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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임해-26화 (26/210)

< -- 26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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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왕대비 박 씨마저 주렴 뒤에 자리를 잡자 썰렁한 가운데 조회가 시작되었다. 이진이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의 사신들이 기밀을 염탐하려 했는지, 소리 소문 없이 도성으로 오다가 충주에서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 있었소. 정언 신잡의 보고에 의하면 왜의 사신이 충주 목사 김 예종의 하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하오. 해서 충주 목사의 파직을 요구하고 있소만, 중요한 것은 왜의 사신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오.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해 봅시다.”

“대사헌 황섬 아뢰옵나이다. 충주 목의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본인을 파직시키는 것은 물론 사건을 일으킨 자는 장 100대를 안겨 전가사변 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성종대왕 시절에는 양인이 관장(官長)에 대해 욕설만 해도 전가사변(全家徙邊)시킨 예가 허다했던 바, 하물며 하인이 그것도 왜의 사신을 구타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위의 형벌을 가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여기서 전가사변(全家徙邊) 이라는 것은 범죄자와 그 가족들을 평안도와 함경도지방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황섬의 발언에 형조판서 윤탁연은 한 술 더 떴다.

“그 벌도 너무 경한 것 같소. 그자는........”

여기서 또 한 술 더 뜨는 자가 있으니 이조판서 정인홍이었다. 윤탁연이 미처 말할 새도 없었다.

“옳소.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는 바, 그 하인뿐만 아니라 절린(切隣:가까운 이웃으로 보통은 3절린이라 하여 가까운 3호를 지칭함)까지 연좌 율을 적용하여, 전가사변 시키는 것이 마땅하오.”

오늘 논의의 초점은 왜의 사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하인의 벌 하나 주는 문제로 시간을 오래 끌까봐 이진이 얼른 나서서 말했다.

“대사헌의 말대로 처결하고 왜의 사신문제를 논의합시다.”

“그 문제는 이판 대감의 말씀이 옳아요. 기강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이판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주상!”

“알겠사옵니다. 왕대비마마!”

왕대비의 말에 이 문제로 더 이상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이진이 얼른 이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진이 급히 다시 발언을 했다.

“하필 이 시점에 왜의 사신들이 왜 오는 것 같소?”

“신 공판 김명원 아뢰옵나이다. 석년에도 누차 저들이 찾아와 아국과의 통상을 요구하고, 명국과의 회동을 중재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온 일이 있사옵니다. 허나, 승하하신 선조대왕께옵서는 찬탈시역한 역신의 신하는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신바, 정2품 이상의 대신들이 숙의한 결과, 관례대로 저들의 사신을 받기로 함에 따라 사신을 접대하였사오나, 내용이 오만무례하다는 이유로 사신까지 묶어둔 일이 있사옵니다. 종국에는 회신은 보류한 채, 사신들만 보낸 지가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똑같은 요구를 해올 개연성이 아주 높사옵니다.”

판서이상의 직급 중에서는 유일하게 재임용된 김명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물었다.

“그래, 이 일을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올해 만해도 벌써 두 번째 파견이옵니다. 전하! 방금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석년에도 여러 차례 저들의 뜻을 우리 조정에 전해 온바, 우리조정에서도 저들에게 요구한 일이 있사옵니다. 즉 수년 전 왜구들이 전라도 죽도로 공격해와 변장 이대원이라는 자를 죽인 적이 있사온데, 그때 우리 측에 잡힌 왜인의 말에 의하면, 변민 사을배동 이라는 자가 왜구에게 가담하여 길을 안내하여 수월하였다 하였사옵니다. 이에 우리 조정은 이를 불쾌히 시켜 그 배반자들을 압송해 온 연후에야, 귀국의 성의를 믿을 수 있다고 답하였사옵니다. 이에 저들은 실로 그 배반자 10여인 까지 압송하여 왔던 바, 우리 조정으로서는 더는 핑계 대기가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전하!”

공조판서 김명원의 발언에 이진이 심사숙고 하고 있을 때 또 발언을 하고 나서는 자가 있었다.

“심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옵니다. 전하! 미개한 자들이 감히 상국인 명국과 회동 자체를 운운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늘, 우리 조선조정에 중재를 요청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전하!”

직정적인 성격인 예조판서 정철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자 이조판서 정인홍마저 카랑카랑 쇳소리를 내었다.

“저들의 청을 윤허하지 마옵소서. 전하!”

“꼭 그렇게 판단할 일만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전하! 저들의 요구가 심히 무례하나 이번기회에 저들이 원하는 사절을 파견하여, 저들의 의도하는 바가 진정 무엇인지 살피는 것도 괜찮다고 사료되어집니다. 전하!”

좌의정 성혼의 말에 유성룡도 찬성을 하고 나섰다.

“신 도승지 또한 좌상 대감의 뜻과 같사옵니다. 전하!”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들을........!”

정철이 그 직선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을 참지 못해 화를 내는데 이쯤에서 이진이 나섰다.

“과인의 생각으로는 저들의 의도를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보오. 진실로 저들이 우리의 중재로 명국과 회동하여 통상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거부할 것을 미리 알고 가도벌괵(假道伐虢)의 계로 조선 영토를 침입하려는 음흉한 흉계인지, 사절을 파견하여 두 눈으로 똑똑히 파악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소.”

“어찌 해동성국인 우리 조선이 그 따위 미개한 족속들에게 사절을 보내는 욕을 자초하시려 합니까?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일부 대신들조차 정철의 말에 합세하여 부복하자, 이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참을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오히려 물었다.

“만약 저들이 과인의 말대로 음흉한 흉계를 숨기고 있다면 모든 책임을 지시겠소?”

“하오나 전하 저들이 무슨 힘으로.........”

“요 근간에 왜국을 다녀온 사람이 있소?”

정철 이하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저들의 실태를 모르지 않소? 또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백년이나 끌어오던 전쟁을 한 사람이 일통시켰다면 그 무력이 과연 얼마나 될지 상상이나 해보셨소? 모름지기 군자란 한때의 욕됨도 참을 줄 알아야 후일이 편안한 법. 이 모든 것을 떠나서라도 이번에는 명분이 약해서라도 통신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합시다.”

이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왕대비 박 씨가 최종 결론을 지었다.

“주상의 말이 옳아요. 모두 주상의 뜻에 따르도록 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재고해달라는 일부 대신들의 말에 짜증이 나는지 잠시 상을 찡그렸던 왕대비 박 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주렴 뒤에 앉혀놓고 계속 아녀자의 소견이라고 따르지 않는다면, 본 비가 여전히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질 않은가요? 하고 즉위 이래 죽 주상을 지켜본 바로는, 비록 주상께서 보령 유치하나 영특하시기가 짝이 없어요. 아녀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으니, 이래저래 본  전은 주렴을 걷으려 함입니다. 더 이상은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본 비의 뜻은 확고하니까.”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왕대비마마!”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

모든 대신들이 부복하여 간청하나 벌써 주렴 뒤는 이미 휑했다.

왕대비가 물러가자 썰렁해진 대전에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서로 다툼을 일삼기 시작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이래저래 화가 난 이진의 버럭에 모두 조개입이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또 저자거리를 재현하는 제 대신들이었다.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은 말도 나오지 않는 이진이었다. 그러나 국정을 총괄해야할 자로서 임무의 막강함을 잘 알기에, 이진은 초유의 인내심을 발휘해 잠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래도 여전하자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들 하시오, 조용! 여기가 어디 저잣거리요!”

이진의 고함에 찔끔한 대신들이 다시 입을 다물자 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이 빠진 모습이었다.

“왜의 사신문제는 저들의 입경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다른 처리할 문제는 없소?”

이진의 하문에 곧 발언하는 자가 있었다.

“신 우승지 이덕형 아뢰옵나이다. 지금이 국상 중이기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왕의 등극 시점이오니 경하할 일이기도 합니다. 전고(典故)의 예에 따르면 새 임금의 등극 시점에는 증광시(增廣試)를 시행해 이를 경축한 일이 많사옵니다. 문무 양과 과거시험을 허용하여 주시옵소서!”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하오. 널리 인재를 구하는 것도 군왕으로서 필히 행해야할 일, 문무 양과는 물론 잡과까지 같이 시행하되, 공고 기간을 거치면 곧 날이 추워질 터, 명년 봄에 시행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소.”

“옳은 말씀이옵니다. 전하!”

주관부서인 예조의 정철마저 찬성하자 이 문제는 모처럼 아무 다툼 없이 넘어갔다. 이에 따라 시기를 논한 바, 명년 봄 춘삼월 달에 초시를 치르기로 최종 확정이 되었다. 이를 끝으로 이진은 조회를 파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진이 다 빠진 이진으로서는 조회를 더 연장하고 싶은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조회가 파해도 이번에는 염치라는 것이 있는지, 더 이상은 왕대비에게 수렴첨정을 요구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지는 제 대신들이었다.

그날 저녁.

이진은 문후 겸해서 부인을 대동하고 왕대비전을 찾아들었다. 또 싸고 드러누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밝은 표정으로 이진을 맞는 왕대비 박 씨였다.

“어서 오세요. 주상!”

“근심 많았으나 괜한 근심이었나 봅니다. 어마마마!”

“호호호........! 대신들이 찾아오지 않으니 이 어미가 근심할 일이 뭐 있겠어요. 하고 주렴을 걷는다 생각하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아주 후련합니다. 아녀자로서 정사에 관여할 것은 정말 못된다고 뼈저리기 게 느낀 나날이었소. 10년 체증이 내려간 듯 아주 후련해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어마마이시니 더 권하기도 어렵겠사옵니다.”

“능히 주상께서 영명하시니 잘 해 나가실 거예요. 이 어미는 믿고 더 이상 관여를 안 하렵니다.”

“자신 있사옵니다. 어마마마! 지켜봐 주십시오.”

“그래야지요. 씩씩한 우리 주상을 보니 이 어미는 매우 기쁘답니다.”

왕대비의 말에 이진이 빙그레 웃고만 있는데, 금방 표정이 어두워진 왕대비 박 씨가 말했다.

“그러나저러나 하원군의 집에 불이 났다 해서, 이 어미가 임의로 선공감을 시켜 복구하도록 지시는 했으나,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하는지........ 아직 철이 들라면 먼 것 같아요. 엄연히 주상이 계신데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하고, 여전히 술과 계집들을 가까이 하고 주사가 아주 심하신 모양입니다.”

“흐흠.......! 모든 조정대신들에게 본을 보여야할 종친으로서 좀 지나친 감이 있군요.”

“이 어미 말이 그 말 이예요.”

“깨닫는 날이 있겠지요.”

가볍게 대답한 이진은 곧 물러날 뜻을 비치고 부인과 함께 곧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 * *

그로부터 닷새 후.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가신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와 승려 겐소(玄蘇) 외에 몇몇 종자를 데리고, 한양 도성에 나타났다. 왜의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서를 휴대하고 도성에 등장한 것이다.

이에 이진은 급히 승지들을 소집해 자문을 구했다.

“과인도 하마연(下馬宴)은 알고 있으나, 왜의 사신에게도 하마연을 베푼 일이 있소?”

“금년 이월에도 저들이 사신을 파견한 바, 선대왕께옵서도 친히 하마연을 개최하셨고, 또한

헌부가 일본 사신의 하마연 때 실수를 한 예조 당상의 추고를 청한 일도 있사옵니다.”

“그랬군.”

도승지 유성룡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이진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과인은 그들에게 하마연을 열어주고 싶지 않다. 방법이 없겠는가?”

“신병을 핑계로 대심이........”

이항복의 답변에 이진이 곧바로 물었다.

“접대는 누가 하고?”

“예판 대감이 하면 될 줄 아옵니다.”

“성정이 괄괄하니 혹여 실수가 있을까 두렵다. 과인의 뜻이라 하고, 삼정승을 필두로 예판대감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하라.”

“명받자옵니다. 전하!”

이진은 그길로 왜의 사신 접대는 그들에게 일임하고 사정전을 벗어나 모처럼 김 개똥이 일하고 있는 소주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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