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자임해-25화 (25/210)

< -- 25 회: 왕으로서의 고단한 하루 -- >

8

“신 이순신 주상전하의 명받자와 등대 하였사옵니다. 전하!”

어전에 부복한 이순신을 보자 이진은 자신도 모르게 넉넉한 웃음을 짓고 온후하게 물었다.

“왜 이리 늦었소?”

“소신 밤을 낯 삼아 달려왔지만, 거리가 있사와 ........”

“무슨 말인지 알겠소. 과인의 마음이 그만큼 경 만나길, 일일이 여삼추처럼 간절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오.”

충청도에서 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늦게 온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그만큼 급해서 그러했던 것을 이순신의 말에서 깨달은 이진은 곧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순신에게 명했다. 역시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고개를 들라!”

이순신이 잠시 고개를 들었다, 얼른 다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런 이순신을 향해 이진이 물었다.

“경의 나이 올해 몇 이지요?”

“마흔넷 이옵니다. 전하!”

“흐흠........!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되었군요.”

이렇게 중얼거린 이진이 이순신에게 말했다.

“과인이 곧 경을 전라좌수사에 봉할 것이요. 물론 처음부터 이 직에 봉하면, 아니라도 말 많은 자들이,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울 터인즉, 나중에라도 책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진도군수(종4품)에 봉할 것이오. 하면 수군만호까지 지냈으니, 큰 무리가 없을 것이고,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종3품)로 옮겼다가, 다시 며칠 후에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에 보임할 것이오. 하니 과인의 고충을 이해해주시오.”

여기서 말을 끊은 이진은 잠시 유성룡과 이순신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말했다.

“과인이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라도 그대를 기어이 그 직에 올려놓으려는 것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이야. 하니 경은 내려가는 즉시 군비 마련에 박차를 가해, 하사리라도 응전 태세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웃는 낯으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이순신의 절을 받은 이진의 말이 이어졌다.

“하고 과인은 경을 다시 1년 후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보임할 것인즉,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 신명을 바쳐 전하의 뜻대로 조선의 바다를 지켜내겠나이다. 전하!”

“물론 초년에는 아직 재정이 열악하여 원하는 지원을 모두 해줄 수는 없겠지만, 가용 자원에서 최선을 다하고, 훗날 재정이 확보되는 대로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지원을 해줄 것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과인은 경을 누구보다도 믿소. 때로 중상도 받을 수 있겠으나, 모든 중상은 과인이 막아내 줄 것이오. 하니 아무 걱정 말고 직에 충실하도록 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기어코 이진의 말에 감동한 이순신이 마루바닥에 감루를 떨어뜨리고, 이를 지켜보던 유성룡 또한 눈이 벌개져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이순신을 손수 일으킨 이진은 그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며 감개가 무량해졌다.

‘성웅 이순신을 내가 역사의 현장에서 보게 되다니.......!’

약간 검게 그을린 장년의 그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이진이었다.

이에 이진은 조금 이르지만 곧 중참을 이곳으로 내오도록 했다. 그 명에 덧붙여 명하길 비록 상중이지만 술 한 잔과, 유성룡과 이순신의 독상을 별도로 준비해오도록 했다. 이 명에 더욱 감복한 이순신과 유성룡이 다시 꿇어 엎드리려 하기에 이를 제지하느라 진땀을 빼는 이진이었다.

잠시 후.

이진의 명대로 수라상과 함께 이제 어주(御酒)가 된 허 씨 부인의 가양주인 홍주가 한 병 같이 나왔다.

“비록 상중이라 삼가야 할 것이나, 세조 대왕께서도 밤이면 총신들을 편전으로 불러들여 주석(酒席)정치를 행한 것으로 알고 있소. 아니면 과인 또한 기미에 꿰인 소와 무엇이 다르리오. 죽어라 일만 하다가면 어찌 일개 군왕이라 할 수 있으리오. 하하하.......! 자, 자, 명장을 얻은 기념으로 과인이 한 잔씩 내리는 것이니, 적다하지 마오. 하하하......!”

이진은 웃으며 손수 술을 치니 감격한 유성룡과 이순신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잔을 받았다. 그들이 얼굴을 돌려 어렵게 한 잔을 비워내자, 이진은 다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한 잔씩을 따라주며 말했다.

“내 꿈은 우리 조선 백성들이 매일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흥청망청 배 두드리며 군왕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이오.”

비록 북의 김 씨 왕조의 슬로건을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것이 역겨웠지만, 이 시대 백성들의 꿈 또한 다르지 않기에 이진은 서슴없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주상천하!”

‘술 마시다 말고 뭔 짓들 하는 것인지.........’

조선의 허례허식에 신물이 나는 이진이었다. 마음 속내를 모두 표출하고 살 수는 없는 법. 이진은 곧 내심을 추스르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인이 조참에서 말한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되오. 하고 부수적으로 해로(海路)도 열어야 하는데, 이는 곧 우리 상선을 안전하게 지킬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오. 하니 당장 현실적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는데 급급하지만, 장차는 대양해군, 험험, 원양해군을 지양해야 된단 말이지. 먼 바다까지 나가, 혹시 있을지 모를 해적들의 횡포도 장차는 막아야 한단 말이오. 이 장군 무슨 말인지 알겠소?”

“명심하겠습니다. 전하!”

“그러기 위해서는 후진도 잘 양성하고 배들도 덩치를 키워 큰 파도에도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어야겠지. 앞으로 이 장군의 임무가 막중하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또 이 소리.........!’

내심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으나 꾹 눌러 참은 이진은 이번에는 유성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인이 알기로는 왜국만 가도 양이(洋夷)의 배가 와서 서로 교역을 해, 온갖 동서의 문물이 넘쳐난다 하오. 지금도 인구나 무엇으로 보나, 조선이 뒤떨어져 있는데, 아직도 우리 중신들은 그들을 미개인 취급만 하니, 큰 코를 한 번 다쳐도 크게 다칠 것이오. 그것도 근간에 말이죠.”

“.........”

유성룡 또한 믿기지 않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두 조롱 속에 갇힌 새들이 되어 창공이 얼마나 드넓은지 모를 가금(家禽)들만 데리고, 매번 일장 훈시를 하건만, 그때마다 ‘내 입만 아프다!’라고 느끼는 이진이었다.

흥이 식은 이진은 곧 함께 수라를 들며 이들을 예우하고 곧 식사가 끝나자 함께 자리를 물렸다. 어찌됐든 이진은 이날 왕대비에게 고하는 것으로 이순신을 일단 진도군수로 봉했다. 그리고 차례로 그가 채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왕대비의 윤허만으로 직을 올려, 기어코 전라좌수사로 보임하고만, 제15대 임금 이진이었다.

* * *

이런 대치 정국 속에 여러 날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아연 조선을 긴장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아니 대치 정국을 풀 수 있는 기괴한 일이 정언(正言: 사간원에 있던 정6품직) 신잡(申磼)의 상소에 의해 발생했다.

곧 ‘왜국 사신이 충주에서 하인에게 구타당한 일로 목사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였던 것이다. 뜬금없이 왜의 사신이 충주에 등장한 것도 놀라운 사실인데다, 사신이 하인에게 구타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다니, 이진으로서는 어이없기도 했지만 물실호기이기도 했다.

이진은 급히 전객사(典客司) 두 명을 충주로 급파하는 한편 조보에 이를 크게 취급하도록 했다. 아예 이진은 자신이 지시한 대로 사설까지 실어 조야의 주목을 끌도록 했다. 사설의 내용을 현대판으로 번역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조선의 민낯을 이대로 보여도 좋은가?’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였다.

[지금 이대로는 일본 사신 단이 온다 해도 임금은 승지 몇 만을 데리고 가서, 하마연(下馬宴:사신이 당도하자마자 왕이 직접 베푸는 잔치)을 베풀 판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관리이고 사대부들인가?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는 극력 추구하고, 백성들이 좀 더 부강해지고 잘 살 수 있는 길은 외면한 채, 허구 헌 날 정쟁으로 날이 지새는 이 조선에 과연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어린 군왕이 가엾도다. 어린 군왕이 힘겹도다. 정에 호소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정치를 책임진 대신들은 그 직분에 충실할 지어다.

아니면 광응창(지금의 서강대 부근에 있던 관리들의 녹봉을 주던 창고)에 가질 말던지, 아니면 주상이 하사하시는 신탄(薪炭: 땔감의 하나)마저 거절하던지, 녹봉은 녹봉대로 받으면서 미숙(米菽: 식량)은 싸서 멍석 위의 시위가 웬 말인가!

이 나라의 녹을 먹는 모든 관리들은 이 기회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 그 죄 중하다고 느끼는 자는 석고대죄 할 지어다.]

조보의 위력은 굉장했다.

이제 사설지국까지 생겨 활자로 다량으로 찍어내는 기사는, 이진의 특명 하에 무료로 배포되었고, 때로는 기별서리들에 의해 곳곳에서 낭독되니, 성난 백성들이 우르르 거리로 몰려나와 사대부들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는 과장이고 실제는 화간 난 일부백성들 몇몇이 관아 앞에 와서 쭈뼛거리기는 했다.)

실로 언론의 막강함을 피부로 느낀 대신들이 결국 백성들과 언론의 막강함에 굴복해 업무에는 복귀했지만, 이제 조지서(造紙署: 종이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폐하자고 덤비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이진이었다.

하긴 지금은 조지서보다도 민간에서 만드는 종이가 더 많이 유통되고 있으니 공연한 걱정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조회 석상에서 얼굴을 맞댄 대신들과 이진이었지만, 여전히 하나의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있었다. 곧 왕대비 박 씨의 자리였다.

어전에 어색한 침묵만 감도는 가운데 이진이 온화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반 해금정책을 용인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소?”

“하오나 전하! 사무역을 허용하고 바닷길을 여는 것은 대국인 명국과 다툼의 소지가 있사옵고, 상업을 장려하는 것은 게으른 자들이 우르르 장사로 몰려 농사를 망칠 소지가 다분한 것은 사실이옵나이다.”

예조판서 정철의 여전한 반론이었다.

“대국이 시행한다고 해서 다 좋은 정책만은 아니지요. 지금 왜국은 양이의 상선마저 드나들어 교역이 성행하는 바람에 그 과실을 백성들이 향유하고 있소. 하고 과인이 단언컨대 상업을 장려한다 해서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아요. 백 번 양보하여 농사에 좀 지장이 있다 칩시다. 사오 년이 내에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대기근에 전부 농사에 매달렸다가 굶어 죽는 것보다는, 여러 방면으로 진출시켜 국부를 도모한다면,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아사자가 줄어들 것이오. 해서 하는 말 이오만, 모든 정책을 근시안적으로만 보지 말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사고하고 판단했으면 좋겠소. 자, 반대는 이쯤 해두고 과인이 왕대비를 모시고 올 테니, 더 이상 이 문제는 입도 뻥긋 마오. 일껏 모신 왕대비가 다시 돌아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이진의 절충 제안에 입만 뻥긋 거리나 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무는 제 대신들이었다. 내심 후후 웃으며 이진은 빠른 걸음으로 통명전으로 향했다. 양반의 느린 걸음에 체질화 되어 있던 내관과 제조상궁 이하 지밀상궁이 체면불구하고 왕을 놓칠세라 달음박질을 하듯 해서야 왕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이 짧은 구절도 목구멍까지 찬 숨 때문에, 나누어 발음한 상선의 고함에 대전 문이 열렸다.

곧 성큼성큼 이진이 안으로 드니, 여전히 왕대비 박 씨는 이마를 싸고 누워있었다.

“어마마마 소자이옵니다.”

“주상께서 어인 걸음이오.”

마지못해 일어나 비스듬히 보료위에 눕는 왕대비 박 씨였다.

“대신들이 뜻을 꺾고 모두 어마마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어마마마!”

“그 고집쟁이들이 고집을 꺾었던 말이오?”

“그렇사옵니다. 어마마마!”

“허, 별 일 일세.”

“이제 어마마도 양보하셔서 정사에 임하시죠?”

“나는 정말 정사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아옵니다. 어마마마! 곧 왜의 사신이 입성한다는데 그들마저 소자 어리다고 깔보면 어찌하옵니까? 뒤를 든든히 지켜주시옵소서. 어마마마!”

“허, 그것참........!”

난처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왕대비가 말했다.

“내 잠시 단장을 하고 갈 테니, 먼저 가 기다리고 계세요.”

“알겠사옵니다. 어마마마!”

이렇게 해서 일단 이진의 중재 하에 모양새를 갖춘 조선 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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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늘 즐겁고 편안한 날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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