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7 회: 황제의 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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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간신들의 활약(?)에 속으로는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체면상 겉으로는 한 발 빼려니 죽을 맛이었다.
"아직 이르다. 조선이 조금 더 발전하면 그 때 다시 논하겠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봄철에 씨를 뿌려야 농사를 망치지 않는 이치와 같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옵니다. 상국이라는 명국도 작금 대 조선의 발치 아래 납작 엎드렸고, 또한 조선의 영토 남북으로 수만리에 이르니, 흥성(興盛)하는 작금이 그 적기가 아닌가 합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간신 4인방 역시 동조하여 크게 외치니 난처한 표정을 짓는 이진이었다.
"하루아침에 상국의 은의를 저버리고 동등한 항렬에 선다는 것은, 모두 신의 없다고 꾸짖을 일이 아닌가 합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예판 우성전을 따라 같이 부복하는 신하가 있는가 하면, 이제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신하들도 제법 생겨났다. 그런 가운데 도승지 이원익이 부복하여 아뢰었다.
"우리 조선의 개국 초에 시세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대(事大)를 결정하였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국운 융성(隆盛)한 작금은 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옵니다. 전하!"
"융통 무애한 것이 외교이거늘 시운에 따라 그 정책도 변경되는 것이 타당한 줄로 아뢰오!"
도승지에 이어 좌부승지 이수광마저 한 팔 거드니 내심 흐뭇함을 감출 수 없는 이진이었다.
여기에 또 이이첨이 나와 나팔을 불었다.
"좌고우면 할 것 없사옵니다. 폐하! 어리석은 소신이 알기로도 여진의 일부 족장을 칸으로 인정한 것으로 아옵니다. 이는 우리가 그런 자들과 동렬 선상에 서서 논의되는 것. 이것이 아니더라도 수만리 영토를 제대로 다스리시려면, 그에 걸맞은 옷으로 갈아입으셔야 제대로 된 통치가 될 것이오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또 다시 간신 4인방 합세하여 한 목소리를 내는데, 일부의 뜻있는(?) 신하들 역시 동조하여 함께 부복하였다.
"흐흠.......!"
비로소 침음하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척하는 이진이었다.
반대하는 신하나 찬성하는 신하나, 모두 초조한 표정으로 이진을 지켜보는 가운데 장고하던 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국운 융성한 지금이 적기다. 하니 예조에서는 관상감에 일러 길일을 택하라. 국명은 '대 조선(大 朝鮮)'으로 할 것이며, 과인은 곧 '짐(朕)'으로 칭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오늘의 잔치는 더욱 크게 벌여라. 뭣들 하는가! 전악은 어서 풍악을 울리지 않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상반된 신하들의 부복 속에서 은은한 주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진이 다시 발언에 나섰다.
"짐이 명국에 더 가혹한 조건을 걸 수 있음에도 이 정도로 만족한 것은, 사대부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한 작금, 그들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음을 우려함이니라. 예를 들어 짐이 명국을 통치한다고 할 적에, 통치의 편의를 위해 복수의 각 조 판서를 두었다고 치면, 아국의 판서는 아직 사대의 때를 벗지 못했으니,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매에 매달려 일일이 가르침을 청할 것이니, 이 어찌 온전한 통치가 되리오. 먼저 조선의 전 사대부들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짐부터 솔선하여 하늘의 자식(天子)이 됨이 마땅하니라. 이렇게 말을 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자들은 매우 우매한 자 일지니, 마주보고 정사를 논할 수 없음이니라. 각성하고 깨어날 지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여!"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폐하!"
일부 신하만 멀뚱멀뚱 하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부복하여 임금의 황제 취임을 옹호(?)하는 가운데, 이진의 가슴에 들어갔다 나온 이이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 만세!"
"대 조선! 만세, 만세, 만 만세!"
"대 조선! 만세, 만세, 만 만세!"
간신 4인방이 득세하니 일부 신하들 또한 동조하여 함께 벌떡 일어나 만세를 외치는 가운데, 갑자기 장중한 주악이 연주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무엇들 하는가? 모두 잔을 높이 들어, 오늘의 경사를 자축하지 않고!"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또 다시 아첨꾼들이 외치는 만세 소리를, 넉넉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먼저 잔을 높이 들어 선창 하였다.
"대 조선 만세(萬歲)!"
"만세, 만세, 만 만세!"
"하하하.........!"
홍소를 터트리며 거침없이 한 잔 술을 비운 이진이 잔을 들어 제일 앞에 영의정과 동렬 선상에 앉은 서쪽의 이순신에게 잔을 내리며 말했다.
"오늘의 대 조선이 있기까지 그대의 공이 참으로 컸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급급히 엎드려 사의를 표하고 황송한 표정으로 잔을 받는 이순신이었다.
이어 이진은 동반의 우두머리 영의정 이발에게도 잔을 내리며 말했다.
"매사 시시비비 많은 것을 논하고 가렸으되, 결국 모든 일이 바로 갔다. 이는 그대들의 공이니 대표로 영상이 짐의 잔을 받으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시세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시류에 순응하여 폐하를 외치는데, 조금전만해도 꺼려졌던 마음이, 이진의 어루만짐에 눈물이 앞을 가려, 잔이 어디 있는지 제대로 잡을 수도 없는 이발이었다.
이를 따라 제 신료들이 모두 부복하여 성은에 감사를 표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를 바라보는 명나라 항장들, 마음이 착잡하여 눈물을 머금고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오늘 같이 흥겨운 날 어찌 이렇게 눈물자국 흥건한 자들이 많은 고? 그대들만 울어서야 쓰겠나? 짐도 한 번 목 놓아 울고 싶다. 대 조선의 오늘이 있기 까지 짐의 공로 없다고는 못 할 터. 그렇다면 짐이 이 자리에 앉게끔 처음으로 교지를 하달하신 왕대비 마마의 은혜를 짐 어찌 잊으오리! 그 은혜 사무쳐 두 손으로 잔 올리니, 제 대소 신료들은 어마마마의 천세를 위해 다시 잔을 부어라!"
"천세, 천세, 천 천세!"
왕대비 박 씨를 위해 제 신하들이 천세를 외치는 속에서 이진은 몸소 따른 잔을 올리고, 주악은 또 한 반 장중하게 경회루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입으로 술을 넘기는 제 신하들 또한 모두 모두 즐겁고 흥겨운 낯빛이었다. 일부만 빼고.
"황상의 어지심이 전고에 없는 대 조선을 새롭게 건국했으니, 이는 영명하신 황상의 은의(恩義). 제 신료들은 앞으로도 황상을 잘 보필하여, 이 나라 대 조선이 만세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해주오."
왕대비 박 씨의 답사에 또 한 번 천세 소리 드높은 가운데, 이진은 좌중을 돌아보며 다음 차례로 술을 내릴 자를 선정하여 호명하니, 그자 그 은혜 사무쳐 울음으로 잔을 받았다. 이이첨이 곧 그였다.
"그대는 짐의 마음을 너무 잘 헤아린다.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는 듯하다. 허나 그릇된 일에 앞장 설 때에는, 그 목 위에 붙어 있는 물건이 성치 않을 터. 명심하라! 허나 아직 까지는 잘 하고 있다. 짐의 잔을 받아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서늘한 마음에 급히 목을 어루만졌다가, 실태를 깨닫고 급히 엎어져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는 이이첨이었다.
"짐이 지금 크게 안타까워하는 것은, 금번 진공에 커다란 공을 세운, 이일, 신립, 권율 장군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 조선을 위하여 최 일선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을 터, 그들의 노고를 기리는 뜻으로 모두 잔을 높이 들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진의 명에 따라 모두 술잔을 높이 들어 잔을 비우는 가운데, 같이 한 잔 술을 비운 이진이 돌연 엄숙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에 좌중이 기침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 가운데 이진이 다시 입을 떼었다.
"제 신료들은 모두 들어라! 짐이 생각건대 주리, 주기론 다 좋다. 성현의 말씀을 ㅤㅉㅗㅈ는 것 또한 다 좋다. 그러나 짐이 생각건대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사구시의 학풍이 조선 전체에 일어나야, 우리 조선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발전할 수 있음이야. 치열하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그 바탕으로 새로운 물건과 기술이 탄생할 때, 백성들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조선의 국운은 더욱 융성해질 지니, 모두 명심하고 실질적인 학풍을 조성하는데, 제 신료들이 앞장서기를 바란다. 자, 자, 오늘 같이 뜻 깊은 날 고루한 훈시는 이에 그칠 테니, 모두 붓고 마셔라! 뭣 하는고? 전악은 풍악을 울리지 않고!"
"네이, 황상!"
다시 흥겨운 가락이 연주되고 무희와 무동들 긴 소매 들어 나풀거리는데, 이번에는 이진의 눈이 명국 쪽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람은 엉뚱한 인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홍 역관 게 있는가?"
"네이, 황상!"
홍순언이 황송해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자, 훈훈한 웃음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이번에도 실로 그대의 공이 컸다. 차후 포상이 있을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자, 자! 진정하고. 짐의 뜻을 하나도 어그러짐 없이 통역하도록 하라!"
"네이, 황상!"
"우선 영창공주에게."
"네, 폐하!"
"지금의 심정이 어떠한지 물어보라."
"네, 황상!"
홍순언이 뭐라고, 뭐라고 말하자, 귀를 모아야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영창공주가 답했다.
"황상의 영명하심이 오늘 날과 같은 대 조선의 치세와 성세를 이루었은즉, 이를 조선의 한 아낙으로써 감축 드린다 하옵니다. 폐하!"
"허허........! 벌써부터 이 무슨 입에 발린 소린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진으로서는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입에는 미소가 맺혔고 눈은 둥글게 호선을 그리며 더욱 온화해졌다.
더 말을 시키고 싶으나 이 자리는 자리가 자리인 만큼 훗날을 기약하고 이진이 다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짐을 위해 술 한 잔을 치도록 이르거라."
"네이, 황상!"
이진의 말을 전해들은 영창공주 주헌영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부끄러운 듯 그 달덩이 같은 얼굴을 살포시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긋나긋 이진 앞에 서서 소맷자락 여며 이진이 내미는 옥병을 받았다.
"받으시옵소서. 황상!"
올해 나이 우리나라 나이로 16세. 한창 피어날 나이라 화장을 하지 않아도 고우련만, 화장까지 하니 제 신하들이 모두 침을 질질 흘리며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그래. 암 받아야지."
고개까지 끄덕이며 잔을 받는 이진,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지 시종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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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조금 짧지만 오늘 2편을 너무 일찍 올린 관계로 서운하실 것 같아 올리니, 즐감하셨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시고 후원해 주심에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더 욕심을 낸다면 조금 부족할지라도 추천과 댓글로 격려를 해주시면, 매검향 더욱 신이 나서 달려가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진심으로 축원 드리옵나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