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6 회: 전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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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38세.
50세가 넘으면 노인 취급을 하는 조선의 세태로 보면, 한창 일할 나이의 곽재우가 사정전에 들어서자마자, 불러준 은혜에 감격해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먼 길에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고개를 들고 가까이 오오.”
“네, 전하!”
이진의 부름에 몇 발짝 더 전진한 그가 다시 한 번 부복했다. 그런 곽재우를 기꺼운 웃음으로 바라보던 이진이 말했다.
“과인이 그대를 부른 것은, 그대의 문장은 물론 무재(武才)가 넘치는 걸 잘 알고 있소. 해서 과인은 그대를 측근에 두고 부리다가, 훗날 때가 되면 일선 지휘관으로 삼으려 함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래, 물고기는 잘 잡힙디까?”
“네? 아, 네! 세월을 낚으려 함이었는지라 항상 수확은 미미했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여기 강태공이 또 한 사람 있었군. 하하하........!”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던 이진이 돌연 웃음을 멎고 주안상을 대령토록 했다. 술을 좋아했던 임해군 본래의 면모가 나오는 것인지, 어느새 주석(酒席) 정치를 행하고 있는 이진이었다.
“시국이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소. 내란에 휩싸였던 왜가 한 사람에 의해 일통되고 나니, 항상 정권의 위협이 되는 무사들과, 새롭게 대두되는 신흥 상인들의 힘을 소진시키기 위해서라도, 정한론(征韓論)이 점점 세를 얻어가고 있는 작금이오. 해서 이에 대한 대비를 등한히 했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인즉, 그대도 이를 똑바로 알고 그대의 무재를 사직을 위해 써주기 바라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충심으로 보필하겠나이다. 전하!”
“고맙소!”
보좌에서 일어나 새삼 그의 손을 잡은 이진은 때맞추어 대령한 그를 주안상으로 이끌고 갔다. 그리고 둘은 시국담론을 전개하며 군신간의 우의를 다졌다.
* * *
곽재우와의 접견을 끝내고 나니, 김 상선이 와서 고했다.
“일전에 부르신 팔도의 거상들이 등대했나이다. 전하!”
“모두 들라 하라!”
“네, 전하!”
주안상을 물린지 얼마 안 되어 흥취가 남아있는 이진에게 조선팔도의 유명 상단들의 대방이 줄줄이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성상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 천비들 대령했나이다. 전하!”
팔도 대방들을 대표하여 송상의 대방 송비인이 아뢰었다.
“잘들 왔소. 먼 길에 고생들 많았소.”
일찍이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한 양반도 자신들 알기를 무슨 벌레 보듯 하는데, 조선 최고의 지존의 몸으로 자신들을 청하고, 하오체를 쓸 줄은 몰랐던 제 대방들이 일제히 이진의 옥음 한마디에 모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전하........! 흑흑흑.........!”
본래 이들을 초치한 목적이 이들의 협조를 받아내기 위함이라, 이진은 아예 이들을 골로 보내기 위해, 주안상마저 풍성하게 준비하도록 했다.
수라간이 때 아니게 바쁜 가운데 이진은 이들을 가까이 불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과인이 그대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년 7월부터는 화폐가 발행됨이야. 해서 거상좌고들의 협조를 당부하기 위함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네, 전하!”
“돈이란 것은 돌고 돌아야 되는 것. 그대들이 화폐 유통에 앞장서달라는 것이지. 그래야 상업이 발전하고, 그대들도 더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음이야. 과인의 말을 알아듣겠지?”
“네, 전하!”
“그대들도 알다시피 과인은 사 무역은 물론 해금(海禁)까지 온갖 조정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풀었다. 이는 농사만이 천하의 대본이 아니고, 상업도 발전시키면 일거리 없는 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고, 국부(國富) 또한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과인이 명백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화폐의 유통이야. 화폐가 유통되지 않고는 절대로 상업이 발전할 수 없음이야. 해서 자발적으로 화폐 유통에 앞장서는 것은 물론, 매점매석과 같은 치졸한 방법은 금했으면 좋겠다. 알아듣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해금정책을 실시하고 사무역을 권장한지 꽤 되었는데, 무슨 변화가 있는가?”
“내상의 대표 이진열 아뢰옵나이다. 전하!”
“그래, 그대는 날 본 일이 있지?”
“황공하옵게도 그렇사옵니다. 전하! 저희 내상으로 말할 것 같으면, 종래 초량의 왜관(倭館)을 이용하여 왜와 모든 거래를 하던 관행을 떨치고, 왜는 물론 양이와도 직접 거래를 하기위한 준비에 한창이옵나이다. 전하! 머지않은 장래에 내상이 멀고 가까운 바다를 누빌 날이 꼭 올 것이옵나이다. 전하!”
“좋은 징조로다.”
“송방의 송비인 아뢰옵나이다. 전하!”
“그래, 잘 지냈는가?”
이진이 친근하게 묻자 놀란 송비인 급급히 부복하며 감루를 떨어트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잠시 후, 진정을 하고 눈물을 씻은 그가 말했다.
“저희 송상은 전하께서 명하신 인삼의 재배법을 확산함은 물론 지리적 요건을 이용하여 벽란도를 통한 명국과의 해상무역에 나서고자 한창 준비 중이옵나이다. 전하! 하옵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하여 전하께옵서 꾀하시는 구황작물의 보급에도 앞장설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고! 하하하.........!”
모처럼만에 홍소를 터트린 이진이 기분 좋은 얼굴로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명국은 아직 해금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 생각인고?”
“아무리 금해도 항상 바닷길은 열려있기 마련이옵나이다. 전하! 하옵고 금은의 출초(出超)에도 항상 신경을 쓰겠나이다. 전하!”
“그래. 바로 그거야! 항상 빚이 많은 집이 망하듯이 나라의 은도 많이 빠져나가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어. 교역은 날로 확대하되 파는 물건이 많아야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팔 물건도 개발하고. 이를 거상좌고들이 안 해주면 누가 해주겠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여기 만상도 왔지?”
“네, 전하 만상의 대표 강극렬 문후 여쭈옵나이다. 전하!”
“그래, 그곳도 변화가 있는가?”
“월경 하는 것이 꺼려지긴 하나, 장사를 위해서는 지옥이라도 가는 것이 장사치들의 속성인지라, 야인들이 필요로 하는 면포, 삼베, 유기, 목기류, 때로 비단과 삼을 주고, 그들의 말과 모피를 들여오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 전보다 한결 마음이 놓이는지라, 날로 교역이 중가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다. 하하하........!”
갑자기 우뚝 웃음을 멎은 이진이 갑자기 엄숙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여기 경강상인의 대표 있나?”
“네, 전하! 전만리 대령이옵나이다. 전하!”
“그래. 과인이 그대에게는 당부도 좀 하고, 귀중한 정보도 하나 일러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대들은 주로 배를 기지고 장사를 하다 보니, 세곡선 운행과 양반들의 소작료를 수취하는 것이 주 수입원이렸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 과정에서 ‘화수(和水)’, ‘투식(偸食)’, ‘고패(故敗)’ 등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도 과인은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미곡의 매점매석을 빼놓을 수 없지. 어떠냐? 그렇지 않느냐?”
“일부 몰지각한 선주와 상인들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옵나이다. 전하!”
“그 짓도 멀지 않았음이야. 앞으로 공물(貢物)은 물론 모든 세금과 심지어 벌금까지도 돈으로 납부하는 세상이 올 것이야.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녹봉도 돈으로 지급이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세곡선 운반이 불필요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한양 도성 민들의 수요는 공급해야겠지만, 그 양이 현저하게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하니 앞으로 음.........!”
“그대들이 선박 건조까지 하고 있지?”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면 세곡선의 수요가 없어지면 선박을 보다 대형화하여 국외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지 않나?”
“그렇게 되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전하!”
“상업이 발전하면 자연적으로 물동량도 증가하게 되어 있지. 그렇지만 나라의 하는 일을 모르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니, 미리 알려주는 것이니라. 하니 대비를 철저히 하여 가난해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때 주안상이 들어왔으므로 이진은 큰 교자상에 모두를 둘러앉히는 파격을 선보이며 그들을 격려하고 꼭 필요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중 당부의 하나로 이진은 제물포 주안에 새로운 제법으로 생산되는 소금의 유통에 각별히 신경 써 줄 것을 당부했고, 창원의 뼈 도자기 등의 수출과 유통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또 이진은 내 대방 이진열로부터 정여립이 운항할 거선 세 척도 왜에서 들여왔다는 보고도 받았다. 정여립이 얼마나 잘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기대를 해보는 이진이었다.
* * *
그로부터 약 3년이 흘러 1592년 임진년(壬辰年) 새해가 밝았다.
이진 또한 열아홉 살의 헌앙한 청년으로 자라있었다. 이제 제법 관록이 붙어 더 위엄이 있어 보이는 이진이었다.
정월 초하루.
이진은 간단하게 연화방에 있는 종묘로 가서 제를 올렸다.
원래 왕이 종묘(宗廟)에 행차 할 때는 1만 여명이 움직이는 대가(大駕) 행렬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허례를 싫어하는 이진은 소수의 친위 금군만 데리고 잠시 제례를 올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대왕대비에게 문후를 여쭙고 하루를 쉬었다. 이 과정에서 이진이 가장 홀가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제 선조 이연의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나,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만 하면 제발 왕실에 초상나지 않기를 비는 이진이었다.
아무튼 그 시간 남쪽 먼 바다 전라 좌수영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목욕재계를 하고, 북쪽으로 경건하게 절을 올린 후 이진이 내린 금낭을 개봉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명을 내려 충청, 전라 좌우수영의 전 수군을 경상 좌수영에 집결시키도록 했다.
정월 초이틀.
이진은 백관의 하례를 받고 간단한 하사품을 내렸다.
그리고 왕대비 박 씨에게 문후를 여쭈러 갔다.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어 올해 나이 38세.
여자로서는 한창 물오를 나이에 홀로 되어, 대비전을 지켜야하는 석녀(石女) 왕대비 박 씨가, 오늘 따라 어두운 얼굴로 이진을 맞았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왕대비 박 씨가 수심이 깃든 얼굴로 물었다.
“헌헌장부가 되신 주상을 보니 오늘따라 이 어미는 근심이 앞섭니다.”
“소자 이렇게 장성했거늘 무엇이 근심이 된다 하시옵니까?”
“이년의 팔자도 박복하거늘 중전마저도 후사를 생산치 못하니, 어미로써 어찌 열성조를 뵐 면목이 있단 말이오?”
근간에 만나기만하면 자주 언급되는 모자간의 대화가 또 재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마마마, 소자나 중전 아직 젊사옵니다. 비빈을 맞아들이더라도 좀 더 시간 여유를 두는 게 옳은 것 같사옵니다. 하옵고 관상감의 말에 의하면 올해는 과히 신수 불길하여, 행치 않는 것이 좋다하였사옵니다. 어마마마!”
현재보다는 이때는 과히 무녀들의 세상이라고 할 정도로 미신에 빠져있는 조선인지라, 이진의 이 말에 왕대비 박 씨도 한풀 꺾인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그 일로 이 어미는 항상 노심초사 속에 세월을 보낸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상께서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비빈도감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주오.”
“어마마마의 뜻을 알겠사옵니다. 올이나 지나거든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이 어미는 하루라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주상!”
“알겠사옵니다. 어마마마!”
겨우 이진이 왕대비의 요청을 뿌리치고 한숨 돌리는데, 뒤늦게 신열이 있어 못 온다던 부인 허 씨가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문후 여쭈러 왔다.
이진은 그런 둘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어제 밤새 내린 눈이 한 자는 쌓여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는데, 전쟁은 터질지라도 제발 일기라도 순조로웠으면 하는 이진의 바람이었다.
설이 지나면 이제 봄이 멀지 않았건만 오늘의 날씨는 어느 때보다 추웠다. 이진의 입에서는 호흡할 때마다 연신 하얀 입김이 토해져 나왔다. 그럴수록 철로 만든 연통에서는 하얀 연기가 더 진하게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너무 추워 안 되겠다 싶어 이진은 다시 통명전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 중앙에는 장작난로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진이 군기시에 명하여 만든 무쇠난로였다. 무쇠난로 정도는 외형을 한 번 본 사람이면 금방 만들 수 있는 제품이었다.
그림을 그려주니 문제없다고 하는 걸로 보아서는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 작법인 듯 했다. 이로써 궁 안이 좀 더 춥지 않게 겨울을 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장작의 소비였다. 그래서 이진은 전쟁이 끝나고 나면 석탄광도 개발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괜히 쇠 받침 위에 화재예방을 위해 깔아놓은 고운 모래를 만지작거리던 이진이 곧 중전 허 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떻소?”
“미열이 좀 있사오나, 대단치는 않사옵니다. 전하!”
“어의에게 진맥을 좀 받아보지 그러오?”
“이미 받아 보았사옵니다. 전하! 고뿔 끼가 조금 있다고.........”
“알았소. 항상 몸 관리를 잘 하시오.”
“네, 전하!”
대답하는 중전의 얼굴도 어두웠다. 신상에 관한 일로 대화가 전개되자, 종전 왕대비에게 원자를 생산하라고 독촉 받은 사실이 상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는 이진의 마음 또한 중전 허 씨 만큼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설핏 든 생각이 ‘밤일을 더 열심히 해볼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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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본문의 대화 내용 중, 이진이 경상(京商)에게 지적한 세 가지 폐해에 대한 설명입니다.
운반곡에 일정량의 물을 타서 곡물을 불려 그만한 양을 횡령하는 것을 ‘화수(和水)’, 운반곡의 일부 또는 전부를 착복하는 것을 ‘투식(偸食)’,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는 것을 ‘고패(故敗)’라 하여, 그들이 자주 행하던 부정 행위였다.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