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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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이 보낸 서신 내용은 이번 역시 저들이 줄곧 조선조정에 요구하던 내용과 똑같았다. 그래서 요는 이번에도 통신사 파견을 놓고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찬반 논리 또한 지난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진은 다툼을 중지시키고 최종 단안을 내려 명하였다.
“명분이야 어찌 하든 실리다. 손자병법을 빌 것도 없이 적을 알아야 하는 법. 되는대로 속히 왜국에 파견할 사절단의 명단을 회계(回啓)하라!”
이제 주렴도 걷히고 어찌 되었든 조선의 최고 통수권자는 이진이다. 왕의 명에 승복치 못하는 자들이 잠시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래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진의 취임 이후 그의 고집을 계속해서 겪어온 대신들은 곧 상의하여 동서 파벌까지 안배하여 통신사 명단을 제출하였다.
역시 원 역사대로 통신 정사에 서인인 황윤길, 부사에 동인인 김성일, 서장관에 동인인 허성, 또 황진이 김성일을 수행하니, 이 네 명이 사절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여기서 허성은 좌부승지 허봉의 친형이었다.
이들이 선정되자 이진은 이들이 떠나기 하루 전 사정전으로 불러들였다. 비록 상중이지만 이들의 무운장도를 빌기 위한 조촐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진이 옥병을 들며 말했다.
“모두 임무의 막중함은 아시리라 믿소. 자, 정사부터 한 잔 받으시오.”
“망극하옵니다. 전하!”
황윤길이 깊이 부복하여 절을 하고 넓은 소매를 사려 잔을 내밀었다. 이진은 쪼르르 맑은 향이 나는 홍주를 그의 잔에 채워주며 말했다.
“정사뿐만 아니라 모두 잘 들으시오. 여러분들이 대 조선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얼굴임을 명심하시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하고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뭐니 뭐니 해도 적정을 잘 살펴 보고하는 일이오.”
이 대목에서 강조를 하기 위해 일단 말을 멈춘 이진은 네 사람을 차례로 쏘아보듯 바라본 후 특히 부사 김성일에게 시선을 멎고 말했다.
“보고함에 있어서 당리당략에 따르거나 허위 보고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오. 만약 허위 보고로 인해 일이 그릇되는 날에는....... 과인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두지만 반드시 그 사람은 물론 가문까지 후과를 면치 못할 것인즉, 절대 기망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이거 술을 치다가 너무 말이 많았군. 자, 다음은 부사 양반 한 잔 받으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김성일 역시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았다. 이어 이진은 차례로 서장관 허성과 유일하게 선전관 출신으로 무관인 황진에게도 술을 내렸다.
모두에게 한 잔씩의 어주를 내리고 자신 또한 스스로 쳐 가볍게 한 잔을 비운 이진은 안주도 집지 않고 다시 한 번 네 사람을 쓸어보며 강조를 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적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해서, 조정은 전혀 대비를 않고 있다가 저들의 침략이라도 당해 보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겠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백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고, 종묘는 불타고, 여러분의 족친 중에서도 왜구에게 능욕을 당하는 등의 치욕을 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 할 수 있겠소? 허니 똑바로 적정을 살피고 제대로 보고를 해주기 바라오. 자꾸 더 이야기 해봐야 되풀이 되는 이야기일 터,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수라나 듭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일단은 부복해 은혜에 감격한다니 고개를 끄덕이며 옥저(玉箸)를 드는 이진이었다.
* * *
익일 통신사 일행이 왜를 향해 한양 도성을 출발하던 날 저녁, 한양 도성으로 들이닥치는 일단의 인물들이 있었다. 정여립 일당을 체포해 끌고 오는 검계 두령의 행렬이 그들이었다. 이에 이진이 왕이 된 후에도 사정전의 한 방에서 함께 기거를 하고 있는 송익필이 급히 강녕전에 있는 당금의 왕에게 보고를 했다.
이에 이진은 웃음을 베어 물고 느긋하게 사정전 뜰로 향하였다. 이미 시각이 술시 초라 주변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사정전 뜰에도 횃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소식을 들었는지 당직 승지인 우부승지 이원익 또한 나와 있었다.
김체건과 김명순의 호위 속에 현장에 도착한 이진은 곧 포승에 엮이어 무릎 꿇려진 일단의 인물들을 쓸어보았다. 대충 헤아려 보아도 십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물들이었다. 이진의 친림에 검계 두령 백일문이 허리 굽혀 아뢰었다.
“주상의 명 받자와 임무를 완수했나이다.”
“원로에 수고들이 많았다. 비록 상중이지만 과인이 어주와 상급을 두둑이 내릴 테니, 가서 푹 쉬어라.”
“망극하옵니다. 전하!”
검계 두령, 소두령 십여 인이 일제히 허리 굽혀 이진의 은혜에 감사하는데 송익필은 벌써 이들이 압수해온 서류를 훑고 있었다.
“흐흠........!”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이진은 곧 우부승지 이원익에게 명을 내렸다.
“정여립만 전 안으로 들이고, 나머지는 이대로 두어라.”
이진의 명에 언제 누가 연락을 했는지 몰라도 의금부 도사 목 수흠이 정여립이라 지목된 자를 이끌고 편전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송익필은 여전히 세 궤짝이나 되는 서류 더미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진은 사정전 안으로 들어가 어좌에 앉았다. 그 앞에는 무릎 꿇린 정여립과 의금부 도사 목수흠, 그리고 승지 이원익이 함께 부복해 있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이진의 명에도 정여립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에 옆에 있던 목수흠이 억지로 그의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여립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세우면 세우는 대로 있는 꼴이 만사를 체념한 듯 했다. 아무튼 목수흠에 의해 사십대 초반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얼굴이 쳐들려졌다.
체포 과정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터진 입술에 딱지가 앉은 모습이 이진의 눈길을 끌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진의 추상같은 호령에도 정여립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내심 중얼거리며 이 자의 죄를 어찌 실토 받을까 고민하는데 송익필이 희희낙락한 얼굴로 들어오며 고했다.
“전하! 참으로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해냈습니다. 전하!”
“무슨 소리요?”
“천하가 공물(天下公物)이라? 허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누굴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 허허.......! 아주 재미있는 사상이로군.”
“무엇이?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다니 이는 사직을 뒤엎자는 소리 아니냐?”
“저기 꿇어 앉아 있는 자에게 물어보시지요. 전하!”
“그 말이 사실이렸다?”
“.........”
묵묵부답 여전히 말이 없는 정여립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각오한 자 같았다.
“허! 내왕한 서신도 많군. 이발, 최영경, 김우옹.........”
송익필의 입에서 그와 서신을 교환한 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씩 거론될 때마다, 매우 아픈 매를 맞는 사람마냥 그의 상체가 크게 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들은 아무 죄도 없소. 단지 사사로운 안부 편지에 지나지 않소.”
비로소 입을 열어 그들을 극력 변호하는 정여립이었다. 이쯤 되자 앞으로의 일이 순조로울 것을 예견한 이진은 손짓을 해 두 사람을 가까이 불렀다.
“두 사람은 과인의 곁으로 오라!”
이진의 지시에 이원익과 목순흠이 재빨리 이진의 보탑 곁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잘 들으시오. 오늘일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네, 전하!”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에는 ‘전혀 납득할 수 없사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대 역모 사건을 그냥 묻으려 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 사유를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짐작한 이진이 곧 입을 열어 보충 설명을 했다.
“만약 두 사람의 입에서 이 일이 발설된다면 두 사람은 물론 수천 명의 생목숨이 결단 나는지만 알면 되오. 그 만큼 이 사건의 파급력이 크단 말이오. 알겠소?”
“네, 주상전하! 소직들 전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사옵니다.”
이원익이 대표로 말하자 동조하듯 황급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목수흠이었다.
“됐소. 그대들은 이만 나가보오.”
“네, 전하!”
두 사람이 나가자 이진은 어좌에서 일어나 친히 정여립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소? 연루된 사람을 다 잡아들여 과인이 직접 국문이라도 시행해야 되겠지요?”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죄는 단지 소인 혼자 지은 것뿐, 다른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흐흠.........! 그래요?”
또 다시 턱을 쓸며 반문하는 이진의 입에는 희미한 웃음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맞사옵니다. 전하!”
“그럼, 잡혀온 저 자들은 다 뭐지? 공모자들이 아닌가? 우선 저들만이라도 과인이 직접 국문을 해볼까?”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그들에게는 전혀 아무 잘못도 없사옵니다.”
“흐흠.........! 혼자 죽겠다? 그렇게는 안 될 걸? 모르긴 몰라도 수백 명의 생목숨이 이번 기회에 결단 나겠는걸.........?”
“전하! 거듭 고하거니와 그들은 단지 소인과 서신 왕래만 한 것뿐이옵니다.”
전 밖으로 나가던 걸음을 우뚝 멎은 이진이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살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너를 살려주는데 다른 사람이랴?”
“전하, 어떤 명이라도 내려주시옵소서. 소인 그 길이 끓는 물, 타는 불속이라도 뛰어들겠나이다.”
“그래? 그럼, 우선 네 진실한 마음을 알고 싶다. 네가 직접 가서 잡혀온 자들이 누구인지 하나하나 신분부터 밝혀 보거라.”
이진의 말에 잠시 주춤하던 정여립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 일어나 전 밖으로 나갔다.
하긴 임금이 마음만 먹으면 여기 잡혀온 자치고 하나 살아나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니 유일하게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줄을 붙들고 정여립은 그 죄인들의 앞에 우뚝 섰다. 이진과 송익필 또한 이때는 그의 곁에 서있었다.
“이 자는 정홍, 이자는 방언신, 이자는 황언륜, 이자는 승려 의연, 이자는 도사 지함두, 이 자는 정옥남, 이자는 박춘룡, 이자는 이진길 이자는 한경, 조웅직, 신여성........”
등등 정여립이 끝도 없이 읊어 가는데 이진이 알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이 이 시대에 천시를 받는 서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승려복장인 의연과 도사 복장인 지함두가 눈길을 끌었다. 또 아직 어린 두 아이 즉 정옥남, 박춘룡이 이진의 눈에 들어왔다.
정여립의 소개로 이들을 한 번 죽 살펴본 이진이 두 사람을 지목해 물었다.
“저, 중과 도사는 무엇 하는 물건인고?”
“중 의연은 무예에 뛰어나 측근에 두었사옵고, 도사는 지모가 빼어나이다.”
“저 두 아이는?”
“한 아이는 소인의 자식 이옵고, 또 한 아이는 안악에 살고 있는 박연령의 아들이옵나이다.”
“그렇군.”
중얼거리듯 말한 이진이 곧 다시 사정전으로 옥보를 옮기며 정여립에게 명했다.
“따라 들어오너라.”
“네, 전하!”
다시 내전의 어좌에 앉은 이진이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정여립을 내려다보며 잠시의 침묵 후에 말했다.
“네가 살길이 있다 했지?”
“네, 전하! 어떤 명이든 이행하겠나이다.”
“좋다!”
힘주어 말한 이진이 재차 말했다.
“너의 꿈을 바다 밖에서 펼쳐 보거라.”
“네?”
너무도 뜬금없는 이진의 말에 즉각 반문하고 보니, 이는 실례라 급히 제 입을 두드리는 정여립이었다.
“내 자금을 대줄 터이니 대동계의 쓸 만한 무리들을 데리고, 왜나 명 더 나아가 유구왕국(琉球王國)까지 교역을 행해, 국부를 늘림은 물론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거야. 고산국(高山國) 등에 해상왕국을 건설해, 네 꿈을 실현도 해보고, 외적의 침입에는 최선봉이 되어 대 조선을 지키는 것이야.”
“그것이 가능하겠사옵니까? 전하!”
이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몇 걸음 다가서는 것은 물론, 눈을 빛내며 묻는 정여립이었다.
“꿈만은 아니지. 네 소원이 그만큼 절실하다면 못 이룰 꿈만은 아니 결코 아니니라. 물론 과인의 뒷받침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하겠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갈증이 난 사람처럼 연신 자신의 입술을 축이며 달려드는 정여립이었다.
“당연히 가족은 고국에 두고 가야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야, 당연합죠. 죽을 목숨을 살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지극하신데, 어찌 감히 식구들을 거느릴 꿈이나 꾸겠사옵니까.”
“좋다. 곧 대동계 인물들을 전부 한 곳에 모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쓸 만한 인물들을 추려 떠나고 나머지는 조정의 철저한 감시를 받는 것이야. 그동안 과인은 상선 여러 척을 마련하여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겠다.”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흑흑흑........!”
곧 부복해 흐느끼는 정여립을 외면한 채, 한 옆에서 두 사람의 하는 거동을 지켜보던 송익필에게 이진이 명했다.
“승려와 도사를 한 번 데리고 와 보오. 하고 내 주변이 너무 쓸쓸하니, 구봉이 잘 아는 인재가 있으면 단 한 사람이라도 추천을 해주었으면 좋겠소.”
“알겠사옵니다. 전하!”
명을 받은 송익필이 곧 밖으로 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동계 원 중에는 기인모사가 수두룩하다더니 이 사람들이 그 들인가?’
내심 생각하며 이 진은 두 사람을 그윽이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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