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14
9월 14일
요즈음은 가을이건만 날씨가 고르지 못했다.
오늘은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있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인가 보다.
이런 날은 업무를 전폐하고, 술이나 한 잔 하면서 계집 궁둥이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이진의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당금 조선의 임금이라 해서 마음먹은 대로 할 수는 없었다. 오늘 따라 하원군 이정의 내사를 명했던 예문관 응교 임인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천추전을 찾아든 것이다.
이진은 부복한 예문관 응교 임인을 보료위에서 덤덤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날도 궂은데 고생이 많소. 그래, 조사를 끝낸 것이오?”
“네, 전하!”
이진은 조용히 임인의 다음 보고를 기다렸다.
“여기 소장(訴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주사 심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축첩(蓄妾)에 재물이 과히 동산을 이룰 만합니다. 이는 선대왕 시절부터 욕심을 부린 것으로, 양인이나 천것들의 제기된 소만해도 수레로 한 수레는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대왕의 은혜로 당시에는 그냥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사옵니다. 원성이 너무 자자합니다. 주상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증빙자료는 모두 있겠지요?”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 모든 것을 종부시(宗簿寺)로 이첩시키시오. 당장 도제조에게 명하여 그를 수감케 할 것인즉 필요하면 국문이라도 하리다.”
“영명하시옵니다. 전하!”
여기서 종부시(宗簿寺)라는 곳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왕실(王室) 족보(族譜)의 편찬과 종실(宗室)의 비위를 규찰(糾察)하던 곳이다.
“그만 물러가오.”
“네, 전하!”
물러가는 임인의 뒷등을 바라보는 이진의 입가에는 쓸쓸한 웃음이 맺혀있었다.
지도자로서의 고뇌어린 웃음이었다. 아무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족보상으로 백부 되는 사람을 내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진의 확고한 결심 하에 이정 건은 신속히 추국이 이루어져, 결국 이정은 전라도 진도로 귀양을 가고 재산은 전액 국고로 몰수되어 이진의 사업자금이 되었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이진이 특별히 지시하여 종친을 돌보는 기관인 종친부에 명해 녹을 타먹고 살게 했다. 이로 인한 효과는 일파만파로 번져 종친들이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했고, 하물며 고관부터 하위직까지 다시 한 번 자신의 주변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거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종친부, 그중에서도 가장 세도가 당당했던 자까지 처벌하는데, 이제는 성역이 없다 여긴 탓인지, 모두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반면에 백성들은 기뻐했다. 이제 당하지 않아 좋았고, 신분을 믿고 행패를 부리던 놈이 하루아침에 낭떠러지로 떨어졌으니. 이는 신분제에 맺힌 백성들의 보상심리가 작용한 탓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종친부 수장들이 이진을 찾아와 애걸하기도 했으나, 이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이 왕대비를 찾아가 읍소하는 바람에, 왕대비가 수차 이진을 호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진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차제에 위에서부터 기강을 바로 세워야 된다.’는 이유로, 시종 반대하며 사사(賜死)할 것을 시종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못이기는 척 왕대비의 청을 들어 주어 그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진은 애초부터 하원군 이정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유배를 보낸다고 하면 종친부에서 감형을 요구할 것은 불을 보듯 훤했으므로, 처음에는 극력 사사(賜死) 즉 사약을 내려 죽여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왕대비의 청에 못이기는 척, 유배로 감형 처분해주어 왕대비의 면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하원군 이정의 일을 처리하는 속에서도 이진은 정여립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송익필을 불러들여 논의를 계속 했다.
“정여립 이하 대동계 원들의 가족을 불러 모아야겠는데, 이는 자신의 주변을 토설하는 것이라, 쉽게 응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에게도 맹점이 있습니다. 그가 해상으로 나가려면 주변을 불러 써야 되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서 가족들을 연금하면 될 것이옵니다.”
“흐흠.........! 그도 그렇지만 최소한의 필요요원만 데리고 가겠는데?”
“필요한 만큼은 데리고 나가겠지요. 해상에 나가 죽기로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필요한 무력과 조력자들은 챙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소.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는 저들을 사가에 너무 오래 머무르게 할 수도 없단 말이지.”
이진이 한마디 하면 두 마디 알아듣는 송익필이었다.
“소문이 날까 두렵다는 말씀인데, 일단 제가 정여립을 잘 구슬려 필요한 사람을 미리 선발하도록 시키지요. 하면 그들의 가족들을 모두 모아, 전가사변 시키면 인구가 적어 고민인 함경도 쪽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 대신에 함경감사 권징에게 이들의 감시를 맡기는 것으로 하고요.”
“좋소.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의연은 김체건을 보내 그 무예를 시험해 보도록 하고, 지함두는 구봉이 그 능력을 시험해 보도록 하오. 해서 무예가 뛰어나거나 지모에 밝다면 과인이 중히 쓸 의향이니까.”
“지함두는 그렇다 쳐도 승려 의연은 어디에 쓰시려나 몰라도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측근 호위무사로 삼을 예정이오만?”
“안됩니다. 전하 그런 역신을 곁에 두셨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하실지 모르옵니다. 전하!”
“명 태조 주원장의 예를 보오. 측근 호위무사들을 항복한 진우량의 군사로 삼지 않았소?”
“그 때는 전시이니 수많은 항복자들을 제대로 쓰기 위해 꾀를 낸 것이지만, 지금은 전시도 아니고, 평화로운 시기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사옵니다. 전하! 뿐만 아니옵니다. 전하!”
“지금 이 시대에 승려를 측근에 등용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될 것이옵니다. 전하! 비록 문정왕후 시절에 문정왕후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 일시적으로 승 보우를 총애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보우를 병판에 올리기도 했지만, 문정왕후 사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흐흠........! 그 문제는 과인도 잘 알지요. 중들이 없으면 종이가 태부족일 것이요. 두부 또한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겠지요. 또한 허허......... 아니오.”
여기서 이진이 말하려 했던 것은 임란이후 중들이 산성축조에 많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다가 중단한 것이다.
“전하의 인재를 갈망하는 마음은 아오나, 의연의 중용은 분명히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할 중차대한 문제이옵니다.”
“알겠소. 하면 구봉은 그를 어디에 썼으면 좋겠소?”
“속 편하게 정여립이나 제대로 호위하라 하지요. 정여립이 만약 해상에서 죽기라도 하면 전하께서 이루려던 꿈도 같이 물거품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구봉이 그렇게 간절히 말하니 이번에는 내 고집을 한 번 꺾어야겠군.”
“잘 결정하셨사옵니다. 전하!”
“동생은 언제 오는 것이오?”
“금명간 도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주이니 먼 곳은 아니옵니다.”
“알겠소. 다른 문제는 없는 것이지요?”
“검계 계원들이 훈련을 마치고 나면, 그들을 어느 곳에 쓸 요량이십니까? 전하!”
“금의위라는 것을 만들어 정보를 모으고 관리들의 비위사실을 캐는데 쓰고 싶소.”
“그들의 권력남용이 우려됩니다만, 정보조직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전하의 통치가 편할 것이옵니다. 전하!”
“바로 내 생각이 그거요. 다른 할 말은 없소?”
“참, 오 상선이 의혹은 짙으나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쉽게 꼬리를 밟히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전하!”
“그래? 그렇다면 그 일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 그를 파출시키도록 하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보임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도록 합시다.”
“알겠사옵니다. 전하!”
모든 볼일이 끝나 송익필이 물러가자, 이진은 곧 모처럼 한가한 마음으로 후원을 거닐었다.
어디 가나 예의 측근들은 죽으나 사나 쫓아다녔다. 참으로 어떤 면으로 보면 왕도 못해먹을 짓이다. 사사로운 개인 시간마저 전부 빨개 벗겨지니 어디 스트레스 받아 웬만큼 무신경한 자가 아니고서는, 아주 고역인 직업(?)이 이 직업이었다.
이제 단풍도 절정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진 낙엽이 더 많은 후원을 거닐던 이진이 무슨 생각이 났던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제조상궁 정옥빈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 밤은 퇴청을 좀 늦추어라. 할 이야기가 있다.”
“네, 전하!”
그냥 대답만 하면 되지, 얼굴은 왜 빨개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그날 밤, 인정 무렵.
오늘도 이진은 날이 추워 천추전으로 침소를 정했다.
오후의 약속대로 제조상궁 정옥빈만이 왕의 침소로 들고, 나머지는 왕명에 의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게 되었다.
이진은 여전히 서 있는 정옥빈을 향해 말했다.
“앉아라. 하루 종일 서 있느라고 다리 아플 텐데.”
“네, 전하!”
벌써 상기된 옥빈이 이진의 명에 의해 이진의 이보 거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금란이라고, 중전이 데리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다. 과인이 사가에 있을 때의 시비로, 나의 수발을 전담하던 아이였다. 과인이 왕이 되어 잠시 방치했는데, 그대가 데리고 잘 가르쳤으면 좋겠다. 사람이 출세했다고 과거나 근본을 잊으면 요망한 짓이지. 안 그러냐?”
“지당하시옵니다. 전하!”
그녀의 대답에 빙긋이 웃음을 베어 문 이진이 곧 문갑에서 작성한 문서 두 장을 꺼내어 정옥빈에게 주며 말했다.
“하나는 금란을 말단 상궁이라 할 수 있는 종6품 상정(尙正)에 봉하는 것이니 내명부에 주도록 하고, 또 그 아이 또한 지밀로 봉할 테니, 그대가 측근에 데리고 잘 교육을 시켜라. 바쁠 테니 차 상위자에게 교육시키라 하는 것도 좋겠지.”
“네, 전하!”
“또 하나는 내시부에 전달하면 된다. 알겠느냐?”
“네, 전하!"
" 이만 볼 일이 끝났다. 그만 나가 보아라!”
“네, 전하!”
그러나 이번의 대답은 전의 대답들과 달리 옥빈의 답변에는 힘이 많이 빠져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춤무춤 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옥빈이었다.
“하하하.........! 서운하냐?”
“..........”
아무 말도 못하고 급격히 얼굴만 붉히는 정옥빈이었다.
“이리 오너라!”
“네, 전하!”
이진의 말에 환한 햇살이 되어 빛나는 정옥빈이었다. 그러나 쉽게 다가들지 못하는 또 그녀였다.
이번에는 또 안길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왜? 싫으냐?”
“아, 아니옵니다.”
얼결에 대답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이진의 곁까지는 왔으나, 몸이 굳어 있는 그녀의 태도였다.
“길이 나려면 아직 멀었다. 즐길 줄 알아야 되는데 무서운 모양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전하! 황홀하기도 했지만 무섭기도 했습니다. 전하!”
“좀 더 가까이 오너라. 이번에는 지난번 보다는 아픔이 덜 할 것이야.”
“네, 전하!”
“대답만 냉큼 냉큼 잘 하면 뭘 하남. 벗어야지 일이 되지.”
“알겠사옵니다. 전하!”
이번 대답은 아주 기어들어가, 청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라 음성이 작았다.
대답이야 어찌 했든 첫날밤보다는 보다 빠르게 옷을 벗고 살며시 금침 위에 눕는 옥빈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하는 이진이었다.
“합방을 하자는데 치마를 입고 할 셈이냐?”
이진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일어나 치마는 물론 속곳 하나만 남기고 모두 벗고 누가 볼세라 이불 속으로 급히 파고드는 정옥빈이었다.
“후후후........! 부끄러우냐?”
“그렇사옵니다. 전하!”
“나이가 몇인데 하는 짓은 방년들과 같구나.”
“..........”
아무 말 못하고 사르르 눈을 감은 채 가슴의 기복만 빠르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정옥빈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이진은 스스로 신속히 옷을 벗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옥빈을 살포시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 등을 토닥이며 그녀의 긴장을 덜어주려 애썼다. 그렇게 조금 있자, 그녀의 숨결이 약간은 잦아드는 것 같아 품에서 떼어내며 물었다.
“좀 안정이 되느냐?”
“네, 전하!”
“혹여 소원이 있느냐?”
“있사옵니다. 전하!”
“말해보아라.”
“내침당하지 않고 측근에서 끝까지 전하를 모셨으면 하는 것이옵니다. 전하!”
“회임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노계가 다 된 몸이라 너무 과분한 꿈이 아닌가 하옵니다. 전하!”
당시 조선의 평균 수명이 37세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따진다면 본인이 노계라 생각한다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접해본 이진으로서는 절대 노계는 아니었다. 물도 많고 아직 온 몸에 탄력이 넘쳤던 것이다.
“흐흠.........! 달걸이는 끝났느냐?”
“아직, 아직 이옵니다. 전하!”
“사람에 따라 난자 500~600개를 다 써버리면 끝나는 것이 폐경이니라. 무슨 말인지 어렵겠지만, 과인이 볼 때는 아직 먼 것 같다. 몸을 잘 관리하도록 해라.”
“감음하옵니다. 전하! 흑흑흑.........!”
“그만한 일에 울다니 넌 바보로구나!”
“전하의 사랑을 받고난 후로는 전하의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것 같사옵니다. 전하!”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방긋 웃는 얼굴로 말하는 옥빈이 오늘밤 따라 유난히 더 고왔다.
이제 이즈러지기 시작하는 만월의 편광(偏光) 때문만은 꼭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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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실록에 보면 가끔 그날의 날씨도 나오는데, 9월14일의 날씨가 그랬더랬습니다. 감사하고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