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 회: 부족한 재정을 벌충하기 위한 묘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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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의 말은 군권을 일원화 하고 오위도총부를 현실성 있게 개조하자는 것이오. 이러자면 물론 군사조직 개편도 있어야겠지요. 우선 과인의 제의부터 들어보시오. 지금까지 여러 군데 흩어졌던 군령을 단일화 해, 앞으로 최소한의 녹봉을 받게 될 대총이상 권관들로부터 위의 장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조직 체계를 갖자는 말이오. 이들은 일반 사법, 행정은 맡지 않고 평소에는 군을 조직, 훈련, 군수물자를 관리했다가 여차하면, 하위 군사들을 동원해 출전하는 것이오. 이런 편제 속에서 지방의 방위를 전담하는 오위 영은 아예 평소에도 지방에 상주하자는 것이오. 과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소?”
“하오면 수령방백들로부터 군권을 떼어내자는 말인데, 그들의 집단 반발에 직면할 것이고, 또한 군권을 쥔 자들의 변란 획책을 늘 근심해야 할 것 아니옵니까?”
늘 시행하자는 제도의 단점 부분만 정확히 끄집어내는 정철의 혜안(?)에 이진은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어 기운이 탈진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진이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경은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제도 시행 초기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인데, 모두 단점만 보고 포기하자니, 군령권의 남발로 패배가 불 보듯 훤한 일도 그냥 두고 보다가 당하자는 거요. 뭐요?”
“괜히 이 평화로운 시기에 벌집을 건드려 분란을 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사옵나이다. 전하! 지금까지 이 제도로도 근심이 없었사온즉 선무군관 제도나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나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우의정 이산해의 말에 이진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입 아프게 떠든 것은 다 어디 가고 원점으로 회귀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진이 가만히 있자 또 부복하여 집단 시위에 나서는 치들이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 없음을 오늘 또 실감하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모를까, 칼을 꺼냈으면 속된 말로 무라도 베어야 했다.
“통신사의 말로 왜구들의 침략이 가까워졌다는 것은 인정하지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것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은지 제일 먼저 인정하고 나오는 정철이었다.
“과인은 명일부터 군국기무를 비변사(備邊司)에서 논의 처리할 것이오. 전시가 임박했은즉 이렇게 넋 놓고 당할 수는 없음입니다. 그대로 행할 지어다!”
말과 함께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말을 대신하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이진이었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진이 말한 비변사의 조직과 기능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았다.
조선의 정치체제는 왕권과 의정부, 육조(六曹), 삼사(三司)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다. 의정부가 정책조정 기관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육조가 행정 실무를 집행하고, 삼사(三司)가 권력 행사에 견제 작용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군사 업무는 원칙적으로 의정부와 병조 사이에서 처리되어야 했다.
그러나 성종 때에 이르러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보다 실정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점차 의정부의 3의정(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포함하는 원상(院相: 임금이 정상적인 정치를 할 수 없을 때 이를 대리 수행할 수 있도록 이끌던 원로 재상)과 병조 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참여시켜 군사 방략을 협의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라고 일컬었다.
지변사재상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방략 수립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활동 면에서도 부침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국방력의 약화, 군사전문가의 부족, 군제의 해이 등 대내적 요인과, 간헐적으로 계속된 외적의 침입이라는 대외적 요인 때문에 그 필요성이 계속 인정되고 있었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변칙적이며 편의적으로 유지해오던 지변사재상과의 합의 체제를 고쳐 임시적으로 비변사라는 비상시국에 대비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후 그간 잦은 야인과 왜구의 침입으로, 1555년 관제상의 상설 관아로 정제화 된 비변사는, 정1품아문으로 거듭 났다. 이후 비변사는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활용되면서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다.
즉,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請兵), 둔전(屯田),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貞節)의 표창 등 군정, 민정, 외교, 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비변사는 중종 때부터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낭관(郎官) 등의 관원으로 조직되었다. 도제조는 현직의 3의정이 겸임하기도 하고,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혹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등이 겸임하는 등 때에 따라 달랐다. 임진왜란 때 비변사 관원은 도제조, 부제조, 낭청(郎廳) 등으로 조직되었다.
도제조는 현직 및 전직 의정이 겸임했으며, 제조는 2품 이상의 지변사재상뿐만 아니라 이조, 호조, 예조, 병조의 판서와 강화유수가 겸임하였다. 이후 훈련도감이 창설되자 훈련대장도 예겸(例兼)하게 되었다. 부제조는 정3품으로 군사에 밝은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부제조 이상은 모두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으로, 이들을 총칭해서 비변사당상이라고 불렀으며 정원은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사에 정통한 3인을 뽑아 유사당상(有司堂上), 즉 상임위원에 임명하여 항상 비변사에 나와서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낭청은 실무를 맡아보는 당하관으로서 정원은 12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1인은 무비사낭청(武備司郎廳)이 예겸하고, 3인은 문신, 8인은 무신당하관 가운데에서 선임하였다. 이 밖에 잡무를 맡아보는 서리(書吏) 16인, 서사(書寫) 1인과 잡역을 담당하는 수직군사(守直軍士),사령(使令) 등 26인이 있었다.
이후 팔도구관당상(八道句管堂上)을 두어 8도의 군무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는데, 대개 각 도에 1인의 구관당상을 두고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맡아보게 하였다.
* * *
이진은 사정전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강녕전으로 들어가 칩거하였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고 이진은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결론은 인재를 모은답시고 청리(淸吏)들만 모아 놓으니 자신의 뜻을 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의 사람도 필요하고 간신배도 필요했다.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찬성하고 쫓는 자들도 있어야, 자신의 의도대로 정사를 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막말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악인들로 버리는 패로 유용하게 쓰면 되는 것이다.
이래서 역대 군왕들이 간신들을 가까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진이었다. 아무튼 이진은 그로부터 그런 사람들을 몇 몇 떠올려 보았고, 자신의 사람이 될 사람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에 이름난 무인들을 데려다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이 무인이지 실제는 그들도 대개의 경우 문신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 속에 이진은 한동안 인물 선정에 고심을 했다. 이윽고 모든 생각이 정리가 되었는지 이진은 곧 송익필, 송한필 형제는 물론 검계 두령 황명호까지 불러들여 각종 명을 내렸다.
이에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속에서 이진은 장장 십일을 강녕전에서 칩거했다. 정사를 아주 중단할 수는 없어, 이튿날은 예조판서 정철을 불러 과거시험의 시제를 내리기도 했다.
그 시제로는 <조선이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는 현실적인 방책을 논하라>였다.
이렇게 칩거 오 일째 되는 날, 칠십 고령의 한 노인이 이진의 부름을 받고 강녕전에 들어섰다. 곧 김귀영(金貴榮)이라는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원 역사에서도 임해군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임해를 호종하여 같이 함경도로 갔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겨져, 함께 포로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한때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김귀영이라는 사람은 도승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병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를 겸한 전력에, 1581년 우의정에 올랐고, 2년 뒤 좌의정이 되었다가, 현재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재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라는 것은 군무를 논하나 실권이 없는 자리로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아무튼 곧 노 대신들이 들어가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이 노인을 이진이 부른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하.........! 흑흑흑.........!”
이진이 곧 잊혀져가는 늙은이인 자신을 단독으로 자신 부른데 대해 감격했는지, 한마디 부르고서는 어깨부터 들썩이기 시작하는 김귀영이었다.
그런 김귀영에게 이진이 한껏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정정하시니 보기에 좋소!”
“전하.........!”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김귀영이 진정되기를 한동안 기다렸다가 이진이 말했다.
“가까이 오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한동안 그렇게 더 있던 김귀영이 무릎걸음으로 이진의 이보 앞에 와서 다시 부복하였다. 이때 이진의 사전 지시에 의해 조촐한 주안상이 들어왔다.
“술 한 잔 하자고 청했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대수롭지 않게 뱉는 이진의 말이었지만 주상과 술을 나눌 수 있다는 영광에 김귀영은 다시 한 번 깊숙이 부복하여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를 보고 희미하게 웃던 이진이 벌떡 보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상에 있는 술잔을 들어 술 한 잔을 쳐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에 있는 잔에도 손수 술을 따르고는 말했다.
“함께 듭시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한 김귀영이 한참 뜸을 들여 자신의 상 앞에 앉았다.
“듭시다.”
“네 전하!”
이렇게 술이 서너 순배 돌때까지 아무 말 없이 술만 권하고 마시던 이진이, 또 한 번 말없이 일어나 창가로 가 창문 앞에 섰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직 보령 유치한데다, 선대왕께옵서는 원임대신 한 명 지명치 않고 흉서를 당하셨으니, 참으로 정사를 펴기가 어렵소.”
이진이 처량한 음조에 슬픈 기색까지 띠고 말하니, 꼭 김귀영이 듣기에는 ‘왜 당신 같은 사람을 원임대신이라도 선정하고 승하하시지, 그냥 천붕을 당해, 정사도 제대로 못 펴게 하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다 자신의 나이를 감안하면 주상은 거의 증손 벌이었다. 그런 주상이 자신을 불러놓고 하소연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김귀영이었다. 또 한 번 그가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꺼이꺼이 거리는데, 이진은 아무 말 없이 김귀영 앞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과인을 좀 도와주시오!”
“전하........! 소신 원하신다면 기꺼이 늙은 목숨이라도 내놓겠나이다. 이 늙은이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사옵니까? 필요하시다면 이 늙은 목숨이라도 가지소서!”
‘옳거니!’
내심 쾌재를 부른 이진이 겉으로는 여전히 침울한 안색으로 말했다.
“과인의 말이 정론을 벗어난 것은 아니나,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연대하여 저항하니, 참으로 어진 정사를 펴기가 어렵구료.”
“이 늙은 신을 그들의 방패로 쓰시옵소서! 전하!”
‘옭거니!’
내심 다시 한 번 무릎을 친 이진이 비로소 정색을 하고 말했다.
“과인은 공을 금일부로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자 부제조로 보임하려하는데 공의 의견은 어떻소?”
“내일 모레면 관 속에 들어갈 늙은이 이나, 신명을 받칠 뿐 이옵나이다. 전하!”
“고맙소! 부제조!”
이진은 새삼 김귀영의 닭 껍질 같이 쭈글쭈글한 손을 덥석 잡으며 감개를 표하고, 또 한 잔의 술을 내렸다.
그리고 통신사들이 보고한 왜의 상황을 심각한 안색으로 전하며, 모든 면에서 개혁을 하여 전쟁에 대비해야 하나,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어하는 대신들이 단체로 저항하니, 공만이라도 과인의 편에 서서 지지해달라는 말을 거듭 당부하였다.
이에 김귀영은 서슴없이 늙은 목숨을 내놓겠다고 호언했다. 만족한 표정을 지은 이진이 사전에 준비한 명아주 지팡이까지 한 벌 내리니 감격한 그는 한 동안 고개를 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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