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8 회: 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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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이 다음 안건을 상정하려 할 때였다.
급히 부복하여 아뢰는 자가 있어 이진이 바라보니 유사당상의 한 명인 김시민이었다.
“신 김시민 아뢰옵나이다. 전하! 기왕 동계훈련의 일환으로 실시하려면, 전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왜침도 머지않았으니, 조선팔도의 정군 전체에 동원령을 내려 함께 소탕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사료되어 집니다. 전하!”
김시민(金時敏).
현재 독립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충청도 목천(木川) 출신이었다. 금년 39세로 사십 고개를 바라보는 장년인 이기도 했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적을 두는 것으로 무관생활을 시작하였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한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진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사람으로 잘 알려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무재를 인정받았고, 종5품 판관 주제에 자신의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에게 군모를 집어던지고 사직하는 기개를 보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김시민의 건의에 잠시 생각하던 이진이 말했다.
“경의 말이 옳소. 금번에는 아예 정군(正軍)에 해당되는 자는, 6번 2삭상체(六番二朔相遞:6교대로 2개월씩 근무하는 것)에 관계없이, 정군 전원에게 소집령을 내려, 호랑이 소탕작전에 동원토록 하오!”
“네, 전하!”
“하오나 전하! 이 혹한기에 백성들을 산야(山野)로 내모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하옵니다.”
새로운 깐족이 예판 우성전의 말에 이진이 말했다.
“과인이 항상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지 않았소. 올해가 가장 위태로운 시기라고. 하니 공은 더 이상 아무 말 마오.”
이제 관록이 붙어 한층 무게감이 실린 이진의 묵직한 말에, 포기한 듯 아예 입을 닫는 제 신하들이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이진이 느닷없이 병조판서 정탁을 지칭하여 물었다.
“병판 정군의 숫자가 총 얼마지요?”
“에.......! 그러니까.........”
금년 67세로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음은 물론 기억력마저 많이 감퇴된 노 대신을 보고 이진은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기로소(耆老所)에나 들여보내야 되나 말아야 되나?’
70세 이상에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문관에 한해 자격이 있지만, 요즘 저런 모습을 가끔 연출할 때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신들의 명예의 전당이자, 경로당인 그곳에 헌액시키고 싶은 게 요즘 가끔 드는 이진의 생각이었다.
이진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때 군의 실무를 담당하는 유사당상의 하나인 고경명이 부복해 대신 아뢰었다.
“총 정군(正軍)은 352,000명인 것으로 아뢰옵나이다. 전하!”
현 조선의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이 정군(正軍)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이진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임란에 대비해 그동안 호적(戶籍)정비를 명하길 몇 번. 이렇게 해서 파악된 조선의 총 인구는 1천 320만 여명이었다.
양반들의 숨겨진 자식 일부까지 등재된 명부였다. 성비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조선이었지만, 1;1이었다. 그 이유를 분석해보면 노년층에 여자가 더 많아서였다. 여자가 더 오래 사는 것은 옛날이라고 다름이 없었다.
아무튼 이 중에서 군역(軍役) 대상자인 15세에서 60세 까지의 남자(丁男)를 다시 빼내니 495만 명으로 줄었다. 여기에 이진이 양반들에게 군역 의무를 지웠지만 실제 군역을 지려하는 양반은 거의 없었다.
1년에 면포 두 필로 빠져나가고, 그나마 노비도 없는 자들은 군적 정리를 담당하는 군적감고(軍籍監考)인, 지방향리와 이정(里正), 권농관(勸農官) 등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대부분 다 빠져나가니, 실제 군역대상자는 또 1/2로 줄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군 복무하는 자들에게 무기 및 피복 등을 지급하고, 생계를 위해 6인1조로 번상(番上:복무)과 보인(保人:경제적 지원자)으로 나누어, 한 명만 군 복무자로 세우니 또 6분의 1이 줄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실제 군복무자는 총 41만2천 명이었다. 여기에 수군 6만 명을 또 떼어내니, 실제 육군 복무자는 35만2천 명이 된 것이다. 그런데 또 이 자들이 육 개월 단위로 2개월씩 돌아가며 근무하니, 실제 평소 조선의 정군은 5만8천 명이 국방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제도도 많이 바꾸었다. 예전 조선의 제도는 8번2삭상체(八番二朔相遞)였다. 즉 8교대로 2개월씩 근무하던 것을, 평소에도 군을 많이 유지하기 위해, 이진이 6교대를 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8교대에서는 4만4천 명이던 평소 근무자가 5만8천으로 늘었으니, 1만4천 명이 평소 더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또 개인 무구를 준비해주기 위해 기존 3인1정을 한조로 묶어, 한 명은 군 복무를 하고 두 명이 군 복무를 안 하는 대신, 군 복무자의 생계를 위해 매달 면포 2필을 줘야 했던 것을, 6인1조로 묶어, 각 개인이 아닌 나라에서 일괄 돈으로 받아, 군 복무자들에게 생계를 지원하고, 칼이며 창, 군복 등의 무구는 물론 급식까지 지급해주었다.
그 전에는 군 복무자가 개인 무구는 물론 식사까지 모든 경비를 책임져야 했다. 이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 되어서 이 제도가 지금 정착 중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진은 이 병력을 4개 영(營)을 묶어 려(旅)로 하고, 또 이 려(旅) 둘을 한데 묶어 1개 사단으로 지칭했다.
그러니까 지방의 1개 사단은 사단장 포함 총 16,68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옛날식 편제이다 보니 부(副)라는 개념은 전혀 없고, 중앙의 사단마냥 지원병이 없는 것은, 전시에는 보인까지 모두 동원되어 보급대가 되거나 할 것이니, 평소 편제에서는 두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중앙군은 기동타격대 성격이 강해, 외적의 침입 또는 어디 난이 있다던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면, 항상 움직일 수 있는 편제를 택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하고 이진의 생각으로는 장차 중앙군을 배로 증강해, 2만 명을 1사단 체제로 만들어, 이들만으로도 전면전이 아니면 모두 대항할 구상을 갖고 있었다.
아니 이후의 정벌 전까지 구상하고 있는 이진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지방군까지 모두 훈련 삼아 호랑이 소탕에 동원을 시킨 이진이 다음 안건을 상정하려는데, 또 하나 불쑥 나서는 자가 있었다. 큰 외삼촌인 김예직(金禮直)이 그였다.
“전하! 나라의 가장 큰 걱정은 호환이 아니라 전하의 후사가 없는 것이옵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명하시어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여야 하옵나이다. 전하!”
“아니, 가례도감이라니? 지금 중전이라도 폐하잔 말이오?”
“그게 아니라, 비빈도감을 의미하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명에서 돌아온 이이첨이 김예직의 편을 들어주었다. 요즈음 죽이 잘 맞는 둘이었다.
“험험, 왕대비께서도 그런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내년에나 봅시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다른 대신들까지 이럴 때는 호흡이 잘 맞아 함께 부복하니 난감한 이진이었다. 그러나 결코 그럴 뜻이 없는 이진으로서는 큰 외삼촌이 낭청에 임명 된 사실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염전 일에 전념하는 외조부와 작은 외삼촌 김의직(金義直)과 달리 계속해서 무과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이었다.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증광시에서는 물론 해마다 치러진 별시에서도 매번 낙방을 하고 징징거리고 돌아다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기찰을 시켜보니 하는 짓이 탐학(貪虐)스러워 꼭 옛날의 임해군을 보는듯했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탐학하다고 체직을 당한 일이 있는 위인이었다. 개똥도 약에 쓸데가 있다고, 이이첨 등의 간신들을 부려 효과를 본적이 있는 이진인지라, 남행으로 그를 낭청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12명이 정원인 이 낭청제도가 이진에게는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당하관 직책으로 종3품에서 종9품까지 임명할 수 있으니, 삼사의 입을 원천봉쇄할 셈으로 종8품 부봉사로 출발시켰으나, 요즘 설쳐대는 모양새는 이이첨 못지않은 김예직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충주에 사는 처남들 이야기도 하자면, 큰 처남 허박(許博)은 별시 문과에 병과나마 급제하는 바람에, 공조로 배치되어 말단이나마, 이진이 직영하는 광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장인과 작은 처남은 수시로 무극금광을 관리하며 장인과 함께 구황작물 보급에 크게 공헌하고 있는 요즈음이었다. 아무튼 생각에서 깨어난 이진은 비빈을 얻으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마음이 심란해져, 더 이상 조회를 않고 회의를 파했다.
* * *
그날 저녁.
이진은 퇴궐 인사차 들린 곽재우를 만났다.
“오늘 직숙(直宿)이 누구지요?”
“내금위장 김덕령이옵니다. 전하!”
“흐흠........! 그렇군! 내일은 그럼, 겸사복장 홍계남인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과인에게 특별히 인삼재배에 성공한 것을 알리기 위해, 비록 4년 근 삼이지만 올라온 것이 있소. 이를 내릴 테니, 달여 드시고 각별히 건강을 챙기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감격해 부복하는 곽재우를 잠시 내려 보던 이진이 다른 것을 물었다.
“이제 금군 모두가 조총 정도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죠?”
“뿐만이 아니옵니다. 전하! 내금위 모두 기사(騎射)에도 능해, 정병(精兵)으로 거듭났나이다. 전하!”
“잘된 일이오. 암, 그래야지. 대 조선의 군왕을 호위하는 최측근 부대인데, 자긍심을 갖고 그 정도는 해주어야지.”
“감읍하옵나이다. 전하!”
“가서 푹 쉬도록 하오.”
“네, 전하!”
그가 물러가자 이진은 잠시 개편된 최측근 호위부대에 대해 생각을 했다.
이진은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중신들은 물론 양반지주들과도 자꾸 마찰이 빚어지자, 검계의 은밀한 내사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자신의 경호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권율이 3사단장으로 물러가자, 그 자리에 꾸준히 직급이 오른 곽재우를 세우고, 명칭도 둘을 합하여 어림군(御臨軍) 또는 금군(禁軍)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대장을 정2품 어영대장(御營大將)이라 명명했다.
한편으로는 내금위장으로는 김덕령을 발령하고, 이들도 기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축차적으로 500명으로 확대된 정원 전원에게, 말 한 필씩을 하사했다. 또 홍계남이 지휘하는 겸사복의 정원도 대폭 늘려 500명으로 하고, 정2품 타관이 겸임하던 것을, 종2품으로 품계를 낮추고, 홍계남을 그 자리에 보임했다. 내금위장 역시 품계는 종2품으로 했다.
곧 생각에서 깨어난 이진의 생각은 오늘도 대두된 중전 허 씨의 회임문제로 고착되었다. 다른 궁녀들이야 체외 사정을 하니 임신이 안 되는 것은 당연했지만, 허 씨가 임신이 안 되니, 골치가 아팠다. 자신이 골치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 이 문제가 자꾸 거론되니 더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진은 이 문제를 좀 더 심각한 차원에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그 해법을 찾아 허 부인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날 밤.
이진은 싸락눈이 내리는 길을 걸어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으로 향했다. 이진이 교태전에 당도하니 혹시 모를 왕의 방문을 기다리기 위함인지 아직 불빛이 환했다.
“주상전하! 납시오!”
내관의 고하는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전각문이 활짝 열리고, 사저에 있을 때부터 측근 시비인 옥란이 예로써 이진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주상전하!”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맞는 중전의 모습이 전과 달라 깜짝 놀라는 이진이었다. 신열이 있다던 모습은 간곳없고, 엷은 나삼을 입었는데 속살이 다 비칠 정도였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데, 이 여편네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옛 이진으로 돌아가 내심 중얼거리는 이진으로서는 한편으로는 좋기도 했지만, 이상한 두려움(?)도 몰려오는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추후 잠자리에 들어서였다. 사람이 이렇게 변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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