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2 회: 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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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장들과의 협의가 끝나자 이순신이 격군 포함하여 20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장선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각 수사들은 물론 병사들이 차례로 승선을 마치자 전함들은 좀 더 먼 바다로 항진을 시작했다.
제법 먼 바다까지 출항을 하자 이순신은 곁에 시립해 있던 판관(判官:종5품)에게 조용히 명했다.
“학익진을 펼치도록!”
“네, 장군!”
이순신의 명을 받은 판관은 신속히 기수(旗手)와 고수(鼓手)에게 명을 전달했다. 이에 따라 대장선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던 청색기가 내려지고 이어 황색기가 계양되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전고 소리 또한 변하여 안정적이던 북소리가 좀 더 빠른 속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진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어린진(魚鱗陣) 모양에서 이순신의 배가 천천히 선수를 틀어 후퇴를 하는 대신 양익이 둥글게 반원을 그리며 전진을 시작했다.
적을 포위하는 양상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학익진이 완성이 되자 이순신의 입에서 재차 명이 떨어졌다.
“안행진(雁行陳)!”
이순신의 명에 의해 붉은 기가 솟구치더니 고수 또한 맹렬하게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대장선 후미에 있던 거북선 이십 척이 선두로 나서서 돌격을 시작하는 것을 시점으로, 마치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인 여덟 팔(八)자 형태로 진형이 순식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이어 다시 어린진으로 진형이 바뀌고 이 진형은 어느 순간 장사진(長蛇陣)으로 바뀌어 마치 긴 뱀 모양으로 전 전함이 일렬로 늘어서서 다시 수영만으로 향했다. 이어 그곳에서는 미리 일렬로 떠 있는 부표(浮漂)를 향해 각종 포 사격은 물론, 변이중에 의해 개발된 화차에 실린 신기전 또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 편전을 비롯한 궁시류, 심지어 선마다 많지는 않지만 조총마저 가세하여 실제 사격 훈련을 반나절이 넘도록 진행되었다. 이 모든 훈련을 마치자 이순신은 제장들을 격려한 후, 판관 하나와 함께 동래성으로 향했다. 이 시각이 벌써 혼각(昏角:어두워지는 시각)이었다.
이에 따라 수영 만에 정박해있던 수백 척의 전함들은 점점 먹물처럼 변해가는 하늘 빛 따라 어둠 속에 잠겨갔다.
오해의 소지가 있어 여기서 잠시 수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함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가자면 이렇다. 이 진의 명에 의해 경국대전의 편제를 갖춘 조선 수군이었지만, 전함이 그 당시의 대맹선, 소맹선 등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벌써 임란 40여 년 전에 판옥선(板屋船)이 개발되었는데, 좀 더 후진적인 배로 회귀하여 제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임란 당시 보유한 200척이 전부 판옥선이었듯이 지금 조선이 보유한 전함 역시 크고 작은 판옥선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처럼 지금의 전함도 최소 120명 이상의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탑승시킬 수 있었고, 대장선과 같은 큰 배들은 200여명에 가까운 정원이 탑승할 수 있었다.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주력 군함이었던 맹선에 갑판 한 층을 더 만들어 3층으로 만든 배였다.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韓船)의 1층 주갑판(Main Deck)을 포판이라고 하는데, 포판 위에 ‘상장’이라 부르는 2층 갑판(O1 Deck)을 둔 배가 바로 판옥선이었다. 포판 아래에도 병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선실이 있으므로, 선실까지 포함한 전체 높이는 3층이 되었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유리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력전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선체 길이가 20~30m 정도였던 판옥선은 임란 해전에 참전한 한, 중, 일 군함 중 크기가 가장 큰 편에 속한데다가 선체도 높은 덕택에 일본군이 그들의 장기인 승선전투전술(Boarding Tactics)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거뒀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은 ‘판옥선은 마치 성곽과 같다’고 그 성능을 격찬했다.
전근대 해전에서는 상대방 군함으로 건너가 마치 지상에서처럼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활과 화약무기 같은 원거리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했지만, 칼과 창 같은 단병무기를 운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서툴렀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고 조선군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승선전투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조선의 장기인 활과 대구경 화약무기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함이 필요했다. 판옥선은 그 같은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군함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동래성으로 들어간 이순신은 동래부사 송상헌에게 어명을 전달했다. 이진이 준 금낭에 포함된 몇 겹으로 접혀진 어지(御旨)를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받아든 그는, 북쪽을 향하여 세 번의 절을 하고는 어지를 펼쳐 읽었다.
<이 어지(御旨)를 역참(驛站)을 이용하여 고(孤)까지 전달하라>
여기서 고(孤)는 과인과 동의어다.
“추가로 봉수대도 점검하라 하셨소!”
“네, 장군!”
이순신의 명을 전해들은 송상헌은 급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이진이 내린 어지가 그가 지정한 날짜와 시각에 부산진을 출발해 중계되기 시작했다. 이는 당연히 역참과 봉화가 제 구실을 하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한 이진의 특명이었던 것이다.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아침 조회시간.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비변사 회의가 열리는 사정전에서 연출 되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밖에서 들을 수 없는 이진의 고함이 전각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도 모자라 밖까지 들려오는 바람에 전각 외부를 지키고 있던 금군들이 움찔 움찔 몸을 떨고 있었다.
“도대체 이틀 반이나 걸리다니 말이 되는 소리요? 말이?”
크게 가슴을 부풀렸던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급각체(急脚遞)들이 전해도 이틀이면 도달할 거리요. 그런데 말을 타고 달리는 파발이 어찌 더 늦을 수가 있다는 말이오?”
이진이 노성을 지르고 닦달을 해도 어느 누구 하나 제대로 답변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답변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위에서 언급된 급각체(急脚遞) 즉 두 다리로 달려 문서나 장계를 전하는 역졸들이 뛰어도, 충분히 이틀이면 닿을 수가 있는 거리가 한양과 부산의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한양과 부산의 직선거리는 320km다. 그러나 이 당시 꾸불꾸불한 도로 사정을 감안해 400km 즉 1,000리라고 감안해도, 당시 규정에 급각체들은 하루 낮 동안 400리를 주파하게 되어 있었다. 비상시국임을 감안해 밤낮으로 달린다면 하루 반나절이면 도달해만 했다. 이것을 가지고 이진이 지금 추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400리를 낮 동안 급각체들이 주파할 수 있을까가 관건인데, 당시 역참은 30리 간격마다 있었으므로, 한 사람당 30리(12lm)를 1시간 20분에 주파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요즘 마라토너들이 통상 이 거리를 40분에 주파하는 것을 가면하면, 그 배의 시간이 주어지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들 또한 발이 빠른 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으니까.
이런데도 말을 타고도 이틀 반이 걸렸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역참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면 15시간이면 파발이 전해져야 됐다. 30리마다 있는 역수를 감안하면 한양과 부산까지는 총 30개의 역참이 있는 셈인데, 이 거리를 30분마다 통과했다 해도 15시간이면 가능한 시간이었다.
이것도 여러 상황을 감안한 시간이었다. 30리 길을 보통사람이 도보로 걸으면 3시간이 걸린다. 도보로 걸어도 나흘이면 도착할 거리다. 그러나 말은 다르다. 오늘날의 경주마 같으면 12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다. 이 정도는 아니고 당시 조선의 조랑말도 15분이면 주파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항시 대기되어 있는 것이 정상이지만 말을 갈아타고 파발꾼을 교체해서, 역마다 20분 걸렸다하면, 10시간이면 도착했어야 했다. 여기에 밤길이고 조금 지체될 것을 감안해 역마다 30분씩 잡아도, 15시간의 계산이 나오는데, 왜적이 침입했다는 전시 성황임을 가정한 것이라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래도 ‘임란 때 사흘 반나절 걸린 시간에 비하면 하루가 단축되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는 이진이었다. 이것도 전에 한 번 암행어사의 제보로 당시 병판 정언신에게 역참제도의 정비를 명했으니, 하루는 단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둘 수 없는 상황임은 분명한 터. 이진은 가만가만 숨을 내쉬어 진정을 하고 말했다.
“여기에 더 먼저 올라왔어야 할 봉화는 아직도 오르지 않고 있으니,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소만, 이대로 둘 수만은 없는 것은 분명한 터.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기 바라오. 알겠소?”
“네, 전하!”
“아, 그럴 것 없이 지금 당장 역참을 정비할 인물 하나를 선임하여 전담 시정토록 합시다. 그 인물로 누가 합당한지 천거하기 바라오.”
서로 사방을 둘러보며 서로의 눈치를 보나 주눅이 들어서인지 아무 말이 없는 제 대신들이었다. 이에 이진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의금부 도사 유희분을 역참정비 경차관으로 임명할 테니, 그리 알고, 병판은 물론 이의 담성부서인 승여사도 적극 참여토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요새 한창 이진을 믿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광해의 처남 유희분이었다. 의금부 도사로써 툭 하면 관료들을 잡아들여 논핵하는 통에 모두 기피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이런 자이니 얼마나 설쳐 댈지 기대를 하면서 이진이 임명한 것이다.
* * *
이렇게 시간이 흘러 20여 일이 지나자 호랑이 소탕작전도 모두 끝났다. 이진은 특별히 어명을 내려 중앙군의 사단장은 물론 각도의 병마절도사들을 어전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각각 미리 작성된 밀계(密計)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관찰사들에게도 특별 어명이 떨어지니, 이를 이행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각도의 감사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사월 초가 되었다.
“어휴, 더워!”
이 나라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있어 함부로 훌훌 집어 던져 나체가 될 수는 없는 일인지라, 한 여름 더위를 방불케 하는 무더위를 피해 일찌감치 강녕전 안에 든 이진은, 겉옷만을 벗고는 지밀들에 의한 부채시중을 받고 있었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려면 이상기후라든가, 머리 세 개에 다리가 여섯 개인 소가 태어나 보고가 되는 등, 하여튼 불길한 징조들이 속출하는 것이 상례였다. 아무튼 그래도 더위는 피할 수 없어 이진이 말했다.
“너무 더워서 안 되겠다. 화채라도 한 그릇 내오너라!”
“네, 전하!”
말이 화채지 겨울 과일은 고사하고 봄 과일 하나 없는 이 시대에, 화채라야 기껏 얼음에 꿀물을 타 올 것이 뻔했다.
그래도 시원한 얼음물이라도 마시고 나면 나을 것 같아 명을 내리고, 부채질을 하는 지밀들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온통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힘들다’ ‘팔 아프다’ 소리 한 번 못하고 이런 모습을 연출하는 거동들을 보노라니, 불현듯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진이 명했다.
“너희들도 힘들 테니 그만들 해라. 대신 습기가 많아서인지 몸이 찌뿌듯하니, 다른 놈들이 와서 허리나 주물러라.”
이진의 명에 다른 지밀들로 교체가 되고, 이제 이진은 저고리와 바지마저 벗어 속옷만 입은 상태로 자신의 몸을 주무르게 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안마에 몸이 좀 나아지는 듯하자 이제는 채 열흘 밖에 남지 않은 왜란이 걱정되는 이진이었다. 전쟁 준비를 한다고 했어도 완벽을 기할 수는 없는 일인데다, 무엇보다도 이 시각 자신의 밀명을 수행하고 있을 수군들의 동태가 걱정이 되어, 조바심이 나는 이진이었다.
‘아! 휴대폰 한 통화가 그립다!’
* * *
그 시각 밀명을 받아 움직이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으니, 조선의 전 수군(水軍)이었다. 황해, 경기 수군은 전라도로 향하고, 이미 부산 수영 만에는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의 전함 80%가 집결해 있는 상태로 모종의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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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늦었습니다. 해량하시옵고........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