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47화 (47/210)

< -- 47 회: 부족한 재정을 벌충하기 위한 묘수 -- >

7

“어떻소? 과인의 제의가?”

이진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병조판서 정언신이 발언을 했다.

“가한 줄 아뢰오. 전하! 신 병판이 생각건대 그럼으로써 일반화된 피역(避役) 의식을 차단할 수 있고, 유사시 동원될 군졸들을 지휘할 하급지휘관을 확보할 것으로 사료되어 집니다. 하오나 그 자손까지도 군역에 충정(充定)되지 않도록 하는 특혜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자손 대에 가서는, 자칫 군역을 질자들이 현저히 감소하지 않을까 우려되어 지옵나이다. 전하!”

“좋소! 그럼, 무엇으로 그들을 달래 지원자를 충원할 방법이 없겠소?”

“그것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 더 이상 대답을 못하는 병조판서였다.

“물을 좀 내오너라.”

“네, 전하!”

아무래도 안 되겠다. 과거시험 급제자를 배로 내려다보니 이제 국방 분야 전체를 건드리게 생겼다. 차제에 이진은 아예 국방부분 전반에 대해 거론하기 위해 음용수부터 가져오라 하고, 작심하고 발언에 나섰다.

“말이 나온 김에 과인은 오늘 국방 전반에 대한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하오. 과인이 사저에 있을 때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집중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 조선은 2백년 평화로 인해 이 분야가 너무 허술하고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소. 해서 과인은 그 문제 하나하나를 공경들과 논의를 하려하오.”

여기서 이진은 일단 말을 끊고 제 대신들의 반응을 한 번 살핀 살폈다. 모두 이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긴 하되, 오늘은 또 무슨 폭탄발언이 쏟아질지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었다. 이에 이진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로 과인은 군역을 진자들이 무기는 물론 모든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제가 알아서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라 할 것이오. 과연 하루 한 끼도 못 챙겨 굶주림이 일상화된 양민 천것들이, 과연 자신의 무기 하나 제대로 소지하고 전장에 임할 수 있겠소? 막상 전쟁이 터지면 거의 열에 아홉은 집안의 농기구나 몽둥이, 죽창을 들고 나올 것이오.”

여기서부터 이진의 음성이 점점 열기를 띠며 고조되었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전쟁이 되겠소? 과연 여기 있는 여러 대신들은 맨 몸뚱이로 적과 싸울 수 있겠소? 게다가 적들은 일반 무기야 말할 것도 없고 조총이라는 신식무기로 대항할 것이고, 또한 백년 전쟁으로 다져진 그들의 전투기술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당적 할 자가 드물 것이오. 이에 대해 말씀들을 해보시오.”

“..........”

모두 꿀 먹은 벙어리들이었다. 알면서도 지금껏 눈 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설마 전쟁이 터지랴. 대부분의 대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안일한 착각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

“왜 말들이 없소?”

“전하! 하옵시면 녹봉 충당하기 바쁜 나라살림으로 그들의 무기라도 장만해주자는 겁니까?”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오히려 역공을 펼치는 예판 정철이었다.

“못할 건 또 뭐요?”

“허허........! 말도 안 되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짓던 정철이 끝내는 혼잣말인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귀머거리가 아닌 다음에야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내심 불끈 화가 치밀었으나 애써 가져온 물을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이진이 차분하게 말을 했다.

“화폐를 제조해 그 차익으로 그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려하나, 이는 한계가 있는 일로 힘에 부치는 일이오. 해서 전혀 군역을 지지 않고 있는 양인 이상 양반들이 이를, 어느 정도는 감당해야 할 것이오.”

“그런 예가 전고에 없었사옵니다. 전하!”

강력 반발하는 정철이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엎드려 제고를 청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지금 무임승차 하자는 거요, 뭐요? 험, 험........! 당신들의 입으로 어떻게 밥이 들어가는지 한 번 이라도 생각해 보셨소? 그들의 수고로움이 없다면 당신들의 입으로 밥이 들어갈 수 있었겠소? 매일 앉아 맹자 왈, 공자 왈 한다고 쌀 한 톨이 생기오, 아니면 밥이 생기오? 진정으로 그들에게 기대는 것은 양반들 아니냐 말이오?”

“그것은 조선 개국 이래 내려오는 엄연한 법도 이옵고, 나라의 근본이옵니다. 전하!”

계속해서 초지일관 서슴없이 자신의 생각을 과감 없이 표출하는 정철이었다.

“물론 그것이 근간이 되어 과인부터가 그 위에 군림하고는 있으나, 나라가 결단 나고서야 양반은 어디 있으며 상민은 어디 있는 것이오? 아니 그렇소?”

“물론 그렀사옵니다만, 아마 양반들에게 세 부담을 시킨다면 연명 상소에 처할 것이옵니다. 전하!”

“무슨 말인지 아나,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 아니오? 그러면 앉아서 나라가 망하길 기다리자는 말이오. 과인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소. 양인 이상은 연 면포 2필 이상을 바치고, 본인이나 자식을 군역에 종사시키고 싶지 않다면, 솔거노비라도 16세에서 60세 이르는 그 집안의 군역 대상자만큼 내놓으시오.”

“백번을 양보하여, 양반들이라고 다 재물과 노비가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대부분의 양반들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양인들과 대응하거나, 일반 상민들보다도 못 사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이진 자신도 막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이런 신분제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양반들에게 이 제도를 시행하려면 집단 반발에 직면할 것은 불 보듯 명확했다.

그렇다고 아무리 화폐 발행에서 이익을 얻는 다고해서 군역대상자 모두에게 개인병기를 지급할 여력은 없었다. 어느 계층이라도 잘 살면 좀 낫겠는데, 일부 계층만 빼놓고 다 같이 잘 못 사니 문제였다.

답답하기는 이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보다 훨씬 더 답답한 이진이었다. 차라리 왜란 발발이라도 몰랐더라면 어떻게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겠는데, 이를 어찌 해야 할 지 자신조차도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밀어붙이자니 양반들의 집단 반발을 야기할 것이고, 내버려두자니 죽창과 몽둥이로 맞서다가, 전투고 뭐고 틈만 나면 도망가려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해야 할지 난감한 이진이었다. 역사 교과서를 보면 임란 3대첩이니 해서 승전 부분만 중점적으로 가르친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 한양 도성이 이십 일 만에 떨어지고 등등 대략적인 전황은 가르치지만 교과서 그 어디에도 조선군이 맨몸뚱이로 전장에 임했고,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는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단일화된 군복을 못 입는 것은 당연했고.

아무튼 그 일례로 한국 역사상 4대 패전의 하나인 용인 전투가 있었다. 임란이 발생한지 채 두 달이 안 된 1592년 6월 5일의 일이었다. 용인 일대에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에서 대대적으로 징집한 5만 군이 모여 있었다.(일본 측 기록으로는 10만 명)

이에 맞선 일본군은 총 1,600명. 31:1이라는 조선군의 압도적 우세였다. 그러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징집되어 끌려온 그야말로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무장을 갖춘 농민과 노비들이었다. 하여튼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에 놀란 왜군은 일단 도망을 쳤다가, 기습전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그 결과는 참담했다.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 일대에서 선봉군이 박살난 뒤, 다음 날에는 수원 광교산 일대의 부대가 기습을 받아 궤멸당하고 말았다. 지휘관부터 앞장서서 도망쳤고, 군사들 또한 조총 소리 한방에 놀라 우르르 도망치기 바빴다. 이에 서로 깔려죽고 도망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는 군사가 훨씬 더 많을 지경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그날의 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져 봇물이 넘쳐나는 듯했다’

당시 조선군의 패배는 정신적 심리적인 면에서 벌써부터 지고 들어가고 있어서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비무장이다시피 끌려나온 농민과 노비들에게 전투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이렇게 미리부터 꽁무니 뺄 궁리부터 하던 자들에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조총의 일제 사격 음에 놀란 치들이, 먼저 달아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봇물 터지듯 모두 도망치다가 서로 밟혀 죽고 깔려 죽는 초유의 참상을 연출하며, 조선의 5만 군이, 채 2천도 안 되는 왜놈들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니 조선군이 명군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 이여송이 조선으로 파병 나와 조선 군대를 보니 세상에 이런 군대가 없었다. 복색은 제 각각인 데다가 손에든 무기라고는 어디서 닳아빠진 농기구 아니면, 몽둥이, 죽창, 어느 놈들은 준비한 다고 한다는 무기가, 호미를 녹여 만든 조악한 칼이었다.

이런 것들은 적의 창칼에 부딪치기만 하면 제풀에 터져나가 지레 죽을 일이었다. 이러니 무슨 전투를 시키겠는가? 해서 뒤에서 파수나 보라고 뒤로 빼돌려놨더니, 날만 새면 주는데, 반절이 주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군사들에게 지급되는 음식이라고 해야, 썩고 불린 쌀에 좁쌀 조금 섞어 하루 한 끼만 지급하니 남아 있는 것이 용하다 싶었다. 이러니 그나마 몇 필 있던 군마도 어느 날인가는 없어지고, 전투 한 번 치르고 나면 남아있는 조선군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조선군이 울산성에는 깜짝 놀랄만한 신위를 보여주었으니, 1597년 전쟁 막바지에 벌어진 울산 성 전투가 그 예였다. 당시 명군 4만에 조선군 1만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권율 장군 휘하에서 열심히 싸워, 300명이 사망하고, 1천여 명의 중경사자를 냈다. 그래도 아직도 4천여 명이 남아있었다.

전투 중 절반인 5천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명군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전투 관례로 보면 절반이 남아 싸운 사실이 기특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전투가 이랬던 것은 아니고 상당 부분이 이와 유사했다.

하지만 진주성 전투나 행주 성 전투와 같이 군관민이 일치단결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싸운 전투도 있었다. 그러니 그나마 나라가 보존된 것 아닌가. 물론 이순신의 수군과 명나라 원병들의 도움도 컸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용인에 끌려나온 병사들에게는 무기가 없었고, 전장에 임한 하급 장교들에게는 녹봉이 없었다. 게다가 윗선 지휘관들은 또 어떠했는가? 각 수령마다 제 각각 소속 병들을 거느렸으니,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는 애초부터 기대할 수도 없었고, 남의 나라 병법서나 달달 외운 자들에게 제대로 된 작전을 구사할 능력은 더 더군다나 없었다. 이래저래 패전은 받아놓은 당상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까지 떠올리고 나니 이진은 답답한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실로 옴치고 뛸 수도 없는 형국이었지만 나름대로 차선책이라도 찾아야 했다. 양반들에게 군역을 지우고, 면포를 받아내려 하다가는 집단 반발로 인해, 임란 전에 내부 변란으로 자신이 쫓겨나거나, 아니면 이를 진압하느라 모든 심력을 소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일부 받아낼 것은 받아내기로 결심한 이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란이 터져도 백성들만 죽고 자신들은 안 죽을 것처럼 말하고, 더 심하게 표현하면 마치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처럼 말하는 것을 보면 복장이 터지지만, 그래도 가장 고치기 쉬운 지휘체계부터 논해봅시다.”

이진의 말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군사 시스템부터 알아야 데는데, 그 일례로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를 인용해 그 예를 들어보겠다.

임란이 터지자 조정에서는 긴급히 한양 도성에 군대를 모았지만, 전부 도망치거나 군역에 응하지 않아 기껏 300명을 모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이덕형을 긴급 도체찰사(정1품으로 한양 방어의 최고사령관)로 임명하는데, 명을 받은 이덕형이 실무를 접하고 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해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당시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지금 조선에서 부족한 것은 장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공이 너무 많아 배가 산으로 갈 지경입니다. 도원수가 전진 명령을 내리면 순찰사는 후퇴명령을 내리는 게 작금 조선의 현실이옵니다.  그런데다 소신마저 이 사이에 끼어 넣어 명을 내리게 되면, 그야말로 더 헛갈리고 뒤죽박죽이 될 것 아니옵니까?

우리 군은 지금 병사, 수사, 조방장, 수령까지 모두 별개의 직위로, 별개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공문만 여러 군데서 한꺼번에 쏟아지고 명령은 또 제 각각 중구난방이옵니다. 하면 병사들은 누구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까? 이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전쟁이 되질 않사옵니다. 굽어 살피옵소서!>

당시 군의 편제를 보면 아래와 같았다.

연대 급의 속오군 2,500명.

대대 급의 사 500명.

중대 급의 초관 99명.

소대 급의 기총 33명.

분대 급의 대총 11명.

이런 서류상의 편제이나 실제적으로는 군사는 없고, 각각의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만 수두룩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실제 전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또 오위도총부라 해서, 이 오위가 지방 수비까지 전담하게 되어있는지라, 전시에는 언제 지방까지 내려가 병사를 모집해 싸울지, 하여튼 가관인 군 조직이었다.

이런 지휘체계의 혼선을 단일화해 명령체계를 일원화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 수령마다 군권이 있으니 이것이 또한 문제였다. 이들 수령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할 것이니 반발은 불 보듯 뻔했다.

한 군데 손을 대려해도 기득권층과 꼭 결부가 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 개혁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 이진으로서는 차라리, 그대로 저승으로 보내지 왜 빙의를 시켰는지, 염라대왕인지 옥황상제인지, 절대자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어찌 됐든 자신으로서는 맡은 소임을 다해, 최소한으로 백성들의 피해를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책임과 포기하고 싶은 심정 속에서, 이진은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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