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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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송익필이 그런 이진을 바라보며 고했다.
“전하! 모수자천 격이나 제 동생을 추천하고 싶사옵니다. 일찍이 돌아가신 율곡 대감이 이르시기를, ‘자신과 함께 성리학에 대해 논할 사람은 익필, 한필(翰弼) 저희 형제밖에 없다고 할 정도의 평가를 받았사옵고, 문장에도 일가를 이룬 것은 물론 지모는 저 보다 더 밝습니다.”
“오호! 그래~? 그렇다면 진즉에 추천할 것이지.........”
“스스로 제 얼굴에 금칠하는 격이라 사양하다 보니........”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다. 당장 연통을 놓아 동생을 데리고 오도록. 지금 어디 있느냐?”
“주상의 건의로 선대왕께 사면을 받은 이후로 향리로 돌아와 고향집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당장 파발을 띄워 데리고 오도록 하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송익필이 급히 부복하는 가운데 이진은 시립해 있는 김 상선에게 명했다.
“밖에 검계 두령들이 있는지 살피고 오너라.”
“네이~! 전하!”
김 상선이 총총 걸음으로 밖으로 향하더니 잠시 후에 고했다.
“주상의 명 받자와 일시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아옵나이다.”
“알았다.”
간단하게 대답한 이진은 곧 중 의연과 도사 지함두에게 시선을 주고 말했다.
“과인이 오늘 그대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려 했으나, 오늘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일단 그 기회를 차후로 미룰 것이야. 하지만 너희들 재주가 쓸 만하다면 거둘 것이고, 아니면 죽임을 당할 줄 알라.”
“전하!........!”
이진의 말에 정여립이 놀라 황급히 부르짖으나 이진은 여유가 있었다.
“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말이다. 재주를 시험할 적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로 알아들으면 되느니라.”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정여립이 급히 부복하여 감격을 표하는데 반해 두 놈들은 건방지게도 두 눈을 치뜨고, 그냥 꺼먹 꺼먹 남 일 대하듯 하고 있었다. 이 모양을 보니 당장 치도곤(治盜棍)이라도 안기고 싶었지만,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오늘은 봐주는 길에 크게 인심 쓰기로 한 이진이 곧 지엄한 명을 내렸다.
“오늘은 시일이 마땅치 않은 것 같으니, 이들의 시험은 다음으로 미루고, 정여립 이하 죄인들을 일단 모두 과인의 사저에 가두어두어라. 훗날 논죄가 있을 것이니라.”
“명 받자옵니다. 전하!”
송익필 이하 최상선과 제조상궁에 이르기까지 허리 굽혀 이진의 명을 받들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던 이진의 시선이 의도적으로 제조상궁 정옥빈에게 머물렀다. 고개를 들던 옥빈이 이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급 홍당무가 되어 당황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찍 어미를 잃은 광해가 연상의 김개시를 가까이 한 것은 모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일단이라 했다. 임해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이진 역시, 어머니 벌의 옥빈이나 이모 벌의 개똥을 그런 연장선상에서 무의식중에 품에 거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먼 미래에 두고 온 아내가 그리웠는지도........
* * *
다음 날 아침.
이진이 조강을 끝내고 무엇을 지시하고자 김 상선을 찾았으나, 들리는 건 내시 중 정3품 상온(尙醞) 직책에 있는 최가의 대답뿐이었다.
“오늘 아침 급히 인편으로 신병에 의한 정직을 청했사옵니다. 전하!”
“어디가 아픈 게냐?”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사옵니다. 전하.”
“그래? 연유에 대해 한 번 알아보아야겠구나.”
혼잣말인 듯 지껄인 이진의 시선이 이번에는 김개시에게 향했다.
“개시, 너는 제조상궁의 가르침을 잘 받고 있는 게냐?”
“네, 전하! 전하의 은혜로 수시로 교육받고 있사옵니다.”
“열심히 하거라!”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귓등으로 들으며 무심코 던진 시선에 대전내관의 하나로, 왕명 전달이 주 임무인 정4품 상전(尙傳) 장가에게 향했는데, 여느 날과 달리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상전! 네게도 무슨 일이 있는 게냐?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니옵니다. 전하!”
“아니면 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측근부터 장악하기로 한 이진은 곧 수행하고 있던 송익필에게 물었다.
“정여립 일당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지?”
“의금부 도사 목 수흠을 불러, 입이 무거운 자들로 엄선하여 주상 전하의 사가에 감금한 채, 밤낮으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는 중이옵나이다.”
“흐흠........! 알았소. 내 서신 한 장을 써 줄 테니, 내상들의 대방에게 일러 양이의 상선 3척을 긴급히 구해오도록 하오. 하고 내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내 뒤를 따르도록.”
이렇게 송익필에게 명한 이진은 뒤를 흘끔 돌아보고 따르던 내관과 상궁들에게 명했다.
“내 구봉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십 보 이상 떨어져 있어라!”
“네, 주상 전하!”
이진의 명에 다른 무리들이 걸음을 멈춰 세우자, 이진은 곧 송익필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가 외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내 측근에서 근무하는 상궁들이나 내관들에 대한 일제 조사를 하되, 특히 내관들에 한해서는 세세한 기찰을 하도록 하오. 이 일은 비밀이니 검계 두령들을 불러다가 시키도록 하오.”
“알겠사옵니다. 전하!”
송익필이 명을 받들자 이진은 곧 따르던 수행원들을 전부 불러 말했다.
“과인이 오늘은 문소전(文昭殿)을 참배하려 했으나 갑자기 날이 추워져 안 되겠다. 오늘 조회는 천추전에서 개최할 것이니 그리 통보하도록 해라.”
여기서 문소전(文昭殿)은 조선 태조 및 그의 정비인 신의 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함이다.
“명 받자옵니다. 전하!”
정4품 내관 상전 장가가 승정원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모두 천추전으로 향하는데 추워 모두 웅크리고 걷고 있었다.
무슨 놈의 날씨가 오늘은 온도가 뚝 떨어져 벌써부터 겨울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임금의 천추전 거동에 아랫것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일부는 회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느라 허둥거렸다.
잠시 후, 육 승지는 물론 당상관 이상의 고관들이 모여들어 오늘 조회가 시작되었다.
“안건을 상정하라!”
이진의 말에 좌부승지 허봉이 발언을 했다.
“함경 감사 권징(權徵)이 북병사 이일(李鎰)의 잉임(仍任)을 청하는 보고서가 올라와 있습니다. 전하!”
여기서 잉임(仍任)이란 그 직의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옮기지 않고 계속하여 그 직을 맡겨두는 것을 말한다. 유임(留任)이라는 뜻과 대동소이하다.
“이일(李鎰)?”
“네, 전하!”
“흐흠........! 이일의 경력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이진의 명에 사전에 조사를 했는지 곧 허봉이 아뢰었다.
“경성판관, 부산포 첨사를 거쳐 전라좌수사의 보임을 마친 후 잠시 낙향에 있을 때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종성부사로 명받아 니탕개의 난을 진압할 당시 큰 공을 세워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전하!”
“흐흠........! 그가 수군에도 몸담은 일이 있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진이 돌연 엉뚱한 사람에 대해서 물었다.
“원균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지?”
곧 병조판서 정언신이 고했다.
“종성부사로 재직 중이옵니다. 전하!”
“흐흠........! 다행이군.”
“그렇다면 이억기는 어디서 근무하고 있소?”
“온성부사로 재직 중이옵니다. 전하!”
병판 정언신의 막힘없는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이진이 곧 엄한 신색을 회복하고 말했다.
“이일의 잉임을 허할 수 없다. 그를 전라좌수사 겸 전라수군절도사로 임명하도록.”
“전라수군절사라 하심은?”
병판 정언신의 물음에 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했다.
“각도에 좌우로 나뉜 수군절도사 중 좌수군절도사(좌수사)에 임명된 자가 우 수군까지 통제할 수 있도록 직제를 신설함이오. 하여 현 전라 좌수군절도사 이순신을 경상수군 절도사로 보임하는 즉 명을 받들도록 하오. 또한 경상우수군 절도사에는 이억기를 보임하고, 전라우수군 절도사에는 최호(崔湖)를 보임하는 즉, 즉시 시행토록 하오.”
“하면 북방이 공허해집니다. 전하!”
병판 정언신의 반론에 이진이 답변했다.
“지금 북방의 남, 북 병마사가 모두 공석이니 이에 대해 회계하고, 나머지 부사들은 알아서 임명들 하오.”
“명 받자옵나이다, 전하!”
“다음 안건 상정하시오.”
이진의 명에 역시 허봉이 아뢰었다.
“전라도 좌수영 진무 김개동 등이 왜노에게 잡혀 팔렸다가 탈출하여 고하고자 대기 중이옵니다. 전하!”
“이는 영상 이하 모두 치죄하여 듣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으로 해주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오늘은 날도 춥고 하니 이만 파합시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모든 대신들과 승지들이 물러가자 이진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문 밖에 대기하고 있던 대전내관 장가를 불러 명했다.
“내일은 날이 풀리려는지 모르니 과인이 내일 문소전 참배에는 가까운 종친들 모두에게 연락하여 입궐토록 하라. 이는 한 조상들을 모시는 족친으로서 과인 혼자보다는 여럿이면 좋겠어서 이르는 말이다.”
“알겠사옵나이다. 전하!”
장 내관이 명을 받들고 나가자 이진은 곧 따뜻한 아랫목으로 가 잠시 쉬었다.
이튿날.
이 날도 날은 풀리지 않아 문소전 참배는 그만 두기로 하고 이진은 입궐한 종친이 있으면 퇴궐해도 좋다는 명을 장 내관에게 내렸다. 그리고 오늘도 또 하루 변함없이 정사를 돌보고 쉬는 밤이었다.
밤도 깊어 이미 시각은 막 인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곧 도성의 팔 문이 닫히고, 통행금지가 시작되려는 시각이었다. 이진이 오늘은 허 부인의 침소에나 가볼까 하고 천추전을 나서려는데, 당직 도승지인 동부승지 이호민이 와서 고했다. 도성문의 개폐도 승정원 담당이었다.
“하원군 이정께옵서, 유문(留門)하고, 출송(出送)케 해 달라 청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아니 내가 오늘은 문소전 참배를 않는다고 돌아가도 좋다고 통보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 이 시각에 와서, 궐문 닫는 것을 중지하고 밖으로 내보내 달라니, 이런 고연 경우가 있소?”
여기서 유문(留門)은 조선 시대에 밤중에 특별한 일이 있어 궁궐이나 성문 닫는 것을 중지시키던 일을 말하는 것이고, 출송(出送)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약주가 과하셨드랬습니다.”
“흥,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매일 술타령에 계집질이오. 지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군. 일단 그의 원대로 해주오.”
괜히 없는 하원군 대신 욕을 먹고 있는 이호민이었다.
이호민이 돌아서는데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하고, 예문관 응교를 통해 하원군 이정의 행실에 대해 은밀히 내사를 하도록 명을 전달하라.”
“명받자옵니다. 전하!”
비밀을 기하기 위해 엉뚱한 예문관 응교를 통해 접근하도록 하는 이진이었다. 이런 전례가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성종 시절에는 양녕대군 첩의 딸인 이구지가 간통 사건에 연루되었던 바, 이런 명을 내려 처결한 바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아침 조회가 끝난 즈음인데 송익필이 들어와 보고를 했다.
“전하의 명으로 검계의 두령을 시켜, 정4품 이상의 내관과 상궁들을 은밀히 내사한 바, 다른 사람들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세 명이 특이했습니다.”
“말해보오. 뭐가 특이한지.”
“오 상선은 어떻게 취부를 했는지 몰라도 재산이 상상 외로 많았으며, 병으로 정직 중인 김 상선은 그 당사자의 병이 아니라 늙은 모친의 병수발을 드느라고 직무를 행할 수 없었고, 또한 대전내관 장가는 정말 너무 가난하여 수양아들이 아파도 약값이 없어 쩔쩔매고 있었다합니다. 그리고 궁녀들은 별 문제가 없었다는 전언입니다. 전하!”
“허허........! 그런 일이.........!”
잠시 생각하던 이진이 곧 송익필에게 명을 내렸다.
“오 상선에 대해서는 조사를 좀 더 철저히 하고, 김 상선에게는 어의를 보내주어 모친의 치료를 돕도록 하오. 하고 장 내관에게는 과인이 직접 어의를 보내고, 승첩을 내릴 테니 그런지 아오.”
“네, 전하!”
곧 송익필이 이진의 명을 이행하고자 물러갔다. 여기서 이진을 모시는 조선시대 내관에 대해 잠시 알아보면 이러했다.
고려시대나 명국의 환관에 의한 폐해를 알고 있던 조선조정은, 환관에게 비록 종2품의 품계까지 허용되었지만,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당상관 이상의 품계가 수여될 때는 국왕의 특지가 있어야 하였다. 즉, 조선시대 내시의 구실은 품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궐내의 음식물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직, 청소 등의 잡무에 국한되어 있었다.
지위가 하락하고 실세가 축소된 반면, 의무 규정은 더욱 강화되었다. 내시들은 관리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와 ‘소학’, ‘삼강행실’ 등을 주요 교과목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고, 매달 고강(考講: 시험)을 치러야 했다.
고강에서는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 등으로 성적을 평가받았는데, 이것은 특별 근무일수로 환산되어, 정상적인 근무일수와 함께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고과법에 따라 1년에 네 번 근무평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교육을 철저히 한 것은 자질 향상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이런 내시들의 수장으로는 종2품 상선(尙膳)이 최 고위직이었다. 내시부 관원 전체를 관리 감독하며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김 상선과, 수라간을 지휘하여 임금, 비빈, 대비, 왕세자 등의 식사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오 상선 등 두 명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최고위직 상선 두 명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부모의 병수발로 출근을 못하고 있고, 하나는 과도한 축재로 인하여 특별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최측근부터 장악하려는 이진의 의도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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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확실히 역사물은 쓰기가 어렵습니다. 공부하고 자료 조사할 것이 너무 많아 이런 데 할애되는 시간이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근래 4편까지 올렸으나, 이는 비축분이 있었던 연유고 하루에 꼬박 매달려 써도 3편 쓰기도 벅찹니다.
이러니 비록 재미가 덜하더라도 댓글, 추천 그리고 지금까지 읽으시면서 선작을 안하셨던 분은 두 눈 질끈 감으시고 선작 등록을 해주셨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덧붙여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후원해주신 여러 독자님들께도 이 자릴 빌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하면서.........!^^
매 검향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