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7 회: 잠행(潛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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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갑진(甲辰)년 즉 1604년이 된 것이다.
때는 춘 삼월 호시절(好時節) 이었다.
겨우내 잠들었던 온갖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맞아 황제 이진은 그동안 마음만 먹고 제대로 시행해 보지 못한 잠행(潛行)을 해보기로 했다.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또 한양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직접 자신의 눈으로 살피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간 몇 번 몰래 궁을 빠져나가 민간을 살펴보려 했지만, 측근에 있는 환관과 궁녀들은 물론 경호상의 어려움을 들어 금군의 어영대장까지 ‘불가하다!’ 극력 간하니, 결단하지 못하던 것을 오늘은 큰마음 먹고 이들을 설득해 놓은 것이다.
이에 따라 어영대장인 김체건은 물론 내금위장 김명순, 겸사복장 백일문까지 모여들었다. 전의 겸사복장이었던 정기룡은 지금 8사단이 창설되어 8사단장이 되었다. 아니 지금은 모두 군단체제로 바뀌어 8군단장이 되어 있었다.
아무튼 여기에 금군 수장들의 요청으로 검계의 두 두령인 김득신, 황명호까지 측근 경호에 나섰다. 이들 외에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수백 명의 뛰어난 금군이 동원되어 수십 보 내에서 이진을 에워싸고 걷고 있었다.
또 최 외곽의 기병 외에는 모두 도보로 궁성을 벗어난 것이다. 여기에 또 극력 따라나서는 다섯 인물이 있으니 김 상선을 비롯한 두 대전내전과 남장을 한 제조상궁 정옥빈과 부제조상공 개똥이였다.
이렇게 되니 이진까지 이 인원만 11명인 데다 삼보 이내에는 또 금군의 상위 계급자 10명이 또 배치되었으니 사대부마냥 꾸몄으되, 누가 봐도 평범과는 거리가 좀 있는 행렬이었다.
아무튼 이 행렬이 제일 처음 향한 곳은 광통 방을 지나 한양 외곽의 간선도로 양쪽으로 지어진 시전(市廛)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수도건설 사업과 함께 시전건설 계획을 세워, 1412년부터 14년(태종 14)까지 4차례에 걸쳐 한양 간선도로변의 좌우에 시전을 위한 공랑(公廊:건물) 3천여 칸을 지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을 지정된 상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그 대가로 나라에서는 공랑세(公廊稅)로 봄가을로 쌀 2말씩을 거두었다. 또 이외에 국역(國役)의 성격으로, 관청의 수요에 따르는 임시부담금, 궁중, 관부의 수리와 도배를 위한 물품 및 경비, 왕실의 관혼상제, 중국에 파견되는 사절의 세폐(歲幣), 해마다 중국에 바치는 공물(貢物)) 수요품의 조달을 맡겨 왔었다.
그러던 것을 이진은 이들에게 일체의 분담금을 지우지 않는 대신 공량세를 올려, 봄가을로 쌀 5말 값 즉 5전씩을 화폐로 받았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모든 물품을 필요에 따라 사들이니 육의전도 모두 없어지고 금난전권이 출현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이진이 시전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온통 흰옷 일색의 백성들이었다. 봄이라 지만 아직 솜옷을 벗지 못한 자들도 있었고, 홋적삼으로 갈아입은 자들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여인네들의 고생이 눈에 훤하게 그려지는 이진이었다.
솜옷을 빨려면 그냥은 안 되고 바느질한 것을 제다 뜯어내고, 일단 안에 든 솜을 다 꺼내야 했다. 이제 이것을 빨아야 되는데, 이것이 겨울에나 입는 옷이다 보니 뜨거운 물에 빨면 좋으련만, 지금과 같이 보일러시설이 있나, 그냥 찬물에 잿물에 담갔던 것을 하염없이 방망이로 두드려 때를 빼야 했다.
이것을 다시 다듬이질을 해 광택을 내고 부드럽게 한 후, 솜을 넣고 다시 꿰매야하는 번거로움이란 참으로 이만 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진은 떠오르는 상념을 접고 다시 시전으로 눈을 돌렸다.
칸칸이 들어선 각종 상점에 주인은 안에 앉아 있었고, 손님들은 밖에서 요구하는 물건을 손가락질하며 흥정을 했다. 작은 점포이다 보니 손님이 안으로 들어가는 예는 없었다. 누가 보면 흥정하는 것이 마치 싸우는 것과 같이 왁자지껄 요란스러웠다.
이들의 하는 모양새를 보면 애초부터 주인은 물건 값을 2배로 부르고, 손님들은 절반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기를 쓰는 모습이었다. 대부분이 다 그렇게 흥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상점의 크기냐고 반 평정도 되는 곳에 온갖 물품을 쟁여 놓았는데 신기할 정도로 높이 쌓아올려 놓았다. 그리고 온 손님에게는 무심한 척 앉아 친절이라고는 눈곱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불친절하였다.
이런 모습들을 웃으며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는데 한가운데 길을 막아선 놈이 있었다. 땔나무 장사였다. 소의 등은 물론 양쪽에 땔나무를 잔뜩 얹고 있는데, 오후가 된 이 시간에도 아직 못 판 것을 보니, 늦게 나왔거나, 이진이 금한 온돌 금지령 때문에 땔감이 안 팔렸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이진은 산의 푸르름을 위해 전국적으로 이제 석탄광을 적극 개발해, 난로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개중에 눈을 피해 온돌을 놓은 자들도 있겠으나 추측하기로는 극소수 일 것이다.
이진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땔나무 장수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갔다. 그런데 땔나무 주인은 아예 오는 손님은 신경도 안 쓰고,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흥정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소가 음메~ 하고 가볍게 울며 곁에 선 주인을 툭툭 치는 것이었다. 소가 먼저 손님 오는 것을 보고 주인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신기한 광경에 이진뿐만 아니라 수행원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눈길을 떼지 못했다.
비로소 눈을 들어 앞의 손님을 바라보는 땔나무 장수였다. 이진의 행색을 보자 비록 옷차림은 일반 사대부마냥 평범하게 꾸몄으나, 보통 사람은 아니라 느꼈는지 바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하긴 일반 양반이면 무조건 상민은 존댓말을 해야 했다.
반면에 양반은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반말이었고, 자리에 같이 동석할 일이 있으면 양반이 앉으라 하기 전에는 앉을 수도 없었다. 내처 서 있다가 앉으라면 비로소 앉는데 그것도 무릎을 꿇고 앉아야 했다.
마치 죄지은 짐승처럼 그러다가, 편히 앉으라는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앉을 수가 있었다. 이런 처지이니 언감생심 어디 반말이 나오겠는가?
“어떻게 오셨사옵니까?”
“내 하나 물어보자. 어찌 아직 땔감을 팔지 못했느냐?”
“늦게 나 온데다가 이제 봄철이니 난로도 걷어치우는 판이라.........”
“그래도 밥은 지어먹어야 할 것 아니냐?”
“그것도 예전만 못합죠. 지금은 갈탄인가 석탄인가가 많이 나와서 땔나무장사는 굶어죽게 생겼습니다요.”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앞으로 나가는데 이번에는 양반 무리 하나가 보였다. 양반들은 일을 하는 것을 수치로 아는데다, 더더군다나 직접 물건을 사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소일 삼아 시장구경을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기이한 행색을 한 자도 있었다. 꼭 구한말마냥 안경을 쓰고 긴 장죽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도 분명 도수가 없는 알인데다가 담뱃불은 붙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새끼손톱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안경이야 이제 교역이 활발해져 양이의 물품이 들어오는 것이 이상할 게 없지만, 이진이 보기에 장죽을 물었다는 것은 심상한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담배의 폐해를 알기에 비록 명과 왜에 수출은 할지언정, 조선 백성들은 피우지 말라 했거늘 잘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검으로 남을 해하려는 자는, 검을 다루다보면 자신부터가 상처를 입는 법이다. 그래도 오늘 자신이 본 바로는 담배 피는 사람을 별로 본 일이 없는지라, 아직 크게 번진 것 같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아무튼 시 건방을 떨며 지나가던 치들이 이진의 무리를 보고는 무엇이 있어 보이는지 얌전하게 스쳐지나갔다. 재미가 없어진 이진이 다시 눈을 들어 전방으로 눈을 돌리니 마침 유기를 파는 유기점이 밀집된 곳이 보였다.
이것을 보자 이진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 유기가 조선의 주력 수출품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번쩍 번쩍 노란 광택이 나는 이 유기를 보면 양이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는지라, 이제는 주력 수출품의 중의 하나가 되어 많은 은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원래 조선의 산업이 다 그렇듯 이런 훌륭한 수출품이 있어도 관이 아니면 이를 대량으로 생산할 곳이 없었다. 수요가 있어도 직공도 없이 장인 한 명이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것을 이것이 양이들에게 잘 팔린다는 보고를 받자, 이진은 나라에서 대규모 자본과 시설 투자를 하여 이를 만들게 하니, 오늘날의 주요 수출품이 된 것이다.
나라에서 먼저 시작하니 이제는 상업자본도 가세하여 양이들의 수요를 충족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외에 또 하나의 주력 수출품이 있었으니 나전 칠기와 자개함이었다.
특히 황동 백동으로 테를 두르고 온갖 자개로 멋을 낸 농이나 보함(寶函) 등의 온갖 자개류는 미처 생산이 달려 못 팔 지경으로 양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품목이었다. 이렇게 죽 시장을 구경하던 이진이 다음에 향한 곳은 지금의 청계천이었다.
이진이 사저에 있을 때 본 바로는 이 청계천뿐만 아니라 모든 한양의 작은 천들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악취가 진동하고 보기가 역겨웠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폐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다.
그래도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여름철 장마가 이를 모두 씻겨 내리고, 동절기에는 이곳 모두가 얼어붙는 관계로, 세균 번식을 막아 그렇지 않았나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아무튼 그러던 것을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한 이래, 이진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양안석축(兩岸石築)공사와 함께 준설,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치수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 할 수 있었고, 오폐수도 한결 덜해졌다. 또 다른 한양의 주요 하천도 이와 마찬가지로 준설하고 정비하였다.
광통교에 올라 자신의 뜻대로 공사가 된 것을 보고 흡족한 웃음을 짓는 이진이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 무렵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진은 광통방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처로 찾아갔다.
곧 자신의 사저시절 왕자사부로 있던 하락(河洛)의 집이었다. 사실 이진이 임해로 빙의된 이후 얼마 배운 바는 없는 사람이지만, 광해와 함께 몇 년 동안을 그에게 배운 바가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는 이진으로서는 옛 사부를 홀대 할 수 없어, 재물을 좀 내린 바 있었다.
어찌 됐든 왕자사부 직에서 물러난 하락은 그 이후 일체의 벼슬을 받지 못하고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석년에 광해가 뒤늦게 하락의 실정을 이야기하며 황상이 도와줬으면 하는 청원을 하기에, 옷감이며 일부의 재물을 내려 보살핀 바가 있었다.
그 이후로는 큰돈은 아니지만 의식주 걱정 없을 정도의 재물을 해마다 내려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여하튼 이진이 해거름에 이집을 찾아들자 갑작스러운 황제의 내방에 그야말로 소란스러움의 극치를 이루는 하락의 집이었다.
종의 기별을 받은 하락이 버선발로 튀어나오고 곧 사랑채로 안내된 이진에게도 그 소음이 들릴 정도로 안채에서는 그 소란스러움이 유난했다.
“황상!”
이진의 출현에 마당에 부복했던 그가 사랑채에서도 이진이 자리를 잡자마자, 그 앞에 부복하는 하락이었다. 칠십 중반이 넘은 고령의 하락이었다. 그런 그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황송해 어쩔 줄을 몰라 하니 오히려 이진이 더 불편할 정도였다.
“이 어찌, 누추한 곳을 몸소 방문하시고........”
“정정한 모습을 보니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사부!”
“늙어죽지 못한 귀신을 황상께서 친히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소신 감격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황상!”
“어인 말씀이 그러 하오. 사부 같은 분이 오래 사셔서 가끔 깨우쳐 주시기도 하셔야죠.”
“이제 오락가락 하는 늙은이가 무슨 아뢰올 말씀이 있겠사옵니까? 하옵고 어질고 영특하신 황상이시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시려고요. 지금의 태평성대가 다 황상의 공인 줄 이 늙은이도 잘 아옵니다.”
“허허........!”
헛웃음을 짓고 마는 이진이었다. 그가 선조에게 보고한 바로는 문리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자로 보고했거늘 영특은 무슨 영특? 하긴 당시 임해가 그러했으니 그만 나무랄 일도 아니었다.
“어지신 성상의 은혜로 온 식구가 풍족하게 살고 있어 그 은혜 뼈에 사무치옵니다. 황상!”
“별 말씀을. 아직 나라 살림이 온전히 풍족치 못하니 더 내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음이 때로 미안할 따름입니다. 사부!”
“어인 말씀을.........! 그런 말씀은 거두어주옵소서. 황상!”
급히 또 부복해 찔끔거리는 하락을 보니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하는 이진이었다.
“알았소. 알았어. 연로하신데 자꾸 그러시면 관절에 무리가 옵니다. 사부!”
“소신이 생각하기에 지금과 같은 어지신 정사가 죽 이어진다면 우리 조선은 해동성국을 넘어 세상 으뜸의 나라가 될 것이옵니다. 황상! 이 노 필부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사는 보람이 있사옵니다. 황상!”
“면전에 대고 민망하게 칭찬 그만 하시고, 술상이나 한 상 봐오세요.”
“아마 지금쯤 준비 중일 것입니다. 황상! 황상께서 친히 납시셨는데 어찌 서운하게 박주 한 잔 없이, 그냥 보내겠사옵니까? 황상!”
“하하하.........! 그렇지요?”
이진이 대소를 터트리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주안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문 밖에 대기하고 있는 부제조상궁을 이진이 불렀다.
“개똥아!”
“네, 황상!”
“사부님께 은자 100냥만 내리도록 해라.”
“네, 황상!”
이를 들은 하락이 또 다시 급히 부복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되옵니다. 황상! 이미 올 일 년 치..........”
“됐습니다. 사부! 다 그만 정도는 내릴 만하니 내리는 것이니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부!”
“이 은혜를.........!”
늙으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또 주책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는 하락을 보고,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따뜻한 웃음을 짓는 이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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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몸이 아파 약을 먹고 좀 쉬었습니다.
오늘 부터는 다시 정상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늘 후의에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