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57화 (57/210)

< -- 57 회: 전야 -- >

2

하루를 더 쉬고 초나흘부터 정상적인 정무가 시작되었다.

어쩔 수 없이 신하들에게 시달리며 경연을 마치고 나니, 승정원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형식적인 인사가 오가고 곧 도승지 이덕형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올해는 유난히 호환(虎患)을 당했다는 장계가 많이 올라오고 있사옵니다. 전하!”

“전국적으로 다 그러오?”

“어느 도 할 것 없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했다는 장계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사옵니다. 아마도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는 호랑이들이 민가로 내려오지 않나 싶습니다. 전하!”

“허허.......! 그것 참, 호환마마라더니, 이제 어느 정도 마마에 대한 대비를 해놓으니, 호랑이가 말썽이군. 아무래도 안 되겠소. 전국적으로 소탕령을 내리되, 산성축조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이진의 물음에 병조를 분장하는 좌부승지 이호민이 답변을 했다.

“전하의 명으로 지난 동짓달 그믐까지는 평성은 몰라도 웬만한 산성을 다 보수가 된 것으로 아옵니다. 전하! 이 과정에서 중들의 노고가 정말 많았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들의 처우도 좀 개선해 주어야 할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진이 돌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비록 온 나라 백성들이 산성보수와 농한기 군사훈련에, 매해 내몰려 시달림은 당했지만, 일단 유사시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으니, 곧 과인에 대한 원망도 봄눈 녹듯 사라질 날이 머지않았소. 하고 종전에 도승지가 말한 호환 말인데, 전국적인 소탕령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동계 훈련 삼아 중앙군을 각지로 파견하는 것은 어떻소?”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는지 채 답변을 못하는 도승지와 좌부승지였다.

“그럼, 그 문제는 비변사 회의로 넘기고 다른 안건 있으면 검토합시다.”

“머지않아 춘궁기가 도래하니 이에 대한 대책을 지금부터라도 챙겨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사료되어 집니다 전하!”

“그 문제는 구휼청을 통합 운영하는 상평청(창을 청으로 변경)에서 하도록 할 것이니 걱정 마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다른 안건 없으면 잠시 후 비변사 회의에서 보오.”

“네, 전하!”

1각이 지난 사정전.

이제는 이곳에서 매일 비변사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비변사까지 가기가 싫은 이진이 명해 그렇게 된 것이다.

아무튼 비변사 구성원들이 아침부터 빼곡히 들어찬 가운데 곧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 승정원에 올라온 장계에 의하면 호환이 유난히 심하다는 보고요. 해서 과인은 중앙 3개 사단을 전부 동원하되, 1개 사단은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하고,  2개 사단은 전국각지로 일정 규모로 흩어져, 동계훈련 겸 호랑이 사냥을 하고 싶소. 소관부서인 병판대감 말씀 해보오.”

“뜻대로 하옵소서! 전하!”

이제 더 기력이 쇠한 정탁이 말하기도 힘에 부치는지 아낌없이 지지를 표명했다.

“1사단장 이일 장군의 의견을 말해보오?”

“소직 역시 적극 찬성이옵나이다. 전하!”

“2사단장 신립 장군은?”

“소신 역시 그렇사옵니다. 전하!”

“3사단장 권율 장군은?”

“어명을 쫓을 뿐이옵니다. 전하!”

“좋소! 3사단 권율 장군은 한양 도성 내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고, 이일 장군은 북4도 즉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를 책임지시오. 하고 신장군은 하삼도와 경기지방을 책임지도록!”

“명 받자옵니다. 전하!”

씩씩한 그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진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이진은 미리 1문 가치의 구리돈 상평통보는 물론 1관가치의 금화까지 모든 돈을 주조하여 일정량씩 미리 전국 관아에 배포해놓고, 이 돈으로 쌀과 면포를 일제히 사들이도록 했다. 또 그 전에는 각 상단 대표들을 불러 그들이 축적하고 있던 은이나, 쌀, 면포 등을 받고 일제히 상평통보 등의 화폐를 출고시켜 유통시키도록 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된 화폐 유통은 그달 나라에서 주는 관리들 녹봉의 1/3을 이 구리돈으로 주는 것을 시작으로, 좀 더 자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누가 은화 한 잎 받고 쌀 한 가마를 내놓느냐고 반발이 거셌다. 그렇지만 그것도 세월이 점차 해결을 해주고 있었다.

나라의 변함없는 정책과 1년이 지나 관리들의 녹봉이 완전히 구리돈으로 지급되자, 민간에도 점차 믿음이 확산 되어갔고, 화폐유통도 점차 늘어갔다. 그러나 1년 내 완착을 기대했던 이진으로서는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었다.

이에 이진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공물은 물론 모든 세금과 벌금까지도 돈으로 받는 조치를 취하고서야, 서서히 화폐는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이 과정에서 공납제(貢納制)가 완전 폐지되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량하여 내는 것으로 시행이 된 것 이다. 그러나 이 조치 때문에 나라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의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공납제 존치로 이익을 보던 자들의 집단저항과 맞서야 했고, 양반지주, 관료들의 저항도 심하게 받아야 했다. 의례적으로 조정 중신들도 또 한 번 일제 사직원을 제출했고, 이진이 달래도 이번에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진은 한 달 넘게 이들을 공석으로 남기고 국정을 운영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기도 했다.

이 과정이 얼마나 답답했는지 이진은 아예 3정승 6판서 없이 나라를 꾸릴 결심까지 했었다. 어찌 되었든 이진의 뚝심 있는 강경대처에 세월이 가면서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화폐유통이 완전 자리를 잡았다.

즉 지금은 1냥이 쌀 한 가마, 면포 5필로 통용되고 있고 물가도 안정적이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이진은 화폐 발행으로 인한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연 평균 80만 냥이던 나라의 전체 살림규모가 발행 첫해에 두 배의 규모로 불어났고, 다음해에는 세 배, 그러나 올해는 2.5배 정도로 격감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었다.

실제 유성룡이 제조로 있는 상평청에서 1문짜리 상평통보 하나를 제조하는 실제 비용은 0.45문의 비용이 들었다. 명목가치 대비 55%의 수익률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 1관짜리 금화나 한 냥짜리 은화는 명목가치와 실제가치의 차이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렇지만 고액 화폐일수록 발행량이 적어지니 1문짜리랑 나라에서 얻는 실제 수익은 거의 비슷했다. 금화 은화라는 소재 차이도 있고 해서.

아무튼 두 해가 지나 완전 정착단계 직전까지 이르니, 그 차액을 포함한 나라살림 규모가 240만 냥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이 돈으로 이진은 그 무엇보다도 중앙군을 조직했다. 즉 지금의 3개 사단을 직업군인화 한 것이다.

말단 병사에게는 월 50전의 녹봉이 지급되는데, 이는 쌀 반 가마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이 정도면 5인 가족의 식생활은 가능한 정도였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는 모든 살림을 다 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다른 가족들이 거든다면 충분히 살림 가능한 액수였다.

한국경제도 70년 초반까지는 하루 세 끼를 해결하기 위한 경제였다. 즉 입에 밥 떠넣는 것이 제1목적이고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인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조선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전 가족이 다 매달려도 하루 두 끼 하는 이 당시의 식습관에(농촌에서 일을 할 때는 세 끼), 입에 풀칠을 못해 헤매는 가정이 거의 대다수라 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상위 20% 정도만 정상 식사가 가능한 정도였다. 이런 현실에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쌀 5말은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루 두 끼 밥만 먹여준다는 조건만 내걸어도 이에 응해 일할 사람이 조선 백성의 최소 5할은 될 것이다. 그보다는 나은 조건이니 양인들이 대거 몰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렇게 해서 구성된 것이 중앙군 3개 사단이었다.

이 중앙군 조직은 명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편제된 조선의 군 편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즉 이 편제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營), 사(司), 초(哨), 기(旗), 대(隊), 오(伍) 등으로 이어지는 종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營)을 분군 편제상 영장(營將) 통솔하의 차 상위 단위 부대로 삼았고, 영에는 5개 사(司)를 두고, 1사에는 5개 초(哨), 1초는 3기(旗), 1기는 3대(隊), 1대는 화병(火兵) 1명과 합쳐 11명의 병사로 조직되며, 사에는 파총(把摠), 초에는 초관(哨官), 기에는 기총(旗摠), 대에는 대총(隊摠)을 각각 지휘관으로 두었다.

따라서 한 개의 병영에는 영장 1명과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및 2,475명의 병사로 편성된 셈이다. 간부까지 합치면 영장 포함 총 2,086명이 1개 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 영을 4개 조합해 꾸린 것이 1개 사단이었다. 그러니까 1개 사단은 사단장 포함 8,345명이 정원이나. 여기에 군량보급 여타 잡병들을 포함하여 1개 사단은 정확히 1만 명으로 구성되도록 현 편제가 짜여있었다.

여기서 ‘사단’이라는 용어는 이진 자신이 명명한 부대 구성단위였다. 아무튼 이 정도 구성하는 데도 엄청난 돈이 녹봉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피복비, 무기류, 여타 소모품 비, 여기에 더 높은 간부들의 녹봉까지 치면 연간 60만 냥이 3개 사단의 중앙군을 유지하는데 들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니 광해군이 성묘를 가고 싶어 중앙군을 모으니, 이리저리 다 빠지고 삼백 몇 명만 모여서, 어쩔 수 없이 경기 일원의 지방군까지 소집해 성묘를 다녀오느라고, 대신들로부터 눈총깨나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어쨌든 이들만 유지하는 데도 전년 예산의 1/4이 소요되니 이진으로서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여기다 화폐가 정착되면 화폐 발행 또한 격감할 것이니, 이진은 올해 나라 세수를 200만 냥 정도로 예측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도 평년작은 되어야 가능한 수치였다.

이는 이제 화폐의 차액보다도 그간 이진의 노력으로 서서히 조선 경제가 발전하기 때문에 가능한 예측 치였다. 이제 국영인 금은철광에서 광물을 토해내는 것은 물론 천일염도 태안, 부안까지 염전이 확장되어 어느 정도 조세에 기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세수가 늘은 부분은 상업과 공업 부분이었다. 그전 상인들에게는 자릿세를 받는 것이 유일한 세금이었으나, 지금은 영업세라 해서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무조건 이 세금을, 두당(頭當) 연간 1냥씩 내어야 했고, 자릿세는 자릿세대로 걷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상인은 의무적으로 기장(記帳)을 하도록 하여, 조선 최초의 누진세율을 적용토록 했다. 많이 번 사람은 많이 내고, 소득이 없는 사람은 안내면 되었다. 또 하나 특기한 제도는 장인들에게 시행되었다.

관노비인 경우 의무적으로 생산된 할당량이 폐지되고 자유롭게 만들어 팔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그 만든 물건 값의 1할을 무조건 나라에 세금으로 납부케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부가세의 일종이었다.

아무튼 이 세금이 해마다 눈에 띌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데다, 구황작물의 보급으로 나라전체로 보면 그만큼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올해로 아마 전국적인 보급이 완료될 것으로 이진은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진이 기대를 걸고 있던 이앙법은 그 진도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었다. 조선의 제1곡창인 전라도에서는 18%선, 제2곡창인 경상도는 그 비율이 더 떨어져 12%만 이앙법으로 쌀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도 실제로 허용을 해놓으니 한 두 해 농사를 지어본 광작 지주들은 이모작을 안 하려 들었다. 지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비료가 없으니까. 그러나 소작농은 80% 이상이 이모작을 행하고 있었다.

겨울에 보리를 심어먹는다고 해서 소작료를 더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 논도 아닌데 무조건 심어서 이익을 챙기자는 주의였던 것이다. 그래도 대부분이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니 지주들도 알면서도 눈감아 줄 수밖에 없는 것이 현 실정이었다.

아무튼 돈 먹는 하마인 중앙군을 공짜로 놀리고 밥을 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훈련 성과도 평가할 겸해서, 호랑이 사냥에 내보내려는 이진이었다. 호랑이 사냥도 쉽지 않은 것이 오죽하면 ‘강원도 포수’라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강원도 포수 = 함흥차사의 동의어니,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빗댄 이 말이야말로 호랑이 사냥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말인 것이다. 호랑이를 정면에서 대응해서는 거의 제 목숨만 헌상하지 잡지를 못 한다.

군대 용어에 피탄 면적이라는 말이 있다. 탄환에 맞을 수 있는 면적이, 정면의 호랑이는 현격히 줄어들기 때문에, 옆에서 쏘아야만 그나마 잡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해서 이진은 이들이 출발하기 전에 호랑이는 못 잡아도 좋으니, 안전제일 주의를 강조할 생각인 것이다.

나라 살림이 거덜 날 정도의 돈을 들여 양성해 놓은 자들인데, 그야말로 개죽음을 시키면 되겠는가, 최소한 왜구들의 조총이라도 한 방 맞고 죽으면 덜 억울할 것이다. 아무튼 호랑이 사냥은 결정이 되었고 이진은 이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