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77화 (77/210)

< -- 77 회: 외교 첩보전 -- >

5

생각에서 깨어난 이진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신충일에게 명했다.

“계속 보고하라!”

“네, 전하!”

“결론부터 말하면 엽혁과 합달 부족 역시 장백여진과 요구조건이 대동소이했습니다. 전하! 이는 이해가 공통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들이라고 황새와 조개가 싸우면 어부에게 한꺼번에 낚이는 것(漁父之利)을 왜 모르겠사옵니까? 신이 몇 마디 설득치 않아도 자신들끼리의 싸움을 피할 의사는 충분히 있었사옵니다. 전하! 하오나........”

잠시 숨을 돌린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국이 보장하는 만큼의 실리가 있어야 하겠고, 대항할 무구가 있어야만 아국으로의 귀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사옵니다. 그렇다고 아국이 모든 야인들의 요구를 들어줄 만큼 강성하지도 못한 작금. 신은 주상전하의 신기묘산대로 우선 그들이 누루하치 영역을 통해 내다팔고 있는 진주, 모피, 산삼, 말 등을 아국의 상인들이 구매하여, 중강시를 통하여 산서나 신안상인에게 팔 계(計)를 제시하였사옵니다. 이는 자신들의 이해와 합치되는바 서로 승낙하였사옵고, 양부(兩部) 공히 무기를 거두되, 중간자로서의 신뢰를 담보할 혼인동맹을 제의하였사옵니다. 전하!”

“흐흠.........! 가는 곳마다 혼사를 제의하니 아국의 공주가 한 수레가 있어도 모자라겠구나!”

탄식하던 이진이 굳은 입매로 결론을 지었다.

“한 술 밥에 배를 수는 없는 법, 계속 그들과 접촉을 하여 그들 부족과 아국이 서로 좋은 쪽으로 결론짓도록 하자.”

“네, 전하!”

“이어 신이 간곳이 동해여진이었사온데, 이들은 거리가 있어서인지 누루하치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는 듯 하였사옵니다. 하오나 그들은 우리의 교역 제의만큼은 크게 반겼습니다.”

“요동보다는 회령이나 경원이 가까울 터, 그들도 반길만할 것이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목과 내놓을 물목까지 전한바, 면포(綿布), 마포(麻布), 저포(苧布), 미두(米豆), 염장(鹽醬), 농구(農具), 종이 등을 마필(馬匹), 해동청(海東靑), 산삼(山蔘) 및 각종 모피(毛皮)류 등으로 교환하자고 제안하였사옵니다. 전하!”

“허한다. 서로 이익이니까.”

“네, 전하!”

신충일의 조아림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제 대신들을 보고 말했다.

“제 공경들도 귀가 있으면 들었을 것이오. 이와 같이 북방도 지금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소.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왜 또한 호시탐탐 재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소. 여기에 명국은 우리의 기미(覊縻)를 전혀 제거할 의사가 없소. 사사건건 간섭한단 말이지요. 이렇게 복잡다단한 정세일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국력을 신장시켜, 어떠한 외침도 막아내고 백성들을 풍족하게 살게 하는 것이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파당의 이익을 논하기 전에, 먼저 백성과 사직의 안위부터 생각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영상 이하 알았다고 부복하나 얼마나 실행이 옮길는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 * *

사흘 후.

관상감에서 뽑은 최고의 길일은 한 달 후였으나, 저들의 일정을 감안하여 이진은 차일(次日)로 제시한 두 개의 날짜 중, 가장 빠른 날을 택하니 곧 그날로부터 사흘 후였다.

이진은 시일 촉급하다는 핑계로 얼렁뚱땅 양인의 혼사를 치르니 장소는 그래도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 앞 넓은 뜰에서였다. 양인의 혼사가 차례로 진행되는데, 자신보다도 늙은 사위를 맞는 인빈 김 씨의 눈물에, 이것은 하례 자리가 아니라 초상을 치르는 것 같았고, 이진 또한 열세 살 나이의 어린 신부의 신장부터가, 자신과 어금버금한지라 도대체가 영 탐탁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서는 물릴 수도 없는 일. 연신 싱글벙글하는 찰합이가 불편해 얼른 식이 끝나길 바랐으나, 식은 이진의 마음과 달리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돈다고, 어찌 되었든 지루한 예식이 마침내 끝났다.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마자 이진은 만사 귀찮아, 후속으로 계획된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곧장 강녕전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이에 이제 고삐 꿰인 망아지가 된 신부 차칸노르가 재게 걸음 놀려 그런 이진의 뒤를 쫓았다.

강녕전 들기 전부터 주안상을 재촉한 이진이 혼자 몇 잔을 술을 거푸 마시고는, 붉은 면사에 가려진 신부를 보고 말했다.

“너도 이리 가까이와 와 한 잔 받거라!”

차칸노르가 이진의 내미는 술잔을 보고 주춤주춤 술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말이 필요 없었다. 이진이 몽고말을 아는 것도 아니고 차칸노르가 조선말을 아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침방까지 역관을 끌어들인다는 것도 못할 짓이었다.

쪼르르.

이진이 손수 따른 술이 옥배에 가득하자 이진의 눈치를 한 번 본 신부가 면사를 들치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이내 거침없이 한 잔 술을 비웠다. 이내 옥배를 이진에게 건네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 역시 투시력이 있는지 면사 사이로도 술을 잘만 따랐다. 이진 역시 받자마자 술 한 잔을 빠른 속도로 비우고 또 술잔을 내밀자, 차칸노르는 사양하는 법도 없이 손을 내밀어 이를 받아 쥐었다.

이렇게 서너 순배의 술잔이 돌자, 이진은 그녀의 답답함을 제거해주기 위해 쪽도리와 면사부터 제거해 주었다. 쌍꺼풀 없는 둥근 눈이 아래로 내리깔려 있으니, 그래도 수줍어는 하는 것 같다.

‘아! 답답하다!’

말도 안통하고. 대화라도 나누면 그래도 나으련만, 이건 도대체가 천생 몸으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흘깃 창문 쪽을 보니 이제야 중참이 갓 지났을까, 환한 가시광선이 창호지를 뚫고 여지없이 투과되고 있었다. 분위기를 잡기에는 시간마저 아직 일렀다.

“차칸노르, 이리 가까이 오너라!”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손짓까지 하자, 무춤무춤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데, 가슴을 꼭 누른 채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긴장이 되는지 손으로 가슴을 누르는 모습에서 이진은 그녀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그래. 네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다 정략이 빚어낸 제물. 후원이나 산책하자.”

혼자 중얼거린 이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자 그녀가 이진의 손에 의지해 함께 강녕전을 벗어났다.

마침내 후원에 이르니 가을 색 완연하여 시시각각 붉고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고, 하늘은 그녀의 북방 고향이 연상되리 만큼 푸르고 드높았다. 그녀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하늘에 둔 시선이 벌써부터 아련하고 아득했다.

애잔한 마음에 이진은 다시 놓았던 그녀의 손을 잡고 옥보를 옮겼다. 그러다가 영 갑갑해서 수행중인 지밀상궁에게 일러 역관을 등대토록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제조상궁 정옥빈에게 물었다.

“차칸노르가 기거할 침궁은 마련이 되었느냐?”

“네, 전하! 별채 하나를 내어 함녕전(咸寧殿)이라 이름 지었나이다. 전하!”

“잘 했다. 음.........! 정략이 게재되었으나 어차피 과인의 여인이 된 몸. 차칸노르를 종4품 숙원(淑媛)에 봉하노니, 착오 없도록 하라.”

“네, 전하!”

어느 때보다 짧게 끊어 대답하는 제조상궁 정옥빈의 눈이 순간적으로 샐쭉했다는 것은 이진만의 착각일까? 그토록 오랜 세월 측근에서 봉사를 했고, 승은까지 입었음에도 자신은 아직 정5품 수위 상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진은 무심히 한마디 물었다.

“혹여 여인 중에 몽고어에 능한 자가 없겠느냐?”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지라, 찾아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그렇게 하도록 해라.”

이때 궁녀 하나와 함께 궁싯거리며 다가오는 염소수염의 중늙은이 하나가 있었다. 분명 역관이리라.

“찾아 계시옵니까? 전하!”

“그래. 과인이 답답하여 그대를 불렀으니, 한마디 빼도 더하지도 말고, 있는 말 그대로 전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우선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떠한지 물어보도록 해라.”

“네, 전하!”

복명한 그가 몇 마디 떠들자 고개를 끄덕인 차칸노르가 답변했다.

“전하를 만나 기쁘오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 금할 수 없사옵니다.”

물론 역관을 통해 전해진 말이었다.

“과인이 싫지는 않은지 솔직히 답하라고 해라.”

“네, 전하!”

“몽골에도 전하와 같이 잘 생긴 남자가 없고, 전하의 따뜻한 배려가 마음에 든다고 하옵니다. 전하!”

“흐흠........!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가 있나?”

혼자 지껄인 이진이 또 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라.”

“아직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옵니다. 전하!”

“음.........!”

민망한 물음이라 잠시 망설이던 이진이 이내 빠른 말로 쏘았다.

“초경은 터졌는지 물어보라.”

제 놈이 얼굴을 붉히며 묻고 답해왔다.

“지난달에.........”

“알았다.”

이진이 더 물을 말이 없어 공연히 푸른 하늘에만 시선을 주고 있는데, 차칸노르의 음성이 들려왔다.

“첨첨밀밀(甜甜蜜蜜) 십분행복(十分幸福)!”

“무슨 뜻이냐?”

“매우 달콤해서 몹시 행복하답니다.”

“그래?”

보기보다는 심성이 맑은 여인 같았다.

* * *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밤이 되었다.

수라를 물리고 새로이 주안상을 들여 마주앉았는데, 가운데에는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나인 하나가 함께 하고 있었다.

서투르나 몽고말을 할 줄 안다는 여인으로 오늘부터 차칸노르의 침궁 나인으로 배정된 여인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 고?”

“김 옥분이옵니다. 전하!”

“알았다. 네가 양인의 잔에 술을 쳐봐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화장을 했는데도 죽은 깨가 내비치는 김 옥분이 두 사람의 잔에 조심조심 술을 따르자, 이진이 잔을 치켜들고 말했다.

“건배!”

“전하의 천 천세를 기원한답니다. 전하!”

“고맙다.”

이진을 따라 그간 예법을 좀 배웠는지 고개 돌려 마시는데, 마시는 속도는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이에 이진이 빙그레 웃으며 안주를 들어 그녀에게 권하자, 딴에는 조신하게 입을 벌린다고 벌리나, 입의 크기가 웬만한 여인의 배는 더 큰듯했다.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를 위해 제어한 이진이 말했다.

“과인에게 직접 술을 따르라고 해라.”

“네, 전하!”

김옥분의 말을 전해 듣고 차칸노르가 술을 따르는데, 이번에는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알다가도 모를 그녀의 행동이었다.

기꺼이 한 잔을 비운 이진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는 이곳이 너의 고향이자 묻힐 땅일 터,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과감히 과인에게 전하고, 씨를 받아 외로움을 덜도록 하라.”

“주상의 은혜 가슴에 사무치옵니다. 전하!”

아무래도 이 말은 김옥분이 윤색을 한듯 해 그녀를 째리자,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이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실로 그런 뜻이었사옵니다. 전하!”

“알았다.”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아, 이진은 다시 술을 치라하고 차칸노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이렇게 옥배 쟁그랑 쟁그랑 가을밤 깊어가고, 섬돌 위의 귀뚜라미 소리 북방의 가을을 노래하는데, 오늘 따라 달마저 휘영청 밝아, 차칸노르의 상사(相思) 계수나무 가지 끝에 걸렸다.

고향에 두고 온 첫사랑 망갈라(忙哥喇)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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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후의에 감사드리며, 늘 행복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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