, 영아사망률도 많이 낮아져 인구도 많이 늘어났으나, 마마 예방백신과 같이 많은 의약품 개발에도 공을 들여, 온 조선 백성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주길 바라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사옵니다. 황상!”

이진의 손짓에 의해 나가지 않고 수발을 들게 된 개똥이 따라준 술을 들며 이진이 말했다.

“같이 한 잔 들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 하시오.”

“네, 황상!”

한 잔 술을 가볍게 비운 이진이 안주를 들고 말했다.

“짐이 누차 조보에 게재하기를 물을 끓여먹고 손만 씻어도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했는데, 아직도 목욕을 안 하는 습관과 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소. 그러니 앞으로  허 태의께서도 조보의 담당자를 불러 백성들에게 계도할 사항이 있으면 수시로 그런 곳에 게재를 하여, 조선 백성들의 수명을 늘리는데 일조해 주기 바라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황상!”

“짐에게 청하고 싶거나 할 말은 없소?”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인원수를 늘려 많은 백성들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더한 바람이 없겠나이다. 황상!”

“그러지 말고. 아예 음.........! 한 해에 300명씩의 학생들을 뽑아 자체적으로 의원을 양성하는 것은 어떻겠소?”

“그렇게 해도 되겠사옵니까? 황상!”

“이제 말단 아전들까지 나라에서 녹을 주어 근원적으로 그들이 비리를 저지를 여지를 차단했은즉, 이제는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도 나라의 예산을 쓰려하오. 그러니 아예 한 해에 300명씩 의원 지망생들을 뽑아 가르치되, 최소한 6년간은 배운 후에야 정식 진료에 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도록 하오.”

“좀 많은 것은 아니온지요? 황상!”

막상 시행하라니 많은 의원의 배출로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질까 걱정이 되는지 주저하는 허준이었다.

“이제 야인들까지 조선 백성이 다 되었으니, 그 정도는 되어야 각 지방에도 의원들을 파견하여 혜택을 볼 것 아니겠소? 어디 그 뿐이오? 그간 조선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 얼마나 늘었소? 일찍이 고산도는 물론 해남도 여기에 이제는 북해도는 물론 그 위의 사할린까지, 그들에게도 우리의 선진 의술을 베풀어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함이 좋겠소.”

“알겠사옵니다. 황상!”

이로써 대 조선제국에 최초의 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할 것이다. 이후 허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2각 동안 더 나누던 이진이 그를 물리고, 노비의 우두머리인 덕삼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근처에 오도 못하고 멀찍이 툇마루 끝에서 새삼 문안인사를 올리는 덕삼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말했다.

“그간 짐도 없는데 사저를 잘 이끌어 주었다. 해서 짐이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다름이 아니라 너를 비롯한 다섯 명의 우두머리들은 이제 종이 아니라 상민의 신분이 되도록 해주겠다.”

“폐하! 흑흑흑.........!”

흐느끼느라 감사의 말도 못하는 덕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채 그의 울음이 그치기도 전에 노비문서를 찾아오도록 했다. 그가 울음을 멈추고 신속히 달려가는 것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 이진이었다.

잠시 후, 덕삼이 다섯 장의 노비문서를 가져오자 이진은 몸소 그 문서를 받아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불을 질러버렸다.

“폐하! 흑흑흑.........!”

소식을 들었는지 집안에 있던 두 인물까지 달려와 같이 흐느끼는 광경을 보고 이진 또한 괜스레 마음이 아려왔다. 이제 저들은 평생의 한이었던 노예의 질곡을 벗고 자신은 물론 그 자손들마저 저 사위어 하늘로 올라가는 한지처럼, 그 한 또한 하늘로 날아오르리라.

아직도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세 인물을 내려다보던 이진이 말했다.

“이것은 그간 충심으로 짐의 사저를 관리해온 데 대한 보답이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이며, 또한 너희들과 같이 헌신하는 자들은 추가로 계속해서 노비에서 풀어줄 것이다. 그렇다고 너희들의 임무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 자손 대에서라도 맑은 영혼으로 구김살 없이 성장할 수 있지 않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다시 울먹이는 그들을 물린 이진이 곧 개똥을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진은 이날 밤 모처럼 개똥과 한 방에서 지냈다.

* * *

이튿날.

이진은 이왕 궁을 나선 길에 더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돌아보고 싶었으나, 산적한 현안과 측근들의 만류로 이날 바로 궁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바로 사정전에서 승정원 회의를 개최하는 이진이었다.

5년이 흐른 지금 승정원 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많은 인원이 물갈이 되고 기존의 인물로는 이수광 하나만 남아 있었다.

새롭게 개편된 승정원 인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았다.

도승지: 송익필

좌승지: 이수광

우승지: 유몽인

좌부승지: 장만

우부승지: 허균

동부승지: 김상헌

송익필은 그간 너무 음지에서만 고생한 보답으로 도승지에 임명한 면도 부인할 수 없지만, 측근 중의 측근으로 이진의 내심을 가장 잘 아는 인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송익필의 도승지 임명에 약간의 잡음이 따르긴 했으나, 그는 선조 시절에 이미 신분을 회복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이수광이야 기존의 승지들 중 유일하게 남은 인물로 좌부승지에서 좌승지로 승진한 것이다. 그 외는 모두 새로운 인물로 채워졌는데 다 유능한 인물들이라 하겠다.

우승지 유몽인(柳夢寅)은 우리에게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 ‘야담’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된 저서로, 다채로운 내용과 자유로운 문체를 높이 평가받고 있는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허균(許筠)이나 김만중(金萬重)이 국문학사를 벗어나면 ‘홍길동전’과 ‘구운몽’의 저자보다는 당시의 핵심적 신하로 먼저 인식되는 것처럼, 유몽인도 최초의 야담집을 지은 뛰어난 문학가이기에 앞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 관원이었다.

장원으로 급제한 뛰어난 실력의 유몽인은 자가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시호는 의정(義貞)이다. ‘어우야담’에도 사용된 ‘어우’라는 다소 독특한 호는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나오는 말로 ‘과장해 속이거나 아첨한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그는 뛰어난 학문적 문학적 성취 외에도 명나라에도 세 번을 다녀오는 등 외교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 외에도 그는 경세론에도 상당한 깊이를 갖고 있었다.

그런 면모는 그가 상주한 <안변(安邊)32책>에 잘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제목 그대로 변경을 안정시킬 수 있는 32개의 방책을 제시한 그 글에서 그는, 변방 백성을 해당 지역에 안정시켜 군병을 확보하는 기반으로 삼고,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며 훈련과 축성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두 목적을 이루려면 은광의 개발, 화폐의 사용, 여관과 상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노포(路鋪:길가의 가게)의 설치, 선박ㆍ수레의 사용 같은 경제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경세론은 농업을 중심에 두었지만, 국방과 경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매우 독특하고 참신한 의견을 제시했다.

이것이 그가 승지에 발탁된 결정적 계기였다.

좌부승지 장만은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실무 관료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인 장만은 인동(仁同) 장씨로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1566년(명종 21) 부 기정(麒禎)과 모 배천 조씨(趙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통진(通津- 경기도 김포의 옛 지명)에서 태어났다.

장만의 딸은 주화파로 유명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에게 시집을 가서, 최명길은 장만의 사위가 된다. 최명길이 국방과 경제에 능했던 실무관료임을 고려하면 장인과 사위 모두가 문무겸비의 재국(才局- 재주와 도량)을 지녔다고 볼 수 있었다.

1589년 장만은 24세의 나이로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59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예문관의 여러 직책을 거쳤으며, 형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의 정언, 지평 등 언관직을 지냈다. 또 1598년 황해도 봉산 군수, 1600년의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장만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원 역사에서 그는 왜란과 이괄의 난, 호란으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은 선조, 광해군에서 인조 대에 이르는 시기 장만은 지방의 관찰사와 병조판서 등의 주요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국방에 대한 탁월한 실무능력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특히 광해군치세 15년간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침입이 가시화되고 실제 후금과의 전투도 수행되던 시기로서, 이 시기에 장만은 광해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국방 정책과 외교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일선 실무자로 활약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바뀌었지만 장만은 도원수의 자리에 올라 국방 문제를 계속 책임졌다. 그만큼 경험이 풍부한 국방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공신에 임명되고, 인조시대 명과 후금의 충돌이 교차하는 국경 지역의 방어에 최대한 헌신했다.

선조에서 인조 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장만은 국경의 최일선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크게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도 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이것은 조선시대 인물 및 정치사 연구가 학문적 계보 중심이나 당쟁사 중심으로 흐른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성리학 연구에 치중하거나 당인(黨人)으로 활약한 인물에 비중을 둔 나머지 실제 국방의 일선에서 활약했던 장만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진이 그를 승지로 특별히 발탁한 것은 이와 같은 그의 탁월한 실무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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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늘 평안하시고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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