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8 회: 황제의 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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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만 못했다.
어제 저녁은 만사를 젖혀놓고 즐기면 되었지만, 오늘 아침 또 눈을 뜨니 이진에게는 산적한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그냥 대 지주 집안의 양반으로 환생해, 과거시험이고 지랄이고, 그냥 한 평생을 탱자 탱자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는 이진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일. 다만 맡을 일에 충실해야지 어찌 하겠는가. 오늘도 쓰린 속을 끌어안고 새벽 4시에 기상해 아침부터 사람 타락하라는 것인지 타락죽을 내온 것을 호통 쳐 복어 국으로 대체하고, 군의 인사에 고심하는 이진이었다.
북방의 신립부터가 아직 연해도의 개척이 다 끝나지 않아 빼주어야 했고, 천진에 머물고 있는 이일의 병력도 북해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교체해주어야 했다. 여기에 명에서 할양받아 새로이 조선 12도의 하나로 편입된 해남도(海南島)에도 군사는 물론 관찰사도 파견해야 했다.
이런저런 인사로 고심하고 있다 보니 어느덧 경연시간이 다가왔다. 이에 이진은 오늘은 바빠 경연에 참석치 못한다고 대전 내관에 이르고 계속 이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제대로 결단할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이진이 곧 마음을 바꾸어 먹었다. ‘나 혼자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아닌데, 왜 나 혼자 끙끙거려야 하지? 명석한 놈들도 데려다 놓고, 다 국 끓여 먹을 것도 아니고.’
이런 생각이 들자 이진은 곧 자리에 벌렁 누워 태업을 행했다. 그러다 깜박 잠이 들려는 순간 고하는 자가 있었다. 김 상선이었다.
“폐하! 곧 승정원 회의가 열릴 시간이옵니다.”
“알았다. 끙...........!”
괴로운 신음을 토하며 마지못해 일어나 사정전으로 향하는 이진이었다. 사정전에 도착하니 이미 육 승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험, 험..........!”
가볍게 기침을 하고 이진이 자리에 앉자 그들이 밤새 안녕을 물었다. 이에 간단히 받는 둥 마는 등 답을 한 이진이, 다른 안건이 올라오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최전방과 해남도에도 관리를 파건해야겠는데 적당한 인재가 있으면 추천하도록 하오.”
선임자가 말할 것이 있는지 잠시 좌중을 살피던 좌부승지 이수광이 발언을 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금번에 요동에서 항복 받은 한인 군사만 해도 근 4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이들의 쓰임새를 우선 궁리해야겠사옵고, 항장들 또한 잘 설득하여 아군의 국방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부렸으면 좋겠나이다.”
“흐흠.........! 일리가 있소. 그래, 누가 그들을 설득해 보겠는가?”
“소신이 한 번 해보겠사옵니다. 폐하!”
역시 발언을 꺼낸 이수광이었다. 하긴 병조를 분장하고 있는 그 이다보니, 자신의 업무라 나선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어 이진은 해남도 관찰사를 추천하도록 하니, 이 사람 저 사람 승지들의 입에서 거론이 되나 하나 같이 이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속 비토만 하던 이진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니, 뜻밖에도 예조판서 우성전이었다. 그리고 변을 대었다.
“좀 사고가 너무 편협한 것 같아, 국외에 나가 여러 풍물을 겪어보면 달라지지 않을까 해서 내는 인사이니 그리 아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이첨을 임명하도록 하오.”
“이이첨은 좀..........”
도승지 이원익이 낯을 찡그리며 탐탁치 앉아하자 이진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개똥도 다 약에 쓸데가 있는 법이라오.”
이 말에서 황상의 의중을 짐작하고 승지들이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군 포상 문제 및 배치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소. 이에 대해 각자 의견을 말해보오.”
이진의 말에 즉각 합리적인 도승지 이원익이 발언을 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공을 포상하는데 있어서 그 출신을 따진다면 앞으로 우리 조선이 더욱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을까 사료되어 집니다. 해서 이번에 공이 많은 야인 출신도 똑같은 비중으로 포상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옳은 말이오. 그 문제는 일찍이 짐이 생각한 바가 있소. 기존의 1, 2, 3 사단장을 공히 군단장(軍團長)으로 승급시켜 같은 예하를 거느리되, 여진인들은 사단장으로 승급시켜, 금번에 포로로 잡은 4만을 각각 1만씩 예하로 분배하는 것이오. 하면 이일 장군 같은 경우 포로로 잡은 군사가 없어 군단장 직급이 어울리지 않으나, 북해도에서 아이누족을 정벌하는 대로 거기서 충원하여 체제를 만들면 될 것이오.”
“하옵시면 자리 배치는?”
좌부승지 이수광의 물음에 이진이 답했다.
“짐의 생각으로는 연해도의 복속 사업도 계속해야 하니 신립과 낭패아한을 그곳으로 보내되, 한인 포로 2만도 함께 보내 그들의 수족이 되는 것이죠. 또 권율은 최근 점령한 요하 쪽을 맡되, 지금 그대로 아구다와 함께 한족 병사 2만을 흡수하여, 미진한 곳을 더욱 개척해야만 할 것이오.”
“하옵시면 천진과 영하성 그리고 해남도가 남았습니다. 황상?”
좌승지 이호민의 물음에 싱긋 웃은 이진이 답했다.
“천진과 영하 방면에는 4사단장 곽재우를 보내고 해남도는 5사단장 김덕령을 보내려하오.”
“그렇게 되면 도성에 일체의 중앙군이 없어 도성 방위가 너무 취약하고,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발생할까 저어되니..........”
우승지 한백겸의 염려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말했다.
“짐도 그것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오. 해서 차제에 3만 중앙군을 더 충원하려 하오.”
“문제는 나라 살림살이가 아닐까 합니다. 황상!”
호조를 분장하고 있는 좌승지 이호민의 말에 이진이 답했다.
“원균과 이억기가 약탈한 재보가 상당량 되는 것으로 알아요. 또한 북방의 구유크도 혼자만 꿀꺽하지는 않겠지. 여기에 곳곳에서 세수가 증가하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오.”
“그렇게만 된다면 야..........”
수긍한 듯 주억거리는 이호민을 보고 있다가 이진이 말했다.
“지금까지 나눈 내용을 전부 황명으로 전하고, 즉위식에 한 점 착오가 없도록 지금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폐하!”
이어 다른 안건이 올라오기 시작했으나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바로바로 하교하고, 잠시 후에는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 * *
관상감에서 길일을 잡으니 5월 5일 단오 날이었다.
이날은 조선의 큰 명절인 동시에 큰 길일이었다.
3월3일 삼진 날
5월5일 단오 날
7월7일 칠석 날
9월9일 중양 절
설과 대보름 그리고 중추절 외에 조선의 4대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날이다.
그런데 모두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모두 홀수 달에 홀 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달의 그 날짜가 겹치고 있다. 자고로 조선은 홀수를 길한 수라 여겼고, 홀수는 밝음 태양, 남성을 상징했다. 반대로 짝수는 어두움, 달, 여성을 상징한다 하겠다.
아무튼 이 진이 황제로 취임하는 이 단오 날은 조선의 청춘남녀들이 더욱 신나게 생겼다. 엄격한 남녀유별의 사회에서 이런 명절날만은 유일하게 남녀가 서로 만나 대화도 할 수 있고, 함께 어울려 씨름구경, 답교(踏橋) 즉 다리 밟기 행사도 즐기는데, 황제 취임일까지 겹쳤으니, ‘훗날 ‘단오 베이비’ 이것은 영어라 그렇고, ‘단오 아기’라는 신조어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5월5일 단오 날이 되었다.
이날 이진이 제일 처음 한 일은 정식으로 대가(大駕)를 꾸며 원구단(圜丘壇)단에 제례를 올리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원구단은 지금의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의 원구단이 세워졌던 자리에 이진이 새롭게 원구단을 조성한 것이다.
원구단은 명에도 있는데 이는 오직 이 세상에서 한 사람 하늘의 자식 즉 천자만이 이곳에서 제례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중화사상으로 보면 조선이 원구단에서 제를 올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우리나라도 그전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제는 고대로부터 천손민족인 우리 민족만이 할 수 있었던 전통 제사의식으로 쭉 있어 왔다.
통치자가 취임하거나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 이를 고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행사인 이 천제는 환국, 배달, 고조선 이래 조선 초기까지 그 맥이 이어졌으나, 조선왕조 세조 때 중국의 황제만이 천제를 올릴 수 있다는 명나라의 압력으로 중단된 바 있었다.
그것을 이진이 황제로 취임하면서 원구단을 새롭게 조성하고 지금 다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황제 취임에는 명국도 초청을 했으나 그들이 올 리가 없었다. 자신들만 유일한 황제 국이라 칭하는데, 또 하나가 나타났으니 오늘 같은 날 침략만 안 해도 다행이었다.
아무튼 오늘 이진은 왕의 행차 시 꾸미는 대가(大駕), 법가(法駕), 소가(小駕) 중 1만 명이 동원되는 가장 성대한 행렬인 대가로 꾸며 원구단을 향했다. 이에 따라 어가의 제일 선두에는 천여 명에 이르는 금군이 갑옷과 무장을 갖추고 길을 열고, 다음으로는 각종 깃발과 의창용 창검을 든 자들이 따랐다.
그 다음으로는 수백 명이 멘 가마를 탄 이진이 나아가는데 앞뒤로는 당(幢), 개(蓋), 일산(日傘)과 커다란 부채 등을 든 자들이 따르고, 또 각 군의 지휘기와 왕실을 상징하는 기 들이 숲을 이루고, 또 이 속을 수백 명의 장악원 소속의 아악대가 줄줄이 따르며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뒤로는 일약 왕이 된 광해를 비롯한 배 다른 동생들과 종친 여타 문문백관들이 차례로 열 지어 따랐다. 또 맨 뒤로 수천의 어림군이 완전 무장을 하고 뒤를 따르니 그 위용이 과히 해를 가릴 만 했다. 또 이 연도에는 수많은 한양 백성들이 몰려 나와 이를 구경하고 경축하고 있었다.
이렇게 천제를 지낸 이진은 곧 경복궁으로 들어와 황제취임식을 가졌다. 제 순서에 따라 진행이 되었는데 뭐니 뭐니 해도 그 절정은 이진이 사정전에서부터 연을 타고 근정전에 도착하는 장면이었다.
왕은 붉은 옷을 입지만 황제는 노란 옷을 입는다. 따라서 황금색에 발톱 다섯 개 달린 용포(왕은 4개 이하)를 입고, 머리에는 보옥이 주렁주렁 달린 면류관을 썼으며, 발에는 노란 목화를 신었다.
그가 나올 때부터 시작된 주악이 이진이 용상에 앉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진은 용상에 앉아 잠시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측으로는 왕대비 아니 황태후가 된 박 씨를 비롯하여 황후 허 씨 또 빈과 종친, 여타 광해를 비롯한 왕, 우로는 여진, 유구, 섬라, 몽골 등에서 온 사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하에는 영의정 이하 각 대신들이 품계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이를 잠시 바라보던 이진이 다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기단 위로 뚜벅 뚜벅 걸어 나와 섰다. 그리고 미리 작성된 황제취임사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짐은 오늘 옛 조선부터 면면히 이어오던 천제를 거행하는 것으로, 면면이 이어오던 천손(天孫)이 다시 황위(皇位)로 나아감을 고했느니라. 비로소 짐은 이 나라를 여신 단군 성조(聖祖)께 떳떳할 수 있었음이니라.
이를 계기로 우리 대 조선 백성들은 그간 외세의 압박에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배달민족의 웅대한 기상을 사해만방에 활달히 떨쳐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군 성조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에 따라, 비록 피가 다를지라도 포용하고 함께 살 부대끼며 공존해야 할 것이니라.
또한 제 문무신료들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여, 우리 백성들이 보다 풍요롭고 배곯지 않는 세상에 살게 해야 할 것이며, 비록 천인일지라도 그 직분에 충실한자, 가려 뽑아 얼마든지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기회를 줄 터. 용맹정진하고 발분하기를 바라느니라.
끝으로 오늘로 새롭게 문을 여는 ‘대 조선제국(大 朝鮮帝國)’의 연호(年號)는 영원히 흥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영흥(永興)이라 하고, 오늘을 그 원년 첫날로 삼노라!]
이진의 취임사가 끝나자 새로이 이조판서가 된 이이첨이 단 위에 나와 말했다.
“다음으로는 만세 삼창이 있겠습니다. 먼저 황제 폐하의 만세(萬歲)를 기원하며 만세 삼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 만세!”
“만 만세!”
“대 조선제국 만세!”
“대 조선제국 만세!”
“만세!”
“만세!”
“만 만세!”
“만 만세!”
쾅, 쾅 쾅!
쾅, 쾅 쾅!
이어 33발의 예포가 울려 퍼졌다.
이어 명의 영창공주를 비(妃)로 맞아들이는 약식 혼례가 거행되었다.
“이상으로 대조선제국의 초대 황제 취임식과 혼례식을 마치고, 이어 경회루에서 성대한 경축연을 개최하겠으니, 자리에 임하신 분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장소를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이이첨이 무슨 현대의 예식장 피로연 안내하듯 말을 하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 쪽으로 향했다.
아무튼 훗날의 역사가들이 ‘중흥의 치(中興之治)’라 일컬어지는 영흥 원년(永興 元年)의 개막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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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베풀어 주신 厚意에 감사드리며 늘 즐겁고 행복한 날 되세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