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4 회: 간신들을 모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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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또한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고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다시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에 곡성이 잦아들고 간혹 흐느끼는 소리만 들려왔다.
“결국 임금은 몽진을 결심하고 평양으로 떠났소. 화가 난 백성들이 여러분들이 서 있는 경복궁은 물론 도처에 불을 지르고, 사대부들의 집부터 털기 시작했소. 폭동이 일어난 것이오. 평소 자신들을 착취했으면 군비라도 제대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런 준비는 전연 없었고, 적이 쳐들어오자 저희 식구만 모조리 미리 빼돌려 북으로 도망갔기 때문이오. 그 결과 의주까지 쫓긴 왕은 명국에서도 받아주질 않아 자결을 하고 말았소.”
“전하..........! 흑흑흑.........”
엉엉엉..........!
“전하.........!”
그들의 울음을 등 뒤로 하고 이진은 말없이 돌아서서 근정전으로 향했다. 그런 이진의 앞에는 그간 온갖 투정을 부리던 대신들조차도 한 덩이가 되어 네 발을 뻗고 울고 있었다.
* * *
성균관 유생들의 출재(黜齋:퇴학)까지 검토했던 이진으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진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이 자진 복귀했기 때문이었다. 이의 기사가 조보에 실리자, 이의 기사가 지방에 퍼지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눈처럼 쌓이던 상소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조선 이대로 좋은가? 이대로 갔을 때의 조선의 모습>
이라는 타이틀 기사 하에 이진이 한 이야기가 더욱 살을 붙여 장황하게 실렸는데, 이를 듣고 발분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당장 농군들이 호미며 곡괭이를 들고 대장간에 나타나 무기를 만들어 달라는 바람에, 대장간이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 * *
다음 날.
초조반을 마치고 기다려도 경연을 개최하자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이 이상타 여기고 있는데, 어제 저녁 당직을 섰던 좌승지 이덕형이 와서 고했다.
“실로 여러 문제가 엎치고 겹쳤습니다. 전하!”
“무슨 말이오?”
“어제 밤늦게 명으로 책봉을 받으러 떠났던 전 우의정 유전 대감이 돌아와 죄를 청하고 있고, 대신들은 집단 사직 상소를 올렸사옵니다. 전하!”
“흐흠.........!”
심각한 안색으로 한참을 생각하던 이진이 불쑥 물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요?”
“책봉 문제는 유전 대감이 비밀리에 알아낸 바에 따르면, 명의 만력제가 정사에 임하지 않은지가 오래 된 모양입니다. 하고 대신들의 집단 사직상소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진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있자 이덕형이 계속해서 보고를 했다.
“하나는 전하의 개혁 의지를 말리지 못한 사대부들의 지탄이 두려웠겠고, 또 하나는 전하의 마음을 헤아렸으니, 더 이상 간하기도 어려워 상소를 올리지 않았나, 소신은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럴 듯한 해석이군. 아니지 맞는 말인 것 같소. 그래 이를 어찌 처결하면 좋겠소.”
“책봉을 받으러 갔던 대신들이야 명의 사정이 그러 하니 처벌을 할 수 없는 문제고, 사직을 청원한 제 대신들은 일단 한 번은 말려야하지 않겠사옵니까?”
“흐흠.......! 책봉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하고, 그러나 말려도 기어이 사직을 청할 고집불통들이 몇 명 있을 것이오. 그들을 고명경차관으로 파견하고, 또한 이제 선대왕의 실록을 편찬할 때도 되지 않았소? 하니 실록청을 설치하고 이의 제조로 임명하면 될 것이오.”
“명철하십니다. 전하!”
“허허........! 이제 이 승지까지 아부 대열에 합류한 것이오.”
“아, 아닙니다. 전하!”
이진의 농담에 급급히 변명하나 이덕형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 * *
만사는 이진의 예상과 뜻대로 되었다.
이진의 만류에도 세 명이 끝까지 고집을 세워 사직이 윤허되었다. 곧 이조판서 정인홍과 예조판서 정철, 뜻밖에도 병조판서 정언신 그들이었다. 정언신의 변은, 병판으로서 무비를 갖추는데 앞장서야 했으나, 그 반대의 길을 걸었으니 면목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들의 사직을 윤허한 이진은 정인홍을 고명경차관으로 세워, 명으로부터 책봉조서를 받아오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진은 정인홍에게 명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명의 조야에 뇌물을 뿌려 이를 받아오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올곧은 정인홍이 난색을 표하기에 이이첨을 딸려 보내 그 역을 맡긴다 했더니, 그라면 치를 떠는 그인지라 또 난색을 표했다. 할 수 없이 이진은 대타로 간신 중의 하나인 이경신을 보내는 것으로 낙착이 되었다.
정철에게 실록청의 제조를 맡기는 이 일은 이보다 수월하게 진행이 되어 그가 그 소임을 맡기로 했다. 곧 선조 이연의 실록편찬에 들어갈 것이다. 이 일이 끝나자 이진은 곧 후임들을 임명했다.
정인홍의 후임으로 예조판서에는 그의 동문인 김우옹(金宇顒)을 임명했다. 이 일로 정인홍의 북경 행이 한결 수월하게 타결되었다. 또 병조판서에는 전에도 병판을 지낸바 있는 현 호조판서 정탁을 옮겼다.
그리고 이진은 우성전(禹性傳)을 예조판서로 임명하고, 정탁이 옮겨가 빈자리인 호조판서에는 도승지 이항복을 기용하였다. 우성전은 이진이 취임한 후 처음으로 내보낸 암행어사의 한 명이기도 했다.
영의정 이발과 같은 동인이었으나 나중에는 갈라져 남인의 거두가 되는 사람이었다. 정철과 같이 바른 발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진은 조정에 이런 사람도 있어야 된다고 보고 그를 선임한 것이다.
아무튼 빈 승지 자리 하나에는 이수광(李睟光)을 발탁해 동부승지로 삼았다. ‘지봉유설’의 저자이며 실학의 선구자인 사람이었다.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고,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이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實效)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며,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 방법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모든 자리가 정리되자 이진은 새로 임명된 사람을 한 사람씩 편전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은 서열이 가장 높은 이조판서 김우옹이었다.
김우옹은 정인홍과 같은 조식의 문하로 만만치 않은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수찬이었을 때는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기도 한 이력도 있었다.
158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이어서 대사성, 대사간을 거쳤으며,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 그는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치에 시책을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진은 그에게 그 무엇보다도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동서는 잘 있소?”
“네? 전하, 송구하오나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손아래 동서 곽재우 말이오?”
“아! 전하께옵서 어찌 곽재우를 다 아십니까?”
김우옹의 물음에 이진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둘러대었다.
“과인이 동강(東岡:김우옹의 호)에게 관심이 많다보니 가계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지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부복하려는 그를 말린 이진이 물었다.
“그 사람도 나이가 꽤 되었을 텐데 과거에는 응시를 안 하는 것이오?”
“아마도 상처가 커서 다시는 응시하려 하지 않을 것이옵나이다. 전하!”
“그게 무슨 말이오?”
“석년에 벌써 4년 전이든가요. 그의 나이 음.........! 그의 나이 34세 때 치러진 별시에서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승하하신 선대왕께옵서 그의 답안 내용이 개탄스럽다고 판단하셔서, 그의 별시 합격을 취소시킨 바가 있사옵니다. 해서 크게 낙망했는지라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허허........! 그런 일이........! 잠시 만요.”
이진은 한 옆에 있던, 새로 도승지에 오른 이덕형을 불러, 당시 곽재우가 제출했던 답안을 찾아오도록 지시를 한 후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지금 그는 무엇을 하고 지내고 있소?”
“작년 선친의 탈상을 끝내고, 지금은 기강(岐江) 근처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내고 있사옵니다. 전하!”
“허허........! 그런 일이........! 인재 하나가 초야에 묻혀있구나!”
혼자 중얼거린 이진이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기더니 김우옹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그의 합격이 취소되지 않아 벼슬을 내린다면 무슨 벼슬이 좋겠소?”
“그가 받을 벼슬의 합당성은 모르겠사오나, 그의 성격만은 아셔야하옵니다. 그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남달리 고집이 세고 성격이 직선적인 면이 있어서, 아마 남과 잘 어울리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전하! 하오니 벼슬을 내리시려면 남과 마찰을 잘 일으키지 않을 직책이 좋겠사옵니다. 전하!”
“그래요? 그에게 그런 면이 있어요? 하긴 누구보다 옆에서 많이 지켜보았으니 잘 아시는 일이겠지요. 흐흠.........! 그렇다 라........?”
이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 여러 사례가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겠다.
전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粹)와 관련된 일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최초로 선조의 눈 밖에 난 계기가 되었다. 하긴 그 인간은 장수들의 공을 인정하는 데는 아주 인색하지만 말이다.
또 한 번은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은 일이 있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당시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다.
아무튼 또 하나의 정철을 보는 것 같아 뜨끔했지만 육전에서는 그만한 장수도 찾기 힘들어 이진의 고심이 깊어졌다. 이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이진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주안상을 들여, 그때부터 김우옹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한 병의 술이 다 떨어져 두 병째를 마시고 있는데, 도승지 편에 과거 곽재우의 답안이 건네지고, 이진은 이를 받아 읽어보았다. 그러나 현대인인 이진과 선조가 보는 관점이 달랐던지 크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진은 곧 도승지 이덕형을 불러 말했다.
“과인이 보기에 이 답안에 큰 문제는 없는듯한데, 도승지 생각은 어떤지 한 번 읽어 보고 평가를 해보시오.”
“네, 전하!”
이진의 답지를 받아 한참을 읽어보던 이덕형이 한 구절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 구절이 이상했던 모양입니다. 전하!”
“어디.......!”
이진은 그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그대를 위해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해(爲言終戮力), 곽분양처럼 되소서(須似郭汾陽)! 여기서 곽 분양이라는 사람이 누구요?”
“곽분양은 당 현종 때의 곽자의(郭子儀)라는 사람으로,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된 인물이옵니다. 전하! 그는 관원으로도 성공했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해, 세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인물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옵니다. 전하!”
“그게 뭐가 이상하오?”
“추측이지만 갓 과시에 응시하는 인물이 벌써부터 세속의 안락을 추구하는 등, 너무 안일한 사고의 소유자가 아닌 가, 평가하신 것 같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거늘.......”
“젊은이가 진취적 기상이 너무 없고, 세속의 이(利)만 쫓는다고 평가하신 듯하옵니다. 전하!”
이를 받아 김우옹이 말했다.
“실제로 그는 농사 경영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현재 상당한 부농이 되어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요.........?”
이진은 몰랐지만 원 역사에서 곽재우는 이 재산을 털어 의병자금으로 썼다.
“흐흠.........!”
잠시 생가에 잠겼던 이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과인이 보기에 아무 하자가 없으니, 그의 과거성적 2등을 그대로 인정하여, 정 팔품 겸사복 사맹(司猛)으로 발령하여, 우선 과인의 측근에 위사로 삼겠으니, 그대로 첩지를 내리시오!”
“선왕이 하신 일을.........!”
“승하하신 분이 뭔 소용이 있소. 과인이 불러 쓰겠다는데. 하고 과인이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소. 전란이 임박했다고. 이런 시기에 훌륭한 장수감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고루한 생각으로 잃어서야 되겠소. 속히 과인의 명대로 행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김우옹이 곽재우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했다. 이에 생색을 내는 이진이었다.
“과인이 보건데 두 분 다 남명선생의 외손 되시니, 훌륭한 사람이라 믿고 쓰려는 것이오. 그 방증으로 여기 동강과 같은 사람을 보니, 그도 대충은 알 만한 사람 일 것 같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렇게 해서 이진은 곽재우를 김덕령과 함께 측근 호위로 부릴 단초를 마련했다. 이진은 김체건이나 김명순 등과 같이 김덕령과 곽재우를 맞교대 시켜, 검계 두령 조직까지 항상 측근에 삼인의 호위가 머물도록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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