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5 회: 백성 앞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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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뒤를 따르는 허준을 돌아보고 명했다.
“내의원으로 가서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두창 예방약을 모두 챙겨 과인을 수행할 차비를 하오. 하고 여타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평안도에 보내주고, 필요한 사람도 같이 수행시키도록 하오. 내일 인시 말(寅時 말: 오전 5시)에 궁문을 빠져나갈 테니, 늦지 않게 그 전에 모든 준비를 갖추어 사정전으로 오오.”
“네, 전하!”
허준이 허리 굽혀 절하고 물러나자 이진은 수행하고 있던 대전내관에게 명을 내렸다. 금번에 장가 대신 승차한 박가였다.
“가서 명을 전하라. 훈련원 지사 신립과 겸사복 도정(都正) 이춘길(李春吉)을 천추전으로 등대하도록 하라.”
“네, 전하!”
그가 명을 받고 떠나자 이진은 지근거리에서 수행하고 있던 권율을 손짓으로 불렀다.
“내금위장은 이리 오시오.”
“네, 전하!”
“내일 인시 말에 궁문을 빠져나가 황해도로 향할 테니, 그 전에 과인을 호위할 군사 200명을 선발하여 함께 사정전에 대기토록 하오. 이 과정에서 하나 명심할 것은 반드시 마마를 앓았던 사람으로 선발해야 할 것이오. 알겠소?”
“네, 전하! 소직 명 받자옵니다.”
이진은 이래서 무관들이 좋았다.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명을 내리면 바로 몸으로 실행하니까. 아무튼 이진은 권율을 다시 원위치로 되돌리고 천추전으로 향해 나아갔다.
천추전 보료 위에 자리를 잡은 이진은 전 수행원들을 안으로 들라 일렀다. 그들을 죽 한 번 둘러본 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전에 과인이 지시하는 것을 보아 모두 알겠지만, 내일 인시 말에 과인이 황해도로 향할 터이니, 지금부터 그 준비를 분담하여 처리하도록 한다. 여기서 하나 명심할 것은 마마를 앓지 않은 사람은 절대 과인을 수행할 수 없으니 그리 알라. 해서 내가 지목하는 사람 가운데 두창을 앓지 않은 사람은 사전에 과인에게 말 하도록.”
이렇게 운을 뗀 이진의 본격적인 지시가 이어졌다.
“상온 장가는 듣거라!”
“네, 전하!”
이진의 명에 특차한 장가가 급히 부복했다.
“과인은 그대를 황해행경차관으로 임명하는 즉 지금 즉시 출발하여 가는 역로마다 그 준비를 철저히 시킬 것이며, 특히 임진 나루를 건널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를 하되, 배다리를 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선박을 이용할 것이니라. 하고 이 과정에서 징발되는 선박에 한 해서는 그 비용을 산정하여 내탕금으로 지급할 터이니 그리 알라.”
“네, 전하!”
“다음 제조상궁은 듣거라!”
“네, 전하!”
이진의 명에 정옥빈이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는 지금 즉시 원행에 필요한 수라며 장막도 필요할 터, 전성사에 일러 이를 준비시키되, 여타 원행에 필요한 물자와 인원을 충분히 준비토록 하라.”
“네, 전하!”
제조상궁이 명을 받들고 급히 몸을 일으키자, 이진이 이를 제지했다.
“잠깐!”
“네, 전하!”
“아직 부제조상궁이 임명되지 않았을 터, 종전에 과인의 말을 들었을 것인즉 선박 징발에 필요한 경비 등 여타 은자도 내탕금에서 충분히 준비토록 하라!”
“네, 전하!”
그녀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이진은 나머지 내관과 상궁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지금 여기 있는 자들 중에 마마를 앓지 않은 자가 있느냐?”
이진의 말에 서로를 돌아보나 없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됐다. 오늘 교대를 하고 돌아가면 내일 인시 말에 떠날 차비를 단단히 하여 모이도록 해라.”
“네, 전하!”
“하고 면신례의 폐해가 큰 것 같으니 너희들만이라도 그런 소동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네, 전하!”
일제히 부복하여 대답은 잘 하나 얼마나 갈는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이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겸사복 도정 이춘길 등대이옵니다.”
“들어오너라!”
“네, 전하!”
이진의 명에 전각문이 열리며 사십대 중반의 준수하게 생긴 미남자 하나가 등장하였다.
문턱을 넘자마자 이춘길이 급히 부복하여 아뢰었다.
“소직 이춘길 전하의 어명 받들어 등대하였나이다.”
“그래, 연일 수고가 많소. 기병들의 조련은 잘 되고 있소?”
“네, 전하!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있사옵나이다. 전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평소 훈련은 전시와 같이 하고, 전시에는 평소의 훈련처럼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 관건이지.”
“명심하겠사옵나이다. 전하!”
“오늘 과인이 도정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고, 내일 인시 말에 사정전을 떠나 황해도로 향할 터, 이 도정은 이에 맞추어 복사 100명을 선발하되 모두 마마를 앓았던 자로 선발을 하여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나이다. 전하!”
“하고 금일부로 중 의연을 겸사복으로 이첩시키는 바, 그의 충성도를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오.”
“네, 전하!”
“평소 부족한 것이나 과인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하도록 하오.”
“갈수록 말의 질이 떨어지고 있사옵나이다. 전하! 그런 일이 없도록 해주셨으면 좋겠나이다. 전하!”
“알겠소. 과인이 꼭 기억했다가 신경 쓰도록 하지.”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만 물러가 준비를 철저히 하오.”
“네, 전하!”
그가 물러가고 2각이 지나자 훈련원 지사 신립이 등대하였다. 신립을 천추전 안으로 들인 이진이 가을 햇빛에 새까맣게 탄 신립을 보고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얼굴을 보아하니 고생이 많은 듯하오.”
“소직이 당연히 할 도리입니다. 전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훈련원생들의 상태는 어떻소?”
“맹훈으로 강병으로 거듭나고 있나이다. 전하!”
“검계원들도 잘 하고 있소?”
“네, 다섯 명은 소직의 가혹한 훈련을 버티지 못하기에 퇴소시킨바, 나머지는 잘 따라오고 있사옵니다. 전하!”
“고마운 일이군.”
거듭 치하를 한 이진이 또 궁금한 것을 물었다.
“지금 훈련원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있는 자들이 총 몇 명이지요?”
“검계원을 제외하고 창병 1,200명, 살수 1,200명 이옵나이다. 전하!”
“앞으로 화승총이라는 것이 물 건너오면 포수(砲手)도 1,200명 더 양성하도록 하오.”
“화승총이라 하심은?”
“나중에 그것이 들어오면 과인이 자세히 일러주리라. 앞으로의 전투는 포수들에 의해 좌우될 터, 잘 양성해야 할 것이오.”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하고 과인이 알기로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임기 만료되어 지금 궐위 상태요. 금일부로 신 장군을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도 임명할 테니, 당분간 겸직하도록 하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그리고 과인이 내일 도성을 떠나 황해도로 향발할 터, 신 장군은 특히 궁궐의 수호에 만전을 기하고, 당상관 이상의 고관들을 면밀히 감시하여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 싶으면 불문곡직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하고, 과인의 하회를 기다리도록 하오.”
“명 받자옵니다. 전하!”
“후후후........! 믿음직스럽소. 과인이 누구보다도 경을 믿으니 하시라도 빈틈 보이지 말고 만전을 기하도록 하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진의 말에 감격한 신립이 급히 부복해 아뢰는데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느덧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
이후 몇 마디 잡답을 더 나누다가 신립마저 내보내고 내실을 서성이던 이진에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진은 곧 또 하나의 대전내관 임가를 시켜 조보를 책임진 색승지 홍인서를 불러 당부했다. 내일 인시 말까지 사정전으로 등대하도록 하라는 명이었다.
그날 밤.
이진은 사흘 만에 허 부인의 침실을 찾았다. 내일 황해도 행을 이야기하러 간 길이었다. 왕대비 박 씨에게 고할까 하다가 말릴 것이 분명할 터, 이를 피하기 위해 아예 떠나면서 알려주기로 하고 허 씨에게로만 간 것이다.
“어서 오시와요, 전하!”
“석참은?”
“들었사옵나이다. 전하!”
“때로 궁금하면 과일이라도 청하지 그러시오?”
“네, 간혹 시켜 먹고 있사옵나이다. 전하!”
“알아서 잘 한다니 한시름 덜었구료.”
“전하의 성총에 소비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전하!”
“다름이 아니라 평안도에 역질이 창궐하여 과인이 직접 황해도로 가, 제사를 올리려 하오. 그러니 그동안 몸 보중하구료.”
“전하! 아니 될 말이옵니다. 전하!”
급히 부복해 고하는데, 그 뜻이 간절했다. 이에 이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토닥이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평안도 백성들이 어려움을 어찌 보고만 있을 수야 있겠소. 큰 도움은 못되지만 그래도 다만 그들에게 정신적 위로나 되었으면 싶어 행하는 일이니 과히 너무 근심 마오.”
“하오나, 전하........!”
“이 문제는 더 말 마오.”
신색이 굳어져 하는 말에 중전 허 씨도 더는 말려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입을 봉했다. 그러나 마음은 그래도 입만은 제 의지를 배반하고 말리고 싶어 시종 씰룩거렸다.
* * *
다음 날 새벽.
여느 날과 같이 파루와 함께 기상을 한 이진은 곧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인시 말(寅時 末: 오전 5시)이 되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시간이 경과하자 시간이 가까워 오는지 소란스러움과 함께 간혹 말울음 소리도 들려왔다.
“지금 몇 점(點)이냐?”
“오점이 다 되가옵나이다. 전하!”
개똥의 고(告)함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명했다.
“출발하자!”
“네, 전하!”
이진의 명에 줄줄이 따라나서는 내관과 상궁들이었다.
“전하!”
이진의 등장에 모두 말에서 뛰어내리고, 급히 땅에서 부복하는데, 왕을 호위하는 자들이라 그런지 어느 군보다도 군기가 엄정했고, 용맹해 보였다.
이에 흡족한 기분이 된 이진이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다 모였소?”
“네, 전하!”
또 다시 일제히 부복하여 고하는데, 초를 치는 자가 있었다.
멀리서부터 이진을 부르며 달려오는데 그 목소리가 간절하기 짝이 없었다. 어제의 당직을 섰던 도승지 유성룡이었다.
“전하! 신 새벽부터의 소란이, 참으로 황해도를 향하시는 것이옵니까?”
그의 등장은 생각도 못했던 이진의 표정이 굳어지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관리를 시켜도 될 일은 굳이 번거로움을 자초하십니까? 전하!”
“과인의 소중한 백성들이 환란 가운데 놓였는데,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 상 된 자의 도리겠소. 과인은 단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정신적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향하고 있소. 경도 과인의 마음을 헤아려 더는 만류할 생각 말고, 일행에 합류하려면 하오.”
“전하! 흑흑흑.........!”
유성룡은 진실로 백성에게 향하는 어린 임금의 마음에 감동되어 더는 말리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그의 울음에도 이진의 손짓에 따라 장대한 행렬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사정전 섬돌에서 지켜보는 허 부인이 소매를 들어 눈가를 찍고 유성룡은 황급히 일어나 이진의 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진은 이 모든 것이 지금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어제 제조상궁의 보고에 법가를 준비한다기에 이를 만류하고 다만 말 한 마리에 의지하려니 위태위태 떨어질 듯하여 조바심을 내고 있는 참이었으니까. 사가에서 조랑말이나 타던 주제에, 왕의 체면이 걸린 일이라 더는 조랑말을 고집하지 못하고, 잘 생긴 백마에 그동안 훌쩍 자란 키 덕분에 어떻게든 오른 이진이었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상을 보고 설총마의 말고삐를 잡은 김명순이 아뢰었다.
“전하! 소직들을 믿으시옵시고, 흔들리는 대로 그냥 놔두소. 말의 반동에 옥체를 맡기시면 그 흐름을 금방 깨우치게 되실 올 것이옵니다.”
“알겠다.”
이진이 곧 김명순의 말대로 행하니 조금은 나은 듯 했다. 이런 풍경을 이진뿐만 아니라 수행 중인 궁녀와 나인 중에서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 떨어지는 사람 없이 이진의 행렬은 어느덧 궁성을 벗어나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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