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 회: 외교 첩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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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의 건주여진 칸 누루하치에게 보내는 국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쌍방 간에 서로 통호(通好)하여 사이좋게 지낼 것을 문서로 확약한다.
둘째: 압록강과 두만강은 본래부터 조선의 수역인바, 앞으로 이 수로를 조선이 관리하되, 건주여진의 수로 이용권은 보장한다. 현재 조선은 손 놓고 있었음.
셋째: 쌍방 간 필요 물품의 수급을 위해 조선 조정은 의주의 대안(對岸)인 중강(中江:압록강의 난자도)과 귀측의 책문(柵門:구련성과 봉황성문 사이)에서 공무역을 매년 2월 15일과 8월 15일 번갈아 가며 행하며, 필요에 따라 증감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훗날 개설되는 중강개시와 책문후시를 기억한 이진의 앞당긴 공무역 제안이었다.
넷째: 위의 사항을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제반 문제 발생 시 쌍방의 충돌을 막기 위한 제도로, 쌍방의 주도(主都)에 무역사무소를 개설하여 필요 인원을 상주시킨다.
위와 같이 구술을 끝낸 이진은 신충일에게 이와 같이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여기서 이진은 절대 상대를 국가로 인정하는 말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혹시라도 명국과 조선 조정에서 알면 큰 문제거리가 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진은 ‘쌍방(雙方)’이니 ‘귀측(貴側)’ 등의 애매한 문구로 그들을 지칭했고, 우리 측은 ‘조선 조정(朝鮮朝廷)’이니 ‘아국(我國)’ 등으로 통칭했다. 이는 현재 건주여진의 누루하치가 내부적으로는 칸(汗)이니 어쩌구 떠들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명국의 도독첨사(都督僉事) 벼슬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유로는 조선 중신들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이 흥기해 금나라를 거쳐 청(淸)나라를 세워, 조선에 형제지국(兄弟之國)을 맺자고 제의할 때만해도, 그런 미개인들과 어떻게 형제제국이 될 수 있는 가로, 조선 중신들이 지랄 발광하던 일을 떠올린 이진의 고심의 흔적이었다.
아무튼 이어 이진은 동 연장선상에서 혜산 너머 장백여진과 영고탑 부근의 동해여진에게도 국경 공무역을 제안하도록 했다. 이 또한 농번기인 2월과 8월 두 차례 개최하며, 그 장소로는 회령(會寧)과 경원(慶源)을 제시했다.
즉 훗날에 열리게 되는 회령개시(會寧開市)와 경원개시(慶源開市)를 앞당겨 제안한 것이다. 이는 국가에서 무역을 보장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사적으로 이루어지던 무역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교역이 되는 것이다. 또 이진은 귀화정책을 설명하여 이들을 적극 조선인화 하도록 했다.
이어 이진은 해서여진에 대한 적극적인 회유책을 개진했다. 현재 해서여진의 강대한 두 세력인 엽혁부와 합달부 사이에서는 한창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혼란으로 인하여 개원의 시장이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흑룡강 유역에서 채취한 진주, 모피, 인삼 등을, 양 부족은 누루하치의 건주여진을 경유하여, 산서(山西), 신안(新安)상인 등에게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적으로 이 과정에서 누루하치는 부차적으로 이익을 보아 더욱 부강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진은 양 부족이 조선을 매개로 하여 다툼을 중지하고 화해를 할 것이며, 그 힘으로 건주여진의 팽창에 맞서야한다고 설파하라고 한 것이었다. 또 이를 위해 조선조정은 이들의 물품을 구매하는 것은 물론,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상기 제품과 말 등으로 받고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하라는 것이었다. 필요하면 무기도 판매하겠다고 슬쩍 언질을 주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몽고족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달단의 실권자인 셋째 아씨 즉 삼 낭자(三娘子) 긴중에게도, 서로 통호하여 사이좋게 지냄은 물론 쌍방 간의 필요 물품을 교환하자고 제안하도록 했다.
이 여인이야말로 명이 베푸는 마시장의 이점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이므로 함부로 동맹이니 결맹이니를 꺼내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필요 물품을 교환하도록 했던 것이다.
끝으로 차하르부족(察哈爾部族)에게는 적극 결맹을 요구하고 필요시 무기를 공급하는 것은 물론 혼인동맹(婚姻同盟)까지 추진하도록 했다. 즉 결맹의 상징으로 조선의 옹주를 그들의 족장에게 시집보내도 좋다는 제안까지 하도록 했다. 이에 앉았던 대부분의 모사들이 펄쩍 뛰었지만 이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어 제 사안의 전술까지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린 이진은 곧 신충일을 북방외교 경차관(敬差官) 임명하였다. 사신으로 임명하면 문제의 소지가 될 여지가 있으므로, 특정 업무 수행을 위해 한시적으로 파견되는 경차관에 임명한 것이다.
이로써 이진은 명국이 조선에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 자주적 외교에 발동을 걸고 있었다. 오직 명국만이 조선의 상국으로서 사대(事大)를 강요하고 주변 이웃과의 선린마저도 방해하는 오만한 명나라.
마치 자신들이 태양인 양 주변국을 모두 위성국가로 전락시켜, 자신들만 따라 돌게 할 뿐. 이 인력권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정책이, 소를 고삐에 꿰어 말뚝에 매어 두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진은 오늘 이 고삐를 과감히 끊어내고 조선도 소고삐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같은 처지인 여진족에게도 고삐와 코투레 모두 명국에 맡겨진 것을, 그 중의 하나라도 끊어내고 떼어내서 좀 더 운신의 폭을 넓혀 주되, 궁극에는 그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진의 정책이었다.
이진은 이 정책의 시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른 만상의 대방 강극렬도 만나, 중강개시와 책문개시에 대해 설명하고 그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당부했다. 더 나아가 이진은 아예 조선 유수의 대 상단들에게 명하여, 하나의 상인 연합체를 결성케 하니, 곧 조경련(朝經聯)이었다.
원래는 ‘조선상인 연합회’라 해서 조상련(朝商聯)이라 하려했으나, 초상이라 하면 제일 싫어하는 이진 때문에 조선경제인 연합회를 줄여 ‘조경련(朝經聯)’이라 칭하게 하니, 이때 처음으로 조선에 ‘경제인(經濟人)’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리고 이들의 대표사무소가 한양에 두어져 이진이 필요하면 즉각즉각 연락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 * *
그로부터 5개월이 흘렀다.
계절은 어느덧 온 조선팔도에 가을 색이 가득한 9월 달이 되었다.
이즈음에 조선 조정을 벌컥 뒤집어 놓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북방외교의 경차관으로 임명된 신충일 일행이 국경을 넘어섰는데, 그 끝에는 야인으로 추정되는 거창한 행렬이 딸려오고 있다는 보고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개성까지 접근한 시각. 이진은 모처럼 종친 몇 명을 왕대비와 함께 자신의 침소가 있는 강녕전으로 초대했다.
이곳에는 왕대비 박 씨는 물론 중전 허 씨, 그 외에도 선조의 후비였던 인빈 김 씨를 비롯하여 순빈 김 씨, 정빈 민 씨, 정빈 홍 씨 등이 다과상이 준비된 가운데 모두 모여 있었다. 모두 원칙적으로는 이진에게 어머니 벌되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을 보고 보료에 앉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진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격조했습니다. 하지만 고(孤)는 고기 한 첨 수라상에 못 올려도, 어마마마들께는 올리라 했으니, 그렇게 곤궁한 살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상의 보살핌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이진의 말에 선조의 가장 많은 승은을 입어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인빈 김 씨가 얼른 고개 숙여 사례하고, 나머지 비빈들도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는 왜적의 침입도 모자라 북방에 큰 변고가 생겼습니다.”
이진의 말에 안색이 해쓱해지는 비빈들이었다. 왜적이 대거 침입했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던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그 때의 놀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작금, 이 여인들에게는 큰 놀라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북방의 야인들마저 준동하기 시작했어요. 각각 흩어졌던 부족들을 한 걸물이 출현해 한 나라로 통합해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결국 그들의 통합된 힘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종당에는 그들의 말발굽 조선으로 향할 것이니, 고는 밤낮으로 잠이 제대로 안 옵니다.”
“영특하신 주상이니 이번에도 왜구를 물리쳤듯 잘 대처할 것을 이 어미는 믿어요.”
이진의 말에 왕대비 박 씨가 위안하는 말을 했다.
“막긴 막아야겠는데, 이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적을 물리치느라 모든 군비를 소진했는데, 그들의 발흥이라! 참으로 어려운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해서 고는 명국이 시행하고 있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흉내 내려합니다.”
여기서 각 비빈들을 한 번 훑어본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해서 생각해 낸 것이 이들과는 견원지간인 몽골족과 결맹을 추진하려합니다. 아니 혼인동맹까지도 추진하려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에게는 자식 하나 없으니, 어마마마님들의 협조를 당부드리겠습니다.”
이진의 이 말에 금방 낯색이 창백하게 변해 벌써 몸이 반쯤 넘어간 여인이 있으니, 임해와 광해의 친모를 생전에 많이 참소했던 인빈 김 씨였다. 그녀만이 가장 나이 많은 딸들을 데리고 있으니 그러했다.
그래봐야 제일 큰딸인 정신옹주(貞愼翁主)가 금년에 열한 살, 그 밑의 정혜옹주(貞惠翁主)가 아홉 살이니, 이진이 생각하기에는 이들도 어린데, 타 비빈들은 그보다도 더 어렸으니, 아예 입에 올릴 게재도 못 되었다.
“정녕 주상께서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까?”
살아있는 관음보살 소리를 듣는 왕대비 박 씨인지라, 선조 살아생전에 중전임에도 아이를 못 낳는다고 받던 박대는 다 어디에다 내팽개쳤는지, 인빈 김 씨를 위해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고라고 이 일이 달갑겠습니까 만은 어쩔 수 없음입니다. 아니면 또 다시 나라가 백척간두에 설 것이옵니다. 어마마마!”
“저런, 저런........ 이 일을 어쩌누! 쯧쯧........!”
왕대비 박 씨가 안타까운 탄식을 쏟아내는데, 인빈 김 씨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물더니 이진 앞에 고개 숙여 말했다.
“정신옹주를 시집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오나 주상! 조금 말미를 주세요. 어미로써 그냥 보낸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리니, 혼수라도 장만하고 지참금이라도 준비하고 싶습니다.”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고 지참금이며 혼수는 고가 내탕금에서 일체를 준비해 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주상!”
인빈 김 씨가 말이 끝나자마자 소매로 눈가를 찍는데 이진의 행사가 정녕 고마워서 라기 보다는, 이제 11세 밖에 안 된 딸을 그것도 먼 이역 땅으로 시집보내야한다는 슬픔에 종내는 목이 메어 얼굴을 돌렸다.
이 당시의 풍속으로는 11세라 해서 혼인이 불가능한 나이는 아니었다. 조혼풍습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서 10살만 넘으면 매파가 오가기 시작해, 대부분의 여인들이 18세를 넘기지 않고 시집을 갔다.
임해의 가슴에 내재된 소심한 복수도 할 겸 몽골부족의 조선 신부로는 인빈 김 씨 소생 정신옹주(貞愼翁主)가 당첨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이틀 후 저녁.
한양 도성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색(暮色) 속에 이진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향했다.
조선의 국왕 이진이 몽골의 한 부족장을 영접하기 위해 야인들의 객관이 있는 동대문 근처 북평관(北平館)으로 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왜의 사신도 접대 않던 사람이, 몽골 일개 부족장을 접대하러 나간다고 간하는 신하들이 무수히 많았지만, 이진은 제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고, 그들마저 거느리고 북평관으로 향한 것이다.
앞뒤로 수많은 의장과 악대 그리고 오백 금군의 호위 속에 만조백관을 거느린 이진이 대련(大輦)에 올라, 동대문으로 향하는 연도는 젊은 국왕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처럼의 도성 밖 나들인데다 처음인 이진의 격식을 갖춘 나들이를 구경나온 인민들이었다.
이윽고 이진이 북평관에 도착하니 이진의 융숭한 접대에 놀란 차하르부족장 찰합이(察哈爾)가 허둥지둥 객관 마당에 나와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이마가 땅에 닿는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극경한 예로 이진을 맞았다.
“차하르부족장 찰합이가 조선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먼 길에 고생이 많았소! 자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전하!”
이진은 안으로 들어가려다 옆에 함께 허리를 숙이고 있는 신충일을 발견하고 그에게도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신 경차관도 먼 길에 고생이 많았소.”
“망극하옵니다. 전하!”
자신을 알아주는데 대한 감격으로 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숙이 더 조아렸다. 이진은 그도 함께 데리고 태평관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미 이진의 명에 의해 연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진이 찰합이를 데리고 연회석상으로 나아가려는데, 그가 역관을 통해 조용히 아뢰었다.
“전하, 그 전에 전하께 소개해 올릴 사람이 있다합니다. 전하!”
“그래? 그럼 잠시 짬을 내보자.”
이진의 말에 따라 찰합이가 소접견실로 들어갔다. 이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남녀 한 쌍이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데 모두 아직 어려 보였다.
“전하! 본인의 뒤를 이어 우리 부족을 이끌고 나갈 막내 구유크(貴由)입니다. 또 저 여식은 본 부족장의 막내여식으로 이름은 차칸노르(白湖)라 합니다. 전하께 상호간의 신뢰를 두터이 하고자 바치는 예물이기도 합니다.”
“허허.........! 이런........!”
생각지도 못한 예물에 내심 당황한 이진이었지만 그의 성의를 무시하면 지금까지의 일이 헛수고로 끝날 것임을 잘 아는 이진인지라, 곧 침착한 음성으로 한마디 했다.
“고맙소!”
그리고 이진은 비로소 부족장 찰합이부터 차례로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찰합이는 50 전후의 나이로 덩치가 매우 컸고 매우 용맹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는 15세 전후로 보였는데, 전사적 기질과 함께 반짝이는 눈동자가 매우 총명해 보였다.
끝으로 이진의 시선이 차칸노르에게 향했는데,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즉 이진의 가는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쳐들다가 황급히 다시 내리깔았던 것이다. 딴에는 얼른 신랑이 될 사람을 훔쳐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어찌 됐든 그녀를 보니 부친을 닮아서인지 덩치가 이진이 만난 그 어느 여인보다 컸으며 몸집도 당당했다. 또 몽고여인답게 광대뼈도 돌출하고 대체로 둥근 형상이었다. 그러나 코만은 몽고 여인답지 앉게 오뚝했다. 이는 지어미를 닮은 듯했다. 대체적으로 여장부의 느낌이 나는 여인이었다.
“각각 15세와 13세입니다.”
찰합이의 소개에 내심 깜짝 놀란 이진이었다.
저 등치가 13세라면 아직 발육이 멈추지 않았을 터, 얼마나 더 클지 내심 두려워지는 이진이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몽고는 막내가 부친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 제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차칸노르’라는 신부의 이름이 이진의 귀에는 ‘착한 노루’로 들렸는데, 몽고어로 백색 호수라는 뜻의 ‘백호(白湖)임을 알았다.
하얀 새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어서 하얀 호수라 이름 지어진 백호(白湖). 이를 동경한다는 여인. 이 얼마나 고상한 이름인가. 그러나 그녀의 생김은 이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이진으로서는 골치가 아파왔다. 소 한 마리 키우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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