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76화 (76/210)

< -- 76 회: 외교 첩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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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이 내심 차칸노르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찰합이가 말했다.

“차칸노르의 예물 물목입니다.”

역관을 통해 바치는 목록을 받아 대충 읽어 보니, 이상하게 모든 것이 숫자 9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흰 색을 상징하는 것이 많았다.

백마 여덟 마리에 흰 나귀 한 마리, 도합 아홉 마리.

해동청 9쌍. 흰 양 81마리. 금 9관. 은 81관.

전마 81마리의 아홉 배인 729마리.

흰 양가죽 81매의 아홉 배인 729매 등 이런 식이었다.

이에 이진이 곁에 시립해 서 있는 신충일에게 물었다.

“모든 것이 아홉이나 아홉의 배수에 숫자가 맞추어져 있고, 흰색을 상징하는 것들이 많은데, 이 어찌 된 일이오?”

곧 신충길이 대답했다.

“몽골 인들은 홀수를 성수(聖數)로 여기는데, 특히 아홉(九)은 무한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따라서 예물이나 공납은 무조건 9의 배수로 바치는 것이 상례이옵니다. 아홉 마리가 아니면 구의 아홉 배인 81마리와 같이. 또 ‘구백지공(九白之貢)’이라 해서 여덟 필의 흰 말에, 흰 낙타 한 마리 등해서, 가급적 아홉을 맞추되 흰 것을 최고의 예물로 칩니다. 이는 흰색을 숭상하는 풍속이 있어서 이기도 합니다. 몽골에서는 정월을 ‘차칸사라’ 즉 흰색의 달이라고 해서 제일 앞에 놓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전하!”

“흐흠.........! 설명 잘 들었소. 비로소 이해가 가는구료.”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기다리고 있을 대신들을 생각해서 막 자리를 뜨려는데, 찰합이가 또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는 우리 부녀의 혼례 날짜를 잡아주셔야 겠사옵니다. 전하!”

“허허........! 성질도 참 급하십니다, 그려. 자 자,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연회나 개최하고, 혼례 날짜는 관상감에서 길일을 택해, 훗날 알려주는 것으로 하겠소이다.”

“알겠소이다.”

비로소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지 엉덩이를 드는 찰합이였다. 그러나 말 하는 모양새가 혹시나 그의 막내아들이 정신옹주의 배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건만, 기필코 늙은이가 장가를 갈 모양이었다.

그래도 서로 어울리는 나이면 오랑캐라도 보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덜 무거울 텐데, 돌아서면 초상 치를 중늙은이한테 11살 아직 초경도 터지지 않았을 아이를 시집보내야한다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못해 신물이 올라오는 이진이었다.

이진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더 이상 싫은 내색도 못하고, 주연 석상으로 향하는 이진은 끝내 무거운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 * *

이날 주연이 끝나는 자리에서 이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신충일을 불러 그들의 의향을 한 번 더 떠보도록 했다. 즉 정신옹주가 이번 혼사의 내정자로 선정되었다고 알려주면서, 상대를 나이 많은 찰합이가 아닌 그의 아들 구유크((貴由)로 하는 것이 어떠냐고, 슬쩍 떠보도록 한 것이다.

그 이튿날.

돌아서 와서도 채 여독도 풀지 못한 신충일이 경연이 끝나자마자 찾아와 아뢰었다.

“전하! 찰합이는 한 술 더 뜨고 있사옵니다. 구유크가 조선의 부마가 될 수 있다면 인질 삼아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조선에 머물게 할 의향도 있다하옵니다. 하옵고 본인부터가 꼭 조선의 부마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옵니다. 하고 몽골은 곧 첫눈 내릴 시기가 다가오니, 그 안에 양인의 혼례를 올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몽골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했사옵니다. 전하!”

“흐흠......! 그 늙은이가 기어코 어린 신부를 맞을 모양이군.”

“사정을 설명 했더니 히죽히죽 웃으며 무척 좋아라 했사옵니다. 전하!”

“어쩔 수 없지. 나라가 조금만 부강했더라만........”

쓸쓸히 탄식한 이진이 그 외의 성과에 대해서 물으려다, 그의 피로감을 감안해 오후에나 다시 등청하도록 했다.

이날 오후.각 대신들도 모두 알아야 하기에 오늘은 사전에 고지해 미시 초 무렵에 늦은 조회를 시작했다. 따라서 중참이 지난 무렵에서야 오늘은 각 대신과 신충일 등이 사정전에 모두 부복해 이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진이 임어하자 곧 조회가 시작되었다.

이진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신 경차관은 북행의 결과에 대해서 보고하라.”

“네, 전하!”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그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중요도에 관계없이 소신의 여정에 따라 아뢰겠나이다. 소신 일행이 가장 먼저 들린 곳은 혜산진 너머 장백여진의 세 부족이었습니다. 그들과 전하의 어심대로 협상을 벌인 결과 두 부족이 듣기에 따라서는 아국에 아주 좋은 제안을 하였사옵니다. 전하!”

일단 여기서 말을 맺었던 신충일의 보고가 이어졌다.

“혜산진 너머 야류장 부족과 무산 너머 너연 부족장은 사전에 미리 의견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공히 같은 제의를 했사온데, 자신들은 조선에 귀의할 의사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그 조건으로 벼슬은 최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상, 칙서(勅書)를 대체할 교서(敎書)와 인장(印章)을 내려 조공(朝貢)을 행할 수 있도록 하옵고, 회령개시 등 공사 무역을 영구히 폐쇄하지 않겠다는 확약과 함께, 충분한 무기 등을 공급해 주어 조선조정의 지원이 없더라도, 타 부족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어야한다는 청을 했사옵니다. 전하!”

“그 미개인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옵니까? 전하! 지중추원사이면 종이품 벼슬인데, 이 벼슬이 얼마나 높은지 알고나 하고서 지껄이는지 모르겠사옵고, 게다가 무기를 지원해달라니? 그 무기로 어느 날 아국을 겨누면 어찌 되는 것이옵니까? 절대 불가한 일이옵니다. 전하! 차라리 지금과 같이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

“예판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한 뱃속에서 나온 듯 죽이 잘 맞는 이판 김우옹이 거들고 나섰다. 이어 일부 대신들이 고개 조아려 동조하고 나서자, 이진은 손을 내저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조용, 조용.......!”

“과인이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말에 충분한 일리가 있다. 과인의 말을 들어보라.”

이렇게 운을 뗀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들이 조선조정에 귀의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배경부터 과인이 분석해 볼라치면, 그들이 그만큼 건주의 누루하치의 팽창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음을 나타남이야. 그에게 귀속되기 싫어 보다 운신의 폭이 자유로울 듯한 아국에 귀부(歸附)할 의향이 있으나, 이는 또 명 황실에서 보장하던 조공무역의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바, 이를 아국에 벌충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인의 교서와 인장 아니겠는가?”

잠시 호흡을 고른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하고 이제 누루하치로부터 등을 돌렸는데, 조선 조정이 나 몰라라 한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요구가, 무기의 공급 요청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이것은 일방적인 요청, 당장 우리가 그들이 귀순해온다고 해서, 그들이 차치하고 있는 영토를 아국의 영토로 편입할 수도 없는 터.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자신들도 무엇을 내놓겠다는 말은 하지 않던가?”

“과연 영명하십니다. 전하!”

“저, 저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대사간이 노여워 수염을 푸들푸들 떨어도 외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신충일이 대답을 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들도 인질을 제공할 용의가 있사옵고, 더 나아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딸들이라도 조공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사옵니다. 전하!”

“흐흠..........!”

모두 아무 말이 없는 가운데 이진은 그들의 입장에 서서 다시 한 번 이해득실을 따져보았다.

명은 일찍이 여진족에게 위소제(衛所制)를 시행하여 지휘, 천백호, 진무, 위소관 등 여러 벼슬을 내리는 한편 이들에게는 황제가 내리는 칙서(勅書)와 인장을 하사해 조공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주었다.

이 조공이라는 것이 받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하사(下賜), 상사(賞賜)라 해서 받는 것이 더 많은, 실익이 보장되는 일이었다. 저들이 만약 귀순을 하게 되면 이런 경제적 실익이 없으니, 조선조정에도 이런 실익을 보장해달라는 것이고, 무기 또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예판 우성전이 걱정하듯 잘못하면 부메랑이 되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기도 했다.

심각히 고민하던 이진이 마침내 입을 떼었다.

“그들이 정녕 인질을 제공하겠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는 방향으로 해보자. 하지만 이행 과정에서 그들의 진의를 철저히 헤아려야 할 것이니, 협상 과정을 지루하게 끌어 수시로 드나들며 그들의 내부 정보는 물론, 그들의 진심이 확인된 뒤에나 시행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는 공사무역으로 서로 신뢰를 다지는 것으로 하자. 알아듣겠는가? 경차관!”

“네, 전하!”

“장백여진의 다른 한 부족은?”

“주셔리 부족장은 그런 이야기는 없사옵고 다만 교역에는 응하겠다고 했사옵니다. 전하!”

“좋다. 그럼 그 다음은 건주여진으로 들어간 것인가?”

“네, 전하!”

“그들에 대해서 보고하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곧 신충일이 보고를 시작했다.

“전하의 뜻을 누루하치는 모두 수용했사옵니다. 그러나 단 하나 부대조건을 달기를 자신에게 조선 공주를 주어 부마로 삼고, 또한 자신도 자신의 장녀 고륜동과공주(固倫東果公主)를 주상전하께 받치겠다고 했사옵니다. 참고로 누루하치는 소신에게 자신의 15세 난 딸 고륜동과 공주를 보여주었사온데, 선녀와 같이 예뻤사옵니다. 전하!”

말을 마친 신충일의 입가에는 요상한 미소가 맺혀있어 대간들의 질타를 받았다.

“지금 경차관은 어느 안전인 줄 알고, 감히 그런........”

“됐소. 저만 하니까 적의 소굴로 잠입하여 여러 정보도 캐내오고, 우리의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 아니겠소!”

이진의 응원에 더욱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신충일이었다. 그러나 이진은 신충일의 그런 모습을 살피기보다는 선조를 원망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너무 빨리 시해했나 하는 회의감을 처음으로 가져보았다.

아들보다는 딸들을 먼저 순풍 순풍 낳아서 자신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또한 여진부족장마다 자신과의 혼사를 거론하니, 아직 이 핑계 저 핑계로 설치되어 있지 않은 비빈도감을 아예 설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는 단지 이진의 생각이고 만약 이를 대신들이 알기라도 한다면 ‘장차 우리가 오랑캐 군주를 섬겨야 할 일 있느냐고?’고 분명 반발할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이진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신충일이 다시 부복하여 아뢰었다.

“다음으로 간 차하르부족의 일은 지금 아국에 내방한 바와 같이 잘 처리되었사옵고, 몽고 달단 국은 삼 낭자께서 여장부인지라 쉽게 우리의 조건을 허락했사옵고, 그 교역지대로 노합하(老哈河)의 상류 개로성(開魯城)을 역 제의까지 했사오나, 소신의 생각으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양국의 교역이 쉽게 성사되기는 어려울 듯싶었사옵니다. 전하!”

“과인의 생각도 그러하다. 허나 서로 친교를 다졌다는데 의의가 있겠고, 훗날 교역통로가 열리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으로 하자.”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음!”

이진의 명이 떨어지자 신충일이 해서여진에 대해서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소신 주상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주상전하께서 붙여주신 만, 몽어에 능한 세작들의 도움으로 엽혁부와 합달부가 다투게 된 원인을 상세히 알게 되어, 교섭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하!”

그의 말에 이진은 그들이 무슨 말을 전했을지 유추해보았다. 아마 자신에게 올라온 정보와 동일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이진은 그들이 전한 정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조공의 권리를 분산시킴으로써 여진족들이 강해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명조정은 건주, 해서여진의 유력자 300명에게 칙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때, 토목의 변으로 에센의 알탄 칸이 침공하여 칙서가 무자격자에게 전달되는 등 혼란을 기대한 공작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건주여진에 1,000통, 해서여진에 500통을 다시 수장들에게 전달하고,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전략을 전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명나라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무력 항쟁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서로 칙서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엽혁부와 합달부였다.

명나라의 요동총병관 이성량은 명나라가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세력을 하나 만들고, 그 세력의 후원자가 되어 여진을 조종하려고 했다. 이렇게 선정된 것이 건주여진 중 누르하치였다. 이성량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누르하치는 여진 중 강대 세력이 되었고, 1589년에 건주 여진 5부족을 통일 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성량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뇌물의 양도 크게 늘었기 때문에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감시를 게을리 했다. 결국 그 후과로 그도 해임되고, 지금 만주에는 누루하치만이 우뚝 선 상태에서 이진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 끝에 이진의 입에 실소가 맺히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고륜동과공주(固倫東果公主)가 과연 신충일의 말대로 선녀처럼 예쁠까?’

어쩌니 해도 자신도 계집을 탐하는 한 사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이진은 씁쓸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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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오늘 벨기에 전의 승전을 기원하면서........!^^

늘 행복한 날들 되세요^^

후의에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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