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 회: 비빈간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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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마마........!”
모처럼 치마폭에 매달려 어리광을 피우는 헌앙한 아들을 보니, 왕대비 박 씨는 자신 또한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하여, 모든 근심 일시에 내려놓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정녕 주상께서는 그 여식을 꼭 들여만 하겠소?”
“절대 주색에 빠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옵니다. 어마마마!”
“정녕 이 어미 앞에서 다짐을 두는 거죠?”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어마마마! 효도도 더 열심히 할 것이옵니다. 어마마마!”
“호호호........! 이거, 이거. 그 여식 때문에 이 어미가 더한 효도를 받게 생겼으니, 안 들이는 것도 곤란하겠군요.”
“맞습니다. 어마마마! 꼭 부탁드리옵니다. 어마마마! 하옵시면 아침저녁 문후만이 아니라 중참 때도........”
“됐어요. 됐어!”
손사래를 친 왕대비 박 씨가 웃는 낯에서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행치 못할 일은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겠고......... 모처럼 주상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이 어미로서는 안 들어주기가 참으로 곤란하군요. 이 어미 이제 주상의 뜻에 따를 테니, 어미와의 약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어마마마와의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옵니다. 어마마마!”
“좋아요! 이번 납채(納采)에 그 여식도 끼워 넣는 것으로 하죠. 주상!”
“감사하옵니다. 어마마마!”
말과 함께 어리광을 부리느라 왕대비 박 씨를 꼭 끌어안는데, 지분냄새가 강하게 풍겨서 곤혹스러운 이진이었다.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인 데다, 왕대비 박 씨 아직 38세의 한창 젊은 나이.
그러나 왕대비 박 씨는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닌지 즐겁기만 한 표정으로 거듭 다짐을 받는 그녀였다.
“주상, 이 어미랑 약조 하셨습니다?”
“물, 물론입니다. 어마마마!”
이렇게 해서 이름도 모르는 여식까지 네 명이 이진의 비빈으로 간택이 확정되었다. 원래는 세 명만 뽑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예상에 없던 한 여인을 더 끼워 넣게 된 것이다. 그녀들 말고도 또 한 여인이 있으니, 당금 가장 번성한 가문의 하나인 허 씨(許 氏) 문중의 여식이었다.
* * *
곧 비빈도감의 관원들에 의해 납채가 진행되었다. 이진의 사주(四柱)를 써넣은 함을 남색은 안으로 홍색 보자기를 겉으로 고이고이 잘 싸서, 손 없는 날을 택해 신부 측에 보냈다. 그러고 채 이틀이 되지 않아 신부 측에서 혼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복서(復書)가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산이라는 조 씨(趙 氏) 여인은 친정이 너무 먼 관계로, 이이첨이 혼주(婚主)가 되어 진행하도록 하니, 그 기간을 상당히 단축할 수 있었다.
이어 납징(納徵)이 행해졌다. 정혼(定婚)한 표시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내는 의식으로, 납폐(納幣)라고도 한다. 예물로 이진은 색색의 비단 열 필과 여피(儷皮)를 보냈다. 소위 현대에서는 ‘함’이라 하고, 봉채(封采)라고도 하는 의식이었다. 여기서 여피(儷皮)란 사슴 가죽 암수 1쌍을 이르는 말로, 예기(禮記)에 나온 대로 따른 것이다.
이어 고기(告期)가 행해지니, 관상감에서 길일(吉日)을 택해 신부 집은 물론 온 나라에 고하니, 그 날이 시월 열이틀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세월이 흘러 가례일(嘉禮日)인 10월 12일이 되었다. 먼저 혼례를 올리기 전에 네 여인을 비빈으로 책봉하는 비수책의(妃受冊儀) 의식이 거행되었다. 원래 왕비의 책봉식 같으면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에서 이 의식을 행해야 하나, 그 격이 낮은 비빈들의 책봉이므로, 비빈들의 책봉례는 창덕궁(昌德宮)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에서 거행되었다.
의식에 따라 네 여식 모두 이진이 내린 내명부 직위를 하사받으니, 모두 정사품(正四品) 소원(昭媛)이 되었다. 이 의식부터는 벌써 혼례가 시작된 것으로, 이진은 이들 사인을 소원(昭媛)에 봉한다는 교지를 내리고, 이들이 그 의식을 치르는 동안 잠시 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친영(親迎)을 행하기 위해서였다.
친영(親迎)이란 원래 신랑이 납채(納采)를 마치고, 직접 신부 집으로 가서 전안례(奠雁禮) 즉 신부와 혼례를 올린 후,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와서 또 예식을 올리는 과정을 이르는 말인데, 이진으로서는 네 신부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혼례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므로, 신부 집에서 예를 올린 양하여 초례청으로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전안례(奠雁禮)의 한자를 보면 기러기 안(雁) 자가 보이는데, 이는 전안례에서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신부의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기러기는 한번 연(緣)을 맺으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짝 의 연분을 지킨다 하여, 신랑이 백년해로(百年偕老) 서약의 징표로서, 신부의 어머니께 드렸던 것이다.
아무튼 네 여인의 책빈 의식이 모두 끝났다는 말을 보고받은 이진은 곧 혼례 장소인 선정전(宣政殿)으로 향하였다.
이진은 곧 초례청이 차려진 선정전 동쪽 자리에 들어섰다. 처음으로 신부들과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곧 신부들이 수모(手母:시중드는 사람, 즉 여기서는 궁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깔린 백포(白怖)를 밟고 차례로 초례청 서쪽 자리에 들어섰다.
이어 이진이 차례로 신부들을 초례청으로 인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진은 오늘의 혼례 주관자인 우의정 이산해의 집법 홀기(笏記:의식 순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또 이산해가 낭랑하게 외쳤다.
“시자포서석어동(侍者布壻席於東)!”
그러자 궁녀들이 신랑인 이진의 자리에 백포(白布)를 동쪽으로 길게 깔았다.
“포부석어서(布婦席於西)!” 이번에는 신부들 자리에 백포가 서쪽으로 길게 깔렸다.
“서동부서상향립(壻東婦西相向立)!” 신랑은 초례상의 동쪽에, 신부들은 서쪽에 마주보고 섰다.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붉은 면사를 길게 늘여 얼굴을 덮었으므로, 전혀 그녀들의 얼굴은 볼 수 없는 이진이었다. 말 뿐인 상견례였다.
아무튼 상견례가 끝나자 신랑 신부는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세수 대야에 담긴 물에 손을 씻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성스러운 혼례식에 임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의식이었다.
각 신부들은 손을 씻는 흉내만 내었고, 소맷자락 밖으로 손을 내놓지도 않았다. 이어 신부들이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신랑에게 두 번 절을 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이진도 신부들에게 한 번 절을 했다. 신부들이 신랑에게 다시 두 번 절하고 이진 또한 신부들에게 다시 한 번 절을 했다.
신랑이 신부들에게 읍하고 신랑과 신부가 각각 끓어 앉았다.
합근례(合巹禮)가 진행되려고 하는 것이다. 근배례(巹拜禮)라고도 하는 것으로 술잔과 표주박에 각각 술을 부어 마시는 의례였다. 처음 술잔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는 것을 의미하며, 표주박으로 마시는 술은 부부의 화합을 의미했다.
또 반으로 쪼개진 표주박은 그 짝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으며, 둘이 합쳐짐으로써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신랑 왼쪽의 궁녀가 신랑의 잔을 들고, 신랑 오른쪽의 궁녀가 술을 따랐다. 이진이 신부들에게 읍하고 나서, 궁녀가 집어 준 잔을 들어 살짝 맛만 보면 되나, 이진은 거침없이 한 잔 술을 다 비웠다. 이에 좌중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각 신부들에게 술잔이 따라지고, 그녀들은 궁녀가 건네 준 잔을 받아 입에 살짝 대어 마시는 시늉만 하였다. 이제는 술잔이 표주박으로 바뀌어 똑같은 의식이 한 번 더 진행되었다. 이로써 폐백 외에 모든 의식이 끝난 것이다. 마저 폐백이 잠시 이어지고 비로소 모든 의식이 끝나 신부들이나 신랑 이진이나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제 신랑 이진이 가장 바라마지 않던 방합례(房合禮)가 남았다. 신랑과 신부가 신방에 함께 들어가는 의식을 말함이었다. 당연히 초야를 치르기 위함이었다. 네 여인을 한 날 한 시에 맞았으니 이진으로서는 코피가 터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방합례(房合禮) 장소는 정월전(淨月殿)에 마련이 되었다. 이윽고 초경(初更)이 되자, 이진이 윗 용포를 벗어 신부 측 수모인 궁녀에게 벗어주었다. 신부들은 반대로 신랑 측 궁녀들에게 윗옷을 넘겨주는 시시껄렁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어 이진은 네 신부를 데리고 정월전 안으로 향했다. 각 수모들도 따라 들어와 이미 지정된 각각의 방에 금침을 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전각 내부에 방을 꾸민 것이다. 이진이 알았다면 한 방에 다 몰아놓고.......... 험, 험........!
곧 이진의 명에 대청에 거한 주안상이 차려지고, 이진은 감히 황송해 사양하는 네 신부를 어르고 달래 한 상에 모두 둘러 앉혔다. 파격에 모두 놀란 눈치들이나 초면인데다 더구나 상대는 이 나라 최고의 지존이니 어쩔 수 없이 명에는 따르나, 모두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상민의 아내들도 감히 겸상을 못하는 시대이거늘 하물며 왕 앞에서라야.
그런 그녀들의 생각은 아랑곳없이 이진은 그 다음 행동에 착수했다. 그녀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기 위해 앞을 가린 면사를 차례로 제거해 준 것이었다.
그것도 차례가 있어야 했다. 모두 정사품 소원(昭媛) 직첩을 받아 직위에 있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는 당연히 나이순에 따르기로 했다. 당연히 이진 머리 나쁘지 않아, 이들의 사주단자에서 그녀들의 생년과 월 정도는 알았다. 솔직히 생일(生日)은 잘 몰랐다.
이에 따르면 금년에 18세 된 허엽(許曄)의 딸 허국(許菊)이 첫째요. 16세 된 구사맹(具思孟)의 딸 구정녀(具貞女)가 둘째요. 나머지 둘은 15세로 나이 공히 같았으나, 3월생인 신립의 딸 신청(申淸)이 셋째가 되었고, 막내는 동갑이지만 10월생인 조말순(趙末順)이 되었다.
조말순은 사축서(司畜署)에 속한 제주도 말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종구품 말단 참봉(參奉)의 여식으로, 가문으로 보면 가장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 미모가 경국지색으로 이진이 초면에 넋을 잃을 정도였으니, 그 미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아무튼 위의 순서로 면사를 벗겨놓으니 전각 안이 갑자기 촛불 대여섯 개는 더 켜놓은 듯 환해지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미모에 조금은 당황한 이진이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을 먼저 내보였다.
“과인은 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람이오. 그러니 과인 앞에서 너무 고루한 예의에 집착하는 것은 사양하니 그런 줄 아오.”
“네, 전하!”
그녀들의 나지막한 옥음을 간신이 귀에 손 모아 들은 이진이 다시 입을 떼었다.
“오늘 초야를 맞아 모두 절로 긴장될 것이오. 긴장을 푸는 데는 술만 한 것이 없으니, 과음은 하지 말고 어느 정도는 마시는 게 좋겠소. 자, 과인이 먼저 빈들의 잔에 한 잔씩 따를 테니 마시고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바라오.”
이렇게 말을 하고 각자의 잔에 술을 따르니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네 여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이 자신의 잔만 바라보고 있자, 신립의 딸 신청이 재치 있게 옥병을 들며 말했다.
“전하, 소첩이 한 잔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좋소! 이렇게 서로 오가는 것이 있어야 재미있지, 초면이라고 너무 데면데면 하게 굴면 재미가 덜 하단 말씀이지.”
말과 함께 소맷자락 여며 조심조심 따르는 신청의 잔을 받고 이진이 다시 말했다.
“자, 각자의 앞에 있는 잔을 들어 모두 건배합시다. 어찌 되었든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으니 백년해로를 축원해야 하지 않겠소?”
이진의 썰에 모두 잔을 들어 올리는데 술잔만 올라오고 얼굴은 모두 상 밑을 바라보니 이 또 무슨 재미란 말인가. 고개를 들라하면 너무 구속하는 것 같아, 이진은 차라리 네 사람의 잔에 각각 한 번 부딪친 다음 말했다.
“우리의 백년해로를 위해 각자의 잔을 다 비우시오. 중간에 술을 남기는 사람은 백년해로에 지장이 있을 것인즉 그런지 아오.”
주당 이진의 말에 내숭인지 진짜인지는 몰라도, 모두 곤혹스러운 얼굴로 아미가 찌푸려지는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이진의 협박 아닌 협박에 몇 모금에 걸쳐 억지로라도 잔을 다 비우는 제 빈(嬪)들이었다. 그리고 감히 카 소리 한 번 못 내고 찌푸린 아미로 고개 돌려 외면하고 있는 네 여인이었다.
“하하하........! 인상들이 왜 그러오? 분명 술잔에 소태는 안 들었을 텐데 말이오.”
여기서 소태란 소태나무의 껍질로, 약으로 쓰며, 쓴맛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자, 자, 안주 한 첨씩!”
오늘따라 너무 자상한 이진이었다. 고기 한 첨을 집어 한 사람씩 돌려가며 챙겨주니,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삼키긴 삼키나, 쓴맛인지 단맛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서너 순배 돌리자, 수줍어 붉던 얼굴들이 이제는 적약(赤藥)이 만개한 듯 붉디붉어졌다.
더 마시게 하면 초야에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이진은 그녀들에게는 그만 권하고 손수 술을 쳐서 거푸 세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밀들도 모두 내쫓았다.
“모두 나가고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방사에 있어서 이진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지라, 그녀들은 군말 없이 전각문을 열고 사라졌다.
‘허허.........! 이제 넷씩이나 되니 문제네. 그냥 한꺼번에 끝내고 말아. 시간도 절약할 겸. 그래서는 안 되지. 이 여인들도 각자 프라이버시가 있고, 이세 생산하고자 들인 여인들인데, 이세는커녕 긴장이 되어 자궁이나 벌어질라나 모르겠네.’
막상 거사할 순간이 오자 한 번 망설였던 이진이 곧 명을 내렸다.
“각자의 금침에 드오.”
이렇게 명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순간 왜 갑자기 중전 허 씨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 그녀는 보나마나 긴 소매 들어 눈가의 눈물 찍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험, 험.........!”
헛기침으로 상념을 떨친 이진이 곧 옥보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부터?’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진이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달한 걸음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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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늘 평안하시고 행운이 가득한 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