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 회: 간신들을 모셔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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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이 칩거하는 동안에도 도승지 이항복을 통해 대신들은 조강을 청하고, 정사에 임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이진은 신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왕으로서 명의 황제 만력제처럼 일종의 태업을 벌이는 것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날 이진이 청한 사람은 자신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세 명의 무장이었다. 곧 훈련원 지사 신립을 비롯하여 내금위장 권율, 겸사복장 이춘길 등이 그들이었다.
강녕전.
이진의 침소인 이곳에서는 지금 한창 주연이 무르익고 있었다. 이진이 선호하는 한 자리에 둘러앉아 주석병권은 아닐지라도 주담이 오가고 있었다.
“해서 말 이오만 과인의 목숨을 맡고 있는 경들이 좀 더 정사에 관여를 해주어야겠소. 이를 어찌 생각하오?”
이진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권율이 부복해 아뢰었다.
“신 타고나기를 눌변(訥辯)인지라, 지금과 같이 측근에 전하를 모시게 해주시옵소서! 전하!”
“흐흠........! 신 장군은 어찌 생각하오.”
“맡겨만 주신다면 신 전하의 명 받들어 까진 문신들을 헤집어 보겠나이다. 전하!”
“옳거니!”
“자네는”
이진은 마지막 하나 남은 이춘길을 보고 물었다.
“소직은 무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절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하옵고 문신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그래?”
일껏 힘들여 얘기해놨더니 측근에 있는 자까지도 문신들의 행위를 지지한다니, 배신감까지 느끼는 이진이었다.
“후후.........!”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던 이진이 싸늘하게 이춘길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나라가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찌 나라가 망하는 길이옵니까? 전하의 뜻대로 하옵시면, 그 전에 변란이 먼저 일어날 것이옵니다. 전하!”
불난 집에 부채질도 모질라 풍구를 갖다 돌리는 이춘길을 조소어린 눈으로 노려보던 이진이 싸늘하게 말했다.
“자네 입에서도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군. 자네 같이 고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과인의 목숨을 맡길 수는 없음이야!”
“신 또한 사직을 원하나이다.”
“그래? 윤허하네!”
“신 이만 물러가옵니다.”
이진의 말에 발칙하게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이춘길이었다.
“감히........! 게 아무도 없느냐?”
“신 김체건 대령이옵니다. 전하!”
“신 김명순 대령이옵나이다. 전하!”
“소직 백일문 대령이옵나이다. 전하!”
“저 자를 잡아 투옥시켜라!”
“네, 전하!”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권율이 중얼거렸다.
“옛말 하나 그름이 없군. 사람 속은 알 수 없으니........!”
“그러게 나 말이오.”
신립 또한 권율의 말에 동조했다.
“주흥이 가셨지만 어쩌겠소? 자, 자, 한 잔씩 들고 저 자의 후임으로 천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말 하시오.”
“신의 수하 중에 홍계남(洪季男) 이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전하! 용력(勇力)이 뛰어나고, 말을 잘 타는 것은 물론 명궁(名弓)이기도 하옵니다. 전하!”
“그래요? 발밑에 보석이 묻혀 있는 줄을 몰랐군. 과인에게 한 번 보내보도록 하오.”
“네, 전하!”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신립을 바라보고 물었다.
“2기는 모집하여 훈련 중이오?”
“네, 전하! 오위도총부 내에서 뽑아 재교육을 시키고 있사옵니다. 전하!”
“과인이 생각하기에는 말이오.”
“네, 전하!”
“기효신서인지 뭔지 척계광의 전술이나 달달 외우는 것으로는 병법서로도 부족하고, 이 뿐만 아니라 여타 전술 면이라든가 훈련 방법 등 모든 면에서 시대에 뒤떨어져 있소. 해서 말 이오만, 두 분은 아니 신임 겸사복장까지 퇴청하지 말고, 근무가 끝나면 저녁나절에 과인에게 특강을 받으러 오오.”
이진의 말에 둘은 해연이 놀란 표정이었다가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즉 이진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진이 그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첫날 과인의 강의를 들어보면 알 것이오.”
그리고는 그에 대해서는 중언부언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앞으로 훈련원을 훈련도감(訓練都監)이라 개칭하고, 더 많은 힘을 실어 줄 예정이오. 하고 앞으로 신 장군은 비변사의 정원이 되어, 이 회의에도 상시 참여를 하게 될 것이니, 그런지 아시고 적극 과인을 지지해줬으면 좋겠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전하! 지금까지 무인들은 너무 천시를 받고 살았사옵니다. 전하! 전하의 꿈꾸는 세상을 위하여, 이 신립 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전하!”
“고맙소!”
새삼 신립의 손을 덥석 잡은 이진이 ‘당신은 어쩔 것이오?’ 하는 표정으로 권율을 바라보았다.
“신 또한 신 장군과 마음은 같사오나, 신 언변이 부족하오니 전하의 칼이 되게 하옵소서!”
“옳거니! 과인이 그대의 마음만 받으면 되었지, 무얼 더 바라겠소. 직분에 충실해주오.”
“네, 전하! 충심으로 모시겠나이다. 전하!”
“좋소! 과인이 두 분 때문에 발 뻗고 잔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자, 자, 술이나 한 잔씩 더 합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새삼 은혜에 감격하는 둘을 넌지시 바라보며 이진은 술잔을 급히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 * *
그 날 오후.
이진의 명에 따라 강녕전에는 광해와 낯모르는 사람 하나가 등대해 있었다. 25~6세 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장대한 키에 네모 번듯한 생김하며, 제법 힘꼴깨나 쓰게 생긴 자였다.
이진이 오전부터 마신 술로 불콰한 얼굴로 게슴츠레 유희분을 바라보다가, 곧 광해에게 시선이 머무니 광해가 황급히 부복해 아뢰었다.
“신, 혼, 전하의 명 받자와 등대하였사옵니다. 전하!”
“자리에 앉게.”
“네, 전하! 처남은 어찌 그러고 서 있는 게요. 전하께 문후 여쭙지 않고?”
“신 유희분 전하를 뵙사옵니다. 전하!”
“그만 일어나 앉으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두 사람을 잠시 말없이 주시하던 이진이 아무 말 없이 술 두 잔을 따라 각각 주며 말했다.
“우 형의 꼴이 보이나? 매일 정사도 팽개치고 주석에 앉아 있음이야. 비상시국을 맞아 비상하게 대처하려 하나, 모두 일신과 가문의 번성을 추구할 뿐, 한마디로 자신의 갖은 것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으니, 우형으로서도 방법이 없어 이렇게 주색에 묻혀 있다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 어리석은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그나마 맡은 사옹원의 일을 놓고 노심초사 뛰어다니다 보니, 형님의 고뇌를 몰랐사옵니다. 전하! 이 우매한 자를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그렇다고 죽여 달라면 그들과 자네가 다를 게 뭐 있는가? 그렇게 고리타분한 이야기 그만하고, 이 우형이 자네에게 하나 청을 넣을 게 있네.”
“말씀만 하시옵소서. 전하! 하찮은 소신의 목숨인들 달게 내놓겠나이다. 전하! 흑흑흑.........!”
“또, 또........! 울 일이 아니야. 비상한 시국이란 말일세.”
혀를 차던 이진이 동생 광해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자네 처남을 빌려 씀세.”
“전하.......!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구동성으로 상 앞에 부복해 흐느끼는 두 사람이었다.
“쯧쯧.........!”
두 사람의 모습에 혀를 차던 이진이 돌연 정색을 하고 광해의 처남을 불렀다.
“유희분!”
“네, 전하!”
깜짝 놀란 유희분이 이진을 급급히 바라보다가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과인의 칼이 되어 적진을 허무는데 선봉이 되겠는가?”
“명만 내려주십시오, 전하! 어느 놈이든 앞에서 가로고치는 것들은 싹 쓸어버리겠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그래! 이런 사람 하나 정도는 있어야, 과인도 좀 편하게 정사를 돌보지. 좋다! 과인은 그대를 정8품 의금부 봉사로 임명한다. 머지않아 의금부 도사(都事)가 될 것인즉 그때까지는 몸을 낮추고 있거라.”
“하오나 소신은.........”
“안다, 알아. 그대가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음을........ 하지만 남행(南行)이라는 것이 있잖은가. 그대의 빼어난 무용과 학식을 과인이 잘 아니, 과인을 충실히 보필하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광해까지 함께 엎어져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이진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맺혀져 있었다.
여기서 남행(南行)이란 고려, 조선조에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리를 특별 임명하는 제도였다. 고관(3품 이상)이나 지방관의 천거(薦擧)와 국가유공자의 자손, 왕실의 친척관계 등의 ‘문음(門蔭)’에 의해서 보통 임명되었다. 7품 이하에 임용되며 과거와 더불어 관리 임용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유희분(柳希奮) 이라는 인물은 광해의 처남으로, 임란 이후 광해를 호종한 이래, 임해군(臨海君), 영창대군(永昌大君), 능창대군(綾昌大君) 등을 무고해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봉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자신의 손아래 매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정권을 지키는데 앞장선 인물로, 자신과도 악연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것은 원 역사에서 한해서고, 지금 이진에게는 그런 충성심과 저돌적인 행동이 필요해, 일단 그를 의금부에 적을 두게 한 것이다.
아무튼 곧 이들을 내보낸 이진은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들을 불러들여 물었다.
“홍여순, 이이첨 등은 왜 얼굴을 비치지 않는가?”
“내일이면 등대할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
“나머지는?”
“주로 지방에 있는 관계로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전하!”
“권율로부터 보내온 사람이 없었던 가?”
“아직은.........”
“무얼 그리 꾸물거리는지 원, 알겠네. 이만 나가보시게 들.”
“네, 전하!”
곧 두 사람이 물러가자 이진은 상을 물리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다음 날 사시 정.
강녕전에서 이진은 사십대 중반의 청수하게 생긴 자와 마주보고 있었다. 곧 그는 홍여순(洪汝諄이라는 인물로, 얼마 전 선조시절만 해도 병조판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간악(奸惡)하다고 여러 번 탄핵을 당하기도 한 인물로, 이진의 부름에 의해 한 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과인이 병판을 부른 이유를 알겠소?”
“소신의 언변이 필요하신 것이시옵니까? 전하!”
“하하하.........! 그렇소. 과인은 공을 금일부로 지변사재상으로 봉하노니, 그대는 과인의 개혁 정책에 앞장서서 소임을 다할 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전하의 손발이 되어 어떠한 일이라도 처결할 것이온즉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하하하..........! 좋소! 암, 그래야지. 명일부터 비변사로 출근을 하면 김귀영 지중추부사가 계실 것이오. 그 노대신과 잘 의논하여 과인의 뜻을 지지해 주기 바라오.”
“전하의 총신(寵臣)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전하!”
“옳거니, 자, 과인은 공을 믿거니와, 곧 비변사에서 봅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곧 다시 한 번 절을 한 그가 눈치껏 일어나며 말했다.
“소신 이만 물러가옵니다. 전하!”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형식적인 인사말을 뱉어 그를 전송했다.
“멀리 못 나가오.”
“네, 전하!”
뒷걸음질로 물러난 그가 곧 문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 등대한 인물은 이이첨(李爾瞻) 이라는 인물이었다. 1582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현재 광릉참봉(光陵參奉)이라는 말직을 지내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원 역사에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지는 등 효자의 면모도 있는 그였다.
그러나 그는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동궁(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진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 상궁(김개시)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그는 광해군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그를 위해 헌신했다. 즉 인목대비를 사사하는데 앞장서는 등, 간악한 짓을 많이 하여 광해 폐위 뒤 참형을 당한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는, 간신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런 그를 이진은 매섭게 노려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그대는 남행이라는 말을 아는가?”
“전하! 흑흑흑.........!”
“그대의 목숨을 과인에게 줄 수 있는가?”
“애초부터 소신의 목숨은 전하 것이었사옵니다. 전하!”
“하하하.........! 좋다! 과인은 그대를 비변사 낭청(郎廳)으로 봉할 것인즉 소임을 다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고개를 끄덕이며 비릿하게 웃는 그였지만, 그의 눈만은 결코 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명(正明)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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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좋은 날들 되십시오!^^
후의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